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796화 (1,553/2,000)

1796화. 칩거

*

다들 경양 상인이 속 쓰려 하는 표정을 보고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술은 그래도 맛이나 있지. 단약 그 맛도 없는 것을…….”

경양 상인이 귀한 술이 아까운지 궁시렁대자 한립이 빙긋 웃더니 손을 펼쳐 네 사람에게 손바닥 크기의 백옥 자기병을 던져 주었다.

“이건…….”

열화 상인이 내용물을 확인하고 의아해했다.

“오석단입니다. 한 분당 하나씩이고 더는 없습니다.”

“려 수사…….”

한립의 말에 경양상인은 할 말을 잃었다.

“하아, 다들 너무 놀라지 마세요. 부탁이 있어서 단약을 선물한 것이니까요.”

한립이 한숨을 쉬자 다들 단약을 넣지 않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다들 제 몸의 흉살기가 너무 짙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천인오쇠의 겁 중 살쇠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의 설명에 다들 놀라면서도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흉살기가 너무 짙어서 의문을 가지던 차에 납득할 만한 설명을 들어서였다.

“흉살기의 발작을 잠시 막아줄 단약의 약방을 구했는데 그 재료인 현지정석(玄芷晶石)을 구하지 못해 막막해하는 중입니다. 다들 그것을 찾는 것을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그가 말한 약방은 무상맹을 통해 구한 숙살단(肅煞丹) 제련법이었다.

그게 있으면 잠시 흉살기 발작을 억누르고 흉살기를 제거해 주어 살쇠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단약을 제련하는데 두 가지 주재료가 꼭 필요했는데 그중 하나는 그가 흉살기 심연에서 찾은 열댓 뿌리의 영초였다.

역시 무상맹을 통해 영초가 고락초(苦珞草)라는 이름을 지녔고 흉살기가 농염한 지역에서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이 지나야 자라나는 영물이라 가격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또 다른 주재료는 말했다시피 현지정석이었다.

“혹시……. 전설 속의 화심석(花心石)을 이르는 것이 맞습니까?”

경양 상인 등 세 사람이 처음 들어본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 열화선존이 침음하다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런 재료는 인연이 닿아야 볼 수 있지요. 그저 수백 년 전에 취곤성(聚琨城)에 나온 적이 있다고 합니다.”

열화선존은 고개를 저었다.

“현지정석이 그리 귀한 물건입니까?”

경양상인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일종의 극품영석인데 여러 태을급 단약을 만드는 주재료로 쓰입니다. 풀로 자라나 수만 년에 한 번 맺는 꽃봉오리가 필 때 꽃술에서 자라나는 작은 결정이라 구하기 매우 어렵지요.”

열화선존이 설명을 해주었다.

“거기다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꽃이 시들지 않아야 결정이 성장합니다. 아주 미세한 간섭에도 결정이 떨어지고 꽃은 시들며 뿌리까지 망치지요. 대부분 이런 풀이 자라는 곳은 엄청난 위험지대이고 시장에 잘 나오지 않아 가격이 무척 높습니다.”

한립이 덧붙였다.

“쯧쯧, 그렇게 귀해서야 어찌 구할지……. 려 수사께서 괜히 오석단만 날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경양상인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려 수사 안심하고 계시지요. 제게 그런 영초에 대해 알만한 몇몇 친우들이 있으니 그들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단여재가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이 일은 저는 도움이 안 될 것 같고, 열화 노귀가 자유롭게 취곤성에 드나들 수 있으니 대신 소식을 알아봐 줄 겁니다. 옥곤로에 또다시 귀한 보물이 나타났을지 모르니까요.”

경양상인이 손을 비비면서 열화선존을 쳐다보았다.

“려 수사, 바둑이 끝나는 대로 다녀올 테니 걱정하지 말고 계세요.”

열화선존이 이 말을 하자마자 바둑판 위에 하얀 돌 두 개가 떨어졌다.

“제가 졌습니다.”

단여재가 대국을 포기한 것이다.

“이런……. 하아, 알겠습니다. 바로 취곤성에 한 번 다녀오지요.”

할 말을 잃고 쳐다보던 열화선존이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남쪽으로 몸을 날렸다.

부운산맥 남쪽 수만 리 밖에 흑산선역 북부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번화한 성인 취곤성이 있었다.

북한선역의 대부분 성에 범인들이 어울려 사는 것과 달리 취곤성 안에는 수백 개의 선가 세력이 있어 거의 수사들만 거주했다.

