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5화. 호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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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로 무너진 건물들 사이에 공수천과 길쭉한 사내 그리고 선박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구경꾼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쳐다보자 공수천은 수결을 맺어 선박을 향해 법결을 날렸다.
그러자 안에 갇혀 있던 이들이 선박 바깥으로 내팽개쳐졌다. 갑자기 풀려난 그들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달아났다.
“저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은호를 잡는 데 실패했나 봅니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하는 한립의 머릿속에 석천공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요족 사내가 펼친 삼두육비 법상은 범성진마공과 모종의 연관이 있는 듯했다.
“려 수사, 구경도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가시지요.”
“하하, 제가 호기심이 지나쳐 경양 수사를 오래 기다리게 했습니다. 어서 출발하시지요.”
* * *
취곤성 중심부의 구름을 뚫고 솟은 하얀 탑 안.
편전에 소류가 나타난 것을 보고 유생 복장을 한 사내가 앉아서 차를 마시다가 몸을 일으켰다.
“일부러 그들을 풀어주셨습니다.”
“보았습니까?”
“자포 수사가 공간법칙을 지니고 있다 한들 수사의 실력에 그들을 붙잡으려고 했다면 성공하셨겠지요. 상부의 늙은이들은 공수천처럼 쉽게 속아 넘어가 주지는 않을 겁니다.”
“자포 수사의 신분 때문에 잡아도 문제가 됐을 거예요. 상부에서 알아도 저를 탓하지는 않을 테고요.”
“오, 누구기에 그렇습니까?”
“광원재.”
소류는 딱 세 글자로 답했다.
“뭐라고요? 확실합니까?”
태연하던 유생 사내가 처음으로 동요했다.
“저도 다 생각이 있어서 이리 행동한 것입니다.”
“그럼 은호는요? 주선대 명단에 이름이 오른 자를 풀어 줬으면 마땅한 이유가 있을 게 아닙니까.”
“다 생각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소류의 목소리가 차가워지자 유생 사내도 더는 묻지 않았다.
* * *
취곤성의 어느 밀실 안.
“세상살이가 날로 흉흉해집니다. 이래서야 어디 무서워서 옥곤루 경매에 가겠습니까? 보고를 올려서 흑산선궁과의 합작을 중단하든지 해야지 이러다 백조산의 명성까지 망치겠습니다.”
금제를 펼친 경양상인이 투덜거렸다.
“하하, 화를 푸세요. 이런 일에 개입하는 것을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그냥 상관하지 마시고 한운산에서 여유롭게 지내시면 될 것입니다.”
한립이 웃음을 흘렸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으나 경매에서 흑포인이 만혼초를 채가지 않았으면 선궁에 체포되어 끌려간 사람은 그가 되었을 것이다.
“휴, 한운산도 언제까지 조용할지 모르겠어요.”
“그런 골치 아픈 이야기는 미뤄두시고 이제 보물을 좀 살펴보시지요.”
“려 수사, 가면 갈수록 연단사가 아니라 장사꾼 같아지십니다.”
한립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자 경양상인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하하, 수행밖에 모르는 제가 어떻게 장사에 대해 안다고 그러십니까?”
한립과 경양상인은 마주 보며 웃음 지었다.
경양상인은 고개를 저으며 손바닥 크기의 팔각 상자를 불러내 중간을 꾹 눌렀다.
달칵.
상자가 여덟 조각으로 벌어지자 한립은 영목신통을 이용해 상대의 행동을 세밀하게 관찰했다.
팔각 상자를 열어서 옆에 둔 경양상인이 문득 동작을 멈추었다.
“왜 그러십니까. 제가 법보를 여는 방법을 배워 갈까 걱정이 되어 그러십니까? 저는 수사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 전혀 알아보지도 못할뿐더러 알아본다고 해도 똑같이 생긴 공간법보가 없으면 무용지물입니다.”
“그 말도 맞습니다. 솔직히 이게 엄청나게 뛰어난 방법은 아니고 워낙 특수한 경우에만 쓰이는 수법이라 백조산 내에서도 배우려는 이가 거의 없지요. 배우느라 고생만 하고 쓸 데가 없을까 봐 말입니다.”
“그런 방법이 전수된다고요? 사연이 있습니까?”
“흠, 대단한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아까 그 뼈는 공간보물이 아니라 동천보물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 겁니다.”
‘동천보물?’
