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795화 (1,552/2,000)

1795화. 대국

*

“누님! 같이 갑시다.”

곁에 있던 비휴가 돌연 금동 옆으로 날아갔다.

“흰둥이 네가?”

금동이 놀라 백옥 비휴를 바라보았다.

“저를 아우 삼아 주신다면서요. 벌써 후회하시는 겁니까?”

비휴는 머리를 금동에게 비비면서 농담조로 물었다.

“흰둥이가 함께 가는 것도 좋겠지. 위험한 서금선을 만나게 되면 잠시 뱃속에 숨어 있을 수 있을 것 아니냐.”

“……좋아, 데려가 주지. 하지만 얼른 수행을 높이지 않고 걸리적거리면 버리고 갈 거야.”

금동은 잠시 고민하다 흰둥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비휴는 좋아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서금선에 대한 소식을 어느 경전에서 읽은 일이 있다. 금원선역(金源仙域)에 한 마리가 나타났다는데 실력은 모르겠구나. 아주 오래전 일이니 아직 존재할지는 모르겠다만, 아무 실마리가 없다면 그곳부터 가보거라.”

“금원선역……. 알겠어요. 고마워요, 아저씨. 몸조심하세요!”

금동은 그를 지긋이 바라보다 비휴를 데리고 빛줄기로 변해 사라졌다. 한립은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우리도 갑시다.”

한참을 서 있던 그는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갔고, 녹색 비차는 먼 곳을 향해 날아갔다.

얼마 뒤, 공간 파동이 일고 멀지 않은 곳에 금동과 비휴가 나타났다.

“아저씨를 따라다니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에요. 내가 앞으로 맞서야 할 존재가 상상을 초월할 뿐……. 이번에는 위기를 간신히 넘겼지만 다시는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금동은 녹색 그림자를 남기고 멀어지는 비차를 보며 중얼거렸다.

“누님, 왜 사서 고생하려고 그래요? 제가 주인님을 오래 따라다니지는 않았어도, 만황진령의 직감으로 말하는데 복을 타고나신 분이 확실하다니까요. 누님의 짐 정도는 거뜬하게 지고 갈 분인데…….”

“그래서 네 말은 내가 짐이라 이 말이야?”

비휴가 꿍얼꿍얼하는 소리를 듣고 금동의 눈길이 사나워졌다.

“아니, 아니 그 말이 아니라요……. 누님이 능력도 뛰어나고 수행도 높아서 혼자 어려움을 헤쳐 나가려는 것은 좋은데, 굳이 안 그래도 된다는 거죠.”

“아직 기억의 일부 밖에는 되찾지 못했지만 내가 그저 영충은 아니란 생각이 들어. 흰둥이 네가 나를 누님으로 부르며 따르는데 너를 홀대할 마음은 없다. 원래 내 것이었던 것들을 되찾는 걸 도와주면 네가 무엇을 먹고 싶든 내가 책임지마.”

“그런 걱정은 마세요! 앞으로 최선을 다해 누님을 도우면서 누님이 무엇을 주시든 불평불만 없이 받아먹을 테니까요!”

“짜식, 마광 그 아부쟁이랑 오래 지내더니 말솜씨가 늘었구나? 가자, 지도를 확인하니 금원선역까지 갈 길이 멀다.”

금동은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먼저 몸을 날렸다.

“같이 가야죠, 누님! 마광 그 녀석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흰둥이가 열심히 네 발로 달려 그 뒤를 쫓았다.

* * *

흑산선역 북부.

야생 대나무들이 온 산을 뒤덮은 깊은 산골짜기에 계곡물이 졸졸 흐르고 맑은 새소리가 울려 퍼졌다.

숲속 깊은 곳에는 간혹 등 양쪽에 매화 무늬가 있는 새하얀 사슴들이 배회했다. 그리고 가파른 골짜기 사이의 꽤 깊어 보이는 계곡물은 굽이굽이 흘러 짙푸른 호수로 흘러 들어갔다.

호수 왼쪽에 돌로 만든 공간에 푸른 의복을 입은 중년인이 보라색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었다.

딩! 디딩…….

단정한 외모의 준수한 사내는 검은 머리카락을 등 뒤로 늘어트리고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했다.

그와 약간 떨어진 곳에 흑발 노인과 백발노인이 마주 앉아 네모난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차례로 바둑돌을 놓고 있었다.

흑발 노인은 의복에 주름 하나 없이 정갈하고 머리카락도 깔끔하게 올려 묶어 예리한 분위기가 풍겼지만, 그와 마주 앉은 백발노인은 반대로 후줄근해 보였다.

