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804화 (1,561/2,000)
  • 1804화. 구경

    *

    붉은 영역 안, 홍발 사내가 양손으로 수결을 맺어가며 화염을 모아 작열하는 하얀 불구슬을 이루었다.

    화염 법칙의 열기에 허공이 덜덜 떨렸고 홍발 사내도 힘의 소모가 극심한지 안색이 창백해졌다. 바람 소리를 내며 하얀 태양이 돌아 무수히 많은 빛의 실들을 뿜었다.

    “찾았다!”

    눈을 부릅뜬 홍발 거한의 수결이 달라졌다.

    두 사람의 좌측 후방에서 흑포 사내가 팽팽하게 당겨진 하얀 빛의 실들에 끌려 나오고 있었다.

    “죽어라!”

    그때 길쭉한 사내가 푸른 영패를 쏘아 보냈다.

    쿵!

    푸른 영패에서 발산된 푸른빛 속에서 뱀의 머리에 호랑이의 몸을 한 괴물 허상이 입을 쩍 벌리고 흑포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괴물 허상은 압도적인 기운을 뿜어냈다. 길쭉한 사내의 수행을 넘어서는 태을경 최고봉의 기운이었다.

    얼굴을 굳힌 흑포 청년은 은신술을 풀어버렸다.

    펑!

    그러자 갑자기 흑포 청년의 몸이 터져 은색 빛알갱이로 흩어지고 푸른 괴물 허상은 허공을 덮쳐야 했다.

    크앙!

    푸른 괴물 허상의 거대한 몸이 흩어져 다시 푸른 영패로 돌아갔으나 빛이 한결 어두워졌다.

    이때 은빛이 모여 은호의 신영으로 돌아갔다.

    그는 외형이 크게 변해 은발과 은색 눈동자, 갸름한 얼굴과 길쭉한 귀를 가진 진짜 모습을 노출했다.

    연기와 같은 은빛이 감도는 모습은 꽤 신비로워 보였다.

    안색이 달라진 길쭉한 사내가 서둘러 푸른 영패를 불러들이고 한 손을 펼쳤다. 그의 소매 속에서 푸른 거도 거울이 날아올라 집채만 하게 커지더니 푸른 빛덩이들을 마구 뿜어냈다.

    길쭉한 사내가 입에서 뿜은 푸른 뇌전이 그 빛덩이들과 합쳐져 뇌전을 품은 문짝 크기의 거대 바람의 칼날들로 변해 은호를 향해 쏟아졌다.

    홍발 거한도 수결을 바꾸어 태양의 빛의 실들이 다시 은호를 향해 날아가게 했다.

    은호는 그들을 멸시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수십 개의 신영으로 갈라져 잔영을 남기면서 사방팔방으로 튀어 나갔다.

    푸른 바람의 칼날이 은색 신영들을 갈랐지만 조그만 상처도 입힐 수 없었고 하얀빛의 실들도 마찬가지였다.

    “더는 놀아줄 시간이 없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만납시다.”

    은호의 웃음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은색 신영들의 속도는 극히 빨라서 두 영역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달아날 생각 마라!”

    길쭉한 사내가 소리를 치고 푸른 고대 거울에 두 손바닥을 대고 정혈을 토해냈다.

    핏기를 흡수한 거울은 반투명하게 변해 푸른 영역에 녹아들었다.

    후웅!

    푸른 영역이 밝게 빛나며 거대한 거울이 되어 기이한 법칙 파동을 발산했다. 빠르게 몸을 움직이던 은색 신영들은 발이 묶인 듯했다.

    길쭉한 사내의 손짓에 푸른 거울 표면에서 수많은 수정 실들이 뻗어 나와 은색 신영들을 관통했다.

    수정실들이 하나씩 은색 신영들의 급소를 뚫어 흩어 버리고 이제 남은 것은 딱 하나였다.

    “공수 형, 지금입니다!”

