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2화. 인과를 끊다
*
이튿날 정오.
콱! 하는 소리가 한립을 깨웠다.
가부좌를 튼 그 옆에 마광과 해 도인이 서서 태을 서금선의 육체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금동이 서금선의 몸에서 막 날아오른 참이었다. 한립이 가벼운 웃음을 띠고 입을 열려는데 금동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수고스럽겠지만 호법을 좀 서주세요.”
금동의 딱딱한 말투에 무심코 입을 다문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해 도인, 마광 역시 삼각형 형태로 물러나 금동과 서금선 시체를 두고 섰다.
그들을 둘러본 금동은 서금선 시체 위에 앉아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작은 손이 수결을 맺자 금빛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어 소용돌이를 형성했다. 강렬한 법칙의 기운을 내뿜은 거대 소용돌이가 금색 딱정벌레를 뒤덮었다.
후우우웅.
주변 만 리 내의 천지원기가 금색 소용돌이로 집결해 땅이 덜덜 떨리고 하늘에 오색구름이 가득 껴있었다.
한립은 단약을 삼키고 허공에 떠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뒷짐을 쥔 마광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을 반짝였고, 해 도인은 아예 가부좌를 틀고 관심 없다는 듯 쳐다보지도 않았다.
“누님의 수행이 더 높아지려나 봅니다.”
비휴가 언제 나왔는지 한립 옆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동을 보는 비휴의 눈에 부러움이 가득했다.
소용돌이가 점점 더 빨리 회전하다 금색 딱정벌레 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금색 주술문자가 흩날리면서 불경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뜨기도 힘든 밝은 빛 속에서 금동의 고통에 찬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금색 소용돌이 위로 거대한 금색 딱정벌레 허상이 떠올랐는데 방금 죽임을 당해서인지 독살스러운 눈빛으로 절규하고 있었다.
“금동이 서금선의 원신을 멸하기는 했으나 아직 시체에 원념이 남아 있군요. 철저히 하나가 되려면 저 원념을 굴복시켜야 할 텐데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마광이 중얼거렸다.
콰릉!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용돌이 위로 금동 허상도 금빛을 번득이며 나타나 기세등등하게 거대 딱정벌레 허상을 덮쳤다.
그들의 격투로 인해 금빛이 출렁이고 폭음이 들려왔다.
금동이 변한 작은 딱정벌레가 아무래도 힘이 부족한지 밀리고 있었다.
“이런, 누님이 밀리고 있습니다! 주인님…….”
비휴가 그걸 보고 다급히 한립을 불렀다.
“이건 내가 도울 수 없는 싸움이다.”
한립이 고개를 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쾅!
큰 허상이 금빛을 만발하면서 금동을 향해 부딪쳐 왔다.
앞발을 힘차게 휘두르는 게 당장이라도 금동을 토막 내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았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던 금동이 휙 하고 몸을 틀고는 더없이 빠른 속도로 거대 딱정벌레 뒤로 이동해 앞발을 움직였다.
차캉!
거대 딱정벌레를 뒤에서 껴안아 꼼짝하지 못하게 한 금동은 상대의 머리를 날카로운 앞발로 베어냈다.
이에 금색 딱정벌레의 머리가 솟아오르고 방대한 육체가 폭발해 대량의 금빛을 발산했다.
금동 허상이 입을 벌려 그것을 힘차게 빨아들였다.
이전보다 훨씬 또렷해진 금동 환영은 점차 줄어들어 가느다란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한립 등은 미처 대비하지 못해 그녀가 내뿜는 압력에 휘말렸다.
수행이 가장 약한 비휴는 비명을 내지르며 곧장 백옥 장신구로 변해 한립의 허리춤에 매달렸고, 눈앞이 캄캄해진 한립도 가슴이 묵직해지는 느낌에 연달아 열댓 걸음을 물러나고서야 바로 섰다.
해 도인도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한립의 체내로 날아들었다. 그러나 마광은 부상을 입었는데도 회선 시체가 대단하기는 한지 휘청거리다 버텨냈다.
금색 인영이 뛰어들자 소용돌이가 다시 커지면서 주변의 기운을 흡수했다.
하늘의 오색구름이 빨려 들어가는 모습은 하늘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일각이 지나 하늘이 차차 맑아지고 소용돌이도 줄어들어 사람 크기의 금색 구슬만이 남았다.
