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799화 (1,556/2,000)

1799화. 신분

*

망파정은 야학곡 깊은 곳에 있어서 막무설의 거처와 가장 가까운 호수 중앙에 있었다.

호수 한가운데 섬세하게 지어 놓은 정자는 꽤 정취가 있었다. 그가 망파정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두 모여 있었다.

단여재 등은 정자 안 탁자에 모여 앉아 과실과 비취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하얀 장포로 갈아입은 우자기만이 떨어져 앉아 향로를 켜놓고 가야금을 타는 중이었다.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우자기의 눈은 줄곧 어느 여인을 향해있었다.

“야학곡에서 그나마 술맛을 아는 사람이 려 수사인데 안 오셨으면 섭섭할 뻔했습니다.”

경양상인은 한립이 늦은 것을 보고 비취색 잔을 들어 올렸다.

“하하, 취곤성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고 할 일이 많아 거절했던 것이니 나무라지 말아주십시오.”

“화심석을 찾는다고 들었는데 찾으셨나요?”

새하얀 치마를 입은 여인이 입을 열었다.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만, 허탕을 쳤습니다.”

한립은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도 벗들에게 연락을 해보았지만 아직 현지정석의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주름 하나 없는 깔끔한 흑포를 걸친 단여재가 말했다.

“서둘러서 될 일은 아니고 인연이 닿아야겠지요. 하하, 어차피 이렇게 모인 김에 근심은 털어 버리고 우 수사의 곡조와 경양 수사의 자미낭에 취해봐야겠습니다.”

“옳소! 려 수사, 한 잔 들어보세요.”

한립의 말에 크게 웃은 경양상인이 미리 준비해둔 빈 잔에 보라색 술을 따라 주었다.

“백엽향, 파사과, 자화제……. 술 한동이를 빚는 데 이리 좋은 재료들을 쓰시고 손도 크십니다.”

먼저 향기를 맡은 한립이 재료를 줄줄 읊었다.

“호오, 냄새만 맡고 그걸 안단 말입니까? 까딱 잘못했다가는 귀한 술 빚는 비법을 생으로 빼앗기게 생겼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자, 함께 드시지요.”

촉룡도에 있을 때 호언 도인과 교류하며 술에 대해 지식을 쌓은 덕이었다. 다들 흥이 올랐을 때 경양상인이 뿌듯한 얼굴로 열화선존에게 물었다.

“열화노귀, 취곤성에서 오래 지냈는데 옥곤루 경매에 참가해 봤습니까?”

“3천 년에 한 번 열리는 데다 매번 참가 인원에 제한을 두어 입장권인 금옥백(金玉帛)을 구하기가 워낙 어려워서 말입니다. 지난번 경매 때는 시장에서 그 천 쪼가리가 선원석 6백 개에 거래되기도 했지요. 선원석 6백 개를 내고 들어가 구경만 할 수는 없어 화엽종 대장로일 때도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았습니다.”

“흐흐, 그 말은 그러니까 금옥백을 본 적도 없다 이말 아닙니까.”

“아, 그렇다고요.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자자, 다들 잘 보십시오.”

한껏 뜸을 들이던 경양상인이 손바닥을 뒤집어 금박지 같은 천을 꺼내 들었다.

금실을 이용해 짠 비단에는 각종 짐승과 물고기, 곤충 문양이 새겨져 있고 그 중앙에 팔각탑이 그려져 있었다.

옥곤류의 모습을 본떠서 만든 모양이었다.

“아니 경전이 열리려면 2백 년도 더 남았는데 금옥백이 벌써 떠돌 리가 있나요?”

허리를 꼿꼿이 세웠던 열화선존은 못 믿겠다는 듯 입을 벌렸다.

“뭐라고요? 그럼 이게 가짜라는 말입니까!”

얼굴이 어두워진 경양상인이 불쾌한 내색을 했다.

“가짜가 아니란 것은 알겠습니다. 백조산 비술을 이용해 제련한 물건이라 복제할 수도 없고 흑산선궁의 눈에 띄면 죽을 텐데 누가 그런 짓을 시도하려고요. 그래서 더 이상하다는 겁니다.”

열화선존이 ‘백조산’을 언급하자 한립도 귀를 기울였다. 그가 영계에서 수련했던 백맥련보결이 그곳에서 유래한 비술이었다.

우자기도 가야금을 타는 것을 멈추고 막무설 뒤에 가서 섰다.

모든 이들이 자신만 바라보고 있자 경양상인이 짐짓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늙은이가 귀한 술을 내놓으면서 모두를 불렀다 했더니 금옥백을 자랑하려고 그랬군요.”

