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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786화 (1,543/2,000)
  • 1786화. 분혼

    *

    한립은 흉살기로 회선 무기를 부릴 수 있다는 데 놀라 장창을 거두고 회색 천을 들어 올렸다.

    거위 털처럼 가볍고 구름을 만지는 듯 부드러운 천이라 들고 있다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았다. 그는 천을 살펴보다 흉살기를 움직여 주입해 보았다.

    몇 배로 커지면서 회색 광채를 발산한 천에서 검은 먹을 듬뿍 칠해 대충 그려 놓은 듯한 특이한 문자들이 떠올랐다.

    두껍게 변한 천은 여전히 부드럽게 움직이면서도 더없이 단단한 느낌을 주었다. 방어용 보물일 거라 판단한 그는 고개를 끄덕이다 천 표면의 무늬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익숙한 무늬였다.

    “그렇지!”

    한립은 은색 옥함을 꺼내 회색 천을 꺼내 들었다. 웅산이 지니고 있던 것과 약간 차이는 있었지만 엇비슷했다.

    “이것도 회계의 물건이겠군…….”

    한립은 흉살기를 회색 천에 불어 넣어 보았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에 잠시 의아해하다 더 많은 흉살기를 스며들게 했다.

    한참이 지나도 별 반응이 없자 흉살기를 거두려는데, 회색 천 표면에 보일 듯 말 듯 옅은 잿빛이 돌기 시작했다.

    길게 숨을 들이마신 그는 전력을 다해 체내의 흉살기를 천으로 쏟아부었다.

    회색 천이 점점 더 밝아지고 문양이 또렷해졌지만 아무리 흉살기를 불어 넣어도 어느 정도 이상으로는 발동되지 않았다.

    “흉살기가 부족해서 여기까지밖에 안 되겠군.”

    그는 동작을 멈추고 천들을 넣어 두었다. 짧은 시간 동안 연구한다고 정체를 밝힐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시간이 날 때 살펴볼 요량이었다.

    마지막으로 검은 옥함만이 남았다. 옥함에 붙은 회색 부적은 봉인에 쓰이는 것이었다.

    부적에 그려진 문자는 회색 천의 무늬와 비슷해 보였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부적에 법결을 던졌다.

    팟.

    부적에서 잿빛이 떠올라 법결을 흩어 버렸다.

    팟.

    다음으로 시간법칙의 힘을 담은 금빛이 회색 부적에 다가갔으나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도 흉살기를 끌어올려 부적을 건드리고서야 부적의 빛이 약간 어둑해졌다.

    일각 후, 펑! 하고 회색 부적이 떨어져 나오면서 검은 옥함이 저절로 열리더니 그 안에 들어있던 검은 가면이 드러났다.

    검은 가면은 바로 윤회전 윤회자들의 붉은 가면이었다.

    “용사(龍四)? 회선도 윤회전 사람이었단 것인가?”

    교삼이 그에게 주었던 윤회전 가면이 ‘용오’ 가면이었다.

    그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옥함을 닫아 거두고는 회선 시체를 쳐다보았다. 그때 마광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정말 운도 좋으십니다. 이런 곳에서 온전한 회선 시체를 다 얻으시다니요. 아마 생전에 태을경에 이르렀던 회선 같군요.”

    “생전에 대단한 수행을 지녔다 한들 지금은 어차피 시체가 아닙니까. 마광 수사께서 그리 말씀하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예전 마량을 따라다닐 때, 어느 유적에서 얻은 두루마리 조각에서 회선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안에 적힌 비술 중에 회선 시체를 이용해 신외화신을 만드는 제련법이 담겨 있었고요. 마량도 그걸 노리고 회선 시체를 얻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수사께서 우연히 온전한 회선 시체를 발견했으니 하는 말입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마광의 말에 한립도 구미가 당겼다. 명한선부 안에서 태을 회선인 묵우의 위력을 보아서였다.

    “제가 어찌 한 수사를 속이겠습니까. 회선들은 인족 수사와 달리 죽고 나서도 육체가 가진 힘이 금방 흩어지지 않고 대부분 남아 있습니다. 태을 회선의 시체를 손에 넣으셨으니 이걸로 화신을 제련하는 데 성공하시면 태을 서금선에 대응하는데 유용할 것입니다.”

    “제련법을 한 번 보여 주시지요.”

    한립의 요구에 그의 발밑에서 마광이 떠올랐다. 한립은 마광에게 하얀 옥간을 받고는 빠르게 그 내용을 기록해 돌려주었다.

    옥간의 내용은 일반적인 분신 제련법과는 달랐고 먼저 해결해야 할 조건들이 많았다.

