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4화. 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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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진법은 농염한 흉살기로 충만해졌다.
그때 마광 주변의 진법 문양들이 빛을 발하고 검은 빛줄기들을 그의 몸에 꽂아 넣었다.
진법에 갇혀 있던 짙은 흉살기는 탈출구를 찾은 것처럼 마광의 몸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마광은 잘게 몸을 떨더니 금세 편해진 얼굴로 눈을 감고 흉살기를 받아들였다.
순식간에 한립 체내의 흉살기 중 3할이 진법을 통해 마광의 몸으로 옮겨갔고, 마광은 짙은 흉살기에 휩싸여 최선을 다해 연화를 시키고 있었다.
표정이 한결 편해진 한립은 다시 주문을 외면서 오른손을 쥐었다.
파앗.
손바닥 위에서 시간도문 여섯 개가 새겨진 금빛 옥병이 신비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이 ‘광음정병’ 안에는 반투명한 금색 액체가 한 방울 들어 있었는데 색깔이 다른 것을 제외하면 장천병의 녹색 액체와 비슷했다.
한립이 그간 살쇠에 대한 대비를 전혀 안 한 것은 아니었다.
만황에서 도망 다니면서도 기회가 될 때마다 광음정병으로 해와 달의 정기를 모아 광음 물방울을 응집했다.
그간의 노력으로 겨우 한 방울이 모인 것이다.
수결을 맺은 손으로 옥병을 가리키자 금빛이 그 안으로 날아들었다. 금색 주술문자와 함께 광음 물방울이 천천히 병 바닥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주변의 주술문자들을 흡수한 물방울은 빙글빙글 돌았고 주변 수천 리 내의 오색빛 알갱이들이 그 안으로 흡수되었다.
한립은 양손으로 수결을 맺은 채 금빛들을 연달아 광음정병 안으로 던져 넣었다.
물방울이 더 강한 빛을 머금으며 서서히 길쭉하게 변해갔다.
3일 뒤, 광음정병 안의 물방울은 사라지고 손가락 크기의 금색 수정실이 떠올랐다.
수정실에서 강렬한 시간법칙의 힘이 느껴졌는데, 한립의 진언보륜의 시간법칙과는 무엇인가 달랐다.
몸 대부분이 검은색으로 물든 한립은 눈동자도 핏빛으로 물들었으나 아직 눈빛만은 맑았다.
돌연 희색을 드러낸 그가 손을 뻗었다.
금색 수정실이 번득 옥병 안에서 튀어나와 그의 가슴 속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쿠쿵.
한립이 금빛을 만발하며 빛의 고리들을 주변으로 발산했다.
금빛이 품은 시간법칙의 힘 때문에 허공이 흐릿하게 변하고 한립의 신영도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검은 진법도 갑자기 발동을 멈춰서 마광이 눈을 뜨고 일어나 금빛으로 둘러싸인 한립을 쳐다보았다.
지금 그는 이전보다 기운이 훨씬 강해져 있었다. 금빛은 장장 일각이 지나서야 희박해지며 사라졌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한립은 검은 반점이 씻은 듯 사라지고 눈동자 색도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흉살기가 온몸을 침식해 붕괴하려고 했던 것이 마치 꿈만 같았다.
“축하드립니다.”
“임기응변이었는데 성공했습니다. 마광 수사께서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한립은 마광을 향해 미소를 보였다.
“별일도 아닌 것을요. 수고하셨습니다.”
마광이 고개를 저었다.
한립은 몸 상태를 확인하고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금색 수정실은 광음정병으로 응결한 광음의 실이었고 천인오쇠를 늦추는 효과가 있었다.
그 말은 살쇠를 무사히 넘긴 게 아니라 그저 늦춘 것뿐이라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광음의 실을 이용해 살쇠를 얼마나 늦출 수 있을지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저 직감적으로 몇백 년 정도는 별 탈이 없을 것이라 느껴졌다.
한립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소매를 저어 동굴 안의 깃발과 금제용 법기들을 회수하고 푸른 빛으로 변해 해 도인과 비휴 등이 기다리는 산골짜기로 돌아왔다.
마광은 당연히 그를 뒤따랐다.
“주인님! ……괜찮으신 거예요?”
비휴가 활짝 웃으며 다가오다 그의 표정이 안 좋은 것을 보고 물었다. 해 도인 역시 일어나 한립을 향해 공수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찮다.”
한립은 해 도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흰둥이의 머리를 토닥이며 하얀 구름으로 고개를 돌렸다.
“금동은 아직 깨어날 기미가 없더냐?”
