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7화. 신비의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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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이 수결을 바꾸자 세 개의 금빛이 교차하면서 소용돌이쳤다.
세 개의 시간법칙의 힘이 그 안에서 섞이는 듯했으나 분명히 하나로 녹아들지는 않고 있었다.
힘을 더 불어넣어 보던 한립은 시간법칙들이 융합되지는 않고 터져나갈 것 같은 흉흉한 기세를 뿜자 법결을 멈추었다.
사나워지던 법칙 파동도 안정을 되찾았다.
‘무엇인가를 잘못하고 있는 걸까?’
금색 소용돌이를 묵묵히 바라보던 한립은 눈을 번득이고 팔을 들어 올렸다.
쉬쉬쉭…….
푸른 깃발 천여 개가 밀실 곳곳에 박혀 주술문자들이 가득한 단단한 푸른 보호막을 이루었다.
동시에 그의 몸에는 거대한 암녹색 거북 갑옷이 떠올라 보호했다. 현무혈맥을 이용한 방어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여러 개의 방어용 선기가 다양한 색깔의 보호막을 만들어 그를 둘러쌌다.
그는 준비를 마치고 다시 수결을 맺어 소용돌이를 가리켰다. 세 개의 기운을 억지로 합치려 들자 파동이 격렬해지고 바깥에서 터져나가려는 힘이 강해졌다.
한립은 이번에는 멈추지 않고 오히려 법결을 대량으로 던져 넣었다.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빛이 무수히 많은 주술문자를 품고 꿈틀댔고, 무시무시한 기운이 소용돌이 속에서 터져 나와 언제라도 폭발을 일으킬 듯했다.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수결을 바꾸었다.
쿠릉!
소용돌이가 크게 흔들리며 절반으로 줄어들어 화약통 같은 금색 문자들이 터져 나오기 직전이었다.
이때 변화가 생겼다!
충돌하던 세 개의 법칙의 힘이 굴복해 부드럽게 녹아들고 있었다.
주술문자들이 안쪽으로 무너져 내려 수정빛을 반짝이는 고리를 이루고 바깥의 소용돌이를 빨아들였다.
밀실의 금빛이 사라지고 작은 금색 고리만이 남아 조용히 떠 있었다.
이럴 줄은 몰랐던 한립이 눈을 크게 뜨고 고리를 올려다보았다.
금색 고리는 아직 안정되지 않았는지 미세한 균열이 보였고 언제든 흩어질 것 같았다. 게다가 웅장한 시간법칙 파동이 고리에서 흘러나와 밀실 안의 푸른 보호막을 조금씩 녹이고 있었다.
다른 금제들도 이렇게 강력한 시간법칙은 막아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한립은 표정을 굳혔다. 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다른 이들이 알면 낭패였다.
막 시간법칙을 억누르려 할 때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났다. 그의 품속에서 장천병이 날아올라 입구를 고리 쪽으로 기울인 것이다.
쉭!
강력한 흡입력이 녹색 태양처럼 빛나는 병에서 흘러나와 금색 고리를 집어삼켰다.
금색 고리가 사라져 시간법칙이 완전히 사라진 순간 밀실을 보호하던 푸른 보호막이 챙강! 깨져나갔다.
크기가 커진 장천병은 녹색 주술문자들을 자욱하게 날려 구름처럼 품고 눈에 보이는 강렬한 법칙 파동을 내뿜었다.
한립이 놀라고 있는데, 진언보륜 중앙에서 금색 눈이 번쩍 뜨이고 수정실 한 줄기가 병 속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쿠쿠쿵!
허공이 갈라지면서 공간균열에서 수정벽이 응결해 어떤 풍경들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것을 기대했던 한립은 또다시 시공간 초월이 시작되는 것 같아 약간 실망했다.
바로 그때 장천병에 콩알 크기의 검은 눈알이 나타나 그를 응시했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 몽롱한 목소리가 울렸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안색이 급변한 한립이 무엇인가를 하기도 전에 수정벽에 거대한 소용돌이가 생겼다.
콰릉!
막대한 흡입력이 소용돌이 속에서 빠져나와 그를 감싸 이전의 시공간 초월 때 보다 더 방대한 힘이 느껴졌다.
극통을 느낀 한립은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하고 의식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머리가 멍한 상태로 정신을 차린 그는 주변을 둘러보고 탄성을 내뱉었다.
회색 공간의 아래에는 암홍색 황원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고 사람은커녕 풀 한 포기 없었다.
모래와 돌만 가득한 황원 상공에 은색 보광을 내뿜는 강이 가로지르면서 콸콸 흘러갔다.
거대한 강을 이룬 것은 물이 아니라 물방울 같은 빛알갱이였고 그것들이 흐르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이번 시공간 초월은 이전과 다른 것 같은데?’