    그때 길쭉한 사내가 크게 외쳤다. 연달아 강력한 술법을 펼치느라 얼굴이 창백해지고 팔이 덜덜 떨려와 신통을 오래 유지하지 못할 듯했다.

    홍발 거한과 공수천이 진중한 얼굴로 주문을 외웠다.

    허공의 하얀 태양이 화염을 머금고 마지막 남은 은색 신영을 향해 떨어졌다.

    쿠콰쾅!

    경천동지할 굉음이 들리고 하얀 태양이 터져 은빛 신형은 하얀빛에 잠식되었다.

    헤아릴 수 없는 힘을 지닌 법칙파동이 흩어지면서 공간을 좍좍 갈라놓았고 푸른 거울도 터져 다시 평범한 푸른 영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법칙 파동이 계속되자 결국에는 푸른 영역마저 붕괴했다.

    기합을 넣은 공수천는 온 힘을 다해 화염 영역을 유지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번 폭발로 취곤성 내성 절반이 난장판이 되었을 것이다.

    몇 호흡이 지나자 법칙의 힘이 드디어 가라앉자 공수천은 백지장처럼 하얘진 얼굴로 희색을 드러냈다.

    하얀 화염과 길쭉한 사내의 법칙의 힘이 결합해 태을경 초기인 은호를 끝장냈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임무를 성공한 것을 증명해야 했기에 시체의 상태가 너무 엉망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화염 영역이 사라지고 구경하던 이들은 더욱 시끄러워졌다.

    하얀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새까맣게 탄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빼빼 마른 녹색 머리의 정체를 알아보자 공수천의 얼굴이 확 달라졌다.

    “왕 형!”

    경악한 공수천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길쭉한 사내 옆으로 가서 바로 녹색과 붉은색 부적을 붙여 주었다.

    강력한 영력과 법칙의 힘이 느껴지는 것이 귀한 부적이 분명했다.

    화아앗!

    공수천은 부적의 빛이 길쭉한 사내의 몸으로 흡수되어 피와 살을 채워주는 것을 보고서야 안도했다.

    원래 길쭉한 사내가 서 있던 곳에는 은호가 기이한 수결을 맺고 서서 똑바로 보기 힘든 밝은 은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은호가 수결을 풀자 은빛이 약해졌고, 그는 창백한 얼굴로 잔잔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자포 사내는 여전히 뒷짐을 지고 세 사람의 싸움은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환술 법칙을 이 정도 경지까지 익히다니!”

    홍발 거한은 홀로 두 명의 동급 수사를 상대하는 은호를 보고 눈빛에 놀란 기색이 어렸다. 그는 일단 길쭉한 사내를 안아 들어 뒤쪽으로 물러났다.

    “내가 그냥 보내준다고 했던가요?”

    은호는 담담히 말하고는 손끝에서 은빛이 뻗어 나가려 했다.

    그 순간, 위쪽 허공에서 파동이 일고 오색(五色) 뇌전이 떨어졌다.

    표정이 급변한 은호가 피했지만 속도가 너무 빨라 오색 뇌전이 왼팔을 감싸고 말았다.

    파칙!

    은호의 팔이 갈가리 찢겨 재로 흩날렸다.

    그는 서둘러 흐릿하게 백여 장 뒤로 이동했고 오색 뇌전은 거머리처럼 따라붙었다.

    이에 표정이 서늘해진 은호가 오른팔을 움직이자 그의 미간에서 수정 사슬 허상이 빠져나왔다.

    오색 뇌전이 슬쩍 그 옆으로 비켜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푸쉬쉭…….

    검은 구멍이 뚫린 바닥에서 푸른 연기가 풀풀 날렸다.

    한립은 기이한 빛을 머금은 눈으로 은호가 두 의식 비술을 사용하는 것을 봐두었다.

    더 멀리까지 물러난 은호는 팔이 잘려나간 자리에 피를 한 모금 내뱉어 새로운 팔을 만들어냈다.

    그때 오색 뇌전빛을 번득이고 육중한 체구의 중년인이 나타났다. 그는 평범한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고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고동색 피부가 아주 단단해 보였다.