열화선존이 그가 거들먹거리는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

“아닙니다? 금옥백을 오늘 선보인 것은 려 수사에게 할 말이 있어서예요. 려 수사, 이걸로 제가 경매에 참가해서 현지정석이 있는지 봐 드리고 일단 물건이 있으면 반드시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경양상인은 술잔을 꺾어 비우고 자신 있게 외쳤다.

“그렇게 돕고 싶으면 금옥백을 려 수사에게 주면 되겠군요.”

열화선존이 짓궂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건……. 저도 필요한 보물이 있나 좀 봐야지요, 하하하…….”

경양상인은 냉큼 금색 천을 넣어버렸다.

열화선존의 말에 한립도 마음이 동해 겉으로는 침묵을 지켰으나 바로 경양상인에게 전음을 보냈다.

“경양 수사, 금옥백을 제게 넘겨주실 수는 없을지요? 선원석, 단약 아니면 법보라도 원하시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늘 말씀하시던 진귀한 술을 빚는 방법이라도 구해드릴 수 있고요.”

한립의 전음에 경양상인이 움찔했다.

“……정말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금옥백은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라 양보할 수가 없군요. 허나 경매에 현지정석이 나오면 꼭 낙찰받아오지요.”

“그럼 금옥백을 어떻게 구하셨는지 귀띔이라도 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옥곤루 경매가 아직 2백 년은 남았지만 그들도 슬슬 준비하고 있습니다. 들려오는 소문에 단약 감정사 자리가 하나 빈다던데, 려 수사의 실력이면 그쪽을 노려보는 것이 어떨지요?”

“경양 수사께서도 그런 식으로 금옥백을 구한 것이겠군요.”

“좋은 마음으로 알려준 것이니, 제 사정을 캐려 하지는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수사.”

경양상인이 불편해하는 소리에 한립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열화선존 등은 계속해서 술을 마시며 경양상인이 너무 속이 좁다는 등의 소리를 하며 농을 해댔다.

* * *

보름 후, 한립은 한운산을 떠나 경양상인의 말대로 해보기 위해 취곤성 내성의 옥곤루로 향했다.

탑의 문은 여전히 닫혀 있고 부적으로 봉해져 있었다. 한립은 탑을 빙 돌아 뒤쪽 골목의 막다른 길로 들어섰다.

막혀 있는 회백색 벽에 손바닥을 올리니 무형의 힘이 그를 쑥 빨아들였다.

너른 정원에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은색 갑옷을 입은 무사들이 모여들어 그를 포위했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도병으로 갑옷에서 강렬한 파동을 내뿜고 있었다. 각각이 대승기 수행밖에 지니지 못했어도 뭔가 특수한 금제를 품고 있는 도병들 같았다.

“누구십니까?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도병 중 하나가 경계하며 물었다.

“옥곤루에서 연단사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네.”

“저를 따라오시지요.”

한립이 목적을 밝히자 도병이 몸을 돌려 정원 뒤편의 대전으로 안내했다.

대전 입구에도 도병들이 두 줄로 늘어서 있었다. 한립은 그들을 훑고 스스로 대전 문을 열고 들어갔다.

등불이 켜진 내부에는 큰 의자 3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그 양쪽 끝에 붉은 의복을 입은 노인과 얼굴이 붉고 체구가 우람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가운데 의자만 비어있었다.

두 노인의 의복에는 똑같이 망치 두 자루가 교차하고 그 아래 불꽃이 있는 모양의 수가 놓아져 있었다.

“감단사 자리에 지원하고 싶으시다고요?”

좌측에 앉은 관을 쓴 홍의 노인이 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요구조건은 아십니까?”

한립의 낭랑한 대답에 이번에는 우측의 우람한 노인이 물었다.

“모릅니다.”

“최소 태을급 단약을 제련할 수 있는 연단사를 찾는데 자격이 됩니까?”

관을 쓴 노인은 말을 하면서도 표정 변화가 없었다.

“제가 태을급 단약을 제련할 수만 있으면 금옥백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맞습니다. 경매 참가자격과 감단사 자격을 동시에 얻게 되는 것이지요.”

우람한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단실이 있으면 빌리겠습니다.”

“왼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노인의 말에 한립은 두말할 것 없이 행동에 들어갔다.

그가 연단실로 들어가고 대전 뒤쪽에서 누군가 천천히 걸어 나와 가운데 의자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신중하게 금제까지 펼쳐 두고……. 호오, 품계도 상당한 금제예요.”

