소설리스트

학사신공-1810화 (1,567/2,000)
  • 1810화. 마역(魔域)

    *

    한립은 조심스럽게 의식을 퍼트려 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폈다.

    천정은 금발 거한이 마족에서 살해를 당하자 태을경 수사들까지 전의를 잃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이제는 마족 대군의 일방적인 살육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라경의 역마자는 직접 나서지 않고 뇌전 법칙으로 영역을 펼쳐 주변 만 리를 봉쇄했다.

    이에 그 안의 마족 수사들은 속도가 늘고, 반대로 천정 수사들은 뇌전의 힘에 간섭을 받아 속도가 느려졌다.

    향 하나가 타기 전에 상황이 종료되었다.

    마족 대군은 천정 수사들을 몰살하지 않고 대부분 수행을 봉인하고 저물법기를 빼앗아 상대편 비행 선박까지 점령했다.

    그리고 나머지 마족들은 죽은 마족 시체들을 수습했다.

    역마자의 영역 안에 있던 한립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죽은 척하며 그들이 나르는 대로 전사자들을 태운 선박으로 옮겨졌다.

    그는 더는 바깥을 살피지 않고 시체의 기억 파편을 뒤졌다.

    쿠릉.

    방대한 기억이 한립의 의식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이전에 시공간 초월을 해서 깃든 어떤 시체보다 방대한 기억이었다.

    한립은 고통스러우면서도 이를 악물고 버텼다.

    얼마 후 고통이 차차 가시고 머릿속에 수많은 기억 파편들이 떠올랐다.

    그가 깃든 시체의 이름은 유오로 태을경 후기에 이른 마족이었고, 그들이 있는 곳은 마역(魔域)이었다.

    “마족, 마역…….”

    진선계에 이르러 마도 공법을 펼치는 사람이 극히 드문 것을 이상하게 여겼는데 유오의 기억 속에 답이 있었다.

    마도 공법을 수련해 정상적인 방법으로 비승을 하면 마역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영계에서 그가 선역에 이른 것처럼 유오도 어느 하계에서 비승해 마계에 온 것이었다.

    마역은 진선계 모처에 위치해 다른 선역들과 공존했으나 서로 왕래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했다.

    한립은 기억 속에서 조금 전 본 은색 거대 손의 정보도 찾으려 했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대신 천정이 마역을 끌어들여 윤회전과 대적하고 싶어 한다는 것과 마족들은 중립을 지키려 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윤회전이…….”

    지금까지는 윤회전이 천정이 쫓는 지하 세력에 불과하다고 여겼는데, 실은 그 이상인 듯했다.

    천정이 그들과 싸워 이기려고 마역을 회유하려 하지 않았는가. 윤회전은 도대체 누가 배후에서 조종하는 것이며 그 목적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이 특별한 목적이 없다면 천정도 이렇게 적대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립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유오의 기억을 뒤적였다.

    ‘엇!’

    유오의 또 다른 신분은 광원재 휘하의 수사였다.

    광원재에서 명을 받아 이곳에 왔다가 운 나쁘게 전쟁 초반에 태을경 수사 두 명의 기습을 받아 목숨을 잃은 것이다.

    “광원재라면 남영이 있던 세력이 아닌가? ……우연히 이름만 같은 걸까, 아니면 하계의 광원재가 마역 광원재의 지부였던 것일까?”

    유오의 기억 속에서 광원재는 마역 제일의 상회일 뿐 아니라 여러 선역과도 암암리에 연계가 되어있는 방대한 세력이었다.

    이런 초대형 세력이 하계까지 지부를 내는 일은 드문 것도 아니었다. 광원재라는 이름에 한립은 자연스럽게 자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원하던 대로 비승에 성공했는지 알 수 없었다. 마족 공법을 수련했으니 만일 비승했다면 십중팔구 마역에 있을 것이다.

    또한 영계에 있는 남궁완의 소식도 알 길이 없었는데, 그간 그의 상황이 좋지 않아 그녀를 찾아볼 여력도 없었다.

    한립은 고뇌를 떨치고 시간도문이 거의 다 꺼진 진언보륜 허상을 올려다보았다.

    마족과 천정 간의 일전을 지켜보느라 시간을 꽤 허비한 탓이었다.

    유오는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남은 기억이 상당해 기억을 전부 살피려면 다른 것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가 가장 관심을 두고 살핀 것은 흉살기를 떨쳐내 태을경에 진입하는 방법이나 유오가 태을경에 이를 때의 경험이었다.

    곧 눈을 반짝인 한립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빠르게 살피다 점차 희색이 옅어졌다.

    마족이 태을경에 이를 때에도 일반 수사와 다를 바 없이 체내의 흉살기를 떨쳐내고 태을옥선의 육체를 이루어야 했다.

