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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788화 (1,545/2,000)
  • 1788화. 깨어나다

    *

    어느덧 반년 뒤.

    흉살기가 자욱한 심연 바닥에 삼각형 진법이 흐릿하게 보였다.

    진법 바깥에 앉은 한립은 푸른빛을 일렁이면서 금색 파문을 퍼트리다 뺨에 검은 흉살기가 맴돌기도 했다.

    그는 작게 탄식하고는 조용히 은회색 눈을 떴다.

    그간 수시로 눈동자가 변했지만, 발작 시간과 그 간격에 어떤 규칙성도 찾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럴 때마다 의식세계에 숨겨진 흉살기가 더욱 사납고 포악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의 뺨에 검은 흉살기가 가시고 눈동자도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 그는 단약을 꺼내 삼키고 운기 조식을 했다.

    두 달 뒤, 어두침침한 심연 바닥에 쿠릉! 하는 소리가 울리고 새까만 흉살기가 들끓었다.

    흉살기가 위로 치솟아 빠르게 심연 입구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공중에 대기 중이던 해 도인의 무표정한 얼굴에도 의혹이 어렸을 때, 심연 바닥에서는 흉살기가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어 삼각형 진법으로 집중되었다.

    진법 바깥에선 한립과 마광은 꽤 피곤해 보였다.

    “두 달 정도면 제련을 마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습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마광이 거대한 흉살기 소용돌이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보다 융합은 자신이 있으십니까?”

    한립은 진법 중앙의 회선 시체를 보았다. 피와 살이 충만하게 차오른 시체는 비로소 사람 같아졌다.

    “솔직히 성공 가능성은 딱 절반입니다. 성공하면 단번에 금선의 경지에 이르고 심지어 금선 후기도 노려볼 수 있겠지만 실패하면 시체 안에 갇혀 거꾸로 시체의 자양분이나 되겠지요.”

    “그렇게 실패 확률이 높은데 신외화신을 제련하자고 제안한 겁니까?”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계약을 맺은 종복이라고 해도, 도움이 안 되면 언제 버려질지 알 수 없는 일인 것을요. 곁의 영충이며 괴뢰들이 하나같이 비범해서 금선의 경지에 이르렀는데 저만 뒤처지니 이런 기회마저 놓치면 어찌하겠습니까?”

    마광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흥미로운 견해군요.”

    한립은 딱히 부정하지도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하하, 어쨌든 제게도 도박이니 좋은 소식을 기다려 주세요.”

    웃음을 흘린 마광이 연기처럼 길쭉하게 늘어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다.

    쿠쿵.

    삼각 진법 중간의 회선 시체가 느닷없이 벌떡 일어났다.

    두 눈은 아직 죽은 물고기 눈깔 같았는데, 입이 벌어지더니 검은 그림자로 변한 마광을 꿀꺽 삼켰다.

    마광을 품은 회선의 시체는 격렬하게 떨면서 두 손을 높이 들어 올리고 오른쪽 무릎을 살짝 굽힌 이상한 자세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시체의 몸 곳곳에 선규처럼 구멍이 열려 주변의 흉살기들을 빨아들이는 중이었다.

    그렇게 한달의 시간이 지나갔다.

    심연 바닥의 흉살기 폭풍이 사라지고 회선 시체는 기괴한 자세를 유지한 채 허공에 떠 있었다.

    한립은 의식으로 법력 파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회선 시체를 훑었다.

    마광의 기운을 발견할 수 없어 천마 계약이 아직 남아 있지 않았다면 회선 시체의 자양분이 되어 사라진 거라 여겼을 것이다.

    탄식하던 그가 손바닥을 펼쳐 금동을 불러냈다.

    “경지는 공고히 한 것이냐?”

    “아저씨가 준 단약을 먹었더니 그럭저럭 기운이 안정되긴 했어요.”

    금동은 조금 아쉬운 얼굴로 답했다.