잠시 망설이다 이야기를 시작한 경양상인을 보고 한립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산해주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공어족 성물인 산해주는 거산과 바다를 담을 수 있는 최고급 보물로 만일 짐승의 뼈 역시 그렇다면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보물이었다.
안타깝게도 선계로 비승할 때는 지니고 올라올 수가 없어서 아직 영계에 있었다.
“공간보물과 달리 동천보물은 내부 공간이 훨씬 넓은 경우가 많고 내부에 천지원기가 흘러 영초나 영수를 기를 수 있습니다.”
경양상인이 말을 잇자 한립은 다 알면서도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해도 동천보물의 수량이 꽤 되어 백조산의 이름으로 구매한다면 쉽게 구할 수 있을 텐데 제가 왜 그걸 고집했는지 아십니까?”
“모르겠습니다. 그저 거액을 쓰시기에 뭔가 사정이 있으려니 했지요.”
“맞습니다. 이 뼈는 어지(魚枝)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백조산의 3대 산주 해진원이 만든 네 가지 동천보물 중 하나이지요. 나머지는 화지(花枝), 조지(鳥枝), 충지(蟲枝)로 불리며 합해서 ‘화조어충(花鳥魚蟲)’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오늘 어지를 얻었으니 이제 화지만 바깥세상을 떠돌고 있겠군요.”
“운치가 가득한 이름입니다. 3대 산주께서 풍류를 아는 분이셨나 봅니다.”
“역대 산주 중에서 성격이 가장 괴상하셨던 분이자 개산조사를 제외하고 모든 제자들이 가장 존경하는 분이셨습니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연기술이 아주 뛰어나 다른 제자들이 생각지 못하는 기발한 물건들을 만들다 2대 산주의 눈에 들어 다음 대의 산주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저희 백조산의 부흥을 이끌었던 분입니다.”
3대 산주 이야기를 하면서 경양상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지라는 이름은 어떻게 풀이하면 좋겠습니까?”
“3대 산주의 성격이 괴상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라고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이름을 지으셨는지 알 도리가 없지요.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시는 것 같은데 바로 열어봅시다.”
경양상인은 팔각 상자를 내려둔 바닥에 빠르게 문양을 새겨 소형 진법을 형성했다. 그리고 팔각 상자 위에 뼈를 올려놓았다.
“동천보물을 열기란 원래 이렇게 힘든 것입니까?”
“안 그랬으면 그 아무것도 모르던 금선도 진작 열어보았겠지요. 우리 손에 들어올 리가 있었겠습니까?”
“그 말씀도 맞습니다.”
“잘 보시지요. 제가 바닥에 그린 것이 ‘팔원해진(八元解陣)입니다. 동천보물은 원주인이 죽으면 다른 사람은 열 수 없게 되어 있는데, 이 방법을 통해서 연화를 시켜야 저물반지처럼 언제든 열고 닫을 수 있습니다.”
“그랬군요. 제가 견문이 부족했습니다.”
“이제 아주 중요한 과정을 시작할 테니 방해하시면 안 됩니다.”
경양상인의 표정이 신중해지자 한립은 조용히 옆으로 비켜서서 지켜보았다.
잠시 후, 그의 손에서 하얀빛이 뼈로 날아갔다.
웅!
뼈의 표면에 새하얀 빛이 퍼지고 동전 크기의 금색 물고기 무늬들이 떠올랐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연화를 마치고 바로 열겠습니다.”
경양상인은 어지를 들고 가부좌를 틀었다. 장장 세 시진이 지나고 땀을 뻘뻘 흘리던 경양상인이 활짝 웃으며 눈을 떴다.
“하하하, 됐습니다! 이제 각자의 몫을 나눠 볼까요?”
경양상인은 무척 고돼 보였으나 기분만은 아주 좋았다.
“그러시지요.”
한립의 말에 경양상인이 어지를 손끝으로 스쳤다.
웅.
뼈가 부르르 떨며 투명해지더니 커다란 은빛 문을 방출했다. 문 안쪽으로 녹색이 어른거리고 바람이 불어왔다.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경양상인이 먼저 그 안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를 따라서 빛의 문 안으로 걸음을 옮긴 한립은 물 위에서 나타났다.
눈앞이 환해지자 깊게 숨을 들이마신 그는 신선한 공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스름한 회색 공간 안에는 수십 리 정도의 작은 호수가 있었고 그 가운데에 동그란 섬이 보였다.
