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787화 (1,544/2,000)

1787화. 배식

*

한립이 복잡한 눈빛으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자, <현살명령공>에 의해 흘러나온 흉살기들이 거대한 빛기둥을 이루어 한립의 몸속으로 콸콸 흘러들었다.

선규를 뚫을 때보다 열 배는 빠른 속도였다.

대량의 흉살기가 홍수를 이루어 닫혀 있는 선규들을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놀랍게도 스스로 선규를 뚫으려 시도하고 있는 것이었다.

눈을 부릅뜬 한립은 어차피 꼼짝도 할 수 없었기에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벌써 3개의 선규가 스스로 뚫렸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그의 얼굴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체내의 경맥이 기운을 이기지 못해 부들부들 떨리면서 고통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현살명령공>은 더욱 빨리 운용되었고 녹색 그림자가 데려온 정순한 흉살기가 그가 지닌 흉살기 속으로 녹아들었다.

의식세계에 갇힌 녹색 쥐는 결국 날카로운 비명을 남기고 펑! 하고 터져 사라지고 말았다.

의식수롱을 거둔 한립은 이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는데 <현살명령공>만은 아직도 그의 통제를 받지 않고 미친 듯이 주변의 흉살기를 녹여 나머지 선규를 공략하고 있었다.

펑! 펑!

또 두 개의 선규가 더 뚫렸다.

이에 한립의 얼굴은 더욱 핏빛으로 물들고 입가에는 핏물이 새어 나왔다. 한립은 급히 선령력을 운용해 경맥을 보호하면서도 <현살명령공>을 막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날 때마다 펑펑거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한립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채 입에서 하염없이 피를 쏟았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106번째 선규를 뚫은 <현살명령공>은 아직도 미친 듯이 주변의 흉살기를 잡아먹고 있었다.

펑!

또 다른 선규가 뚫리는 소리에 한립은 울컥 피를 토하면서도 눈빛만은 밝아졌다.

웅웅웅웅.

이때, 107개의 선규가 공명을 하면서 주변의 천지원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천지영기들이 콸콸 쏟아져 들어와 정순한 선령력으로 변해 그의 경맥을 따라 힘차게 흘러갔다.

드디어 <현살명령공>은 흥이 다했는지 천천히 운용을 마쳤고, 한립은 힘이 풀려 절벽 바위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치료용 단약을 삼키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한참 뒤, 눈을 뜬 그는 얼굴색이 거의 돌아와 있었다.

그것은 거대 쥐 유골에 남아 있던 잔혼 혹은 오랜 세월을 거쳐 유골에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의식이 엄청난 흉살기를 품고 그의 의식세계에 침투한 위험천만한 경험이었다.

이런 어마어마한 흉살기 공격이면 태을경 수사라 해도 몸과 선령력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운 좋게 묵우가 내준 <현살명령공>을 익히고 있어 전화위복을 이루었다.

이로써 그는 막대한 흉살기를 얻어 실력이 한층 강해진 것은 물론 태을경까지 한 걸음을 앞두게 되었다.

과도하게 쌓인 흉살기에 걱정이 되기는 했으나 한립은 마음을 정리하고 거대 쥐 유골을 쳐다보았다.

유골에 남은 흉살기가 현저하게 줄어 있었다.

한립은 더 이상 유골에 접근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법결을 날려 주변의 진법을 이용해 흉살기를 더욱 줄여나갔다.

* * *

심연 입구 쪽의 절벽.

금동이 초조한 기색으로 절벽 바위를 오가며 수시로 심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누님,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니까요. 주인님은 분명 괜찮으실 거예요.”

백옥 비휴가 심심한 듯 바닥에 엎드려 중얼거렸다.

“네가 뭘 아느냐! 20년이 되기까지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아저씨가 돌아오지 않고 있는데 무슨 일이 없기는! ……안 되겠다, 내가 직접 가봐야지.”

금동이 얼굴을 찌푸리고 하는 말에 해 도인이 표표히 내려와 그녀를 막아섰다.

“차라리 내가 내려가 살피겠습니다. 괴뢰의 몸이니 이곳의 영향을 덜 받을 테고요.”

그 말에 금동이 무언가 답하려다 눈썹을 홱 끌어올리고 심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푸른빛이 흉살기를 뚫고 올라오고 있었다.

“아저씨, 이제야 나타나면……. 와, 수행이 늘었네요!”

불만을 털어놓던 금동은 한립의 기운을 감지하고 놀라워했다.

“금선경 최고봉……. 주인님, 태을옥선의 경지를 한 걸음 앞두셨군요!”