백발노인은 불꽃무늬가 수놓아진 담청색 장포를 걸치고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산발의 머리를 한 손으로 짚은 모습이 게을러 보였다.

흑발 노인이 과감히 바둑돌을 탁! 내려놓으면 백발노인은 느긋하게 고민을 하다 바둑돌을 내려놓았다.

늘 있는 일인지 흑발 노인은 재촉하지 않고 자신의 차례가 끝나면 눈을 감고 몇 수 앞을 내다보곤 했다.

“열화 노귀, 그렇게 느려 터져서야 답답해서 어디 두겠습니까? 내 수사의 내력을 몰랐으면 늙은 거북이가 만년쯤 수련해서 사람이 된 줄 알았겠어요.”

옆에서 대국을 지켜보던 삼베옷을 입은 갈의(葛衣) 노인이 술잔을 쭉 들이키고 웃으며 타박했다.

“단 수사도 뭐라고 안 하는데 주정뱅이가 어딜 참견하고 그럽니까? 에이, 방해 말고 저쪽으로 가서 마시세요!”

백발노인이 힐끗 그를 보고 화내는 기색 없이 손을 내저었다.

“향양곡(向陽谷) 노관자와의 대국 때도 시간을 얼마나 끌었었습니까? 뭉그적뭉그적 장장 30년동안 상대를 괴롭혔지요? 어떤 실력자라도 지루해서 항복하겠습니다.”

“노관자는 채봉곡(彩鳳谷)에 절색의 진선 여수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자리를 뜬 것이지, 아니었으면 20년은 더 두었을 판이었어요.”

“절색은 개뿔! 내 직접 가봤더니 그게 얼굴인지 궁댕인지 모르겠더구만……. 노관자 같이 안목 없는 인물이면 몰라도 내 눈에는 영 아니었습니다.”

갈의 노인은 눈썹을 휙 끌어올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바둑판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백발노인은 아무래도 밀리고 있는지 더는 갈의 노인을 상대해 주지 않았다.

“꺽! 하여튼 이 사람들이랑은 긴말을 나눌 수가 없어요. 려 수사는 요즘 뭐가 그리 바빠 안 보이는 것인지.”

갈의 노인이 골짜기 입구 쪽을 쳐다보았다.

딩.

그 소리에 악기 소리가 그쳤다.

“최근 오석단(五石丹)을 제련 중이라 들었습니다. 요 며칠 연락을 취해도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아직 출관하지 않은 모양이에요.”

중년인이 고개를 돌려 대답해주었다.

그런데 그 말이 끝나자마자 푸른 장포를 걸친 안색이 창백한 청년이 대나무 숲 깊은 곳에서 걸어 나왔다.

평범한 용모에 키가 큰 청년은 윤회전 가면을 써서 용모를 바꾼 한립이었다.

금동, 흰둥이와 헤어진 지도 2백 년이 지났고, 그가 이곳 부운산맥(浮雲山脈)에서 지낸 지도 거의 2백 년이 다 되어 갔다.

“오, 려 수사 오셨구려! 자자, 같이 술이나 한잔합시다.”

갈의 사내가 반갑게 일어나 그를 불렀다.

대국하던 노인들도 차례로 일어났는데 악기를 연주하던 청이 중년인만 앉은 채 눈인사를 건넸다.

미소를 띤 한립은 허상처럼 변해 바로 그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열화 수사, 경양 수사, 단 수사, 자기 수사……. 그간 연단을 하느라 모두의 초대에 응할 수 없었으니 양해 바랍니다.”

“괜찮습니다. 연단사가 연단을 해야지 우리 같은 늙은이들처럼 맨날 하릴없이 놀 수가 있나요.”

한립의 인사에 열화선존(熱火仙尊)이라 불리는 백발노인이 웃음 지었다.

그는 원래 흑산선역의 중등 가문 태상장로였는데 태생적으로 게을러서 종문의 일은 모두 사제에게 떠맡기고 이곳 부운산맥에 숨어 한가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보기에는 추레해 보여도 수행은 이곳에 모여 있던 네 사람 중 가장 높아 금선 후기에 이르러 있었다.

열화선존과 바둑을 두던 흑발 노인의 이름은 단여재로, 그도 흑산선역 본토 수사였다.

떠돌이 생활을 하던 산수 출신인 그는 치열하게 뺐고 빼앗기며 금선 초기에 이른 탓에 그런 아귀다툼에 질려 이곳에 오게 되었다.

