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790화 (1,547/2,000)

1790화. 베다

*

태을 서금선은 해 도인이 달아나는 것을 보고도 쫓지 않고, 오직 심연 깊은 곳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흉살기만을 바라보았다.

“20년 동안 헛꿈을 꾸고 깨어나니 기분이 어떻습니까? 하하하하…….”

이때 심연 깊은 곳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종소리처럼 웅웅 울렸다.

한립의 말이 그를 치욕스럽게 만들었는지 서금선의 얼굴이 일그러졌으나 그래도 함부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본 선녀는 여기 있다! 내 손에 맞아 죽는 게 두렵지 않으면 내려와서 싸워보든가!”

뒤이어 들려온 금동의 목소리에는 서금선도 발끈해 전신의 금빛을 불꽃처럼 이글거리며 체형을 줄였다.

전신에 금빛 문양이 뒤덮인 그는 불꽃으로 된 의복을 걸친 것 같았다.

태을 서금선은 화염의 비호를 받으면서 심연의 흉살기를 밀어내고 아래로 내려왔으나 불편한 눈빛을 감추지는 않았다.

심연의 흉살기를 싫어하는 것이 티가 났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심연 바닥에 있는 한립과 금동을 발견했다. 인족 사내와 동류인 꼬마 녀석은 겨우 20년간 수행이 확 늘어나 있었다.

어째서인지 태을 후기의 수행을 지닌 그의 마음에 갑자기 경계심이 들어 더 내려가지 않고 심연 바닥을 살피는데 짙은 흉살기 속에 영력 파동이 숨겨져 있었다.

‘진법?’

비웃음을 흘린 서금선은 입을 벌려 금빛 광풍으로 바닥을 쓸었다.

휘이잉.

흉살기와 모래 먼지에 미세한 수정 빛알갱이가 섞여 날아오르고 바닥에 숨겨져 있던 동그란 제단과 삼각 깃발들이 드러났다.

“겨우 이걸 믿고 설친 것이냐?”

서금선이 물었으나 아래에서 한립과 금동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꼬마야, 너와 나는 본래 하나다. 내 몸속에 융합되면 이렇게 도망 다닌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이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어차피 그리될 것 얌전히 굴거라.”

“칫, 그게 사실이면 당신이나 내게 얌전히 잡아 먹혀서 내 몸에 융합되지 그래요? 어차피 한 몸이라면서요?”

입을 비죽인 금동이 비아냥거렸다.

“우리가 원래 하나였다고 하나 우리의 의식과 경지는 차이가 있다. 경지가 높은 내가 너를 잡아먹는 것은 간단한 일이지만 네가 나를 잡아먹기는 쉽지 않겠지. 게다가 아직 어린아이의 품성을 지닌 네게 흡수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너는 다른 동족에게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고분고분 내 말을 따르겠다면 네 기억을 남겨 줄 수도 있다. 오늘 네가 태을 초기에 이른 것을 보니 아주 기쁘구나.”

태을 서금선은 화를 내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 그때 듣고 있던 한립이 입을 열었다.

“저는 금동의 지금 성격이 훨씬 마음에 드는군요. 금동을 잡아먹고 싶다면 주인인 제게도 동의를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금선경 인족 주제에 누구 앞에서 내 동족에게 주인이라 칭하는 것이냐!”

태을 서금선이 한립의 말에 버럭 화를 내면서 앞발을 교차해 초승달 모양의 수정빛을 발사했다.

금동의 평소 공격과 똑같은 대신 속도가 훨씬 빨랐다.

하지만 진작 대비하고 있던 한립은 체내의 진언보륜을 역전시켜 금동을 데리고 옆으로 피하며 동시에 손목을 털어 검은빛과 하얀빛을 날려 보냈다.

하얀빛은 서금선도 기억하고 있는 백옥 문진이었다. 이전에 그의 공격을 맞받아치면서 망가진 줄 알았는데 또 불러낼 줄은 몰랐다.

바람을 타고 백옥 문진 앞쪽의 만황 사자 머리가 커지면서 서금선을 내리누르려 했고, 검은빛은 길쭉한 검은 벼루로 변해 서금선의 발아래에서 새까만 불길을 일으켰다.

두 개의 보물 모두 봉천도의 것으로 위력적인 선기였으나 서금선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서금선은 앞발에서 수정빛을 날려 하얀 문진을 쾅! 쳐내고 입을 벌려 검은 불길을 훅! 빨아들였다.

백옥 문진이 부서지고 검은 불길이 감쪽같이 사라졌을 때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검은 화염이 뒤덮고 있어 보이지 않던 바닥에 각종 백옥 돌기둥이 분분히 뚫고 올라와 진법을 이루고 눈처럼 하얀빛을 쏘아 올린 것이다.

