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3화. 괴도(怪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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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양상인의 말대로 흑산선역 북부 제일의 성인 이곳에서, 그것도 감찰사까지 버티고 있는데 누군가 대놓고 진법을 펼쳐 수사들을 가두었다면…….’
한립이 생각에 빠져있을 때 붉은색과 푸른색 인영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동공을 수축한 한립은 공법 운용을 멈추고 그들을 살폈다.
금색 갑옷을 입은 두 사람은 예전에 보았던 천정 감찰사 복장을 하고 있었다.
전신에서 화염이 이글거리는 붉은 머리 거한은 주변 공기마저 왜곡되게 만들었다. 그 방대한 기운은 공수구 이상인 태을경 중기였다.
홍발(紅髮) 거한은 사람 키만 한 비늘로 뒤덮인 새빨간 거검을 들고 있었고, 구불구불한 거검의 검신은 화룡(火龍)의 모양을 하고 있어서 용 꼬리가 칼끝 그리고 용머리가 손잡이 역할을 했다.
검을 타고 흐르는 붉은 기운은 무엇이든 베어 죽일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또 다른 대나무 줄기처럼 마르고 키 큰 사내는 눈부신 푸른빛에 휩싸여 있었는데 발산하는 기운은 홍발 거한 못지않았다.
“감찰선사!”
현장의 다른 이들도 그들의 복색을 알아보았다.
“모두 당황하실 것 없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윤회전의 역도가 이곳에 숨어들었기 때문이니까요. 이 일에 개입되지 않은 수사들은 곧 풀려날 것입니다.”
홍발 거한이 아무렇지 않게 설명하고 예리한 시선으로 무리를 훑었다. 이에 한립은 가슴이 철렁했다.
‘정체를 들킨 건가?’
복잡한 마음으로 대책을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거기 당신, 그리고 당신, 저쪽에 당신……. 우리를 따라 심문에 협조해 주셔야겠습니다.”
홍발 거한은 손을 들어 방금 지나간 흑포 청년을 비롯한 몇 사람을 지목했다. 한립은 그가 자신을 부르지 않자 조금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기억이 맞다면 방금 지목된 이들은 만혼초가 경매품으로 나왔을 때 가격을 불렀던 이들이었다. 그의 직감대로 경매 직전 갑자기 추가된 만혼초는 함정이었다.
그 후로도 거한은 매서운 눈초리로 다른 이들을 훑어보았고 그의 시선에 몇몇이 바늘에 눈을 찔린 듯 고통스러워했다.
한립은 홍발 거한의 시선에도 표정 변화가 없었다.
연신술을 익히고 흉살기가 회선에 가까울 정도로 짙다고 해도 허원단을 복용해서 특수한 법기로 조사하지 않는 한 들통 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과연 거한의 시선은 한립을 그냥 스쳐 지나갔다.
“거기 당신이랑 당신도 나오시죠.”
홍발 거한은 두 명을 더 불러냈다.
“감찰선사 대인, 저희는 윤회전 사람도 아닌데 왜 잡아가시는 겁니까!”
붉은 장포를 입은 수사가 불평하는데도 홍발 거한은 다른 이들을 훑어 의심스러운 자를 색출하느라 바빴다.
“됐습니다. 방금 지목된 이들만 저희를 따라가시고 나머지는 가보셔도 좋습니다.”
홍발 거한이 수결을 맺어 구금 금제를 풀어주었다.
“우리도 갑시다.”
풀려난 이들은 서둘러 자리를 떠났고 경양상인도 낮은 목소리로 한립을 재촉했다.
두 사람은 금방 옥곤루가 있는 구역을 벗어나 인파 속으로 스며들었다.
경양상인은 완전히 이곳을 떠나고 싶었으나 한립은 이 일이 어떻게 마무리되는지 보고 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에 경양상인은 속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다른 수사들 틈에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옥곤루 앞 공터에 남은 사람은 열댓 명 정도였다.
대부분이 만혼초를 얻으려고 경쟁하던 이들이었는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비취색 뼈를 판 남색 거한도 있었다.
그밖에 흑포 청년의 뒤를 따르던 자색 도포의 수사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십여 리 밖에서 구경꾼에 섞여 있던 한립은 눈을 가늘게 떴다.
“오르시지요.”
홍발 거한은 백옥 선박을 불러냈다.
그 위에는 무시무시한 뇌전이 번득거리는 새빨간 빛의 우리가 설치되어 있어 지켜보는 이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멀리 있던 한립의 눈에도 놀란 듯한 기색이 스쳤다. 홍발 거한의 얼굴이 낯익다 했더니 공수구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감찰사라고 이렇게 멋대로 사람을 잡아가도 되는 겁니까! 우리는 옥곤루에 경매를 하러 온 것이지 윤회전 역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저는 바쁜 일이 있어 같이 못가겠습니다.”
