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6화. 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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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세의 물건 외에 동천보물 안의 밀실에는 선가 법보와 단약, 재료들이 따로 보관되어 있었다.
대부분이 태을경 수사가 쓸만한 것이라 품질이 괜찮았는데 불 속성 법칙의 힘을 지닌 붉은 깃털 부채와 시간법칙의 힘을 지닌 나무 자가 가장 진귀한 보물이었다.
전자는 무슨 새의 깃털로 만든 것인지 법칙의 힘이 강렬해서 흐릿하게 어린 화염 허상만으로도 평범한 금선의 법보를 녹이기에 충분해 보였고, 후자는 비취색의 매끈한 자 끝에 금전문으로 ‘일시광음일시금(一時光陰一時金)’이라는 글자가 작게 새겨져 있었다.
“려 수사, 경매 때 보니 시간법칙의 힘을 지닌 법보에 관심이 많으시던데 두 보물 중 나무 자를 챙기시지요. 저 부채는 제가 심심할 때 보물을 제련하며 쓰면 좋겠습니다.”
경양상인은 깃털 부채가 퍽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그 단시호는 특별히 쓸 데가 있어 구한 것이었는데, 저 나무 자는 품질이 떨어지는군요. 저도 단약을 제련할 때 저 깃털 부채가 도움이 될 듯싶습니다.”
한립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했다.
“부채를 양보해 주시고, 이 중 3분의 1을 떼어 가시고 남는 것 중에 세 가지를 더 골라 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 그렇게 부채가 마음에 드시면 수사의 말대로 따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경양상인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한립은 푸른 나무 자와 나머지 몫을 골라 저물탁 속에 챙겨 넣었다.
밀실을 나서자 경양상인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그를 훑다 입을 열었다.
“우리가 꽤 잘 통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제게 약소한 부탁이 하나 있는데 이야기를 해도 될지 모르겠어요.”
“혹시 백조산의 집사 장로직에 관한 것입니까?”
한립은 예상했다는 듯 씩 웃으며 물었다.
“하하, 그걸 눈치채셨군요. 맞습니다! 려 수사처럼 실력이 좋은 연단사가 백조산에 들어오면 앞길이 구만리 일겁니다. 저희 종문도 려 수사 같은 인재를 얻게 되니 좋고요.”
“제가 살쇠의 겁 때문에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이번에 현지정석도 얻었으니 단약만 제련해내면 흉살기를 밀어내는 것은 일도 아닐 겁니다.”
“좋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단약을 제련하는 일로 한동안은 바쁠 듯싶습니다.”
“그러세요. 저도 경매 일을 마무리 지으려면 가봐야 합니다. 꼭 연단에 성공해 살쇠에서 벗어나는 날 녹배주 한 동이를 꺼내 축배를 듭시다!”
“가보겠습니다.”
한립과 경양상인은 서로 포권을 하고 헤어졌다.
* * *
한립은 최곤성을 떠나 부운산 야학곡으로 돌아갔다.
그는 마광이 아직 폐관 수련 중인 것을 확인하고는 안쪽 방으로 들어가 탁자 앞에 손으로 그림을 그려나갔다.
가느다란 선들은 팔각 상자에 새겨져 있던 현묘한 문양들을 그대로 따온 것이었다.
그는 하얀 종이를 꺼내 바닥에 그려 놓은 것을 따라 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각도에서 본 팔각 상자의 도안들이 8장의 종이에 옮겨졌다.
잠시 고심하던 그는 다른 종이를 꺼내 이번에는 경양상인이 펼친 진법을 옮겨 그렸다.
“그건 팔원해진이 아닙니까…….”
뒤쪽에서 갑자기 해 도인이 말을 걸었다.
“아는 바가 있으십니까?”
손을 멈춘 한립의 질문에 해 도인은 자신이 어떻게 그 이름을 아는지 아연했다.
“……그냥 이걸 보니까 이름이 떠올랐습니다.”
“원주인이 봉인한 기억의 일부가 깨어난 것이군요.”
“그럴 지도요. 그런데 이 부분의 선이 휘어 있어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듯합니다.”
해 도인은 몇 장의 종이를 상세히 살피다 하나를 짚었다.
“어떻게 만드는 것인지 아십니까?”
“재료만 있으면 만들 수 있겠습니다.”
해 도인은 거침없이 답하고 한립의 손에서 붓을 받아 종이에 거침없이 글을 썼다.
잠시 후, 기다란 목록이 한립의 손에 들렸다.
“이 재료들을 모아주시면 팔원약(八元鑰)을 만들 수 있습니다.”
“팔원약…….”
“팔원진해는 특수한 동천보물을 여는 데만 쓰이는 것으로 압니다. 무엇을 열려고 하십니까?”
해 도인은 간만에 그가 하는 일에 관심을 보였다. 한립은 잠시 고민하다 거대 쥐 꼬리뼈를 꺼냈다.