이 때문인지 선궁의 취곤성에 대한 관리도 엄격해서 내성과 외성으로 분리를 해서 외성은 수사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하지만, 내성 출입에는 조건이 있었다.

진선에 이르지 못하거나 흑산선역 본토 종문에 등록되지 않은 수사들은 내성 출입이 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산수들은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었다.

오직 태을옥선의 경지에 올라야 그런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내성 출입을 할 수 있었다.

듣기로 취곤성 내성에는 천정의 감찰사가 상주하는데 수행이 대단하다고 했다.

처음 흑산선역에 도착한 한립은 야학곡에 자리를 잡기 전에 바로 취곤성을 향했는데 성안의 어느 광장에 주선방(誅仙榜) 편액이 걸린 장소가 있었다.

거의 천장에 달하는 편액에는 인족, 요족 그리고 이종족들을 포함한 각종 신영들이 그려져 있고 그들의 죄목이나 현상금이 표시되어 있었다.

쭉 내용을 훑던 한립은 백리염, 호언도인 그리고 교삼과 같은 익숙한 인물들도 찾을 수 있었는데 교삼의 이름은 백리염 위에 있었으며 감구진이란 이름으로 붉은 가면을 쓴 얼굴 그대로 그려져 있었다.

그는 명단 끝에서 또 익숙한 모습을 찾았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다.

푸른 장포를 입고 검을 들어 찌르고 있는 모습은 그의 원래 모습과는 좀 차이가 있었지만 아주 생생했다.

‘려비우, 금술을 수련하고 천정의 선관을 해치다. 생사에 상관없이 선원석 5천 개.’

그걸 본 한립은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수배 중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현상금은 5천 개밖에 되지 않는데 교삼은 놀랍게도 십만 개라는 것에 기분이 상했기 때문이다.

도우야 그렇다 치고 태을급 공수구를 죽였는데도 현상금이 이렇게 적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립을 얼른 고개를 들어 감구진의 죄목을 읽어보았다. 금술 수련, 선관 모해, 회선과의 작당 등 확실히 죄목이 아주 풍성했다.

생각해 보니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선궁은 공수구의 사망 원인을 감구진과 묵우라 여기고 있는 듯했다.

그 후 한립은 취곤성에서 흉살기를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하자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된 단여재의 추천으로 야학곡에 동부를 만들게 되었다.

열화선존이 급히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남은 이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어렸다.

“단 수사, 단시일 내로 찾을 수 없는 물건인데 왜 그러셨습니까. 괜히 열화 수사의 흥만 깨게 되었습니다.”

한립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바둑대국이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핵심인데 이미 마음이 흐트러졌으니 더 두어봐야 무의미하지요. 게다가 형세를 기억해 두었으니 나중에 복기해서 다시 두면 그만입니다.”

단여재는 대수롭지 않게 손을 저어 바둑돌과 바둑판을 거두었다.

“흐흐, 려 수사? 지난번에 화연주를 몇 동이 빚는다지 않으셨습니까?”

이때 경양상인이 다가서며 웃음을 흘렸다.

“맛은 수사의 녹배주보다 못해도 빚기는 어렵지 않아 완성했습니다.”

말귀를 알아들은 한립이 하하 웃음 지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녹배주는 빚기가 너무 어렵고 제대로 익으려면 몇천 년은 더 숙성해야 할 듯합니다. 지금 꺼내 마시기에는 너무 안타까워서요.”

“경양 수사께서 그리 속이 좁은 분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한립은 손을 저어 황토색 술동이 하나를 경양상인 앞에 불러냈다. 그러자 경양상인은 곧장 얼굴이 환해져서는 술동이를 끌어 앉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캬, 향기 좋습니다! 그런데 몇 백 년은 묵혀 둔 술 같습니다? 최근에 담은 것 같지가 않게 향이 깊어요.”

“벗을 대접하는데 가장 좋은 것을 내놔야지요. 다들 목이나 축이시지요.”

단여재와 우자기는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으나 한립이 이렇게 말하자 함께 잔을 들고 즐겁게 화연주를 맛보았다.

해가 질 무렵 한립은 동부로 돌아왔다.

다른 이들의 동부와 멀찍이 떨어져 있는 그곳은 석문이 굳게 닫혀 있었고, 푸른 물빛이 반짝거리는 문 양옆에 도병인 금갑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도병은 이전과 달리 머리 하나만큼 키가 자라고 몸에 나선형 무늬가 늘어나 무척 강해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두 눈에 약간의 생기가 돌아 그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기도 했다.