거문고를 타던 중년인 우자기와 갈의 노인인 경양상인은 흑산선역 본토 수사는 아니고 다른 선역에서 와서 결국에 이곳에 정착하게 된 이들이었다.

한 사람은 진선 후기의 수행을 지녔고 다른 한 사람은 금선 후기의 수행을 지녀 수행의 차이가 크게 났지만 네 사람 중에서 가장 친밀한 사이였다.

사실 이곳에 모인 네 사람과 한립 외에 부운산맥의 100개가 넘는 크고 작은 골짜기에는 다른 수도자들도 많았다.

대부분이 산수나 곳곳을 유람하는 떠돌이 출신으로 대도를 이루기가 요원하다는 것을 깨닫고 경치 좋은 곳에서 가야금이나 타고 바둑이나 두며 자유롭게 살기 위해 모인 이들이었다. 그래서 부운산맥은 한가로운 구름이라는 뜻의 한운산(閑雲山)이라 불리기도 했다.

네 사람과 한립은 그들이 기거하는 운록곡이란 골짜기를 이 때문에 야학곡(野鶴谷)이라 불렀다.

한운산과 야학곡이 합쳐지면 한가로운 구름과 노니는 학들이라는 뜻의 한운야학이라는 성어가 완성되었다.

한운산에는 ‘과거는 묻지 말고, 분쟁에는 끼지 말며, 외부의 관여를 받지 않는다’는 이상한 규정이 있었다.

이곳에 거주하는 이들의 정체를 캐지 않고 서로 싸우지 않으며 바깥 세력이 한운산의 질서에 간섭하게 두지 말자는 뜻이었다.

예전에 부운산맥에 머물던 어떤 산수가 정한 규칙이라는데, 처음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다가 그가 규칙을 어기는 이들을 멸살시켜버려서 그 후로는 다들 지키게 되었다고 했다.

천정의 요직을 맡고 있었는지 그 사람이 떠난 후에도 부운산에는 전통처럼 규칙이 전해 내려왔고 이곳을 관리하는 선궁도 눈을 감아 준다고 했다.

“한운산에서는 하릴없이 쉬는 것이 옳은 일 아닙니까? 쉴 틈 없이 연단을 하니 이곳의 분위기를 망치는 것 같아 민망합니다.”

한립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수사가 연단사인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는 겁니다. 당시 수사의 도움으로 금혼단을 얻지 못했으면 금선이 되기도 전에 혼백이 흩어져 사라졌을 목숨이에요.”

단여재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하, 매번 그 일을 언급하십니다. 제게는 큰일도 아니었는 것을요. 저도 수사의 추천으로 야학곡에 동부를 틀고 살게 되었으니 서로 은혜를 주고받은 것 아니겠습니까.”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어찌 그것으로 갚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한립은 상대가 속세의 강호를 살아가는 무인처럼 은원을 중시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 선자께서는 보이지 않으십니다?”

“막무설의 성격을 아시지 않습니까. 청풍절벽에서 참선을 하고 있습니다.”

한립이 주위를 돌아보며 묻자 우자기가 답했다.

“참선은 무슨? 또 멍하니 앉아 있겠지! 한 번 우두커니 앉으면 십 년이고 백 년이고 움직이지를 않으니 괴인이 많다는 한운산에서도 그런 사람은 손에 꼽힐 겁니다.”

경양상인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리 대도를 이룰 희망이 없다고 해도 그리 허송세월 보내서는 안 될 텐데요. 수행에 흥미가 없으면 속세의 정취라도 느끼면서 지내면 재미라도 있을 텐데요.”

우자기도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혼자서 속세의 정취를 즐기기 어려운 모양인데, 자기 수사께서 도와주시지 그럽니까?”

한립은 우자기가 막무설을 흠모하는 것을 알았기에 놀리듯 쳐다보았다. 그 말에 우자기는 웃음을 잃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한숨만 나왔다.

막무설은 금선 초기 수사이고 자신은 진선 후기밖에 되지 않는데 어찌 그녀와 그런 사이가 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그렇지, 오석단을 제련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하나 살 수 있겠습니까?”

이때 경양 상인이 술병을 들고 실실 웃으며 다가와 물었다.

“사다니요. 너무 예의를 차리십니다…….”

한립은 손을 내저었고 그 말에 경양 상인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하지만 한립의 다음 말이 이어지자 그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우리 사이에 그런 걸 사고팔 수 있나요? 그냥 녹배주(綠醅酒)한 동이만 주시고 가져가시면 됩니다.”

녹배주는 경양 상인이 고대 경전에서 제조법을 찾아 빚은 아주 특수한 술로 그 가치는 오석단과 맞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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