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798화 (1,555/2,000)

1798화. 취곤성

*

다음으로는 경전과 옥간들을 빠르게 훑었다.

대부분이 공법과 비술이 적혀 있었는데 태을경 수사들이 지니고 다니는 서적들답게 그의 안목을 높여 주었다.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낭비할 수 없어 대충 내용만 훑고 내용을 외우려 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회색 옥간을 든 한립의 눈빛이 달라졌다.

공법이 아닌 금강철골단(金剛鐵骨丹)이라는 단약 제조법이었다.

금속 법칙을 함유한 단약은 해당 법칙을 깨우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외에 육신을 단단하게 하는 효과도 있었다.

고개를 들어 고리를 확인하니 시간도문이 절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립은 금강철골단 약방을 기억해 두고 다른 물건들을 살폈다.

빠르게 모든 경전과 옥간을 확인한 그는 다섯 저물법기들을 들고 날아올랐다.

몇 호흡 뒤에 사막의 오아시스에 이른 그는 검은빛으로 감싼 저물법기들을 호수 깊은 곳으로 가라앉혔다.

그리고 자신은 그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연신술 5성의 현묘함을 만끽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리의 시간도문이 하나씩 어두워지고 결국 마지막 도문이 꺼졌다.

휘휘휘휘…….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금색 고리가 새까만 소용돌이로 변해 강력한 힘으로 한립을 덮쳤다.

쉭!

한립의 혼백은 저항할 틈도 없이 빨려 들어갔다. 의식을 잃었다가 정신을 차리자 동부로 돌아와 있었다.

허공에 있던 장천병은 빛이 어두워지며 그의 손으로 떨어졌다.

장천병에 의식을 불어넣어 병령과 대화를 나눠보려 했으나 아무리 시도를 해보아도 깊이 잠든 듯 반응이 없었다.

한립은 탄식하며 병을 넣어 두고 잊기 전에 금강철골단의 약방을 옥간을 꺼내 기록해 두었다.

이번 시공간 초월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신비한 강과 윤회자를 공격하는 감찰선사들……. 이 모든 광경이 어느 사람 어느 역사의 일부라면?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죽어가고 있거나 이미 죽은 사람의 몸에 깃들어 그들의 기억을 조사할 수 있었다.

앞으로 시공간을 선택할 수 있을지 깊이 연구해봐야 할 듯싶었다. 그래도 이번에 육인곤의 몸에 깃들어 연신술 5성 수련경험과 깨달음을 느끼고 온 것은 큰 수확이었다.

이로써 연신술 5성 수련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그는 막 수련을 시작하려다 문득 바깥을 쳐다보았다.

휙.

하얀빛이 바깥에서 들어와 밀실 안을 맴돌다 펑! 터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금제를 거둔 한립이 문을 열고 나가자 잿빛 장포를 입은 노인과 마주했다.

작은 두 눈은 뭘 훔쳐 먹다 들킨 쥐의 눈을 닮아 있었다.

“노 수사, 오랜만에 뵙습니다.”

뜻밖의 인물을 보고 움찔한 한립은 미소를 지었다. 염소수염 노인은 인근 향양곡에 사는 노관자였다.

경양상인, 열화선존 등과 잘 지내서 자주 야학곡에 놀러 왔기에 그와도 안면이 있었다.

“려 수사의 수련을 방해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노관자가 웃는 낯으로 공수를 했다.

“아닙니다. 수사께서 무슨 일로 누추한 곳까지 찾아주셨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안으로 들어가 이야기 나누시지요.”

“그럴 것은 없고, 그냥 여기서 이야기하겠습니다.”

한립이 안으로 들어갈 것을 권했으나 노관자는 담담히 거절했다.

“말씀하시지요.”

“다름이 아니라 다른 수사들과 북부 천악산맥을 지나가 유적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강력한 금제들도 남아 있고 위험해 보여서 실력이 있는 수사들을 모아 도전해 보려고 하는데, 려 수사께서 인근 골짜기에서는 손에 꼽히는 실력자가 아닙니까? 어떻게 함께 가서 기연을 노려보시겠습니까?”

노관자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물었다.

“……그런 제안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허나 저는 급히 처리할 중요한 일이 있어 함께 하지 못할 듯합니다.”

“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안타까워하던 노관자는 긴말하지 않고 떠나갔다. 한립은 그를 배웅한 다음 다시 밀실로 돌아가 앉았다.

노관자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연신술 수련이 급해서만은 아니었다.