남색 도포를 입고 구불구불한 수염을 기른 노인이 금선경 후기 최고봉의 기운을 드러냈다.
극도로 차가운 기운이 폭발적으로 퍼져나가 파문을 일으켰고 붉은 진법의 빛도 영향을 받아 어둑해졌다.
구불구불한 수염 노인은 극한(劇寒) 법칙의 파동으로 십여 장을 얼리고 펑! 터진 금제를 뚫고 솟아올랐다.
법칙 영역을 펼쳐 금제에서 벗어난 것이다.
“내가 가도 된다고 했던가?”
전신에서 사납게 흉살기를 터트린 홍살 거한이 들고 있던 화룡 거검으로 허공을 베었다.
쿵!
구불구불한 수염 노인 머리 위에서 굉음과 함께 거대한 화룡 허상이 나타나 더없이 뜨거운 법칙 파동을 드리웠다.
노인 주위의 남색 영역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노인은 입에서 눈부신 남색 빛을 뿜자 짧은 남색 창이 남색 교룡으로 변해 화룡 허상을 공격했다.
화룡 허상은 입을 벌려 집채만 한 불구름을 뿜었다.
쿠르릉.
남색 교룡이 불구름과 충돌해 폭발한 뒤, 남색 창도 불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튕겨 나와 구불구불한 수염 노인에게 향했다.
콰쾅!
눈부신 붉은 빛에 휩싸인 노인이 참혹한 비명을 질렀다. 붉은 구름이 가시고 나타난 맑은 하늘에는 노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모두 제가 두 번 말하지 않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홍발 거한이 나머지 수사들을 향해 경고했다.
수사들은 바들바들 떨며 더는 불만을 표하지 못했고 스스로 선박의 붉은 우리 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한립의 시선은 어느 두 사람에게 향했다. 수척한 흑포 청년과 그 옆의 자색 도포 수사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모습에 홍발 거한도 냉랭한 시선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거참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저 비행 보물은 아주 흥미롭긴 하지만 우리 속에 들어가 앉는 취미는 없어서요.”
흑포 청년은 홍발 거한과 당당하게 시선을 마주 보며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길쭉한 사내가 거한과 시선을 마주치고 흐릿하게 흑포 사내 뒤쪽으로 이동했다.
“만혼초를 가져간 건 당신이겠지, 윤회전 호삼(狐三).”
“호삼이요? 저를 부르신 게 맞습니까? 사람을 잘 못 보신 듯합니다만, 호삼이란 이름은 마음에 드는군요.”
홍발 거한의 말에 흑포 청년이 두 손을 펼치고 싱긋 미소 지었다.
“호삼, 아니면 은호(銀狐)라 불러야 할까? 십만 년 전에 천홍선궁(天鴻仙宮)의 보물을 훔친 것을 시작으로 수백 년마다 선역을 옮겨 다니며 도적질을 하더니 이곳에서 잡히는구나. 훔쳐 간 물건을 내놓으면 곱게 죽여주마.”
말을 하면서 홍발 거한의 몸에서 화염이 크게 타올라 인근 땅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괴도(怪盜) 은호가 저 자였다니.”
경양상인이 듣고 있다 중얼거렸다. 한립도 성의 주선대에서 은호란 이름을 본 적이 있었다.
그곳에 적혀 있기로 윤회전 인물인 은호는 진귀한 보물을 훔치기 좋아했고 대부분 선궁과 연관이 있는 범죄를 저질러 왔다.
“천홍선궁의 보물이 도난당한 적이 있습니까? 아, 들은 기억이 납니다. 천홍선궁 궁주 사도박문이 현천의 보물을 구해 천정에 바치려고 경전을 열어 수많은 금선과 천정의 감찰사까지 초대했는데 그 전날 도둑을 맞았다지요? 쯧쯧, 궁주와 감찰사들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겠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일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저를 잡아다 분풀이를 해서야 쓰겠습니까?”
“무슨 헛소리를 지껄여도 넌 끝이다!”
홍발 거한의 이마에 힘줄이 솟았을 때, 길쭉한 사내가 먼저 싸늘하게 소리쳤다. 천정 감찰사들은 앞뒤에서 다가가며 흑포 청년과 자포 수사를 압박했다.
“귀찮아 죽겠네. 꼭 때가 되면 나를 귀찮게 하는 것들이 있단 말이지. 며칠 한가롭게 지내려 했는데 뜻대로 안 되는구나.”
흑포 청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돌연 몸을 틀어 구불구불한 은색 실로 변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구금 금제는 그를 막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자포 수사는 뒷짐을 쥐고 자신은 상관없다는 태도로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멈춰라!”
홍발 거한이 대노하며 천장 가까이 되는 새빨간 영역을 펼쳐 인근의 경매회장과 주변 건물을 감쌌다.
새빨간 영역에는 실체화된 화염이 넘실거려서 영역 범위에 속한 옥곤루와 다른 건물들이 녹아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멀리서 구경하던 이들은 얼른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흑포 청년은 증발이라도 된 듯 보이지 않았다.