시공간 초월 전 보았던 장천병의 눈과 어렴풋이 들려온 목소리가 기억에 남았다. 그 눈은 장천병의 병령(甁靈)이었고 목소리도 그것이 낸 게 분명했다.
고개를 숙인 그는 자신이 누군가의 몸에 깃든 게 아니라 혼백의 형태로 허공에 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게…….”
자신이 세 개의 시간법칙의 힘을 융합해 만든 금색 고리가 아무래도 장천병에 영향을 미친 듯했다.
거대한 강은 하늘의 끝에서 끝을 잇고 있었는데, 그 안을 흐르는 빛의 물방울은 맷돌만 한 것도 있고 쌀알처럼 작은 것도 있었다.
커다란 물방울 속에는 어떤 그림자 같은 것이 지나쳤는데 빠르게 흘러가 잘 보이지 않았다.
한립은 한참 후에야 조심스럽게 강에 다가가 보았다.
어느 물방울에 노란 사막 풍경이 떠올라 점점 또렷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그의 움직임이 물방울을 자극했는지 돌연 강렬한 빛과 흡입력이 날아들었다.
쉭!
한립의 혼백은 힘없이 물방울에 잡아 먹혔고 다시 정신을 잃고는 한참 후에야 의식을 되찾았다.
“……실력이 대단합니다. 우리 오성사자(五星使者)가 협공하다 셋이 죽었어요.”
숨을 헐떡거리는 목소리가 한립의 의식에 울려 퍼졌다.
“연신술이 5성 최고봉에 이른 자니 만만하게 볼 수 없습니다. 공을 세울 욕심에 잘 알아보지도 않고 덤벼든 고 수사, 임 수사 등이 현명하지 못했던 게지요. 그들이 한 멍청한 짓 때문에 우리가 봉변을 당할 뻔했습니다.”
또 다른 날카로운 목소리가 냉소하며 말했다.
“그들이 죽어 우리 쪽 타격이 큰데 대인께서 그 죄를 우리에게 묻지는 않으시겠지요?”
처음 들려왔던 목소리가 걱정스레 물었다.
“안 그러실 겁니다. 감찰 선사들이 위험한 임무를 하다 죽어 나가는 게 드문 일도 아니고요. 저 육인갑의 머리만 갖고 돌아가면 대인께서 큰 상을 내리실 겁니다.”
그들의 대화를 들은 한립은 깜짝 놀라 의식 파동을 감추고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제 그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어느 시체에 깃들어 있었다.
검은 장포를 입은 산발을 한 중년인은 뺨이 움푹 들어가 이리와 같은 흉악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누워있는 노란 사막에는 구멍이 잔뜩 뚫려 있었고 연기와 용암이 흘러나와 대격전이 펼쳐졌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사내 두 명이 근처에 서 있었는데 천정 표식이 있는 금색 갑옷을 입고 있었다.
키가 큰 노인은 서늘한 인상에 코가 높았고, 작고 뚱뚱한 청년은 동글동글한 얼굴에 머리카락이 없는 대머리였다.
창백한 얼굴의 두 사람 중 얼굴이 둥그런 대머리 청년은 입가에 피가 흐르고 갑옷도 고철이 되어 있었다.
그들이 말한 대로 멀지 않은 곳에 똑같은 금색 갑옷을 입은 시체 세 구가 흩어져 있는 게 보였다. 노인과 청년은 공수구 이상의 강자로 각각 태을 중기, 태을 후기 수사였다.
그들이 나눈 대화로 보아 천정의 감찰 선사인 그들이 시체에 또 다른 혼백이 있다는 것을 알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장천병으로 시공간을 초월한 상태에서 살해를 당하면 어떻게 될지 아직 몰랐으나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립의 혼백이 흑포 사내의 의식세계 속으로 숨어들자 갑자기 뜨거운 기운이 흘러나와 융합되었다.
정순하고 방대한 의식의 힘은 한립의 혼백을 충만하게 만들어 주었고 조각조각 난 흑포 사내의 생전 기억이 빠르게 전해졌다.
여러 번의 시공간 초월로 익숙해진 한립은 기억이 주입되는 동안 내용을 확인했다.
기억의 파편들은 한립의 혼백이 흡수했으나 의식의 힘은 너무 방대해서 절반도 융합되지 못하고 주변에 하얀 구름처럼 퍼져 괴이한 궤적을 그리면서 움직였다.
흑포 사내는 연신술 5성을 익혀 그보다 훨씬 방대한 의식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수백 년을 수련해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해 고전한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런 세부적인 기억에 연연할 때가 아니었다.
쉭!
번쩍 눈을 뜬 한립은 손을 들어 칠흑 같은 비검을 분출했다.
번득 허공에 녹아든 검은 태산처럼 변해 키 큰 노인과 얼굴이 둥그런 대머리 청년에게 떨어졌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그들이 검은 사내의 움직임을 모를 리 없었다.
“아직 살아 있다고? 말도 안 돼!”