수풀이 무성한 섬에는 새소리가 들려오고 하얀 담에 검은 기와를 얹은 저택도 하나 보였다.
한립은 경양상인 옆에 서서 물속을 오가는 금색 잉어들을 내려다보았다.
“동천 안의 영기가 이렇게 충만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군요! 선역의 어느 종문과 비교해도 크게 부족하지 않겠어요. 아마 호수 속에 적어도 영천(靈泉)이 두 개는 있을 듯합니다. 듣던 대로 3대 산주의 솜씨가 대단하지 않습니까?”
한립의 찬사에 경양상인은 술이 든 호리병박을 풀러 꼴딱꼴딱 삼키면서 말했다.
“그런데 현재 귀문은 몇 대 산주께서 맡고 계십니까?”
“허허, 벌써 5대 산주가 맡고 계시니 3대 산주께서는 이야기로만 전해지지요. 세월의 흐름이 참 무상합니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면서 호수 속의 작은 섬으로 향했다.
풀과 꽃향기가 물씬 풍기는 섬에 올라 저택으로 날아가니 그 왼쪽으로 밭이 있었는데 그 안에 자라는 선약과 영초를 옅은 보라색 보호막이 지키고 있었다.
눈을 반짝인 경양상인이 나서서 오랫동안 보수하지 않은 금제를 풀어버렸다.
“려 수사는 연단사이니 무엇인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어지 옥골(玉骨)이 오랜 세월 동안 봉인되어 있던 탓에 이 안에서 자라는 영초도 십만 년은 되었군요. 특히 구엽수유(九葉茱萸)와 묵향초(墨香草)의 약성이 절정으로 보입니다.”
약재밭을 살피던 한립의 눈이 반짝였다.
“약속한 대로 3분의 1을 골라 가시지요. 부족하다 여기시면 제 몫인 영초를 선원석으로 바꿔 가셔도 됩니다. 미리 빚을 일부 갚는 셈 치지요, 하하.”
“제게 선원석을 빌릴 때부터 동천보물 안의 물건으로 때우려는 마음을 먹었던 것은 아니시겠지요? 아주 계산이 빠르십니다.”
경양상인의 말에 한립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아닙니다. 제가 거액을 주고 어지 옥골을 산 것은 종문을 위해서지 그 안에 든 물건을 탐해서가 아니에요. 안에 무엇이 들어있든 그건 운에 맡겨야겠으나 종문의 물건을 남의 손에 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하, 어찌 되었든 저는 그리 쉽게 경양 수사의 빚을 청산해 드릴 마음이 없습니다. 딱 3분의 1만 골라갈 테니 나머지는 천천히 갚으시면 됩니다.”
한립은 밭의 영초 중 원하는 것을 골라 갔다.
그동안 경양상인은 저택으로 가서 문에 걸린 금제를 풀고 그곳에 앉아 술로 목을 축이며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다.
안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데 전혀 조급해 보이지 않았다.
한립이 합류하자 같이 문턱을 넘은 그들은 선가와 달리 속세의 저택 같아 보이는 뜰을 걸어갔다.
십여 걸음마다 하얀 그림자 벽이 있고, 검은색과 붉은색의 잉어 두 마리가 연결되어 동그란 형태를 이루고 있는 그림이 반짝거렸다.
한립이 남색빛을 반짝이며 제대로 보려고 하자 하얀 안개가 어리며 그림자 벽을 막았다. 그림자 벽돌이 동천보물의 중요기관인 것 같았다.
그리고 저택을 양쪽의 통로에는 영핵이 다 닳은 괴뢰들이 쓰러져 있었다. 경양상인이 다가가 괴뢰들을 살피고 실망스러운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떠합니까?”
“3대 산주님 솜씨는 아닙니다. 누가 남겨 둔 것인지 몰라도 꽤 섬세하게 만들었는데 지금은 고철 덩어리나 마찬가지군요.”
“어지가 오랜 세월 떠돌아다녔다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을 겁니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이길 바라셨습니까?”
괴뢰들을 훑은 한립이 웃음 지었다.
“그것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저택에 있는 방들을 뒤지다 동천보물의 전주인이 속세의 그림을 모으는데 열정적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속세에서 명성이 자자한 대가의 그림이나 아니면 서예가의 작품들이 허다했다.
정당에 걸린 <곡상첩(哭喪帖)>은 십만 년 전 금원선역 경내의 어느 세속 국가의 서예 대가가 그 선조를 기리며 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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