홍발 거한이 깜짝 놀란 사이 길쭉한 사내가 흑포 청년이 사라진 순간 수결을 맺었다.
푸른빛이 허공으로 날아가 경매회장을 중심으로 수십 리를 뒤덮는 푸른 보호막을 만든 것이다.
반구형의 푸른 보호막 안에서 수많은 소용돌이가 쳤다.
공간 파동을 물씬 풍기는 푸른 보호막은 은호를 잡기 위해 미리 준비해 둔 공간전송을 막는 금제였다.
“엇!”
길쭉한 사내가 흑포 청년의 종적을 찾으려다 눈을 크게 떴다.
홍발 사내의 영역 안에서 자포 사내가 보호막도 불러내지 않고 뒷짐을 지고 서 있는데 화염이 다가가지 못하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어째서…….”
길쭉한 사내가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는데 홍발 사내가 거검을 휘둘렀다.
쩡!
검에서 빠져나온 화룡을 은색 검빛이 막아섰다.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검빛 속에서 희미하게 주술문자들이 반짝거렸다.
이에 코웃음을 친 홍발 거한은 거검에 더 많은 기운을 불어넣었다.
챙강.
경쾌하게 검빛이 갈라졌다.
바로 그 순간, 홍발 거한 등 뒤에 미세한 공간 파동이 일고 두 개의 똑같은 은색 검빛이 나타나 정확히 홍발 거한의 심장을 노렸다.
얼굴을 구긴 홍발 거한은 허둥거리지 않고 입에서 붉은 방패를 뿜었다.
챙! 챙!
두 번의 경쾌한 소리와 함께 은색 검빛과 붉은 방패 사이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런데 홍발 거한이 한시름을 놓기 전, 그의 좌우에도 네 개의 은색 검빛이 나타나 더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다.
드디어 표정이 어두워진 홍발 거한은 화룡 거검을 휘둘러 커다란 검기 네 줄기를 날려 보냈다.
법칙파동을 지닌 검기들이 은색 검빛 네 개를 향해 쇄도했다.
펑펑펑!
검빛들이 연달아 화염에 뒤덮여 깨졌다.
하지만 네 번째 검빛은 화염 검기와 충돌하기 직전 기묘하게 방향을 틀었고, 화염 검기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검빛은 홍발 사내의 아랫배를 찔러 들어갔다.
군중 속에서 이를 지켜보던 한립은 눈썹을 꿈틀했다. 순간 의식 사슬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순간 홍발 거한 옆에서 쿵! 하는 진동이 일고 눈부신 푸른빛이 베틀북으로 변해 은색 검빛과 충돌했다.
“공수 형, 괜찮으십니까?”
네 번째 검빛이 터지고 홍발 거한 옆에 길쭉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 왕 형.”
예기치 못한 공격에 진땀을 흘리던 홍발 거한이 인사를 하며 수결을 맺었다.
화룡 거검이 날아올라 붉은 검기로 주변에 검진을 펼쳤고 동시에 등 뒤에서 붉은 방패가 보호막을 펼쳐 암습에 대비했다.
“은호는 태을경 초기지만 실력이 상당하니 조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길쭉한 사내가 당부하고 손을 휘저었다.
푸른 죽간(竹簡) 선기가 날아올라 대나무 조각이 엮인 듯한 푸른 보호막을 형성해 그를 보호했다.
“공수천, 공수세가의 천재로 선옥에서 명성이 자자하다던데 실력이 이게 다란 말인가…….”
흑포 청년의 비웃는 소리가 허공 곳곳에서 웅웅 울렸다.
“은호의 은신술은 영역으로도 감지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법칙을 익힌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홍발 사내는 일순 화가 치밀었지만 상대의 도발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주변을 살피며 전음을 보냈다.
“예전에 저자가 허공에 녹아들 수 있는 공간 보물을 지니고 있어 영역과 의식으로도 종적을 찾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길쭉한 사내가 전음으로 답했다.
“그 방법을 쓰겠다는 것입니까?”
홍발 거한의 물음에 길쭉한 사내의 몸에서 푸른 영역이 퍼져 붉은 화염 영역과 중첩되었다.
그가 빠르게 수결을 맺자 주위에 푸른 돌풍들이 떠올랐다. 홍발 거한도 주문을 외워 화염 기둥들을 불러내 푸른 돌풍과 결합했다.
쿠르릉!
불기둥과 돌풍이 합쳐져 화염 영역의 빛이 몇 배로 강해졌지만 푸른 영역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바깥의 수사들은 화염에 시야가 가려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태을경 수사들이 싸우는 것을 지켜보기만 해도 법칙의 힘을 어떻게 운용하는 것인지 알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한립이 안타까워한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아까 순간적으로 느낀 의식 사슬을 자세히 보고 배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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