키 큰 노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한립 쪽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손바닥에서 남색 파문이 흘러나와 거대한 교룡 허상을 이루고 태산 검을 향해 날아갔다.
남색 교룡에게 감긴 검은 태산 검은 허공에 멈춰 표면에 얼음이 맺혔다. 겁먹은 기색이 스친 얼굴이 둥그런 대머리 청년도 크게 기합을 넣으면서 한팔을 펼쳤다.
맑은 진동 소리와 함께 적황색 보검 두 자루가 화염에 휩싸여 날아갔다. 보검들은 교룡이 막고 있는 태산 검을 빙 돌아 한립만을 노렸다.
한립이 손바닥으로 땅바닥을 내려치고 종이처럼 괴이하게 몸을 틀어 두 검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가라!”
그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외치는 소리에 키 큰 노인은 갑자기 들이닥친 수정 사슬 몇 개에 머리를 내주고 눈을 부릅떠야 했다.
다음 순간 눈이 풀린 노인은 멍한 표정으로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한립이 기습을 가하자 태을경 수사도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하지 못하고 의식수롱에 당한 것이다.
“고 사형!”
얼굴이 둥그런 대머리 청년이 그걸 보고 대경실색해 달아나려 했다.
냉소를 흘린 한립은 번개처럼 그를 향해 달려들어 미간에서 수정빛을 반짝였다.
청년은 한립의 둔광이 다가오자 붉은 빛줄기로 변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쳤다.
한 쌍의 보검 선기도 챙기지 않고 달아난 것이다.
한립은 멀리 까지 그를 쫓지 않고 지면으로 내려와 창백한 얼굴로 숨을 헐떡거렸다.
시체에 남은 선령력이 얼마 되지 않아 청년이 담이 약한 것을 보고 겁을 주어 쫓아낸 것이었다.
선원석을 꺼내 선령력을 회복하면서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선령력을 이용해 키 큰 노인의 머리로 검은빛을 날렸다.
퍽!
노인의 머리가 깨지고 머리 잃은 시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여기까지 간신히 해낸 한립도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래도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선원석을 쥐고 선령력을 흡수하니 그제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노란 사막은 이전에 빛의 물방울 속에서 보았던 풍경과 비슷했다.
그의 머리 위에는 720개의 시간도문이 꺼져가는 노란 고리가 떠 있었다. 한립은 눈을 감고 방대한 의식을 운용해 연실술 5성의 감각을 익히면서 기억을 뒤졌다.
육인갑이라 불린 흑포 사내는 윤회전의 윤회자였다.
그와 달리 정식 윤회자인 그는 윤회전에서 대량의 지원을 받았지만 그만큼 제약도 있어 일정 기간마다 한 번씩 윤회전에서 할당되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육인갑은 이곳 선계의 동남쪽에 있는 개원선역(開元仙域)에 임무를 수행하러 왔다가 천정의 감찰 선사 다섯의 매복에 당해 목숨을 잃었다.
한참 후 한립은 인상을 찡그렸다.
윤회전에 대해 알고 싶었는데 관련 정보가 너무 적었다.
윤회자가 된지 2백만 년이 넘었으나 수련 광이라 임무를 수행할 때 외에는 동굴에만 들어앉아 있었고, 윤회전 고위급 인사와 접촉하는 일도 없이 임무를 배정해 주는 윤회사(輪回使)나 이따금 만날 뿐이었다.
한립은 고개를 저으며 시간도문이 4분의 1까지 꺼진 금색 고리 허상을 흘끗 보았다.
그는 몸을 일으켜 키 큰 노인의 시체에서 저물법기를 찾아냈다. 다른 세 구의 시체의 저물법기도 마찬가지였다.
편하게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육인갑의 저물 반지까지 빼서 다섯 개의 저물법기를 나란히 놓고 하나씩 확인했다.
태을경 수사 다섯의 저물법기에 든 물건들은 무척 풍성했다.
대량의 선원석은 말할 것도 없고 품질이 극히 높은 선기들, 진귀한 재료와 단약들이 끝도 없이 나왔다.
한립은 욕심이 생겼지만 갖고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다른 물건들을 찾아보았다.
잠시 후 그가 따로 분류한 물건 더미에는 경전과 옥간들 그리고 구멍이 뚫린 금색 원반과 영패, 하얀 나침반이 있었다.
한립은 원반과 나침반을 살피다 옆에 두고 영패를 들어 올렸다.
공수구의 저물법기에서 보았던 금색 원반은 감찰선사들 끼리 연락을 주고받는 물건이었고, 하얀 나침반은 연신술의 기운을 감지하는 용도의 법기였다.
금색 영패는 신분을 증명하는 데 쓰이는지 키 큰 노인을 포함한 천정 인물들은 모두 하나씩 지니고 있었다.
영패의 가장자리에는 구불구불 날아다니는 용 문양이, 양면에는 각각 옥(獄)이라는 글자와 번호가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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