    금색 갑옷을 입은 그도 감찰사였다.

    “소류!”

    은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이를 갈았다.

    “소류 감찰사까지?”

    경양상인도 놀란 듯했다.

    “소류 감찰사라면 취곤성에 머문다는 감찰선사가 아닙니까?”

    옆에서 한립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는 태을경 최고봉의 수사니 은호도 이번에는 정말 위험하겠어요.”

    “천정의 수배범인 은호를 걱정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목소리를 낮춘 한립의 질문에 경양상인이 서둘러 다른 이들과 소류가 듣지는 않았나 살폈다.

    “려 수사, 그런 말을 함부로 했다가는 제가 크게 곤란해질 수 있습니다.”

    경양상인은 쩔쩔매는 목소리로 전음을 보냈다.

    “하하, 미리 방음 금제를 펼쳐 두었으니 안심하시지요.”

    한립은 웃음 지으며 전음으로 답했다.

    움찔한 경양상인은 어느새 자신과 한립이 금제로 둘러싸여 있자 안심을 하면서도 깜짝 놀랐다.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금제를 펼치다니 한립의 관련 신통이 그의 생각보다 뛰어난 게 확실했다.

    멀리서 은호는 수십 개의 환영을 만들어 또 사방팔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어딜 서둘러 가십니까?”

    냉소를 흘린 소류가 믿기지 않는 속도로 열 개의 손가락을 움직였다. 수십 줄기의 오색 뇌전이 그의 손끝에서 빠져나가 은색 신영의 뒤를 쫓았다.

    파칙! 파칙! 파치칙…….

    따라잡힌 은색 신영들은 하나씩 흩어지고 남은 것은 은호 본체뿐이었다.

    파치치칙!

    웃음을 흘린 소류는 오색 뇌전들을 뭉쳐 뇌룡(雷龍) 네 마리를 만들었다.

    콰릉.

    달려드는 뇌룡의 엄청난 압력에 은호는 속도가 10배는 느려져 위기의 순간 미간에서 여러 개의 의식 사슬 허상을 내뿜었다.

    의식 사슬 허상이 번득이고 네 마리 뇌룡 사이에서 약간의 틈이 벌어졌다.

    쿠콰쾅…….

    오색 뇌룡들이 충돌해 굉장한 기운을 터트렸는데 그 사이로 은호가 튀어나왔다. 의복이 찢어지고 팔과 몸 곳곳에 검게 변한 상처가 가득해서 중상을 입은 듯했다.

    “아니, 나서지 말랬다고 언제까지 구경만 할 겁니까!”

    은호의 외침에 소류도 여태까지 목각인형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자포 사내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어떤 대비도 하지 않고 빠르게 수결을 맺어 다시 뇌룡을 만들어 은호를 쫓았다.

    은호는 뇌룡들의 힘을 상당히 꺼리는 눈치였는데 잔영을 남기며 최선을 다해 자포 사내 쪽으로 도망쳤다.

    “수사가 요청한 겁니다. 이전에 진 빚은 이번 전투로 갚는 겁니다.”

    미소를 지은 자포 사내가 처음으로 매혹적인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멀리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한립은 어딘가 낯설지 않은 목소리에 표정이 달라졌다.

    “알겠습니다!”

    자포 사내 옆에 선 은호가 그다지 좋지 않은 목소리로 답했다. 자포 사내는 그의 대답을 듣고서야 대량의 보라색 광채를 퍼트렸다.

    강렬한 마기 파동이 폭발적으로 감지되었다.

    마기는 그리 강대하지 않은 대신 범성진마공의 마기보다 정순했다. 보라색 광채는 급속도로 커져 자포 사내 뒤쪽으로 뭉쳐지더니 삼두육비의 거인 허상으로 변해갔다.

    세 개의 머리들은 각각 모양이 달라서 뿔이 난 머리는 노기등등하게 눈을 부릅떴고, 화염 모양의 머리는 눈을 감고 있었다. 마지막 머리는 이질적으로 자비로운 인상에 미간에 눈이 하나 더 박혀 있었다.