    유오는 흉살기를 없앨 때 단약을 이용하지 않고 신기하게도 마역에 서식하는 특수한 마수인 ‘몽맥(夢貘)’에게 자신의 흉살기를 깨끗이 삼키게 해서 태을경에 이르렀다.

    몽맥은 기이한 환수(幻獸)라서 각종 힘과 꿈 그리고 기억 등을 삼킬 수 있었는데 마역에서도 극히 발견하기 어려워 매번 몽맥이 나타날 때마다 실력자들이 대거 나서곤 했다.

    흉살기를 삼켜 없애줄 수 있는 신통은 무척 특수해서 대라경 수사도 몽맥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오는 애초 광원재에 들어가는 대가로 광원재의 역량을 이용해 딱 한 번 몽맥을 사용할 수 있어 태을경에 이르렀다.

    한립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가 있는 흑산선역에서 마역까지는 얼마나 먼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요원한 거리에 있었기에 이 방법으로 태을경에 이르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유오의 기억을 확인했다.

    태을 후기 수사는 아는 것도 많고 경험도 풍부해서 여러 가지 마공이며 비술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한립의 눈빛에 기쁨이 어렸다.

    유오의 기억 중 구유마동(九幽魔瞳)이라는 비술은 일종의 영목 신통으로 높은 경지까지 익히면 위로는 하늘 아래로는 땅속까지 살필 수 있다고 했다.

    위력이 강력한 대신 수련 조건이 까다로워 마역에서도 이런 비술을 익힌 자가 얼마 없었고 유오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어느 정도 영목 능력을 지녀야 강력한 비술을 펼치며 눈이 상하지 않을 수 있었다.

    다음으로 수련이 오래 걸리고 정순한 마기를 장기간 눈에 주입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구유마동은 특수한 약물의 보조가 있어야 하는데 그 재료가 무척 진귀했다.

    이런 세 가지 난관 때문에 태을경 후기의 고수도 익히기를 포기한 비술이었다. 하지만 한립에게는 난관을 해결할 방법이 있었다.

    이미 오랜 세월 명청령안을 수련한 그는 눈을 최대한 단련해 두었고, 범성진마공을 수련해서 정순한 마기를 지녀 충분히 구유마동을 수련할 기본을 갖추었다.

    수련을 보조할 약물이야 장천병이 있으니 더더욱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재료가 진귀해도 일단 그 종자나 어린 묘만 구해도 필요한 연식까지 키울 수 있었다. 게다가 참으로 공교롭게도 주재료가 극목초였다.

    명한선궁에서 극목초를 얻어다 화지 공간에 심어 놓아서 열심히 키우기만 하면 되었다.

    한립은 구유마동 비술을 여러 번 보아 구결을 한 글자도 빠트리지 않고 외운 뒤 다른 기억을 살펴보았다.

    시간이 흘러 진언보륜의 시간도문이 모두 꺼졌다.

    쿠릉!

    방대한 힘이 고리에서 흘러나와 그의 의식을 유오의 머릿속에서 끄집어냈다.

    * * *

    밀실 안, 한립은 몸을 떨며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수정벽이 소실되고 진언보륜의 도문들은 어둡게 변해있었다. 진언보륜, 광음정병 그리고 가득한 금색 모래를 거둔 한립은 생각에 잠겼다.

    한참 후, 그는 용오 가면을 쓰고 수결을 맺어 무상맹 교역 창을 띄워 구유마동을 수련하기 위해 필요한 약물의 재료들을 구한다는 임무를 올려두었다.

    그리고 두 손가락에서 빛을 발해 은색 빛의 문을 불러냈다.

    빛의 문 안으로 들어간 그는 약재밭으로 가서 거원 괴뢰들이 열심히 일해 넓혀 놓은 밭을 살폈다.

    천천히 밭을 거닐다 보니 대부분은 자리를 잡았고 워낙 까다로운 몇몇 영초들만이 이파리가 약간 누렇게 변해 시들시들했다.

    그는 거원 괴뢰를 불러 옥병을 하나 내주고 보름마다 한 방울씩 누렇게 변한 영초들에게 주도록 했다.

    분부를 마친 한립은 곧 극목초가 자라는 구역에 다다랐다.

    수십만 년 이상 된 극목초들은 당장 약물을 배합하기에도 충분했지만 구유마동에 적힌 바로 극목초는 오래된 것일수록 효과가 강하다고 했다.

    한립은 암녹색 작은 병을 꺼내 극목초에 기울였다.

    그는 비취색 액체가 떨어지려 할 때 손가락을 튕겨 물방울을 여덟 뿌리의 극목초에 균일하게 흩뿌렸다.

    극목초를 돌보고 그가 향한 곳은 보랏빛 뇌전이 자욱하게 번진 도병 모두(母豆)가 자라는 곳이었다.

    기운으로 보니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다.

    “한 수사, 괜한 말일지 모르겠으나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립이 몸을 돌리니 마광이 밭 가장자리를 따라 다가오고 있었다.