“한 수사, 심연 아래에서 기연을 얻으셨나 봅니다.”

그를 둘러싼 백옥 비휴와 해 도인도 한마디씩 했다.

“아저씨, 아래에서 찾은 귀한 보물을 혼자 먹기라도 한 거예요? 어, 그런데 눈동자가 왜 회색으로 변했어요?”

금동은 한립의 눈동자 색이 변한 것을 보고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말에 미미하게 표정이 달라진 한립은 손바닥에 수증기를 응결해 거울을 만들어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확실히 동공에 안개 같은 게 차올라 회선 묵우와 비슷하게 은회색을 띠고 있었다.

‘묵우, 그 늙은이에게 당했군. 회선의 <현살명령공>에 이런 부작용이…….’

겉으로는 무표정했으나 한립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왜요? 안 좋은 일이에요?”

“수행에 약간의 문제가 생긴 듯한데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주마. 심연 아래에서 발견한 것이 있는데 네게 도움이 될 것 같으니 같이 내려가 보자꾸나.”

“보물이에요?”

대번에 얼굴이 밝아진 금동이 좋아했다.

“저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데요?”

백옥 비휴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래로 내려가면 알 것이다. 해 도인께서는 계속해서 진법을 좀 살펴 주시지요.”

한립은 거울을 치우고 해 도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해 도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곧장 푸른빛으로 금동과 흰둥이를 감싸고 심연 아래쪽으로 몸을 던졌다.

거대 쥐의 흉살기를 흡수한 이후에 흉살기들이 그를 덜 배척해서 쉽게 내려갈 수 있었다.

다시 심연 바닥까지 내려간 한립은 무형의 힘으로 주변의 흉살기들을 밀어내고 빈 공간을 만들어 냈다.

그의 몸에서 금빛과 하얀빛이 빠져나와 금동과 흰둥이로 변했다.

“엄청난 흉살기…….”

막 모습을 드러낸 금동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 유골은…….”

백옥 비휴는 주변의 흉살기는 신경 쓰지 않고 거대 쥐 뼈대를 보고 기쁨에 차 외쳤다.

그제야 금동도 거대한 녹색 유골을 보고 당장 튀어 나가려는데 한립이 그녀를 낚아챘다.

“급할 것 없다. 유골의 흉살기를 제거해 두었다만 함부로 먹었다가 무슨 변화가 생길지 모르니 잘 살펴보고 먹거라.”

“아저씨, 저렇게 조금 남은 흉살기는 괜찮으니까 안심해요. 배고파 죽겠다고요……. 저걸 먹고 나면 수행도 확 오르겠죠?”

금동은 말을 하면서 입에 침이 잔뜩 고여 있었다.

“주인님, 저도 좀 나눠 먹으면 안 될까요?”

이때 백옥 비휴가 둘 사이에 머리를 들이밀면서 물었다.

“……흰둥아, 지금은 특수한 상황이다. 만일 저 거대 요수의 뼈를 금동이 섭취해서 경지가 한 단계 높아질 수 있다면 태을 서금선을 상대할 때 큰 도움이 되겠지. 이해할 수 있겠느냐?”

주저하던 한립이 고개를 저었다.

“아……. 그럼 알겠습니다.”

흰둥이가 실망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번 어려움만 지나가면 다른 것으로 보상해주마.”

한립은 그런 백옥 비휴의 머리를 툭툭 쳐주었다.

“아저씨 그럼 나 먹어요? 먹어도 되죠?”

기다리다 못한 금동이 고개를 돌려 확인했고 한립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동은 신이 나서 금색 딱정벌레로 변해 녹색 뼈를 씹어댔다.

아드득 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비휴는 부러운 눈빛으로 입맛만 다셨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금동이 다시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돌아와 손에 기다란 뼈를 들고 한립에게 다가왔다.

“으, 이빨 나갈 뻔했어요. 이 꼬리뼈는 대체 뭐예요?”

한립이 기다란 뼈를 받아 살피고 희색을 드러냈다.

“공간 보물……. 설마 거대 쥐의 저물 법기란 말인가?”

선령력을 주입하자 흘러나오는 강렬한 공간 파동에 한립은 더욱더 힘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녹색 뼈는 투명한 옥처럼 반짝이는 것 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아무래도 당장 연화시킬 수 없을 듯하니 나중에 천천히 연구해봐야 할 것 같았다.

딱정벌레의 모습으로 돌아가 만찬을 마친 금동이 배를 두드리면서 길게 트림을 했다.

“아아, 배부르다! 흰둥아, 남은 건 네 거다.”

