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4화. 선인들
*
핏빛 공간 안.
퍼퍼펑!
녹색 거대 쥐의 몸속에서 돌연 눈을 찌를 듯한 수정빛이 터지면서 방대한 짐승의 몸을 찢어 놓았다.
허공에 나타난 한립은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와 눈부신 수정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수결을 맺은 그의 두 눈에서 수정빛이 응결돼 거대한 검을 이루고 허공을 갈랐다.
쿠쿵!
핏빛 공간이 갈라지면서 한립은 다시 어두운 심연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가까운 암석 위에 앉아 가볍게 숨을 내쉬고는 방대하고 정순해진 의식의 힘을 감응해보았다.
지금의 그에게는 주변의 자욱한 흉살기 음풍도 전혀 방해되지 않았다. 잠시 후 눈을 뜬 그는 미간에서 수정빛을 반짝였다.
휭.
반짝이는 검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튀어 나가 심연 고공으로 솟구쳤다.
키하악!
고공의 구름 속으로 지나가던 진선경 푸른 매가 번개처럼 날아든 검 그림자에 머리를 맞고 참혹한 비명을 질러댔다.
잿빛으로 변한 푸른 매는 기운을 잃고 고꾸라져 나무 요수가 있는 수풀 속으로 처박혔다. 고요하던 수풀 속에 덩굴들이 깨어나 순식간에 푸른 매를 감싸고 조여 들어갔다.
이에 한립은 무척 기뻐했다.
의식의 힘이 크게 늘어 염검결 공격의 위력이 태을 서금선에게 써먹어도 될 만큼 강해졌기 때문이다.
다른 의식 공격 수단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그는 미간에서 반짝이는 사슬들을 뿜어서 우리를 만들었다. 검은 주술문자들이 아른거리는 사슬 우리는 수정빛과 검은빛이 어우러져 기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 * *
심연 바깥의 숲 변두리.
커다란 비취색 거목의 나무 기둥에는 기이하게도 얼굴이 있었다.
풍성한 가지와 이파리를 드리운 거대 얼굴은 눈을 감고 고른 숨을 내쉬면서 잠에 빠져 있는 듯했다.
그때 거목 인근 허공에 파문이 일고 수정 사슬 몇 개가 나타나 그 속으로 스며들었다.
크에에엑!
별안간 눈을 부릅뜬 비취색 거목의 얼굴이 괴성을 지르면서 굵은 가지들을 팔처럼 휘둘렀다.
그 위력은 태을급에 가까웠는데 가지에서 흘러나온 녹색 빛들이 주변을 갈랐다.
쿠콰쾅!
하지만 비취색 고목의 난동은 오래지 않아 멈추었고 꽁꽁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거목 깊숙이 녹색 안개가 자욱한 곳에 나무 인간의 모양을 한 혼백이 수정 사슬 우리에 갇혀서 외부와 떨어져 있었다.
나무인간 혼백은 대노하며 우리를 공격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 * *
흉살기가 가득한 심연 깊은 곳.
한립 옆의 허공에 수정 사슬 몇 개가 나타나, 그의 머릿속으로 돌아 들어갔다. 안색은 창백해도 분명 즐거워하는 얼굴이었다.
사슬 우리는 연신술 4성을 수련하면 펼칠 수 있는 ‘의식수롱(意識囚籠)’이라는 비술로 적의 혼백을 가둬 잠시 혼백과 육체를 격리하는 공격이었다.
조금 전 태을급 나무 요수도 당했으니 그 위력이 얼마나 강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한립은 고르지 못한 호흡을 정돈하고 안색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위력이 강한 만큼 의식 소모도 커서 의식의 힘이 3할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의식을 충만하게 회복하려면 한 달은 휴식을 취해야 할 터였다.
한립은 검은 옥간을 꺼내 의식을 불어넣었다. 그 안에 기록된 작은 글자들은 연신술 5성의 구결이었다.
원래는 흉살기로 선규를 뚫으려 했지만 연신술 수련이 더 효과가 크다면 계획을 변경하는 것이 맞았다.
* * *
심연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하얀 산봉우리 위.
푸른 돌을 깔아 만든 광장 중앙에 네모난 돌 탁자가 놓여 있고 사면에 각각 색깔이 다른 돌의자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돌의자 위에 세 명이 앉아 있었다.
검은 장포를 걸친 새까만 피부의 청년은 가느다란 눈썹과 눈 그리고 머리에 솟은 두 개의 은백색 뿔이 차가운 느낌을 자아냈다.
키가 크고 마른 백포 사내는 잘생긴 외모에 간간이 금발이 섞인 백발을 하고 있었고, 마지막 새빨간 지팡이를 쥐고 있는 노인은 붉은 머리에 등이 굽어 있었다.