동시에 심연 양쪽 벽에 네 개의 주술문자가 등장했다.

네 개의 주술문자는 한립이 보석함에서 얻은 네 장의 부적을 기초로 대량의 선령력으로 새겨 넣은 ‘청룡곤목부’, ‘백호삭금부’, ‘주명거화부’, ‘진무거수부’를 품은 사상부진(四象符陣)이었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고 네 방향에서 진령들이 서금선을 둘러쌌다.

“이런 조잡한 수법을 내게 펼치다니!”

서금선은 날카롭게 소리쳤고 그 주위로 아주 얇은 보광 칼날들이 헤아릴 수 없이 튀어 나가 진법을 구멍투성이로 만들었다.

그를 향해 달려들던 짐승들도 보광 칼날들을 맞고 옅어지다 연기로 변해 흩어졌다. 그런데 연기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거대하기 짝이 없는 3층 누각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불경 소리를 흩날리며 서금선을 환영 속에 가두었다.

그 짧은 순간, 서금선은 수도 없이 금동을 따라잡아 죽이는 환영을 보게 되었다.

즈즈즛!

멍해 보이던 서금선은 괴성을 터트리며 3층 누각이 퍼트린 불경 소리를 압도했다.

그러자 누각에 쩍쩍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립은 그 모습을 유심히 봐두었다.

서금선은 20년 동안 환영에 고통을 받으면서 의식의 힘이 이전보다 강해진 게 틀림없었다.

비취색 호리병으로 정련한 누각이 그를 10초 정도 붙들어 뒀어야 했는데 3초가 지나자 환영에서 벗어나 진언보륜을 펼칠 시간을 벌지 못했다.

퍽!

3층 누각이 조각조각 부서졌다.

“마광 수사, 언제 나서려고 아직도 뜸을 들이고 있는 것입니까?”

한립의 목소리에 흉살기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검은 인영이 불현듯 서금선 뒤에 나타나 새까만 장창을 등에 찔러 넣었다.

회선 시체에 들어간 마광은 비술을 사용해 태을 초기의 경지까지 수행을 끌어올린 상태였다.

창끝에서 핏빛 실이 피어올라 맴돌면서 강렬한 살의를 담고 서금선을 공격했다. 한립이 위력을 시험했을 때보다 수십 배는 강했다.

뒤쪽의 이상을 감지한 서금선은 피하지 않고 두 앞발을 보내 검은 창을 막으려 했다.

두 앞발이 훨씬 거대했으나 기세는 둘 다 막강했다.

쿠앙!

마광과 태을 서금선의 충돌에 엄청난 괴력이 무형의 기운을 발산해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갔다.

검은 장창은 급격히 휘어서 그 반동으로 마광과 함께 심연 위쪽으로 튀어 올라 한립을 깜짝 놀라게 했다.

마광이 회선의 육체를 차지하지 못했다면 벌써 온몸이 부서져 죽었을 테고, 그 자신은 단 한 번의 공격도 막지 못하고 죽어 나갔을 것이다.

서금선 역시 괴력에 밀려 아래쪽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던 금색 빛이 번득이고 거대한 고리가 열댓 개의 수정실을 휘감고 4백여 개의 시간도문을 뿜어냈다.

금색 파문이 흘러나와 금색 공간에 갇힌 서금충은 눈앞이 뿌옇게 변해 늪에 빠진 것처럼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수정빛을 방출해 금색 고리 자체를 가루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선령력이 움직이지 않아 불가능했다.

한립은 진언보륜이 버텨내는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요행이 금선 최고봉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면 서금선을 잠시도 가두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빠르게 수결을 바꾸어 가며 진언보륜을 조종해 서금선을 단단히 가둬두고 초록 호리병박을 불러냈다.

쌀알 크기의 주술문자들이 번득거리는 호리병박 입구에서 강력한 기세가 느껴졌다.

전력으로 진언보륜을 조종하면서 호리병박을 발동해야 하는 한립도 선령력이나 의식이 거의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베어라.”

그의 명에 호리병박 입구에서 녹색 빛이 반짝이고 청죽봉운검들이 금빛을 번득이면서 튀어나왔다.

초록 보광을 두른 총 8자루의 비검들이 태을 서금선의 심장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챙!

쨍!

채챙!

쩡!

날카로운 충돌음이 연달아 들리고 그때마다 뇌전이 튀었다.

한립은 전력을 모두 끌어내기 위해서 검빛이나 검그림자를 날려 보낸 것이 아니라 비검 자체로 충돌하고 있었다.

“그래 어디 마음껏 베어봐라! 속박에서 벗어난 순간, 내 네 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다, 으하하…….”

