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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793화 (1,550/2,000)

1793화. 대항

*

“한 수사, 왜 그러십니까?”

눈치 빠른 마광은 그의 시선을 느끼고 수련을 멈추었다.

“흉살기 파동이 무척 약한데 따로 비술로 기운을 감추고 있는 것입니까?”

한립은 마광의 두 눈동자가 회선과 같은 잿빛이 아니라 사람처럼 검다는 것도 주의 깊게 봐두었다.

“아닙니다? 그냥 수련만 하는 걸요.”

마광은 영문을 모르겠는 얼굴을 했다.

“아무 비술도 펼치지 않았는데 보통 사람과 똑같이 보인단 말입니까?”

“그러고 보니, 이 몸으로 선계를 활보하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습니다. 심연을 떠났을 때만 해도 좀 이상했는데 지금은 멀쩡해요. 모든 게 예전에 수사께서 주신 단약에서 나온 기운이 단전에 남아 있어서 그런듯합니다.”

마광이 눈을 감고 자신의 몸을 찬찬히 살피고 답했다.

“허원단이요?”

“맞습니다. 그 단약의 기운이 단전에서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흉살기를 숨겨주고 있습니다. 처음 먹고는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니 이런 효과가 있더군요.”

“허원단…….”

“특별한 효과이긴 한데, 단약의 힘으로 형성된 소용돌이가 영원히 유지되지는 않을 듯합니다. 조금씩이지만 흩어지고 있어 길어야 십여 년 정도 남아 있겠어요.”

마광의 말에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원단이 회선 혼백을 깨우는 데만 쓰이는 줄 알았는데 이제보니 회선이 선계의 천지원기에 적응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다행히 회선 시체의 저물 법기에 허원단의 주재료인 흑수정이 들어 있어 나중에 다시 연단할 수 있었다.

그가 생각에 잠겨있을 때 갑자기 체내의 선규에서 흉살기들이 흘러나와 통제를 벗어났다.

그가 몸을 부르르 떨자 먹처럼 검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한 수사!”

마광이 그걸 보고 놀라 소리치고 비휴와 해 도인도 그를 쳐다보았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따라올 필요 없습니다.”

비차가 멈추자 한립은 벌떡 일어나 아래로 몸을 날려 영기가 짙은 산맥으로 내려갔다.

그가 커다란 협곡으로 내려가니 주변 요수들이 기운을 감지하고 혼비백산해 달아났다.

쾅!

한립은 주먹을 내질러 산 벽을 뚫고 동굴을 만든 다음 급히 금제를 펼치고 주저앉았다.

검은 흉살기는 아까보다 더 많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차 위.

“주인님이 갑자기 왜 저러시죠?”

비휴가 어안이 벙벙해 물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인족 수사들이 겪는 천인오쇠 중에 마지막 살쇠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마광이 차분히 설명해주었다.

그런 마광을 힐끗 본 해 도인은 비차를 조종해 한립이 있는 골짜기와 꽤 멀리 있는 산맥으로 내려갔다.

“이제 막 금선 최고봉에 이르렀는데 벌써 살쇠가 도래했다고요?”

비휴는 믿기지 않은 듯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이게 다 흉살기로 선규를 뚫었고, 체내의 흉살기가 과도한 탓이지요.”

“태을옥선이 되기 전에 가장 큰 고비가 살쇠인데 금선 최고봉에 이른지 얼마 되지도 않은 주인님께서 이겨내실지 걱정입니다. 공수구를 따라다니면서 여러 해를 준비하고도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흉살기가 발작해 미쳐 날뛰다 죽는 일을 여럿 보았거든요.”

비휴의 탄식을 끝으로 비차 위는 조용해졌다.

마광은 생각에 잠기고 해도 인은 멀리 동굴을 덤덤하게 바라보았다.

* * *

동굴 안.

한립은 가부좌를 틀고 진언화륜경을 전력으로 운용해 금빛을 내뿜었다. 그러자 진언보륜이 시간의 힘으로 그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도 천인오쇠 중 다섯 번째 쇠락인 살쇠가 도래할 조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금선경에 이르러 수행이 급격히 늘어난 덕에 사쇠는 넘겼지만 태을경을 한 걸음 앞둔 지금은 오쇠를 피할 길이 없었다.

묵우가 내준 현살명령공을 익힌 탓도 있지만 연신술 4성을 익힌 것도 갑작스러운 오쇠의 도래와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되었든 이겨내야겠지.’