    그중 하나는 제련하는 사람이 짙은 흉살기를 지니고 있다가 그것을 회선 시체의 주요 관절에 주입해 조종해야 했다.

    두 번째로는 제련하는 이의 혼백을 분열하는 분혼비술을 이용해 그걸 흉살기와 융합해 살혼(煞魂)으로 만들어 회선 시체 속에 융합시켜야 했다.

    “첫 번째 조건은 괜찮지만 두 번째 조건은 너무 위험해 보입니다.”

    “혼백을 분열하는 수법 자체가 위험 부담이 있는 일이니까요. 분혼을 살혼으로 변화시키면 그 부정적인 감정에 본체가 영향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회선이 지닌 힘은 수도자의 것과는 상극이라 평범한 분혼을 회선 시체 안에 집어넣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소멸하고 말 겁니다.”

    마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한 수사께서 살혼을 만들고 싶지 않으시다면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한립이 꺼리는 것을 보고 마광이 말을 이었다.

    “어떤 방법입니까?”

    “하하, 저를 분혼 대신해 회선 시체에 융합시키는 것입니다.”

    “수사를요?”

    “천외마두인 저는 형태가 없어 혼백과 아주 흡사하고 회선 체내의 역량에 저항력이 있어 체내에 머무르는 데 별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마광 수사, 영계에서 우리가 계약을 맺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아십니까?”

    “자주 깊은 잠에 빠져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만 년은 넘었겠지요. 그건 갑자기 왜 물으십니까?”

    마광이 움찔하며 물었다.

    “그리 오랜 세월 동안 함께 했으니 서로의 성정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수사는 내가 분혼술에 동의하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처음부터 스스로 회선의 몸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입니까?”

    한립은 상대를 응시하며 담담히 말했다.

    “정말 무엇도 숨길 수가 없군요. 제가 회선의 시체 속으로 들어가고자 한 것은 다른 마음을 품어서가 아니라 수사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입니다. 태을 서금선이 언제든 쫓아 올 수 있는 마당에 만일 수사가 잘못해서 죽어 버리면 저는 어찌 되겠습니까?”

    “오, 그게 다입니까?”

    “물론입니다. 한 수사께서는 이미 금선 후기에 이르렀고 금동과 해 도인도 금선급인데 저만 아직 진선경에 머물러 있지요. 이렇게 홀로 뒤처지니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마광은 한숨을 내쉬며 씁쓸하게 웃었다. 한립은 그런 마광을 지긋이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파앗.

    잠시 후 그가 손을 뻗어 푸른 빛의 실로 회선의 시체를 둘둘 말아 누에고치처럼 만들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요.”

    한립은 회선 시체가 발산하는 흉살기를 차단해 챙겼고 마광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거대 쥐 유골로 다가간 한립은 미간을 좁혔다.

    이 거대한 뼈도 흉살기의 근원 중 하나라 품고 있는 영력이 풍부하다고 해도 금동과 비휴에게 먹이기 좀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건 해결할 방법이 있었다.

    잠시 침음하던 그는 검은 진법 깃발과 원반을 꺼내 거대 쥐 유골 인근에 뿔 두었다.

    하루가 지나 거대 쥐 유골 주변에 호리병 형태의 진법이 펼쳐졌다.

    한립이 두 손을 펼쳐 법결을 던져 넣자 진법이 교차하는 네 부분에서 검은 빛기둥이 솟아올라 거대 쥐 유골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에 거대 쥐가 꿀렁꿀렁 발산하던 흉살기가 잠시 멈추었다가 검은 주술문자들이 떠올라 쿵! 하고 폭음을 냈다.

    흉살기가 몇 배나 빨리 발산되면서 심연을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이 진법은 여러 가지 다른 진법을 기초로 개조하여 만든 것이라 효과에 자신이 없었는데 잘 통하는 것을 보자 안심이 되었다.

    끼기긱…….

    그런데 그때, 거대 쥐 유골이 부르르 떨더니 뻥 뚫려 있던 눈구멍에 녹색 불길이 차올라 한립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이에 한립은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고 심장이 철렁했다.

    이전에 보았던 환영이 겹치면서 거대 쥐 유골이 살아 움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진법을 발동하던 것도 잊어버리고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푸확!

    돌연 거대 쥐 입안에서 짙은 녹색 그림자가 그를 향해 쇄도했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안 그래도 멀리 피하지 못한 한립을 따라잡고 몸에 박혀 들어가려 했다.

    콰르릉!

    그 순간, 천둥소리가 울리고 수많은 금빛 뇌전들이 한립의 몸속에서 빠져나와 굵직한 뇌전을 이루고 녹색 그림자와 충돌했다.

    쿠쿠쿠쿵.

