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5화. 바닥
*
잠시 아래쪽을 살피던 한립은 시험 삼아 손바닥을 그 속으로 집어넣어 보았다. 그러자 손바닥에 뼈를 찌르는 냉기가 침투해 파고들려 했다.
이에 한립은 맹렬히 몸을 떨었고 장벽에서 손을 빼내려 했으나 강력한 힘이 그의 손을 붙들어 좀처럼 뺄 수 없었다.
그는 곧바로 눈동자를 남색으로 물들여 그의 손을 흉살기들이 끌어당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파칙!
눈을 가늘게 뜬 한립이 손바닥에 금빛 뇌전을 일으켰다.
흉살기가 뭉쳐 만들어진 검은 실들은 벽사신뢰에 밀려났으나 아직도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 틈에 얼른 손을 뺀 한립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의 손에 빼곡하게 생긴 붉은 점들은 흉살기에 뚫린 자국이었고 거뭇거뭇하게 안개 같은 것이 어려 있었다.
파치칙!
다시 한번 금빛 뇌전이 손 전체에서 일렁이고 작은 구멍들이 빠르게 봉합되어 사라졌다.
한립은 내심 쓴웃음을 흘렸다. 조금만 늦게 빼냈어도 손에 큰 상처를 입을 뻔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흉살기가 공격성을 지녀서 내가 조종하지 않아도 체내에 파고드는구나. 이런 흉살기로 선규를 뚫는 게 쉽지만은 않겠어…….”
흉살기를 이용해 선규를 뚫는 것 자체가 위험한 술법이었는데 장벽 안의 흉살기들을 함부로 흡수했다가는 몸속에서 폭약을 터트리는 것처럼 육신과 의식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머뭇거리던 한립은 결국 마음을 정했다.
20년밖에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이곳에 남아 수련하기로 한 것 자체가 도박이었고 선택의 여지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심연에서의 수련으로 해가 뜨고 달이 지는 것도 모른 채 어느덧 십여 년이 흘러갔다.
심연 출구에 가까운 절벽 바위 위에 금동이 가부좌를 하고 앉아 양손을 동그랗게 모으고 있었고 그 옆에 백옥 비휴가 앞발로 턱을 받치고 엎어져 쿨쿨 잠에 빠져 있었다.
휭!
바람이 일고 위에서 금빛이 떨어졌다.
백옥 비휴는 고개를 들어 진법이 아직 멀쩡한지 점검을 마치고 돌아오는 해 도인을 보더니 다시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금동은 시종일관 눈을 감고 수련 중이었다.
쿠르릉…….
그때 심연 아래쪽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이어서 흉살기들이 심연을 뒤흔들고 차올라 그들이 있는 절벽 바위까지 자욱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제야 눈을 뜬 금동이 바위에서 폴짝 뛰어내려 긴장된 눈빛으로 아래를 살폈고 흰둥이도 일어나 그녀의 옆에 섰다.
“누님, 주인님이 혹시…….”
“아저씨…….”
금동은 흰둥이의 말이 끝나기 전에 걱정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콰르릉!
하늘에 돌연 천지원기들이 밀려들어 깔때기 모양을 이루고 심연으로 천지원기를 쏟아부었다.
인근 골짜기의 푸른 거목에 거대한 얼굴이 떠올라 심연 쪽을 보더니 뿌리가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산골짜기 안의 대지와 바위가 갈라지고 양쪽으로 빽빽하게 자라난 수목들이 물러나면서 푸른 거목을 위해 길을 터주었다.
거목은 의아하다는 얼굴로 백 리를 움직이더니 하늘 위의 웅장한 천기현상과 심연 아래에서 샘솟는 흉살기를 보고 경계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그 시각, 심연 입구 천여 리 아래 공간에는 한립이 금색 태양처럼 빛을 발산하면서 짙은 흉살기들을 십여 장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천지원기가 거대한 폭포처럼 떨어져 내려 그를 금빛 기운으로 둘둘 말고 소용돌이치면서 주위로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암흑 속에 갇혀 있던 심연 안이 금빛으로 차올랐다. 이런 기현상은 장장 3일 동안 계속되다가 점차 사라져 갔다.
* * *
3일 후, 맑은 포효소리가 울리고 황금색 고치처럼 둘둘 말려 있던 기운이 반으로 갈라지면서 한립이 튀어나왔다.
휘이잉.
심연을 채운 금빛이 그의 입속으로 빠르게 빨려 들어갔고 그의 등에서는 금빛 점 하나가 깜빡거리면서 남은 영기들을 흡수했다.
