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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783화 (1,540/2,000)

1783화. 침식

*

일각 후.

절벽에서 튀어나온 어느 널찍한 바위에 내려선 한립은 소매를 털어 수십 구의 백골 잔해들을 심연 아래쪽으로 쓸어버렸다.

이미 입구에서 천장 아래였다.

“아저씨, 여기는…….”

주변을 둘러본 그가 해 도인, 금동, 비휴를 불러내자 금동이 불편한 기색으로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아주 짙은 흉살기군요.”

해 도인도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심연 안이다. 더 내려가면 흉살기의 침식을 받을 수 있으니 내가 아래쪽에서 수련하는 동안 이곳에 머물면 된다.”

“아저씨도 안심하고 수련해요! 이곳은 우리에게 맡겨두고요!”

“해 도인, 만일에 대비해 저를 도와 진법을 설치해 주셔야겠습니다.”

한립이 금동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해 도인을 향해 말했다.

“알겠습니다.”

해 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 이곳은 너무 음산한데 별문제 없겠죠?”

흰둥이가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심연의 흉살기가 짙어 우리가 힘든 만큼 다른 만황 짐승들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의식으로 조사를 해보았지만 살아 있는 생명체의 기운을 감지하지 못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야.”

한립의 말에 흰둥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동, 혹시 모르니 내가 수련하는 동안에도 항상 태을 서금선의 동향을 주시해야 한다. 무슨 변화라도 생기면 즉시 내게 알리도록 하고.”

“그럴게요!”

금동은 서금선이라는 세 글자에 몸을 부르르 떨고 얼른 답했다. 한립은 해 도인에게 진법에 관해 설명하고 함께 심연 양쪽의 벽을 오가면서 바삐 움직였다.

“거령이란 요녀를 따라 다닐 때도 많이 싸웠지만 대부분 누군가를 쫓아가 죽이는 일이었는데, 아저씨 곁으로 돌아온 후로는 긴장할 일이 많다니까.”

금동이 그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후회하시는 거예요, 누님?”

그 소리를 들은 흰둥이가 떠보듯 물었다.

“매일매일 짜릿하고 재미있는데 후회는 무슨? 그리고 아저씨가 누구야,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금동이 그의 머리를 탁! 치면서 웃자 비휴도 따라 웃음 지었다.

* * *

한립은 심연 아래로 내려가 빛이라고는 전혀 들지 않는 곳에서 실체화된 흉살기에 둘러싸였다.

흉살기를 이용해 선규를 뚫는 그도 호흡이 갑갑하고 몸이 불편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그리고 흉살기가 더욱 자욱해지는데 산 벽 양쪽의 짐승 유골들은 줄어가고 있어 한립의 눈에는 의혹이 가득했다.

거의 백 리를 내려가자 흉살기가 요동치면서 음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음산한 바람 속에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주변에 검은 얼음이 껴있었다.

‘……!’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검은 얼음에 뒤덮인 한립은 사나운 살심이 머릿속에 밀려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눈앞이 핏빛으로 물든 그는 주변에 수많은 요수 시체들이 산처럼 쌓인 환영을 보면서 처량한 비명과 귀곡성을 들어야 했다.

한립은 미간을 찌푸렸을 뿐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흉살기가 너무 짙어 마음을 어지럽히는 거라 판단한 그는 진작부터 연신술로 의식을 보호하고 있었다.

눈을 감은 그의 머리로 청량한 기운이 흘러 들어가 주변의 환영을 밀어냈다.

음산한 바람을 타고 귀곡성과 시체들의 고약한 냄새가 전해졌지만 연신술을 몇 번이고 운용해서 방대한 의식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푸른빛을 반짝여 전신에 어린 검은 살얼음을 깨버리고 심연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연신술을 익히지 않은 다른 금선 중기 수사가 이곳에 왔다면 환영에 취해 미치거나 죽었을 것이다.

어두컴컴한 심연은 여전히 바닥이 보이지 않았고, 흉살기가 형성한 바람이 의식을 방해해서 멀리까지 살피는 것은 무리였다.

그는 더 아래로 내려가려다가 문득 희색을 드러냈다.

방금 전 연신술로 환영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면서 연신술이 약간 진보한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몇 년을 고되게 수련에 매진한 것보다 오히려 효과가 좋았다.

한립은 침음했다.

흉살기로 가득 찬 이곳은 의식을 자극해 위험한 만큼 연신술 수련에 도움이 되었다.