한립은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바로 동부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는 대청을 중간에 두고 여러 밀실이 있는 내부를 훑고는 곧바로 마광과 해 도인이 수련 중인 좌측 밀실 두 곳을 연달아 살폈다.

허원단으로 흉살기를 가렸다지만 회선의 몸을 지닌 마광은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이곳에 온 뒤로 한 번도 동부를 떠나지 않았다.

해 도인은 그냥 흑산선역에 온 뒤 갑자기 폐관을 결정해 바깥으로 나오는 일이 드물었다.

시선을 거둔 한립도 자신의 밀실로 들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금동과 헤어지고 백포 사내가 준 지도 대로 위험한 곳은 다 피해 다녔는데도 만황의 규모와 위험성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가 시간법칙과 태을경에 가까운 실력을 지니고 마광이 짧은 시간이지만 태을경 실력을 내지 못했다면 몇 번이나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태을급 뇌전 짐승에 3년을 쫓기다 마광과 힘을 합쳐 결전을 벌이고 벗어나기도 했고, 화염으로 가득 찬 천연 비경에 갇혀서 10년 동안 정염불새가 화염을 잡아먹게 하고서야 겨우 탈출한 일도 있었다.

물론 그만큼 수확이 풍부하기는 했다.

진귀한 만황의 재료들은 물론이고 오는 길에 만난 이종족 무리에게 적잖은 비술과 특이한 공법을 얻었다.

입구의 도병도 만황의 어느 이종족에게 배운 비결로 새롭게 제련한 것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걱정인 흉살기는 아직도 문제였다.

웅!

금빛이 뭉쳐 광음정병으로 변했다.

옥병은 이전보다 실체화되고 표면에 수백 개의 시간도문이 반짝였다.

진언보륜을 다루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장천병의 시간 알갱이를 이용해 그간 광음정병의 시간도문을 늘려왔다.

한립은 옥병을 옆에 두고 다시 수결을 맺어 금빛을 발산했다. 그의 주술 소리를 타고 금빛이 모래알처럼 뭉쳐져 시간 파동을 내뿜었다.

이런 모래들이 삽시간에 십여 장의 금색 사막을 이루고 밀실을 뒤덮었다.

금색 사막에서 특수한 법칙의 힘이 깜빡거리고 천지원기의 흐름이 빨라졌다.

선규 속의 흉살기 때문에 금선경 최고봉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그는 <수연사시결>과 <환진보전> 수련에만 매달렸다.

시간 법칙에 재능이 뛰어났던 것인지 수연사시결도 6권까지 익혔고 환진보전은 ‘환진사해’라는 모래사막 신통까지 펼칠 정도로 발전했다.

광음정병이 발산하는 빛이 아래의 환진사해와 은은하게 호응했다.

우웅!

한립이 수결을 맺자 등 뒤로 진언보륜이 떠올랐다.

빼곡한 시간도문은 이전보다 더 많아서 이미 720개나 되었고 한계에 이르러 있었다.

고리에서 퍼져나간 금빛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

진언보륜, 광음정병, 환진사해에서 뿜어져 나온 세 가지 금빛이 서로를 비추고 상호 공명을 했다.

허공이 웅웅 울리는 소리가 불경처럼 맑게 들렸다.

수연사시결과 환진보전을 얻고 진언보륜경과 연관이 있을 거래 생각했는데 역시 같은 구결에서 갈라진 것처럼 연계가 되었다.

그는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는 데만 집중했다.

세 가지 시간법칙을 융합하려 시도는 해보았는데,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서로 배척해서 여러 번 실패했다.

3대 지존법칙 중 하나인 시간 법칙은 진선계의 가장 핵심을 이루는 천지법칙이라 할 수 있었다.

시간은 한 사람의 생로병사를 주관했고, 크게 보아 진선계 전체를 앞으로 밀어 보내는 힘이었다.

어느 미지의 손이 규칙에 따라 시간의 바퀴를 굴려 그 안의 모든 사람이 영원히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지존법칙이라는 이름답게 다른 절대다수의 법칙보다 시간법칙은 우위에 있었다.

예를 들어 물이나 불의 법칙은 시간법칙의 영향을 받으면 위력도 상당히 줄어들었다.

결론적으로 시간법칙의 현묘함은 거의 모든 것을 망라했고, 결코 진언화륜경이라는 한 공법으로 다 익힐 수는 없었다.

대도귀일(大道歸一), 대도는 하나로 통한다는 말이 있었기에 한립은 세 가지 공법을 융합하는 일이 잘되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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