금동은 남아 있는 뼈대를 가리키면서 대범하게 소리쳤다. 그 말에 백옥 비휴가 멍하니 있자 금동이 머리를 탁! 쳤다.

“뭐해? 내가 마저 다 먹어?”

“하지만, 누님…….”

“네가 날 누님이라고 부르는데 나도 이 정도는 해줘야지. 저 뼈가 얼마나 영양이 풍부한지 절반만 먹어도 배가 차네. 앞으로 이걸 소화 시키는데도 꽤 걸릴 거야. 네 뱃속에서 적잖은 선기를 먹어치웠으니까 그걸 돌려주는 셈 치지 뭐.”

금동의 말에 감동한 비휴는 곧장 움직이지 않고 한립을 올려다보았다.

“시키는 대로 하거라.”

“고맙습니다, 누님!”

백옥 비휴는 몸을 마구 부풀려 남은 백골을 깔끔하게 삼키고 다시 강아지 크기로 변했다.

“흰둥아, 한입에 물건을 삼키는 그 능력은 정말 부럽다!”

뒷짐을 지고 지켜보던 금동이 혀를 내둘렀다.

“자, 다 먹었으면 이제 연화를 시킬 때로구나.”

“그 말을 들으니까 갑자기 졸음이 몰려오는 것 같아요…….”

한립이 웃으며 하는 말에 금동이 하품을 하면서 손바닥 크기의 금색 딱정벌레로 변해 바닥에 내려앉았다.

한립은 그런 금동을 영수대 속으로 넣어 주었다.

“주인님, 저도 한동안 폐관 수련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흰둥이의 말에 그는 또 다른 영수대를 꺼내 비휴를 들여보냈다.

금동과 흰둥이가 순식간에 백골을 먹어 치우자 심연 바닥이 텅 비었다.

그런 바닥을 훑던 한립이 백골에 가려져 있던 자리가 녹색 별빛처럼 반짝이는 것을 보고 눈썹을 끌어올렸다.

그곳에는 팔뚝 길이의 반투명한 식물 열댓 뿌리가 자라고 있었는데 투명하고 얇은 잎과 녹색빛을 반짝이는 줄기를 갖고 있었다.

의식으로 식물들을 훑어도 특수한 기운을 느낄 수 없었지만 흉살기가 이렇게 진한 심연 바닥에서 자란 식물이 평범할 리 없었다.

그는 곧장 수십 개의 기다란 백옥함을 꺼내 녹색 식물들을 뿌리와 흙까지 퍼내서 조심스럽게 옮겨 담고 각각 은색 부적을 붙여 두었다.

“마광 수사, 나와 보시지요.”

“결정을 내리신 겁니까?”

그의 부름에 그림자 속에서 그와 꼭 닮은 모습의 마광이 씨익 웃으며 일어났다.

“회선 시체의 가치에 대해서는 이해를 했습니다. 강적을 앞둔 상황에서 도움만 된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지요.”

“한 수사, 안심하셔도 됩니다. 천마 계약을 맺었으니 서로가 강해지면 서로에게 좋은 일이니까요.”

마광은 기뻐하며 말했다.

“그 말은 사실이나, 나나 수사나 회선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못한 듯합니다. 혹시 모를 변고를 대비해 몇 가지 금제를 걸어 두어도 되겠습니까?”

한립도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야……. 당연히 됩니다.”

마광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선선히 답했다.

한립은 이마에 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는 의식의 힘을 끌어내 마광의 몸으로 보냈다.

그는 연신술을 발동해서 수정실들로 마광의 미간과 심장 그리고 단전 등 몇몇 주요 부위들을 공략했다.

“윽…….”

마광은 잠시 고통스러워하다 얼굴을 풀었다.

“되었습니다. 금제는 평상시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지만 만일 회선의 몸에 들어가 다른 분혼의 통제를 받거나 무의식중에 이상한 행동을 하면 저절로 발동될 겁니다. 일단 금제가 발동되면 나도 제때 막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고요.”

한립이 손을 거두고 의미심장하게 경고했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장담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가장 좋겠지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신외화신을 제련할 수 있는지 설명해 주시지요.”

마광이 입을 달싹여 제련법을 설명해 주자 한립은 상대가 내준 옥간 속의 내용과 비교를 하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다시 물었다.

3일 뒤, 삼각형의 진법이 심연 바닥에 펼쳐지고 한립과 마광이 진법의 좌우, 그리고 회선 시체가 중앙에 놓였다.

가부좌를 튼 한립과 마광이 시선을 마주치고 수결을 맺으면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후웅.

진법 곳곳에 박힌 흑수정들이 밝게 빛나고 회선 시체를 향해 검은 불길이 흘러 들어갔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