    뇌전은 녹색 그림자와 충돌한 후 터져 태양처럼 주변을 밝혔다. 그리고 녹색 그림자는 십여 장 밖으로 튕겨 나갔다.

    그러나 녹색 그림자는 몸을 가누자마자 더 빠른 속도로 그를 향해 달려들며 중간에서 번득 사라졌다.

    한립은 곧장 금빛을 방출해 전력으로 공법을 운용했다.

    등 뒤로 진언보륜이 떠올라 금빛 파문을 방출해 금색 구역을 만들자 주변의 모든 것이 갑자기 고요해졌다.

    출렁이던 흉살기, 진동하던 심연 그리고 그와 겨우 한 장 거리에 있던 녹색 그림자까지 모든 것이 움직임을 멈춘 것 같았다.

    한립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녹색 그림자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시간법칙을 지니고 있지 않았으면 벌써 몸속으로 침투했을 것이다.

    그가 녹색 그림자를 살피려는데 갑자기 녹색 그림자에서 파동이 일더니 밝은 녹색빛이 주변의 금빛 파문을 물들였다.

    깜짝 놀란 한립이 무슨 반응을 보이기 전에 강대한 법칙의 힘을 폭발적으로 드러낸 그림자가 그를 향해 더없이 빠른 속도로 전진하면서 금색 파문을 길게 갈라버렸다.

    그러나 금색 파문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녹색 그림자에게도 힘든 일인지 천천히 빛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녹색 그림자는 외형도 점점 가늘어져 종잇장처럼 변했다가 나중에는 녹색 실이 되어 눈 깜짝할 사이에 공간을 뛰어넘었다.

    슉!

    한립이 손을 반쯤 들어 올렸을 때는 이미 녹색 실이 몸속에 들어와 있었다. 즉시 정순한 흉살기가 그의 몸에 퍼지기 시작했다.

    방대한 흉살기가 지나는 곳은 몸이 뻣뻣해져서 선령력을 전혀 일으킬 수 없었고 몸도 마찬가지였다.

    전신의 금빛이 빠르게 흩어져 사라지고 어두운 녹색 빛이 한립을 감쌌다.

    ‘이를 어찌한다.’

    한립은 마음이 무거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당황하지는 않았다. 이때 낄낄거리는 흉악한 웃음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의식세계에 흐릿하게 녹색 쥐가 나타나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고 있는 금색 소인에게 달려드는 중이었다.

    “죽고 싶으냐!”

    번뜩 눈을 뜬 금색 소인이 노호성을 터트리면서 두 팔을 교차해 보광을 번득이는 검 그림자를 날렸다.

    육신과 선령력을 움직일 수 없는 것뿐이지 의식세계 안의 방대한 의식의 힘은 그대로였다.

    촤악!

    녹색 쥐는 곧장 반 토막이 났다.

    하지만 반 토막이 난 녹색 쥐는 아무렇지 않게 두 덩이의 녹색 빛으로 변해 계속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인상을 찡그린 금색 소인이 두 팔을 움직였다. 사슬 두 줄기가 뻗어 나가 녹색 빛덩이들을 결박했다.

    그러나 사슬에 묶인 두 빛덩이는 힘껏 발버둥 치면서도 들릴 듯 말 듯 낄낄 웃어대고 있었다. 녹색 빛덩이는 어두웠으나 함유한 혼백의 힘은 엄청나서 두 사슬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금색 소인은 빠르게 수결을 맺어 두 사슬을 한곳으로 모으고 더 많은 수정 사슬들을 날려 보냈다.

    촤르릉!

    사슬들이 우리를 형성하는 의식수롱 술법이 녹색 빛덩이들을 안에 가두었다.

    녹색 빛덩이들은 다시 하나로 융합되어 녹색 쥐로 변하더니 화가 난 얼굴로 우리에 몸을 부딪치고 날카로운 이빨로 사슬을 공격했다.

    사슬 우리는 흔들리기는 해도 부서지지는 않았다. 이에 한립이 안도하는데 갑자기 이변이 발생했다.

    녹색 그림자가 데리고 들어온 정순한 흉살기가 통제를 잃고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체내의 선령력을 운용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간 쌓아둔 흉살기들이 정순한 흉살기를 감응하고 몰려들어 한립의 전신에 새까만 안개가 피어올랐다.

    쿠릉!

    녹색 흉살기가 합류하자 검은 안개는 미친 듯이 팽창했다.

    어쩐 일인지 <현살명령공>이 스스로 발동해 녹색 그림자가 데려온 흉살기를 빠르게 흡수하고 있었다.

    찌지직! 찍찍!

    이에 한립의 의식세계에 갇혀 있던 녹색 쥐가 겁에 질려 날카롭게 울어댔고 정순한 흉살기를 잃을수록 체형이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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