이전에 경험한 규쇠와 달리 살쇠의 횡포는 대단했다.

그의 몸 안에 잠복해 있던 흉살기들이 그의 의식세계에 침투하려 시도하는 한편, 흉살기를 품은 선규들도 외부로 흉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마음속에 살심이 차올라 그걸 억제하지 않았다면 진작 미쳐서 무슨 짓을 했을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있는 동굴 속은 어느새 깜깜해져 위쪽으로 검은 구름이 뜨고 붉은 그림자들이 어른거렸다.

원혼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더니 그의 동굴을 중심으로 수백 리의 초목과 화초가 시들고 바위가 먹빛으로 물들었다.

수려하던 골짜기가 갑자기 지옥처럼 변하자 멀리서 지켜보던 마광 등도 표정이 달라졌다.

그때 한립의 피부에는 검은 반점들이 얼룩덜룩 나타나 서서히 퍼지고 눈빛에도 핏빛이 어리는 중이었다.

콰릉!

양손으로 수결을 맺은 그의 손에서 금빛 벽사신뢰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음산한 기운에 상극인 벽사신뢰도 이번만은 통하지 않고 거꾸로 침식되어 밝은 빛이 흐려졌다.

그가 불러낸 선기들도 흉살기에 충돌해 빛이 사라지고 법칙의 힘을 머금은 보물만이 조금이나마 대항을 했다.

안타깝게도 법칙의 힘을 지닌 다른 선기들도 얼마 버티지 못해 결국에는 시간 법칙의 힘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한립은 침착하게 진언보륜을 회전시켜 시간도문에서 강렬한 시간의 힘을 내뿜게 했다.

흉살기가 아무리 강렬하게 충돌해 와도 시간 법칙이 굳세게 잘 막아주었다.

살쇠에 대해 오래 연구하지는 못했으나 3대 지존법칙인 시간 법칙의 힘으로 보호하지 않았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른다.

안도하던 그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시간의 힘이 강대해도 흉살기의 근원이 체내에 있는 것이라 서서히 몸과 의식에 스며드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몸의 반점들이 연결되면서 피와 살육에 대한 욕구가 더욱 강해져 연신술을 펼쳐 겨우 억눌렀다.

‘그렇다면…….’

한립은 은색 부적이 붙은 하얀 옥함을 불러냈다.

주문을 외워 법칙 파동이 새어 나오는 옥함에 법결을 던져 넣자 부적이 재가 되면서 용 눈알 크기의 은색 단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진한 약 냄새가 풍기는 태을단이었다.

한립은 당시 목숨을 걸고 태을단 3개를 확보한 것을 다행이라 여기고 얼른 태을단을 삼켰다.

태을단은 그의 뱃속을 태울 것처럼 뜨겁게 녹아 은빛으로 변해 몸속을 흘러 다녔다.

체내의 흉살기가 은빛을 만나 눈 녹듯이 녹아 사라지고 은빛도 줄어들었다. 다행히 태을단이 효과가 있어 열심히 은빛으로 흉살기를 몰아냈다.

동굴 안은 그가 내뿜는 은빛과 금빛이 교차해 반짝이고 있었다. 기이한 약향이 바람을 타고 마광 등이 있는 곳까지 전해졌다.

“이 냄새는! 주인님께서 흉살기를 연화시키고 계시나 봐요. 진작 살쇠를 준비하고 계셨나?”

비휴가 코를 킁킁거리고 신나 외쳤다.

그 소리에 마광은 뜻밖이라는 얼굴을 했고 해 도인은 여전히 덤덤한 얼굴을 했다. 그렇게 비차 안은 다시 적막해졌다.

그렇게 반년이 지나갔다.

한립은 체내의 흉살기를 대부분 밀어냈지만, 아직 몸에 검은 반점이 몇 개 남아 있었고 의식세계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몸속을 돌던 은빛이 사라지자 다시 흉살기들이 소생하려는 낌새가 보였다.

깜짝 놀란 한립은 다시 태을단 하나를 꺼내 삼켰다. 단약이 뱃속으로 들어가고 뜨끈한 은빛이 남은 흉살기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두 번째 태을단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부에 남은 검은 반점이 사라지고 피부가 하얗다 못해 투명하게 변해 핏줄과 뼈가 다 보였다.

비록 흉살기를 다 몰아내긴 했어도 아직 살쇠가 끝나지 않았기에 그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107개의 선규 중 71개는 흉살기로 뚫은 것이었고, 그 안에는 검은 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흉살기가 태을경으로 향하는 길을 막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던 그는 금방 얼굴을 폈다.