그 모습에 한립은 한시름을 놓았으나 함부로 다가서지는 않았다. 금색 구슬은 무시무시한 존재를 품고 있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 공수구에게 얻은 하얀 깃발 선기를 불러냈다. 하얀 깃발은 바람을 타고 커져서 구름을 잔뜩 내뿜었다.
하얀 구름이 금색 구슬을 감싸 그 기운을 어느 정도 가려 주었다.
“일단 떠납시다.”
수결을 맺은 그가 구름으로 금색 구슬을 감싸 그 자리를 뜨려다 안색이 변해 멈춰 섰다.
언제부터인지 그 앞에 낯선 백포 사내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3, 40대로 보이는 잘생긴 사내는 검은 머리카락 사이사이 금발이 섞여 있었다.
아무 징조도 없이 나타난 사내는 존재하지 않는 듯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한립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마광도 전혀 눈치채지 못해 깜짝 놀란 눈치였다.
백포 사내는 먼저 입을 열 마음이 없는지 그와 마광을 훑고 있었다.
“선배님께서는 누구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훌륭하구나. 나를 놀라게 하다니 말이야.”
백포 사내가 한립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딴소리를 했다.
“이 목소리는……. 당시 서금선을 20년간 붙들어 주신다고 했던 분이 아니십니까?”
“그래, 내가 그랬었지.”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선배님!”
한립은 정중히 예를 올렸다.
상대가 서금선을 20년 동안 붙들어 주지 않았으면 그와 금동은 벌써 죽었을 것이다.
“나도 그저 다른 이의 부탁을 받아 그리 한 것이다.”
백포 사내의 대답은 한립의 짐작을 벗어났다.
“내가 너를 위험에서 벗어나게 도와준 것은 낙아를 도와준 은혜를 갚아 인과를 끊어내기 위해서였다.”
“낙아……. 류낙아 말씀이시군요. 낙아를 데리고 계십니까? 잘 지내고 있는지요?”
“잘 지내고 있다. 영환계에서 한동안 함께 지낸 것은 알지만 방금 말했다시피 그 아이와 네 인과는 끊어졌다. 앞으로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야.”
순간 눈빛이 차가워진 백포 사내가 단호히 말했다.
“예.”
한립은 조용히 답했다. 상대는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대라경 수사임이 분명했다.
그런 존재가 하는 말에는 원치 않아도 고개를 끄덕여야 했고, 류낙아가 잘 지내고 있다면 다른 것은 상관없었다.
“또한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백포 사내가 당부하며 푸른 옥간을 건넸다.
“지도이니 어서 이곳을 떠나 돌아오지 말거라.”
백포 사내는 할 말만 남기고 마광을 잠시 쳐다보다 바람처럼 사라졌다.
류낙아와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백포 사내는 그와 말 한마디 섞지 않고 죽이려 했을 것이다.
“휴우, 태을경 서금선보다 더 무섭던데. 대라경 수사일까요?”
마광이 길게 숨을 내쉬면서 한립을 힐끗 보았다. 한립은 대답 없이 감정을 추스르고 의식을 옥간에 불어넣었다.
백포 사내가 주고 간 지도는 아주 상세했다.
거기다 네 개의 거대한 영역 위에는 분명하게 4대 종족의 영역이라 다른 이들이 침범하면 무조건 죽인다는 설명까지 적혀 있었다.
그들이 지나온 구역은 천호족에 속한 곳으로 그곳의 노조가 바로 백포 사내인 듯했다. 류낙아를 데려갔다는 동족이 바로 천호족인 것이다.
네 개의 구역 사이로 흑산선역으로 통하는 비교적 안전한 노선이 표시되어 있었다.
“한 수사,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축객령을 들었으니 어서 떠나는 것이 상책입니다. 괜한 오해를 사면 안 될 테니까요.”
마광의 물음에 한립이 비취색 비차를 불러냈다.
그의 조종에 하얀 구름이 급격히 줄어들어 금동이 변한 금색 구슬을 품고 비차에 올랐다.
“혹시 음기 속성의 영수대는 없으십니까?”
마광의 물음에 잠시 멈칫한 한립이 검은 영수대를 꺼내 주었다. 거령에게서 구한 음기 속성의 영수대로 공간이 아주 널찍했다.
“고맙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마광은 그걸 들고 심연 바닥으로 내려갔다.