조금 전 시공간 초월을 하느라 진언보륜의 도문들이 전부 어두워졌는데 이런 때 위험을 무릅쓰고 보물을 찾으러 갈 수는 없었다.

* * *

시간이 유수와 같이 흘러 30년이 지났다.

한립은 동부 문을 굳게 닫고 나서지 않았고 다른 이들도 방해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동부 앞에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백발노인이 나타났다. 바로 열화선자였다.

“열화 수사 오셨습니까! 멀리 마중을 나가지 못해 송구합니다.”

그가 전음을 보내기 전에 동부 문이 열리고 한립이 걸어 나왔다.

“하하, 서로 동부가 코앞인데 마중은 무슨 마중입니까?”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지요.”

“그렇게까지 할 건 없고, 오늘 온 것은 드릴 것이 있어서입니다. 폐관 수련을 하는 것 같아서 오늘에서야 갖고 왔습니다.”

“혹시 현지정석을 찾으신 것입니까?”

한립이 눈썹을 꿈틀하고 물었다.

“그런 보물이 아무 데나 있으려고요? 허허, 려 수사를 실망하게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게 아니라면…….”

한립이 의아해할 때 열화선존이 하얀 영패를 던져 주었다.

받아보니 붉은 잎사귀 도안 왼쪽에 고대문자로 ‘외문 장로령’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열화선존의 종문인 화엽종(火葉宗) 외문 장로임을 증명하는 영패였다. 영패의 반대편에는 소형 주술문자 중간에 ‘려한’이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열화 수사, 이건…….”

“약소하지만 제 성의입니다. 화엽종 수사로 기록을 해두었으니까 자유롭게 취곤성 내성을 드나들 수 있을 거예요. 허나 이름만 번지르르하지 외문 장로 녹봉은 못 드립니다. 가세가 그리 크지 않아 금선급 외문 장로를 감당할 여력이 안 돼서 말입니다.”

열화선존이 농담조로 말했다.

“마음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화엽종 외문 장로라는 직함을 받았으니 해야 할 일은 해야겠지요. 앞으로 3백 년에 한 번씩 진선급 단약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물론 재료는 종문에서 부담을 해주셔야겠지만요.”

“려 수사, 우리가 이곳으로 온 이유가 무엇인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영패를 드린 것은 수사와 거래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러니 종문을 위해 그런 일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3백 년에 한 번 연단하는 것은 제게 큰일이 아닙니다. 저도 고마운 마음은 어떻게든 표해야지요. 장로 영패를 구해오시느라 애를 쓰셨을 게 아닙니까?”

오랜만에 정색하고 거절하는 열화선존을 보고 한립이 고개를 저었다.

열화선존이 아무 대가 없이 주는 선물이라고 했다지만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어야 좋은 관계가 유지되는 법이었다.

게다가 3백 년에 한 번씩 대량의 진선급 단약이 보급되면 단시간 내로는 별 차이가 없어도 세월이 쌓일수록 다른 종문과 차이가 벌어질 것이다.

열화선존은 다 귀찮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종문의 대업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흑산행궁에 인맥이 있어 그리 고생하지는 않았습니다.”

외문제자는 절차가 덜 복잡한 편이었으나 그래도 장로급을 새로 등록하는 일이니 강도 높은 조사가 있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자꾸 그렇게 서먹하게 구시면 영패를 도로 가져가겠습니다.”

“하하,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만 영패를 받아 넣어야겠군요.”

담소를 나누던 열화선존이 떠나고 한립은 영패를 만지작거리다 동부로 들어갔다.

* * *

두 달 후, 취곤성.

복잡한 골목을 따라 빼곡하게 상점들이 들어서 있고 사람들과 영수들이 끄는 마차가 지나다녀서 아주 왁자지껄했다.

하늘 위로는 거대한 성단의 선박이 일정 궤도를 따라 지나다니면서 물자를 싣고 성안의 항구를 오갔다.

내성과 외성 사이의 산만한 높이의 성벽에는 여러 수사들이 순찰을 돌고 동서남북 네 방향의 성문은 진선 수사들이 지켰다.

내성 북문 앞에는 그냥 지나가는 이들을 제외하고 백여 명이 길게 늘어서서 신분을 확인받고 차례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 줄 중간에 푸른 장포를 입은 한립이 서서 성문을 훑고 있었다.

성벽과 입구에 주술문자를 새겨 만든 진법이 한 사람씩 통과할 때마다 푸른빛을 발했다.

푸른빛을 발하는 것은 진입하는 이가 진선 초기 이상의 수행을 지녔다는 뜻이었고 조사를 마친 이들은 신분이 확인되었기에 순조롭게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다른 수사들을 따라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는데 누군가 줄도 서지 않고 성문을 지키는 수사들도 무사한 채 성문으로 다가갔다.