    게다가 여섯 개의 팔에는 곤봉, 채찍, 도끼 등의 각기 다른 무기가 들려 있었고 소매로 가려지지 않은 부분에는 언뜻언뜻 보라색 비늘이 보였다.

    ‘알고 보니 그 자였어…….’

    자포 사내는 원황성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 석천공일 가능성이 컸다. 법상을 불러낸 그의 기운은 금선 최고봉에 불과했다.

    중간에 뿔이 달린 머리가 보라색 빛을 발산하고 미간 사이의 수직 동공을 지닌 눈에서 은빛이 뻗어 나갔다.

    은빛은 강렬한 공간 파동을 내뿜으며 은호 뒤쪽에서 소용돌이를 만들어 네 마리 뇌룡들을 휘감았다.

    팟.

    은빛이 번득이고 소용돌이와 뇌룡들이 사라지자 소류는 흠칫 놀랐다. 이때 소류 뒤로 은색 소용돌이가 나타나 오색 뇌룡들을 뿜어냈다.

    “공간나이술(空間挪移術)이 대단합니다. 무쇠와 같은 소류가 자신의 신통에 당하다니, 하하하!”

    소류가 자신이 만들어낸 뇌룡의 힘에 튕겨 나가는 것을 보고 은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가시지요!”

    자포 수사는 급히 수결을 맺었다. 보라색 법상이 여섯 개의 팔로 그와 은호를 안고 번개처럼 날아올랐다.

    “어딜 가려느냐!”

    분노에 찬 목소리가 울렸다.

    오색 뇌전이 수백 장을 퍼져 영역을 이루고 단단하고 실체화된 뇌전 장벽이 다시금 구경꾼들의 시선을 가렸다.

    채찍과 같은 오색 뇌전들이 사방에서 몰아쳤다.

    뇌전 영역 안에 모습을 드러낸 소류는 금색 갑옷이 약간 망가져 고동색 피부가 노출되었을 뿐 부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콰릉!

    그는 두 손으로 뇌전 도끼를 들고 그것을 서서히 휘둘러 오색 뇌전을 내뿜었다. 동시에 커다란 붉은 거검이 화룡 허상을 휘감고 달아나고 있는 보랏빛을 향해 날아들었다.

    지켜보고 있던 공수천이 합세한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길쭉한 사내도 정신을 차리고 그 뒤에 서 있었는데 부상이 상당한지 공격은 하지 않았다.

    이때 보라색 둔광 속에서 은빛이 퍼져 삽시간에 영역을 만들었다.

    도끼의 뇌전이나 거검이 공간의 힘에 말려들어 영역을 비켜나가 자기들끼리 충돌했다.

    연달아 폭음이 들려왔지만, 은호와 자포 사내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제길!”

    공수천이 이를 악물었고 길쭉한 사내도 안색이 좋지 않았다. 수결을 풀어 뇌전 도끼를 흩어 버린 소류도 미간을 좁혔다.

    “소 수사의 뇌전 법칙은 은호의 신통과 상극이라 알고 있습니다. 진작 우리와 힘을 합쳐 협공했더라면 왕 형이 부상을 당하기 전에 잡을 수 있었을 겁니다!”

    공수천이 소류를 향해 소리를 높였다.

    “지금 내게 따지는 겁니까?”

    그를 바라보는 소류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아니, 따지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은호를 잡는 것이 임무였는데 만혼초까지 가지고 달아나게 두었으니 돌아가 무어라 한단 말입니까?”

    “은호를 잡는 것은 당신들의 임무고 난 도움을 주라는 명을 받았을 뿐입니다. 제가 할 일은 다 한 것으로 아는데요? 그리고 선박 위의 수사들은 취곤성 경전에 참석한 귀빈들입니다. 앞으로 어찌할지 아실 거라 믿겠습니다.”

    말을 마친 소류는 뇌전 영역을 거두고 흐릿하게 사라졌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