“무슨 물건인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수사가 아니었으면 동천보물인지 알아보지도 못했을 겁니다.”
“저도 경매에서 똑같이 생긴 물건을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재료가 준비되는 대로 수고 좀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이야기를 마친 한립은 팔원약의 재료를 구하기 위해 급히 동부를 떠나 취곤성으로 향했다.
* * *
두 달이 훌쩍 넘은 어느 날, 한립의 동부 안 바닥에는 작은 진법이 완성되어 있었다.
달칵.
팔각 상자를 손에 든 해 도인이 그것을 열어 진법 중앙에 두었다.
“한 수사, 동천보물을 놓을 차례입니다.”
“그런데 구결은…….”
기다리고 있던 한립이 뼈를 상자 위에 놓고 중얼거렸다.
“구결은 큰 의미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체내의 내력을 운용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도지요.”
“어떤 구결인지도 알고 계시는 겁니까?”
“제게 맡겨 주시지요.”
고개를 끄덕인 해 도인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 내용은 경양상인이 읊조리던 것과 똑같았다.
해 도인의 손에서 하얀빛이 뼈로 날아가 표면을 타고 흐르자 새하얀 옥골(玉骨)로 변한 보물의 표면에 동전 크기의 꽃무늬가 하나 떠올랐다.
예상대로 거대 쥐 꼬리뼈는 백조산 3대 산주가 제련한 동천보물 화조어충 중 화지였다.
“봉인을 풀었습니다. 한 수사께서 연화해 쓰시면 됩니다”
작업을 마친 해 도인이 뼈를 건넸다.
“고생하셨습니다.”
한립은 인사를 하고 가부좌를 틀었다.
두 시진 후, 번쩍 눈을 뜬 그의 이마에는 땀이 흥건했다.
한립은 즐거운 표정으로 일어나 힐긋 해 도인을 보고 손끝으로 화지를 스쳤다.
웅.
부르르 떨던 옥골이 투명하게 변해 은색 빛의 문을 방출했다.
“해 수사, 같이 들어가 동천 안이 어떤가 보시지요?”
한립이 웃으며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이에 해 도인은 문 앞에서 돌연 멈추었다가 평정을 회복하고 따라 들어갔다.
* * *
한립이 도착한 곳은 너른 초원 위였다.
초원 끝에는 울창한 숲이 있고 그 위로 은은한 연기가 자욱했다. 한립은 급히 숲으로 가지 않고 동천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만 장 정도 높이에 동천 하늘은 두꺼운 공간장벽으로 막혀 있었고 사방 어디로 가도 마찬가지였다.
경양상인의 어지와 비교해 화지의 면적이 훨씬 컸으나 천지영기가 농후한 정도는 비슷했다.
조사를 마친 그는 해 도인을 데리고 숲으로 날아갔다. 숲에 감도는 흐릿한 연기는 흉살기였다.
숲속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하얀 오솔길에는 다양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흉살기의 근원으로 이어지는 듯했다.
눈살을 찌푸린 한립은 오솔길을 이룬 것이 하얀 돌이나 옥이 아닌 크기가 제각각인 사람과 짐승의 뼈인 것을 발견했다.
“거대 쥐의 살기가 짙은 게 이해가 가는구나. 이런 괴상한 취향이라니…….”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양옆에 온갖 영초들이 보였고, 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것들도 있었다.
숲속으로 들어갈수록 흉살기도 줄어들고 있었다. 천천히 걷다 보니 그 끝에 보라색 대나무 숲이 있었다.
보라색 연기가 자욱하고 영기가 왕성한 대나무 숲 안에 2층 건물이 있었다. 흉살기는 조금도 없어 선인이 거주할 법한 분위기가 풍겼다.
한립은 영목 신통으로 금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울타리에 설치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뜰의 작은 연못에서 보라색 연기가 부글부글 올라오고 그 중심에는 자금색 연꽃이 있었다.
“이 동천보물의 핵심은 연못이고 그 안에서 자금련(紫金蓮)이 자라고 있었군요.”
연못 옆에선 한립은 생각에 잠겼다.
“그렇네요, 동천의 근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해 도인도 동의했다.
그들은 연못 위의 보라색 대나무 다리를 건너 2층 누각 앞으로 향했다.
보라색 대나무로 지어진 건물은 아래쪽으로 뿌리가 자라나 있었고 보랏빛이 반짝여 무슨 금제가 펼쳐진 듯 보였다.
“재미있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연못의 자금련의 힘과 건물의 뿌리가 연결되어 강제로 금제를 뚫고 들어가면 문은 열리되 동천의 근간이 흔들리겠어요.”
눈동자에서 남색빛을 거둔 한립이 해 도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구령섭진술을 약간만 변형하면 자금련이 상하기 전에 금제를 열 수 있을 테니까요.”
“자신이 있으시다면 한 번 보여주시지요.”