그의 법결에 남아 있던 일부 흉살기들이 검은 빛기둥으로 뭉쳐져 영수대 안으로 들어갔다.
빵빵하게 부푼 영수대는 2, 3백 근이나 나갔고, 그 안에서 짙은 흉살기가 느껴졌다. 좋아하며 돌아오는 마광을 보고 한립은 말없이 벽옥비차를 출발시켰다.
“이 노선대로 가주시면 됩니다.”
한립은 옥간을 해 도인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객실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107개의 선규 중 대부분이 <현살명령공>으로 뚫은 것이고, 특히 심연에서 뚫은 것은 검은 테두리가 짙었다.
<현살명령공>으로 수행이 빠르게 늘어난 것은 좋았지만 바닷물로 목마름을 달랜 것과 같았다.
태을경에 이르려면 반드시 맞서야 하는 다섯 번째 쇠락에 흉살기는 위험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 * *
진선계의 어느 은백색 대전 안.
다섯 명이 그 안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빛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웅 수사, 이곳에 온 지도 시간이 꽤 흘렀는데 적응은 잘하셨습니까?”
하얀빛으로 둘러싸인 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상대는 금빛으로 둘러싸인 청년 사내였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금빛 청년이 웃으며 답했다.
“우리 두 가문은 대대로 돈독한 사이입니다. 수사께서 막 금선 후기에 이르러 수행을 안정시킬 시간이 필요할 테니, 바로 임무를 수행하기 어려우시면 제가 대인께 고해 조정해드리겠습니다.”
하얀빛 인영이 자신의 가슴을 탁탁 쳤다.
“고맙습니다, 현 수사. 이미 경지가 안정되어 굳이 다시 일정을 조정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천재 검수의 명성에 걸맞은 분이군요. 처음 선옥(仙獄)에 오셨을 때만 해도 금선 초기의 수행이셨는데 홀로 윤회전 금선 중기의 역도를 죽이지 않으셨습니까.”
함께 앉은 붉은빛 인영이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적 수사. 다 운이 좋았지요. 그런데 공수 수사께서 보이지 않으십니다?”
“공수천의 아우가 얼마 전 북한선역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흉수를 찾아 나서려는 것을 대인께서 허락하지 않아 한참을 방황했지요.
그러다 며칠 전 감찰천경이 북한선역과 흑토선역 사이의 만황구역에서 연신술 4성을 대성한 이가 감응되어 그것을 조사하겠다 청하고 출발했지요.”
겸손히 말을 돌리는 금빛 청년의 물음에 붉은빛 인영이 답했다.
“그게 언제 있었던 일입니까? 저는 어째 처음 듣는 소리입니다. 연신술 3성도 아니고 4성을 대성하다니 윤회전이 움직이는 것 아닙니까?”
하얀빛 인영이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마침 수사께서 외부로 임무를 나가셨을 때라 저만 소식을 접했습니다. 하하, 어디 윤회전이 움직임이 없었던 적이 있던가요?”
붉은빛 인영은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만황구역의 상황이 복잡하고 인족 수사, 특히 천정을 적대시하니 추적이 쉽지 않겠군요.”
금빛 청년이 눈을 반짝였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공수천도 힘만 빼고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고 돌아올지도 모르지요.”
붉은빛 인영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
* * *
반년 후.
만황 모처를 녹색 빛줄기가 지나며 희미한 흔적을 남겼다.
한립은 녹색 비차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고 그 앞에는 하얀 구름이 있었다.
조용히 눈을 뜬 한립은 반년 만에야 부상을 모두 회복하고 선령력과 의식의 힘을 채울 수 있었다.
그러나 금동은 여전히 구슬 속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태을 후기 서금선을 먹고 소화를 시켜야 하니 오래 걸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천호족 대라경 노조가 내준 지도를 보고 가니 여정이 순조로워 서두를 것도 없었다.
비휴는 비차 구석에서 하얀빛을 반짝이면서 쿨쿨 자고 있었고, 마광은 정좌를 하고 앉아 검은 영수대를 품에 안고 있었다.
영수대 안에서 검은 흉살기들이 빠져나와 그의 몸속으로 스며들어갔다.
“흠?”
그걸 보던 한립은 의아해졌다.
흉살기를 이용해 수련하고 있는데도 마광이 발산하는 흉살기 파동이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