“부산주님, 저자가 태을급 단약을 제련할 수 있겠습니까?”

관을 쓴 노인이 그를 향해 물었다.

“허허, 그걸 나라고 압니까? 기다려 봐야지요.”

* * *

다섯 달 후, 대전 밀실이 열렸다.

한 차례 실패를 거친 뒤 한립은 마지막 재료로 옥청단 세 알을 제련해 냈다.

“영기가 가득하고 품질이 절정입니다! 제가 보았던 옥청단 중에 세 손가락 안에 들겠어요.”

관을 쓴 노인은 방금 화로에서 나온 따끈따끈한 단약을 들고 칭찬을 쏟아냈다.

“아주 좋습니다! 이렇게 연단술이 고명하다니 감단사 자격에 적합하군요.”

붉은 얼굴의 우람한 노인도 마음에 차는 듯 밝게 웃었다.

“그렇다면 책임자인 경양 수사를 불러주시지요.”

관을 쓴 노인의 손에서 옥청단을 가져온 한립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 소리에 홍의 노인과 우람한 노인은 얼굴이 굳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하하……. 과연 려 수사답습니다. 한 번에 제 신분을 알아차리셨군요.”

대전 뒤쪽에서 명랑하게 웃으며 경양상인이 나타났다.

가슴에 다른 노인들처럼 불꽃 수가 놓여 있었는데 색깔이 황금색으로 다른 이들과 달랐다.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도착하자마자 이름도 묻지 않고 연단실을 쓰라는 것을 보면 일단 제가 누구인지 안다는 이야긴데, 제가 이곳에 올 것을 아는 사람이 경양 수사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하, 제가 배울 점이 많은 분입니다.”

경양상인이 가운데 자리에 앉고 손을 젓자 나머지 두 노인이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크흠……. 려 수사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이번 경매는 흑산선궁과 우리 백조산 분파가 손을 잡고 거행하는 일이라 규정을 준수해야 했습니다. 솔직히 수사의 연단 실력에 확신이 있었기에 이번 시험도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에 불과합니다.”

보는 눈이 사라지자 경양상인이 헛기침을 하고 밝게 웃음 지었다.

“저를 좋게 봐주신 것은 감사합니다. 그래서 수사의 진정한 신분은 무엇입니까?”

미간을 좁힌 한립이 진지하게 묻자 경양상인이 한숨을 푹 쉬고 소매 속에서 호리병을 꺼내 술을 들이켰다.

“백조산 부산주 72인 중 하나가 접니다. 흑토선역의 분파를 맡고 있고요.”

그는 꿀꺽 술을 삼키며 답을 주었다.

“흑토선역이요? 흑산선역이 아니라요?”

“흑토선역(黑土仙域), 흑산선역(黑山仙域), 복택선역(伏澤仙域) 그리고 원경선역(元競仙域)은 거리도 가깝고 그 사이에 만황구역 같은 단절이 없어 통칭해서 사맹선구(四盟仙區)라 부릅니다. 백조산 분파가 흑토선역에서 이 사맹선구 전체를 관리하고 있어 부산주인 저도 이곳에 머물 수 있었지요.”

“신분을 숨기고 야학곡에 머무시는 이유라도…….”

“열화노귀나 저도 성격이 비슷합니다. 구속을 싫어하고 번거로운 일은 질색이에요. 흑산선역에 좋은 곳이 있다기에 여정 중에 만난 우자기와 벗이 되어 함께 부운산에 오게 되었습니다.”

한립이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자 경양상인은 울상을 지었다.

“너무 양심이 없는 거 아닙니까? 원래 이번 취곤성 경매는 제가 안 나서도 되었는데 수사가 화심석이 급해 보여서 정보를 찾다가 개입하게 된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면 제가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정말로 저 때문에 말입니까?”

얼굴을 푼 한립이 친근한 웃음을 머금고 되물었다.

“하하, 물론 그 때문만은 아니고요. 옥곤루 경매에는 매번 오는데 이전에는 개인 신분으로 참석을 했지요.”

“이번 일은 정말 감사드립니다. 오래전부터 홍상주와 화연주 빚는 법을 알고 싶어 하셨는데 일이 정리되는 대로 직접 몇 동이 빚어서 제련법과 같이 보내드리겠습니다. 저는 입이 무거운 편이니 야학곡에 소문이 날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립이 공수를 하고 감사를 표했다.

“하하, 역시 려 수사와는 말이 통합니다! 자, 오늘은 같이 술이나 진탕 마셔 봅시다!”

경양상인은 엄지를 치켜세우며 신이나 말했다.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