드디어 84번째 선규를 뚫은 것이다.
다른 선규들과 마찬가지로 구멍 가장자리에 검은 흉살기가 남아 있었고 이전보다 더 짙고 선명했다.
한립은 금색 고리를 띄워 4백여 개의 시간보문들이 눈부신 빛을 내면서 18가닥의 시간정사에 휘감겨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의 손짓에 시간정사 18가닥이 바늘처럼 꼿꼿하게 서서 그의 손가락을 휘감고 반지처럼 변했다.
“<진언화륜경> 4성 공법을 수련해 이렇게 많은 시간정사가 생길 줄이야. 진언보륜의 위력이 강해져 나중에 서금선을 상대할 때 도움이 되겠어.”
그가 진언보륜을 체내로 돌려놓자 금빛이 흩어지고 주위의 짙은 흉살기들이 다시 자욱하게 퍼져 심연 안이 어둑해졌다.
* * *
3일 동안 휴식을 취하다 눈을 뜬 한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람이 말한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이제 해 도인 등과 합류해서 대응방안을 상의해야겠어.”
고개를 들어 심연 위쪽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의식의 바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수사, 여기까지 왔는데 심연 바닥에 대체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마광 수사, 내가 외부와의 감응을 단절시켜 두었을 텐데 여기가 어딘지 어찌 안 것입니까?”
움찔한 한립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절대 저를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수사의 체내에 흉살기가 돌연 폭증해서 외부와의 연계가 강해진 것이니까요.”
“흉살기? 마광 수사는 천외마두인데 흉살기와는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하하, 흉살기는 인족이나 요수만의 힘은 아닙니다. 살생하는 자라면 누구나 흉살기를 응결하게 되지요. 우리 천마족이 그런 부정적인 힘에 인족보다 더 민감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마광 수사, 갑자기 심연 바닥을 살펴보자고 제안하다니 무언가 알아낸 것이 있나 봅니다.”
한립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자신과 마광의 상태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조금 안심했다.
“아……. 솔직히 말씀드리면 희미하게 아래쪽에 무언가 무척 특별한 것이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저는 그냥 의견을 낸 것이니 한 수사 생각에 아니다 싶으면 그냥 올라가시지요.”
“……마광 수사께서 무언가를 발견했다니 내려가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한립은 잠시 고민하다 심연 아래로 내려갔다.
수백 리를 내려가자 흉살기가 더욱 농후해져서 그의 수행과 의식의 힘으로도 불편함을 느꼈다.
이에 흉살기가 견딜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르면 그냥 돌아가려고 하는데 시야에 거대하기 짝이 없는 녹색 뼈대가 들어왔다. 그 크기가 태을 서금선 이상이었다.
한립은 그 골격 아래에서 드디어 심연의 바닥을 볼 수 있었다. 내려온 거리를 계산해 보니 2천 리에 달하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새까만 흉살기를 풀풀 휘날리는 골격은 흉살기 환영에서 보았던 녹색 거대 쥐와 비슷했다.
“이게 그 거대 쥐의 유골이란 말인가?”
거대 쥐 미간에서 뒤통수로 통하는 흔적으로 보아 무언가에 의해 머리에 치명상을 입어 죽은 듯했다.
거대 유골에는 영력 파동이 남아 있지 않았으나 그래도 거대한 산악을 앞에 둔 것마냥 위압감이 느껴졌고, 특히 다른 뼈보다 색깔이 짙은 암녹색 송곳니 두 개는 법칙 파동을 발산했다.
거대 쥐 유골을 살피던 한립은 그 머리 뒤쪽에 누워있는 보라색 장포를 입은 사내의 시체를 발견했다.
“저건…….”
시체는 아직 사람을 모습을 온전히 갖추고 있었는데 피부가 어두운 보랏빛으로 변하고 바싹 말라 부식된 의복 위로 검은 먼지 같은 알갱이들이 쌓여 있었다.
거대 쥐 머리를 빙 돌아 다가가려던 한립은 강렬한 흉살기가 덮쳐와 어쩔 수 없이 움직임을 멈추고 시체를 살폈다.
사내는 피부가 쪼글쪼글 말라붙어 노인처럼 보였지만 얼굴을 자세히 살피니 나이가 많이 든 것 같지는 않았다.
마치 죽으면서도 한이 남았는지 눈을 부릅떠 눈동자가 죽은 물고기처럼 회백색으로 변해 생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회선……. 그래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던 거야.”
눈을 반짝인 한립이 중얼거렸다. 자포 사내의 시체는 명한선부에서 본 묵우와 마찬가지로 회선이었다.