    “태을경을 넘어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그러느냐. 명한선부에서 태을단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다투었더냐. 넌 태을단도 없이 겨우 거대 유골 절반을 먹고 태을경에 이르렀는데도 만족 못 하는 것이야?”

    한립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며칠 전인가 금동은 갑자기 깨어나서 자기가 태을경 초기에 이르렀다고 알렸다.

    태을경에 이르는 고비로 알려진 천인의 쇠락은 서금충인 금동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듯했다.

    “기왕 수행이 느는 거, 한 번에 태을 중기에 이르렀으면 좋았잖아요. 아저씨가 그 녀석을 상대할 때 더 도움이 되게요.”

    금동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만황에서 강적에 쫓겨 도망 다니면서 금동도 성격이 많이 성숙해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이어진 금동의 말에 싹 달아나고 말았다.

    “어, 저 시체도 좋아 보이는데 먹어도 돼요? 저걸 먹으면 태을 중기에 이를지도…….”

    “정순한 흉살기로 가득 찬 태을 회선의 시체까지 노리는 것이냐?”

    “하긴 아직 소화가 다 안 된 것 같은데 흰둥이가 잘 먹으니까 걔한테…….”

    금동의 말이 끝나기 전에 회선의 시체에서 호흡 소리 같은 게 들려왔다.

    훅……. 훅…….

    재빨리 고개를 돌린 한립은 시체의 가슴이 살아 있는 것처럼 기복이 생긴 것을 발견했다.

    게다가 언제 눈을 감았는지 눈꺼풀 아래의 눈알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언제 깨어났지? 악몽이라도 꾸는 건가?”

    금동이 눈을 크게 뜨고 의아해했다.

    한립은 조용히 시체를 주시했다. 명한선부에서 묵우 시체가 깨어날 때 보이던 현상과 비슷해서였다.

    ‘마광이 융합에 성공했다면 왜 아직 깨어나지 못하는 거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오래 고민하던 한립은 무언가를 떠올렸다.

    회선 시체가 깨어날 때 묵우가 복용했던 허원단이 생각난 것이다. 한립은 손바닥을 뒤집어 용 눈알 크기의 단약을 꺼내 들었다.

    그는 회선의 뺨을 움켜쥐고 입을 벌려 단약을 삼키게 하고는 멀찍이 떨어져서 반응을 살폈다.

    십여 초가 흐르고 커다란 트림 소리가 들리더니 회선이 입을 쩍 벌려 새까만 연기를 분출했다.

    그걸 본 한립은 금동을 뒤로 보내 보호하면서 연신술을 발동했다.

    “한 수사, 공격하지 마세요! 접니다.”

    회선 시체에서 다급히 마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하면서 몸을 오른쪽 왼쪽으로 기울여 보며 몸에 적응하고 있는 듯했다.

    “그걸 어찌 증명할 겁니까?”

    한립은 연신술을 거두지 않고 냉랭히 물었다.

    ‘마광’은 머뭇거리다가 양손으로 수결을 맺어 회백색 눈을 새까맣게 물들이고 입에서 검은 기운을 내뿜었다.

    검은 기운이 휘리릭 날아가 한립 앞에서 가죽 두루마리로 변해 떨어졌다. 바로 천마 계약을 맺은 계약서였다.

    마광은 아직도 연신술 금제가 몸 곳곳에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검은 두루마리를 삼켰다.

    “그 신중한 성격은 백만 년이 지나도 고치지 못할 겁니다.”

    “내가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면 수사가 계약을 맺은 상대는 아직 마량이었겠지요.”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계약을 맺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량 같은 녀석 보다는 한 수사가 훨씬 낫다는 확신이 듭니다. 하늘과 땅 차이랄까요.”

    마광이 실실 웃으며 분위기를 풀었다.

    “그런 말보다는 설명을 해주실 때입니다. 어째서 수행이 예상하던 것과 다른 겁니까?”