한립이 웃으며 권하자 해 도인도 거절하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반각도 지나지 않아 펑!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보라색 건물의 빛이 땅속으로 흘러 들어가 사라지고 해 도인이 수결을 풀고 눈을 떴다.
“들어가 보시지요.”
한립은 해 도인과 같이 대문 앞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었다. 내부에서 청량한 기운이 밀려 나와 정신이 맑아지고 온몸이 시원해졌다.
“호수의 자금련을 이용해 천지영기를 이곳으로 모으고 있었군요. 영기가 아주 짙어 수련하기에 명당자리입니다. 이곳을 지은 이의 기발한 생각에 감탄을 금할 수 없군요.”
해 도인은 갑자기 찬사를 늘어놓았다.
“영기를 모으되 가두지는 않아 동천 내부의 천지영기 흐름에 간섭하지는 않고, 발산된 영기는 숲으로 돌아가 이곳을 동천에서 가장 기운이 왕성한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약재밭을 만들면 좋겠어요.”
한립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나무 건물 1층은 간소하게 꾸며져 있었다.
고풍스러운 족자에 짙은 먹으로 ‘선(禪)’자가 그려져 있는데 그 선이 구불구불해서 글자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했는데 희미하게 장포를 입고 지팡이를 든 비대한 인영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 앞에는 거친 삼베로 짠 방석이 놓여 있었고 자주 사용했는지 많이 낡아 있었다.
한립은 고개를 돌려 왼쪽 방에서 보라색 대죽으로 만든 기다란 침상을 발견했다.
그 곁에 놓인 네모난 탁자에 불이 꺼진 등불과 다기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었다.
한립과 해 도인은 바로 2층으로 올라가 비술 금제가 펼쳐진 세 개의 저물 궤짝을 찾아냈다.
그들은 봉인을 풀고 희색을 드러냈다.
첫 번째 궤짝 안에는 대량의 영약과 재료가 들어있었다. 수십만 년 이상 된 화문영지나 옥수황정, 아니면 대량의 천하성사, 빙백한정 그리고 구양수석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나마 이런 것들은 무엇인지나 알아보았지 나머지는 한립도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한립은 단숨에 재료들을 저물탁으로 옮겨 담았다.
두 번째 궤짝에는 십여 관의 공법 경전들이 들어있었다. 일부만 인족 수사들이 익힐 수 있고 나머지는 요족이나 이종족 수사가 수련하기에 적합한 고계 공법이었다.
한립은 대충 훑어보고 크게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연신술과 시간공법들을 수련하기에도 바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 도인이 <뇌부정법(雷部正法)>이라는 공법을 고르더니 한립에게 그걸 줄 것을 청했다.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한립은 공법들까지 넣어두고 세 번째 궤짝을 열었다.
예상대로 그 안에 가득 들어있는 것은 어느 정도 손상은 되었지만 영기가 왕성한 법보와 선기들이었다.
한립은 새하얀 장검을 들어 올려 그 끝이 살짝 갈라진 것을 보았다. 품질 좋은 후천선기가 이 균열로 가치가 확 떨어진 것이다.
“아깝구만…….”
거대 쥐 진령은 육체 자체가 선기급으로 단단했으니 이것들은 싸우고 이겨서 빼앗은 전리품들 같았다.
궤짝 바닥의 회색 저물대에는 매우 정순한 선령력을 품고 있는 수십 개의 중품 선원석들이 들어있었다.
“이렇게나 많은 중품 선원석이라니……. 북한선역에서는 보기도 어려운 것을…….”
한립이 놀라 중얼거렸다.
“평범한 선원석보다 응련하기가 어려워 북한선역의 태을옥선이라 해도 지닌 이가 몇 되지 않을 겁니다.”
“흑산선역의 대종문도 모아만 두고 함부로 내놓지 않을 물건이고요.”
대나무 건물을 샅샅이 뒤진 한립은 해 도인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왔다.
파파팟.
그의 손짓에 십여 마리의 거원 괴뢰들이 나타나 주변의 보라색 대나무를 베고 땅에 박힌 돌을 제거해 공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괴뢰들이 잘라낸 나무와 대나무들로 공터에 울타리를 치자 한립이 금제 진법을 설치했다.
보라색 누각이 인근으로 발산하는 영기를 끌어모으는 간단한 진법이라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한립은 커다란 통 2개에 배합만 해놓고 아직 쓰지 못하던 영액을 꺼내 거원 괴뢰에게 나눠주고는 그것들을 밭에 뿌리게 했다.
“영초를 키우기에 아주 좋지만 그래도 백여 년은 걸릴 겁니다. 우리는 이만 나가지요.”
한립은 바삐 일하는 괴뢰들을 두고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숲 바깥에 있던 은색 빛의 문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경양상인을 따라 어지 동천에 들어갈 때는 몰랐는데 자신이 연화를 해서 화지 동천에 들어와 보니 주인이 나가지 않으면 보물을 닫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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