한립은 사내와 거대 쥐 시체를 이리저리 오가면서 심연에 가득한 흉살기의 근원이 이 두 시체라고 확신했다.
한립은 거리를 두고 회선 시체를 빙 돌면서 사내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작은 상처가 암녹색으로 썩어들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거대 쥐와 회선은 이곳에서 전투를 벌이다 동귀어진한 것 같았다. 2천 리에 달하는 심연 자체가 그들이 벌인 전투 때문에 만들어진 지형일 수도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이 지났을 텐데, 유골에서 아직도 강렬한 파동이 느껴져. 금동에게 먹이면 수행을 높일 수 있지 않을까?”
한립은 거대 쥐의 송곳니를 보다가 청죽봉운검을 불러냈다.
챙!
강렬한 검빛이 송곳니 아래쪽을 공격하자 암녹색 빛이 확 튀었다. 암녹색 빛은 강력한 부식 기운을 지니고 있어 한립은 푸른빛을 일으키고 소매를 저어 그것들을 밀어내야 했다.
그러나 암녹색 기운이 흩어지고 한립은 당황하기보다는 도리어 기뻐했다.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지만 청죽봉운검에 공격을 당하고도 멀쩡하다면 분명 귀한 보물이었다.
이번에는 청죽봉운검 세 자루를 하나로 합쳐 금빛 뇌전을 두르고 송곳니를 공격했다. 그러자 암녹색 송곳니가 거대 쥐의 입에서 뚝 떨어져 내렸다.
장검을 거두고 그것들을 저물대 안에 넣어둔 한립은 회선 시체로 다가가 훑어보았다.
보라색 장포는 귀한 물건처럼 보였는데 이미 복구가 힘들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그의 손에서 푸른 빛이 날아가 시체의 몸을 뒤졌다.
탁!
회색 보따리 하나가 시체에서 떨어져 나오자 그의 눈이 밝아졌다. 보따리는 저물법기였고 그 안에서 많지는 않지만 몇 가지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엇!”
무엇이 들어 있나 살피던 그가 주먹 크기의 검은 수정돌 몇 개를 보고 탄성을 내뱉었다.
새까만 수정돌은 강렬한 법칙 파동을 내뿜는 허원단의 주재료 흑수정이었다. 흑수정의 광택이나 품고 있는 법칙 파동이 예전에 교삼이 넘겨준 흑수정보다 훨씬 나았다.
나머지 물건들은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었으나 3개의 물건은 흑수정 이상의 강렬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단단하고 얼룩덜룩한 회색의 동그란 뼈는 잿빛 무늬가 있었는데 무엇의 뼈인지 알 수 없었으나 꽃잎마다 핏빛 문양이 들어간 새까만 꽃은 언뜻 보면 웃고 있는 괴이한 얼굴처럼 보였다.
마지막으로 병에든 회백색 액체는 표면에 한기가 어린 잿빛 화염이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워낙 기운이 특이하고 들어 보지 못한 종류의 재료들이라 회계의 물건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립은 재료들을 챙기면서 마지막 남은 2개의 선기와 검은 옥함을 내려다보았다.
먹처럼 새까만 장창은 양식이 고풍스러웠고 창끝에 희미하게 붉은 흔적이 있어 살기가 하늘을 찔렀다.
또 다른 선기인 회색 천은 잠자리 날개처럼 얇았고 별 무늬가 수놓아져서 회색빛을 반짝였다.
몸을 굽혀 장창을 들어 올리던 그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그것은 중수진륜에 버금가는 육중한 무기였다.
휘휘휙!
검은 장창을 살짝 휘둘러보니 화려하게 잔상이 폭발하며 주변을 웅웅 울렸다.
“좋은 창이로다!”
그러나 선령력을 주입해 보아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의아해하던 그는 곧 이유를 알아냈다.
회선 체내의 힘은 선령력이 아니기에 그들이 쓰는 선기도 선령력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유감스러웠지만 한립은 검은 장창을 몇 번 휘둘러 보다 넣어 두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장창 끝에 희미하게 검은빛이 떠올랐다.
무의식중에 체내의 흉살기가 흘러든 덕이었다.
“흉살기로 회선의 무기를 발동할 수 있단 말인가?”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흉살기를 움직여 보았다.
쿵!
축적된 방대한 흉살기가 안개처럼 그를 감싸고 천천히 검은 장창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검은 장창은 즉시 검은빛을 밝게 발했다. 창끝의 붉은 흔적이 핏빛 실들을 흘려보내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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