그들이 앉은 돌탁자 위로 물로 이뤄진 하얀 거울이 하늘 높이 수정빛을 쏘아 올렸다. 놀라운 천기현상을 감응한 거울에는 어두운 협곡 같은 곳을 흐릿하게 비추고 있었다.
“여기까지 파동이 전해지는 것을 보면 상당한 천기현상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습니다. 누군가 대라경이 이른 것일까요?”
흑포 청년이 천천히 입을 뗐다.
“대라경에 이르렀다고 보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모종의 의식 비술을 익힐 때 나타나는 현상 같군요.”
백포 사내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미간을 좁힌 흑포 청년이 그를 향해 코웃음을 치는데 백포 사내는 홍발 노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 형 생각은 어떠십니까?”
“확실히 이상하기는 하지만 곡 수사의 세력 범위 내에서 벌어지는 일이니 약조에 따라 우리는 참견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홍발 노인이 머리카락을 넘기며 입을 열었다.
“오늘도 그렇고 곡 수사는 겨우 백만 년에 한 번 있는 모임을 몇 번이나 빠졌습니다. 거기다 그의 영지에서 이런 해괴한 일까지 벌어지는데 뭘 하는지 모르겠어요.”
백포 사내가 고개를 저으면서 어쩔 수 없는 인물이라는 어투로 말했다.
“원체 비밀이 많은 사람이니 신경 쓸 것 있겠습니까.”
홍발 노인은 허허 웃어넘겼다.
“솔직히 류 형이 지금 남의 영지 일까지 신경 쓸 틈이 있습니까? 암성산맥의 어느 일족이 갑자기 그곳의 충족 영지를 전부 빼앗았다는데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흑포 청년이 갑자기 화제를 돌리며 냉랭히 따졌다.
“좌 형께서 무슨 일로 저를 그리 못마땅해하시나 했더니 그 일 때문이었군요. 수사나 저나 후인들이 수천수만인데, 억만리가 넘는 만황에 퍼져 사는 그들을 어찌 일일이 관리하겠습니까? 서로 경쟁하고 흥망성쇠를 겪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구속할 이유가 없지요. 혹여나 그 일로 마음이 쓰이시면 좌 형께서 사람을 보내 다시 빼앗아오시면 그만입니다.”
백포 사내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렇다면, 오늘 나눠야 할 이야기는 다 한 것 같습니다. 저는 가보렵니다.”
흑포 사내가 벌떡 일어나 허공으로 스며들었다.
“좌 형의 성격이 급한 것이 어디 하루 이틀입니까? 류 형은 너무 개의치 마세요. 저도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백만 년 후에 다시 뵙지요.”
홍발 노인도 일어나서 지팡이를 휘둘렀다.
삭!
허공에 하얀 흔적이 벌어지며 공간통로가 나타나 노인을 삼키고 사라졌다.
“……녀석이 담도 크구나. 가랬더니 그 자리에서 수련해? 그래, 류아가 그리 믿고 따르는 인족 ‘오라버니’가 그럴 능력이 되는지 어디 지켜보마.”
입가를 끌어올린 백포 사내의 말에 하얀 물 거울이 펑! 하고 터져 수정빛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그 사이로 백포 사내도 사라졌다.
* * *
십여 일 후.
안 그래도 동급 금선의 의식을 월등히 뛰어넘던 한립은 연신술 4성을 대성하고는 의식의 힘이 크게 늘어 5성 공법을 익힐 조건이 되었다.
그러나 5성 공법은 무척 난해했고 몇몇 부분은 무턱대고 수련하기에는 위험해 보여서 함부로 시도할 수 없었다.
한립은 흉살기가 만연한 환경에서 의식에 자극을 주어 수련했던 것을 참고해서 만일 더 강력한 음풍이나 음혼이 있다면 의식을 더욱 강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결정을 내린 그는 옥간을 회수하고 일어나서 더 깊은 곳의 심연으로 내려갔다.
‘이런…….’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의 예상과 달리 음풍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려갈수록 기세가 약해졌기 때문이다.
흉살기는 짙었으나 사람의 의식에 위해를 끼치는 음풍이 불지 않아 환상에 빠지거나 하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실망한 그는 다시 음풍이 가장 거센 곳까지 올라와 바위에 자리를 잡고 5성 연신술에 도전해 보았다.
반년 후.
눈을 뜬 한립은 울적해 보였다.
반년 동안 잠도 자지 않고 수련을 했는데 진전이 거의 없었다. 길게 숨을 내쉬며 답답한 마음을 털어 버린 그는 다시 수결을 맺었다.