“2년 동안 아무 반응이 없었는데, 누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죠?”
“괜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주인님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면 안심이고요. 이제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이곳에 머문 지도 꽤 되었지. 해 형, 출발합시다.”
한립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해 도인에게 말했다.
그 말에 해 도인은 법결을 던져 녹색 비차를 출발시키고 한립은 무지개처럼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비차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살쇠를 광음의 실이 함유한 시간법칙의 힘으로 늦추었으나 아직 체내의 흉살기를 다 해결한 게 아니었다.
게다가 멀쩡했던 선규 3개까지 흉살기의 침식을 받았다. 고민하던 한립은 뭔가를 떠올리고 전방을 가리켰다.
팟.
물빛이 반짝이고 거울이 떠올랐는데 그곳에 비친 한립은 어느새 눈동자가 잿빛으로 반짝였다.
눈동자가 잿빛으로 변하는 일이 잦아진 것이다.
북한선역은 전체 진선계로 치면 변두리에 있는 작은 선역에 불과해서 태을경에 이른 수사도 몇 되지 않았다.
그래서 천인오쇠에 대한 정보를 구할 수도 없었고 자신은 특별한 증상을 겪고 있으니 흑산선역에 이른 다음에 방법을 찾아야 할 듯했다.
팟.
거울을 흩어버린 한립은 교삼이 내준 윤회전의 용오 가면을 꺼내 썼다. 가격을 넉넉하게 제시해 두었으니 허원단에 필요한 다른 재료들을 갖고 있다는 연락이 왔을 것이다.
반 시진 뒤, 가면을 벗은 한립 옆에 허원단 재료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주위를 살핀 한립은 해 도인과 마광에게 금동을 지키게 하고는 결계를 치고 은색 연단로를 꺼냈다.
화륵!
소매를 펄럭이자 연단로 밑에서 정염 소인을 품은 불길이 치솟았고, 무시무시한 열기가 느껴졌다.
정염 소인은 명한선궁을 떠난 뒤로 더욱 열기가 강해져서는 한립을 향해 뭐라 인사를 건네곤 얌전히 앉아 수결을 맺었다.
화르르.
작열하는 하얀 화염이 12줄기로 갈라져 화로 하부를 균일하게 감쌌다.
낙백량풍 내에서 제련했던 경험 덕에 허원단을 제련하는 솜씨가 늘었으나 문제는 품질 좋은 흑수정에 맞게 다른 재료들이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것이었다.
시간법칙의 힘을 다루는 그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나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재료들을 하나씩 화로로 집어넣었다.
7, 8년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녹색 비차는 아직도 만황의 끝에 이르지 못하고 빠른 속도로 빙하와 숲 그리고 사막과 평원을 지나고 있었다.
천호족 노조가 준 지도에 따라 큰 말썽 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눈치 없이 그들의 길을 막는 만황 짐승들은 마광, 해 도인 그리고 비휴가 나서서 처리해 그가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결계 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은 한립은 오로지 은색 연단로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화앗!
연단로 표면에 빛이 반짝이고 뚜껑이 스스로 날아가 검은색 보광을 발산하는 허원단이 드러났다.
한립은 미소를 지으며 단약을 꺼내 넣어두고 연단로와 정염 소인도 거둬들였다.
오늘까지 재료를 모으는 족족 제련해서 실패한 것을 제외하고도 이십여 개의 허원단을 얻었다.
그는 단약을 하나 꺼내 세심하게 살피다가 입안에 집어넣었다. 단약의 효과는 직접 겪어봐야 가장 정확히 알 수 있었다.
허원단은 뱃속에서 천천히 녹으며 음랭한 기운으로 변해 퍼져나갔다. 음랭한 기운이 닿는 곳마다 흉살기가 공명하긴 했으나 다른 변화는 없었다.
한립은 단약의 약성이 천천히 효과를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 기다림이 반년 넘게 이어졌다.
허원단의 음랭한 기운은 아랫배 인근에서 회오리치면서 수십 개의 선규 속 흉살기와 특별한 연계를 맺기 시작했다.
한립 체내의 흉살기들이 점점 깊이 몸을 숨기고 선규 안의 검은 실도 움직임이 느려졌다.
눈썹을 끌어올린 한립은 눈을 뜨고 다시 거울을 띄웠다. 거울 안의 그는 맑은 검은색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그걸 보고서야 한립은 안심했다.
흑산선역에서 아무 때나 눈동자가 잿빛으로 변하면 천정 사람의 눈에 발각될 게 틀림없었다.