웅웅!

다른 이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성문의 진법이 현란한 금색으로 반짝였다.

“태을옥선…….”

흑산선역 북부 제1의 성인 취곤성이라 진선 수사들이 허다하지만 태을경 수사를 볼 기회는 많지 않았다.

다들 어떻게든 상대의 용모라도 확인해 두려고 쳐다봤지만 이미 성안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웅웅!

소동이 가라앉고 한립 차례가 되자 진법이 새하얗게 빛났다.

“금선 수사…….”

성문을 지키던 중년 수사가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한립은 옅은 미소를 띠고 화엽종 장로 영패를 꺼내 주었고, 그의 영패는 작은 돌탑 위에 올려져 소형 진법으로 따로 진위를 확인받았다.

“확인되었습니다. 선배님,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중년 수사에게 영패를 돌려받은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내성으로 들어선 순간 주변이 확 밝아지듯 영기가 짙어졌다. 바닥과 건물들에 흐릿하게 새겨진 주술문자들이 서로 연결되어 이런 효과를 내고 있었다.

“씀씀이도 크구나. 내성 전체를 선가 종문처럼 영기가 왕성하게 만들어 놓다니……. 한운산 수사들이 어떻게든 기회가 생기면 취곤성 내성에서 지내려 하는 이유가 있었어.”

한립은 감탄하며 넓은 길을 따라 걸어갔다.

북적거리는 외성과 달리 내성은 조용한 편이었고 대부분이 상점만을 바삐 오갔다.

한립도 길에서 시간을 축내지 않고 규모가 큰 편인 3층 누각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상점 장궤가 미안하다는 얼굴로 그를 배웅했다.

그는 현지정석 같은 재료를 보유하고 있을 만한 상점은 취곤성 내에서도 세 곳밖에 되지 않았고, 그들이 지니고 있어도 함부로 팔지 않을 거라는 말을 해주었다.

예상했던 바라 크게 낙담하지 않은 한립은 내성을 돌아보기로 했다.

반나절 동안 한립은 연달아 수십 개의 상점을 돌았으나 소득이 없었다.

해가 지고 하늘이 어두워질 무렵 열화선존이 언급했던 옥곤루에 이른 한립은 붉은 담에 녹색 기와를 얹은 팔각 탑과 마주했다.

처마에 방울을 매단 양식이 속세의 느낌이 나기도 했다.

굳게 닫힌 탑 남쪽 대문은 흑산선궁의 표식이 적힌 부적으로 봉해져 있었다.

수소문해본 결과 옥곤루는 전문적으로 경매가 이뤄지는 장소로 3천 년에 한 번 성의 건축을 축하하는 경전이 열릴 때만 개방되었다.

다음번 경전까지는 아직도 2, 3백 년은 남아 있었다.

한립은 바로 취곤성의 선가 객잔을 찾아 임시 동부를 빌리고 낮에는 재료를 찾아다니고 저녁에는 돌아와 수련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 * *

5, 6년이 금방 지나갔다.

현지정석은 구하지 못했으나 취곤성 내성의 상황은 어느 정도 파악이 되었다.

선인과 상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는 곳답게 각종 재료 거래도 활발하고 괴뢰법보와 같은 것도 북한선역과는 비교할 수 없게 많았다.

무상맹 내의 거래와 달리 체계적으로 매매가 이루어지고 규모도 커서 쓸모없는 선기와 재료 등을 팔고 숙살단을 제련하는데 필요한 보조재료들도 구했다.

주재료인 현지정석이 얼마나 비쌀지 몰랐기에 두 번 정도 제련이 가능한 보조재료만을 구하고 선원석을 아껴두었다.

명한선부에서 상당한 재물을 얻었다고 해도 만황구역에서 수백 년을 보내고 따로 금동과 흰둥이에게도 여비로 주어서 남은 선원석은 50만 개가 전부였다.

‘별수 없군…….’

그는 성내의 웬만한 점포는 샅샅이 뒤져봐도 현지정석의 소식도 들을 수 없자 더는 수련을 미루지 않고 야학곡으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오고 반년이 되지 않아 경양상인에게서 골짜기 안의 망파정(忘派亭)에서 모이자는 연락이 왔다.

빚어둔 자미낭(紫媚娘)이라는 술이 잘 익어 마실 때가 되었다고 했다.

한립은 원래는 거절하고 가지 않으려 했는데 상대가 3번이나 초대하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동부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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