주변의 짙은 흉살기들이 즉시 벌떼처럼 달려들어 그를 감싼 뒤, 그의 귓가에서 무수히 많은 짐승들이 처량하게 울부짖었고 체내로 차갑고 흉포한 기운을 불어넣었다.
한립은 일부러 그 기운을 막지 않았다.
짙은 흉살기가 체내에서 난동을 부려 전신의 경맥이 찌르는 듯 아프고 미세한 칼날들이 몸속에서 요동치는 것 같았다.
그는 얼른 수행 증진용 단약을 복용하고 천천히 <현살명령공>을 운용했다.
후웅!
체내에 축적된 흉살기가 격발되면서 전신에 짙은 검은 빛이 떠올랐다. 검은빛은 주변의 흉살기와 융합되어 소용돌이치면서 흉흉한 기운이 흡수되는 속도를 높였다.
흉살기의 침식에 마치 검은 안개 옷을 걸친 듯 보이는 한립은 무수히 많은 바늘이 피부를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현살명령공을 운용해 모은 흉살기들이 홍수를 이루었다.
끙! 신음을 흘린 한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흉살기들이 산발적으로 몸을 돌아다닐 때는 그래도 참을만했는데 한곳으로 결집해 돌아다니자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상황이 다급했기에 어떻게든 흉살기를 이용해 더 많은 선규를 뚫어야 했다.
“아직……. 부족해…….”
극심한 고통을 참으면서 그는 흉살기를 사납게 움직여 선규를 하나씩 뚫어나갔다.
* * *
3달이 넘는 시간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심연 속에서 기다란 포효소리가 울려 퍼졌다.
입구에서 천여 리 정도 떨어져 있는 한립의 어깨뼈 아래로 작은 소용돌이가 천지원기를 콸콸 빨아들이다가 서서히 멈추었다.
금빛이 사라지고 그곳에 남은 것은 62번째 선규였다.
의식으로 살피니 선규에는 대량의 선령력 뿐만 아니라 주변의 검은 흉살기 가닥도 훨씬 선명해져 있었다.
확실히 체내의 흉살기로 뚫은 선규는 다른 것들과 달랐다.
한립은 근심을 억누르고 진언보륜을 불러내 시간도문이 또 두 개 늘어난 것을 확인했다.
그는 가볍게 탁한 공기를 뱉어내고 시선을 새까만 심연 아래쪽으로 돌렸다. 위쪽 흉살기는 그가 모조리 흡수해서 아래쪽에서 흉살기가 빠르게 차오르고 있었다.
한립은 단약을 먹고 기운을 조정하고는 아래쪽으로 빠르게 내려갔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흉살기가 짙고 진득해져서 그가 처음 멈춰서 수련했던 곳보다 음풍이 강해졌다.
다시 요수들의 시체와 피가 산과 바다를 이루는 환상이 보이기 시작했으나 이미 연신술 4성을 대성했기에 계속해서 하강할 수 있었다.
30리를 더 내려가니 음풍은 다시 줄어들고 흉살기만 밀집되어 있었다. 단단하게 뭉쳐 있는 흉살기 때문에 내려가기 힘들어졌을 때 이변이 발생했다.
허공에 녹색빛 알갱이들이 몰려들었고 전에 보았던 녹색 거대 쥐 환영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체구가 몇 배나 더 커진 거대 쥐는 털과 피부가 다 타들어 가 있고 두 개의 거대한 눈알은 당장이라도 굴러떨어질 듯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찌직!
거대 쥐는 날카롭게 울부짖으며 한립을 향해 날아들었다. 거대 쥐가 날아들자 지독한 피비린내가 풍겨와 후각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진작 이런 일이 생길 거라 예상했던 한립은 피하지도 않고 속으로 연신술 구결을 읊으면서 벼락처럼 기합을 넣었다.
강대한 의식의 힘이 한여름의 폭우처럼 의식세계를 씻어내 거대 쥐 환상도 쿵! 하고 흩어져 버렸다.
잠시 멈추었던 한립은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갔다.
더 정순하고 진한 흉살기를 흡수할수록 앞으로 선규를 뚫는 데 도움이 되어 수행을 빠르게 늘릴 수 있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기에 최대한 실력을 높여야 살아날 수 있다.
그는 수백 장을 더 내려간 후에야 어쩔 수 없이 멈춰 섰다. 이번에 그를 막아선 것은 환상이 아니라 극한의 흉살기였다.
아래쪽에 뭉쳐진 흉살기들은 이미 안개 형태를 넘어서서 검은 먹을 굳혀 만든 장벽 같았다.
이 장벽 안의 흉살기는 그의 주변을 흐르는 것과는 분명히 무언가 달랐는데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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