태을 서금선은 비검들에 몇 번을 베이고도 상처하나 생기지 않았다.

옆에서 이를 보고 있던 금동은 답답한 마음만 가득 차올랐다. 거령을 따라다닐 때 놀지 말고 조금만 더 수련했으면 오늘 이렇게 무력하지는 않았을 거란 후회가 들었다.

그녀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한립 쪽에서 먼저 변화가 생겼다.

전신에서 금빛을 일으킨 한립이 선령력을 아낌없이 호리병박 안으로 쏟아부은 것이다.

그러자 호리병박 내부의 녹색 소용돌이가 급속도로 역전하면서 간담이 서늘해질 만한 힘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기 직전 같았다.

“가라!”

호리병박 입구에서 검날 같은 게 번득 사라졌다. 잠시 후, 흐릿한 녹색 검 그림자가 서금선 앞에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가슴을 찔러 들어갔다.

쩡!

부르르 떠는 서금선의 몸을 타고 금빛 뇌전과 검기가 섞여 퍼져나갔다.

그 영향으로 흉살기들은 심연 위쪽으로 밀려나고 양쪽 벽과 바닥은 검기를 품은 돌풍에 언덕만 한 구덩이가 파였다.

또한 단단하기 짝이 없던 서금선의 껍질에도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껍질에 손상이 간 순간, 태을 서금선은 격렬하게 발버둥을 쳤고 이에 진언보륜도 점차 불안정해지고 있었다.

아예 가슴을 뚫고 들어가지 못한 건 아쉬운 일이었지만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한립은 주저하지 않고 수결에 변화를 주었다.

자리를 지키고 있던 여덟 자루의 비검은 하나로 융합되어 한립의 두 손에 들렸다.

“죽여 버리겠다!”

분노에 찬 태을 서금선의 외침에도 한립은 집중력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힘껏 거검을 휘둘렀다.

선령력과 벽사신뢰 그리고 만고검기까지 담은 정말 최후의 일격이었다.

쾅! 쾅! 쾅…….

일격을 날리고 날렵하게 몸을 튼 한립은 또다시 같은 곳을 노렸다.

금빛 뇌전과 겹겹이 쌓인 검기들이 태을 서금선 가슴에 난 작은 상처를 집요하게 뚫고 활화산과 같은 힘을 가하고 있었다.

그때 심연 위쪽에서 다시 내려온 마광이 멀리서 그런 한립을 쳐다보고 있었다.

태을 서금선도 이전의 내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기겁해서 어떻게든 진언보륜에서 벗어나려 애를 썼다. 검에 찍힐 때마다 그 충격에 날개까지 부르르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립의 의식 소모는 극에 달했고 두 눈이 충혈되어 귀에서는 피까지 흐르고 있었다.

359번째, 360번째…….

아무리 내리쳐도 서금선의 상처는 더 커지지 않았다.

361번째!

그간 쌓인 벽사신뢰가 더는 버티지 못했고 만고검기들도 날뛰었다.

금빛 뇌전의 소용돌이가 새하얀 검기와 하나가 되어 용처럼 서금선의 가슴을 뚫고 나갔다.

크아아악!

서금선은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면서도 날개를 펄럭여 막대한 위력의 진언보륜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큭, 내게 상처를 입히다니 네 놈은 이 자리에서 죽인다!”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서금선은 크게 분노하며 소리쳤다. 몇 초 후면 상처가 봉합될 거라 굳게 믿었으나 안타깝게도 그건 착각이었다.

상처 주변에 뇌전 빛과 검기가 남아 종횡무진하는 탓에 상처는 봉합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한립은 씁쓸하게 이를 악물었다.

최후의 일격까지 날렸지만 상대에게 치명상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태을 서금선이 입을 벌려 장창같이 생긴 수정실을 뿜어냈다.

오색빛을 머금은 수정창은 한립의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동공을 수축한 한립은 진언보륜을 불러들여 가속하려 했으나, 진언보륜이 체내로 돌아온 순간 이상을 감지했다.

고리의 도문들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속도를 줄이는 금색 파문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오색 수정창은 이미 코앞에 이르러 있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그 앞에 금빛이 날아들어 금동으로 변했다.

푹!

오색 창에 어깨를 뚫린 금동은 충격에 한립 쪽으로 밀려나면서 피를 쏟았다. 그들이 날아가 벽에 부딪히자 심연이 크게 진동했다.

피어오르는 먼지 속에서 한립은 입가의 피를 닦을 새도 없이 금동을 안고 마광 옆으로 번득 이동했다.

눈을 반짝인 마광이 그들 앞을 막아섰다.

금동의 기운이 약해지긴 했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단로와 거대 쥐 유골을 먹어 태을경에 이르렀기에 오색 수정창을 맞고도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