이제 흉살기는 감추고 눈동자는 정상으로 돌아왔으니 누군가 특별한 방법을 쓰지 않으면 들킬 걱정이 없었고 미리 허원단을 많이 만들어 두었기에 한동안은 버틸 만했다.
만일에 대비해 한립은 무상맹 내에 허원단의 다른 재료를 모으는 임무를 등록해 두었다. 그런데 등록을 마치고 나자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금제를 거둔 한립은 소리가 들려 온 곳을 보고 기뻐했다.
비차 뒤쪽에서 하얀 구름이 갈라지고 금색 구슬 안의 방대한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달게 자고 있던 비휴도 얼른 뛰어왔다.
“누님이 깨어나려나 봅니다!”
“해 형, 적당한 장소를 찾아 비차를 멈춰주시지요.”
기뻐하는 흰둥이를 보고 한립은 해 도인을 향해 말했다.
비차는 곧 안개가 자욱한 어느 산골짜기로 내려가고 금색 구슬은 태양처럼 밝게 빛났다.
한립은 법결을 던져 하얀 깃발을 회수했다.
쩌적.
바로 그때, 금색 구슬이 갈라지고 호리호리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금발을 길게 늘어트린 열댓 살의 소녀는 둥글게 휜 눈매와 새하얀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나오자 텅 빈 구슬은 펑! 하고 금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소녀는 사람 같지 않은 범속한 기운이 느껴졌다.
“……금동?”
한립은 금동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금발 소녀는 어린아이였던 금동과 닮기는 했지만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동글동글 귀엽던 아이가 차가운 인상의 소녀가 된 것이다.
비휴도 반갑게 다가서려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멈추었다.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되어 순조롭게 태을경에 이르게 되었네요. 생각해 보니 모든 것이 꿈만 같아요.”
금동은 한립을 향해 말하며 나른하게 몸을 움직여 보았다.
목소리는 옥쟁반 위를 구르는 구슬같이 영롱했는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아 싸늘했다.
“아저씨, 뭘 그렇게 쳐다봐요? 혹시 내가 금동이 아니라 우리를 죽이려고 쫓아오던 서금선일까 봐요? 하긴 그 녀석을 집어삼켜서 새로운 기억이 많이 생기긴 했어요.”
금동은 한립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장난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하지만 그런 미소는 금방 사라지고 다시 표정이 딱딱해졌다.
“어떤 기억이 생긴 것이냐?”
한립은 얼굴을 풀고 물었다.
자신을 익숙하게 아저씨라 부르고 의식연계가 그대로인 것을 보면 상대는 금동이 맞았다.
“……인계에서부터 아저씨가 돌봐준 덕분에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침묵하던 금동이 웬일로 그에게 예를 올렸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것이냐?”
“홀로 세상을 돌아다니며 다른 서금선들을 찾아보고 싶어요.”
“다른 서금선에 대한 실마리는 있고?”
“아직 없지만, 희미하게 감지되는 무엇인가가 있기는 해요.”
“네 실력이 크게 늘었다지만 그리 만만한 세상이 아니다. 안심이 되지 않는구나.”
“맞아요, 누님! 선계가 얼마나 크고 위험한데 홀로 다니려고 그래요? 주인님과 함께 다니면 태을 후기의 적을 만나도 두렵지 않을 텐데. 왜 떠나려고 그래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비휴가 끼어들었다.
“동족을 찾는 건 내 사명이야. 아저씨와 너는 따로 하고 싶은 일을 해야지.”
금동은 동요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한립은 눈을 반짝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비휴도 금동이 굳게 결심한 것을 알고 가만히 있었다.
“충분히 생각해 보고 내린 결론이냐?”
잠시 후, 한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저씨, 허락해주세요.”
금동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좋다. 네가 결정한 대로 해보아라. 세상에 끝나지 않는 연회는 없고 헤어지지 않는 인연은 없는 법이지…….”
한립은 한숨을 쉬듯 답했다. 금동은 그를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리고 바로 떠나려 했다.
“잠깐, 가져갈 물건이 있다.”
그녀를 불러 세운 한립은 봉황 무늬가 새겨진 비취색 팔찌를 던져 주었다.
“만황 지도와 영보들 그리고 선원석이 들어있다. 그 밖에 무상맹 가면도 몇 개 넣어 두었으니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내게 연락을 취하거라.”
금동은 한립에게 수많은 전투를 치룬 전우이자 어릴 때부터 키워온 딸 같은 존재였다. 봉황 무늬 팔찌를 든 금동은 얼굴이 어두워졌지만 거절하지 않고 왼팔에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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