    “말씀하시지요.”

    “동천의 보물 내부에 천지영기가 흐른다고 해도 진정한 하늘과 땅이 아닌 이상 한계가 있을 겁니다. 과도하게 영초를 심으면 내부의 영기 흐름에 영향을 미쳐 전체적으로 동천을 쇠락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동천 내부에 금제를 더욱 강화하려 합니다.”

    “하하, 역시 세심하시군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습니다.”

    “마광 수사의 호의를 어찌 모르겠습니까. 흉살기를 어느 정도 모아 갖다 드리려 했는데 이리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말을 하면서 한립은 검은 저물대를 던져 주었다. 저물대가 호선을 그리며 마광의 손에 들렸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죽루(竹樓)로 가서 마저 이야기 나누시지요.”

    두 사람은 함께 대나무로 지은 누각으로 걸어갔고, 누각 앞 연못에 이르자 마광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퐁당!

    한립은 홀로 연못을 두어 바퀴 거닐다가 주술문자가 가득 새겨진 둥그런 돌들을 특수한 위치에 던져 넣었다.

    돌들이 자리를 잡자, 청죽봉운검이 연못 주위로 날아가 선령력을 이용해 바닥 깊이 무언가를 새겨 나갔다.

    오래지 않아 복잡한 진법 도안이 연못을 중심으로 완성되었다. 한립은 장검을 거두고 투명한 중품 선원석을 꺼내 들고 망설였다.

    중품 선원석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그것을 아까워하는 듯했다.

    퐁당!

    얼마 지나지 않아 중품 선원석도 연못으로 날아가 자금색 연꽃 아래로 가라앉았다.

    곧 연못 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자욱하게 보라색 안개가 올라왔고 연못은 물론 그 위에 세워진 보라색 대나무 다리까지 뒤덮었다.

    한립은 맑은 바람이 호수 중앙에서 불어오는 것을 느끼다 흐릿하게 사라졌다.

    잠시 후 그는 동천 내부의 구석에서 나타나 미리 제련해 둔 진법 원반을 꺼내 일반 선원석 하나를 박아 넣고 땅속 깊이 묻었다.

    화지 동천 구석구석에서 이런 일이 반복되었다.

    우우웅!

    동천 곳곳에 연달아 빛이 번뜩이고 진법 원반들이 동시에 발동되어 빛기둥들을 쏘아 올렸다.

    그러자 연못 중앙의 자금색 연꽃에서 주먹 크기의 꽃봉오리가 나타나 활짝 피어났다.

    “중품 선원석 하나를 희생해 앞으로 백 년 동안은 동천의 영기가 부족할 일은 없겠습니다.”

    마광은 죽루 2층 창가에 서서 연못에 피어난 연꽃을 보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미소를 지은 한립은 대꾸하지 않았으나 화지 동천의 변화에 흡족한 얼굴이었다.

    그는 꼼꼼하게 동천 내부를 돌아보고는 밀실로 돌아갔다. 시간이 흘러 밤이 되었는지, 동굴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 달빛이 들어와 그를 비추었다.

    조용히 달빛 아래 서 있던 그는 품에서 암녹색 병을 꺼내 그 아래 내려놓았다.

    * * *

    봄이 가고 겨울이 오는 일이 여러 번 지나 30여 년이 지났건만 부운곡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동안 한립은 무상맹을 통해 부재료들을 구하고 그것들을 약재밭에 심어 키웠다.

    밀실 안에서 수련하던 그는 등불이 꺼진 새까만 공간에서 오로지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만 밝은 빛을 받고 있었다.

    그 앞에 놓인 백옥 자기병에는 보랏빛 액체가 찰랑거렸다.

    문득 눈을 뜬 한립은 명청영목을 발동해 눈동자에 남색빛을 일으켰고 수결을 맺어 피부에 자금색 비늘을 뒤덮고, 방대한 선령력을 점점 새까만 마기로 전환했다.

    속으로 구유마동 비술을 읊던 그는 수결을 맺어 두 손으로 바닥의 자기 병을 가리켰다. 연한 보라색 액체가 병 속에서 떠올라 그의 손짓에 이끌려 두 눈동자로 향했다.

    액체가 눈에 들어온 순간 한립은 눈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에 눈을 감으려다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견뎌냈다.

    부릅뜬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탁한 기운을 몰아내고 뺨에 옅은 눈물 자국을 남겼다.

    이렇게 눈을 씻어낼수록 남색빛은 약해지고 점점 투명하고 맑아져 갔다.

    휘잉.

    바람이 불지 않는 밀실 안에 갑자기 새까만 마기가 용솟음쳤다. 그 한 가운데에 작은 소용돌이가 나타나 손가락 굵기의 검은 기둥을 이루고 한립의 두 눈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의 두 눈은 끝없이 마기를 받아들였고 한립은 기이한 수결을 맺으며 온몸에서 자금색 파문을 퍼트렸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