아직 체내에 두 번째 태을단의 약효가 남아 있었고 아직 쓰지 않은 세 번째 태을단까지 있으니 남은 흉살기를 밀어낼 수 있었다.

한립은 심호흡을 하며 태을단의 남은 약성을 선규 속의 흉살기로 보냈다.

검은 실 같은 흉살기는 다른 흉살기와 달리 뜨끈한 은빛이 충돌해 와도 나풀거릴 뿐 흩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치 선규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 듯했다.

* * *

다시 시간이 흘러 반년 뒤, 한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반년 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선규에 박힌 검은 실들은 약간 옅어졌을 뿐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71개의 선규에 남아있는 검은 실을 하나도 제거하지 못했다는 소리였다. 눈빛이 매서워진 한립은 주먹을 세게 그러쥐었다.

쿵!

두 번째 태을단이 드디어 완전히 연화되어 은백색 빛의 점으로 흩어진 것이다. 체내를 흐르며 선규를 공략하던 뜨끈한 은빛도 물러났다.

그 순간, 뜻밖에도 선규에서 넘실거리던 검은 실들이 튀어나와 제멋대로 날뛰려 했다.

한립 체내의 선령력이 이런 선규들로 흘러들고 외부의 천지영기도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구륵구륵.

선규에서 괴이한 소리와 함께 새까만 흉살기들이 튀어나와 다시 그의 몸을 침식하려 들었다.

이전보다 더욱 새까매진 흉살기는 이전에 경험했던 것보다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한립은 시간법칙의 힘으로 서둘러 억제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붉게 충혈된 눈은 잿빛으로 반짝였다.

그는 서둘러 한 손으로 수결을 맺어 <진언화륜경>을 전력으로 운용하면서 다른 손으로 태을단이 든 옥함을 열었다.

처음 2개와 달리 은색 무늬들이 합쳐져 흐릿하게 다리가 3개 달린 금색 새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약성은 훨씬 강해 보였다.

한립은 조심스럽게 태을단을 들어 올려 입가로 가져가다 멈칫했다.

살쇠의 기운이 너무 맹렬했다.

마지막 태을단이 다른 것들보다 좋다고는 하나 선규에 검은 실처럼 박힌 흉살기를 모조리 몰아낼 수는 없을 듯싶었다.

금선 후기 수사가 아무리 살생을 해서 흉살기를 쌓았다고 해도 자신처럼 흉살기를 직접 흡수해 선규까지 뚫은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평범한 태을단 한 알로도 무사히 살쇠를 넘겼겠지만 절반은 회선과 다름없는 그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한립은 들고 있던 태을단을 거둬들이고 어딘가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동굴과 멀리 떨어진 골짜기에 마광 등이 비차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고, 금동이 변한 금색 구슬은 아직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돌연 마광이 얼굴을 꿈틀하고 일어났다.

“어딜 가려고요?”

비휴가 네 발로 냉큼 따라 일어나 그 앞을 막았다.

“당신 주인이 나를 부르십니다.”

마광은 그런 비휴를 힐끗 보고는 검은빛으로 변해 날아갔다.

마광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립이 있는 동굴 앞에 나타났고, 금제가 스스로 그가 들어올 수 있도록 열어 주었다.

그곳은 짙은 흉살기가 엄습하고 음풍이 뼈를 시리게 하는 시꺼먼 동굴이었다.

그러나 마광은 전혀 개의치 않고 걸어가 검은 기운과 금빛을 두르고 있는 한립을 발견했다. 그는 두 눈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한 수사.”

“도움이 필요해 마광 수사를 청했습니다.”

한립은 전력으로 시간법칙을 조종하면서 아주 천천히 말했다. 말을 하는 것도 무척 어려워 보였다.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습니다. 제게도 좋은 일이군요.”

고개를 끄덕인 마광은 그의 옆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에 한립이 곧바로 소매를 털어 수백 개의 검은 깃발을 동굴 곳곳으로 날려 보내 진법을 펼쳤다.

중얼중얼 주문을 외며 입에서 정혈을 뿜어 진법에 스며들게 하자 웅! 하고 팔뚝 굵기의 검은 빛들이 진법에서 뻗어 나와 그의 몸에 꽂혔다.

전신에서 요동치던 흉살기들이 움츠러들더니 그 검은 빛줄기를 따라 진법으로 끌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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