    여전히 날카로운 어조의 한립은 마광의 몸에서 금선급이 아닌 태을급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여전히 어조가 날카로운 한립은 마광의 몸에서 금선급이 아닌 태을급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바람 속의 등불처럼 기운이 불안정하기는 했다.

    금동도 그걸 보고 인상을 팍 쓰며 태을 초기의 위압감을 드러내 마광을 노려보았다. 그 모습에 마광은 두 손을 들어 올려 투항하는 자세를 취했다.

    “제발 오해 좀 마시라니까 그럽니다. 융합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회선의 몸 안에 들어와 보니 남은 힘이 대단하더군요. 까딱 잘못했으면 잡아 먹힐 뻔했는데 수사께서 적기에 단약을 주어 위기를 넘긴 겁니다.”

    “글쎄요. 마광 수사가 잡아 먹힐 뻔한 것처럼은 보이지 않던데요?”

    “수사도 잘 아시겠지만, 저는 원래 진선의 수행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몸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도 힘에 부쳐서 기운을 안정시켜도 금선 후기 정도의 실력밖에는 내지 못할 거예요. 태을경 실력은 기껏해야 아주 잠시만 쓸 수 있고 진짜 태을경 수사에 비해서는 못하겠지요.”

    한립은 의식 연계를 통해 상대의 말대로 기운이 점점 가라앉아 금선 후기 경지에 머무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들으니 마광 수사가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호법을 설 테니 기운을 안정시키시지요.”

    “고맙습니다.”

    한립의 말에 마광이 사양하지 않고 주저앉아 운공을 했다.

    * * *

    푸른 산맥 허공에 거대한 빛덩이가 떠 있었다.

    거대한 하얀 빛은 기이한 빛을 반짝여서 보는 이의 눈을 매혹시키면서도 기이한 힘으로 인근의 다른 요수들이 감히 다가오지 못하게 차단했다.

    그 한 가운데에 거대한 금색 딱정벌레가 있었다.

    바로 태을 서금선이었다.

    얼어붙은 것처럼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던 딱정벌레의 눈동자에서 하얀 소용돌이가 치고 있었다.

    그 소용돌이 속을 스치는 모습 중 하나는 거대한 딱정벌레가 충족으로 돌아가 충족 대군을 공격하는 수족들을 멸하고 대량의 재료와 보물을 빼앗는 장면이었고, 그 밖에 대다수는 다른 서금선을 찾아내 잡아먹는 것이었다.

    “으하하! 드디어……. 드디어 대라경을 회복했다! 고대하던 그 날이 되었구나!”

    충족 동부의 어느 밀실에서 몸부림치던 금색 딱정벌레가 가부좌를 튼 채 체구가 큰 사내로 변해 입을 열었다.

    각진 얼굴에 눈썹이 짙은 사내는 얼굴에 금색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환희에 찬 사내의 주변 허공이 쩍쩍 갈라지면서 유리처럼 깨져나간 것이다.

    푸른 산맥 위 하얀 빛덩이가 주술문자를 쏟아내더니 펑! 하고 터져버렸다.

    천천히 눈을 깜빡거린 금색 딱정벌레는 동공의 하얀 소용돌이가 사라진 채 경악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분명 이미 충족으로 돌아가서 수족들을 쳐부수고 대라경의 경지에 진입했을 텐데……. 어째서 다시 여기에…….”

    당황해 소리를 지르던 그는 금방 냉정을 되찾았다. 아직 살아 있는 동족의 기운이 느껴졌고, 이전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설마 환술에 걸려 있었단 말인가…….”

    금색 딱정벌레는 자신의 몸을 둘러보고 앞발로 허공을 갈랐다. 금빛들이 전방에 뭉쳐 원형의 진법을 이루었다.

    웅.

    무수히 많은 주술문자들이 깜빡거리는 게 무슨 비술을 펼친 듯했다.

    “벌써 20년이 지났다고?”

    딱정벌레는 난색을 보였고 눈에는 두려움이 차올랐다.

    오랜 세월 만황에 살아온 그는 이곳 상황을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잘 알았다.

    충족과 수족은 만황 구역 변두리의 약소 종족에 불과했고 진정으로 만황을 통치하는 것은 4대 왕족이었다.

    만황에서 가장 영기가 짙은 구역은 이 4대 왕족 세력이 나눠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금선과 태을급 존재들이 수도 없이 많은 것은 물론이고 사성(四聖)이라 불리는 대라경의 노조들까지 있었다.

    태을 후기에 이른 서금선은 두려울 것이 없어야 마땅하나 만황사성 만큼은 꺼려졌다.

    위치를 가늠해 보니 이곳은 4대 왕족 중 통천서족(通天鼠族)의 지역이었다.

    한립을 쫓느라 정신없이 여기까지 왔다가 누군가의 환술에 걸려 20년을 꼼짝 않고 있었다니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만황사성 뿐이었다.

    ‘천호족의 대라 노조가 손을 쓴 것인가? ……어째서? 그들의 영역에 함부로 들어온 것에 대해 경고하려고?’

    금색 딱정벌레는 마음이 복잡해졌지만, 곧 탐욕이 걱정을 이겼다. 금빛으로 변한 서금선은 어딘가를 향해 번개처럼 나아갔다.

    * * *

    심연 입구 근처의 바위에 금빛과 하얀빛이 떠서 강렬한 기운을 발산했다.

    바로 금동과 비휴였다.

    실력이 크게 늘었으나 그래도 하부의 흉살기에는 저항하기 어려워 위쪽에서 수련하고 있었다.

    심연 하부에는 한립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마광이 조종하는 태을 회선이 앉아 흉살기를 흡수하고 있었다.

    통통하게 살이 차오른 시체는 검은 장포까지 새것으로 변해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아저씨, 큰일 났어요! 그 녀석이 깨어나서 쫓아와요!”

    한립은 금동의 목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정확히 20년째군. 그 목소리가 거짓말을 하진 않았어.”

    마광을 힐끗 본 한립은 기운을 안정시키는 것을 방해하지 않고 푸른 빛으로 변해 홀로 올라갔다.

    이때 ‘마광’이 눈을 뜨고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잿빛 눈동자를 반짝였다. 한립은 비휴와 금동이 있는 바위에 올랐다.

    “아저씨…….”

    “금동, 서금선들이 이곳의 흉살기를 두려워하는 것이 맞느냐?”

    한립은 금동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고 물었다.

    “두려워하는 것까지는 아니고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해야 할 거예요.”

    “……따돌릴 수 있었다면 진작 그렇게 했겠지만 세월이 지나도 그쪽에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구나. 더는 고생하지 않도록 이곳으로 불러들여야겠다.”

    금동의 대답에 침묵하던 한립이 빙긋 웃음 지었다.

    “아저씨 수행도 늘었고 나도 태을경에 이르렀잖아요. 마광 그 아부쟁이까지 있으니까 모두 힘을 합치면 그 녀석을 죽일 수 있을 거예요!”

    금동이 한이 맺혔는지 표독스럽게 소리쳤다.

    “아니, 누님 저는 왜 빼놓으십니까…….”

    “흰둥이 너? 넌 한 사람 몫은 아니고 한 절반쯤 쳐줄게.”

    비휴가 작게 투덜거리자 금동이 그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희 실력이 크게 늘었다고 하나 태을 후기 서금선을 상대하는 것이니 방심할 수는 없다. 금동, 상대가 도착하려면 얼마나 걸리겠더냐?”

    “이 속도면 한 달 정도 걸리겠어요.”

    “한 달이라. 충분하겠어. 그동안 너희는 계속 수련하면 된다. 금동, 서금선의 행적을 주시하고 있다가 변화가 생기면 바로 알려주거라.”

    “맡겨만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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