그저 흉살기를 이용해 선규를 뚫을 심산으로 찾은 곳이 연신술 수련에도 도움이 되다니 반가운 일이었다.

바깥세상에서 이렇게 짙은 흉살기는 보기 어려웠는데 도대체 저 아래 무엇이 있는 것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잠시 후, 한립은 신중한 얼굴로 아래로 더 내려갔다.

이번에는 십여 리정도 내려가자 흉살기가 이룬 음풍이 강해져 귀 옆에서 요수들이 울부짖는 것만 같았다.

그 자리에 멈춘 한립은 의식세계를 보호하던 연신술을 일부러 느슨하게 풀었다.

주변의 사나운 기운이 콸콸 흘러들어 눈앞이 뿌옇게 변하고 시체가 산을 이루고 그 피가 흘러 바다가 되는 환영이 생생하게 펼쳐졌다.

한립은 이번에도 연신술을 극성으로 발동해 머릿속에서 환영을 지우려 했다.

* * *

반나절이 지나 눈을 뜬 한립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대로 연신술이 늘어 있었다.

한립은 그 자리에서 잠시 기운을 추스르고 더 아래로 내려갔다.

몇 개월 뒤, 한립의 연신술은 4성 최고봉에 이르렀다.

그는 절벽에 튀어나온 암석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대충 가늠해봐도 입구에서 천리는 내려왔는데 아직도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암석에서 몸을 날린 그는 얼마 가지 못해 눈을 크게 떴다.

심연이 갑자기 좁아지면서 흉살기들이 몰려들어 크고 작은 소용돌이를 이루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불어 닥치는 흉살기 음풍이 어찌나 맹렬한지 연신술을 거두지 않았는데도 의식의 영향을 받았다.

이에 움직임을 멈추려던 그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바람기둥이 날아들었다.

찰나의 순간 연신술의 방어를 뚫고 흉살기 음풍이 한립의 의식세계를 채웠다.

눈에 핏빛이 어린 그는 어느새 환영 속에 빠져 수많은 요수의 백골과 시체가 핏빛 바다에 잠겨 있는 세상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공기 중에 가득한 구역질 나는 피비린내에 질끈 혀끝을 깨물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연신술로 의식을 보호할 수 있었다.

최선을 다해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몸속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처럼 가슴에 분노의 불길이 치솟고 참을 수 없는 울분이 차올랐다.

“이건!”

이런 느낌은 이전에도 받은 적이 있었다. 바로 흑풍해역에서 연신술이 발작했을 때 딱 이랬었다.

‘4성을 수련해서 한동안 발작이 일어날 일은 없어야 할 텐데? 이곳의 환영이 연신술의 발작을 유발한 건가?’

한립은 다급히 연신술을 전력으로 운용해서 머리를 맑게 하고 어떻게 하면 환영을 해결할지 방법을 생각했다.

그때, 촤르륵 하는 소리가 들려와 그의 눈길을 끌었다.

핏물들이 출렁이면서 거목 크기의 늑대 요수 유골이 몸을 일으켜 그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한립은 손가락을 튕겨 푸른 빛으로 늑대 요수를 두 동강 냈다.

촤르륵!

이번에는 다른 요수 시체 두 마리가 달려들었다.

그가 푸른빛을 날려 요수 시체를 갈랐으나 연이어 사방팔방에서 유골들이 날아들었다. 진선급이 대부분이고 간혹 금선급이 섞였는데 요수 유골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그는 즉시 산악 거원으로 변신해 금빛 주먹을 마구 휘둘러 달려드는 유골들을 산산조각냈다.

퍼퍼퍽!

그러나 아무리 부수고 또 부수어도 달려드는 유골들의 수는 늘어만 갔다.

휙!

수많은 유골 속에서 굵직한 초록 짐승의 꼬리뼈가 핏빛 바다를 뚫고 횡으로 날아들었다.

쾅!

놀랍게도 꼬리뼈는 한립이 날린 주먹을 무너뜨리고 그의 허리를 가격했다. 이에 그는 휘청거리며 주변의 요수 유골 속으로 던져졌고 다른 요수 유골들이 이를 발견해 정신없이 깨물고 할퀴었다.

단단하기 그지없던 산악 거원의 몸이 마구 뜯겨 나가 곳곳에서 뼈가 드러났다.

크아앙!

열이 받은 한립은 전신에서 강렬한 금빛을 발하면서 다가오는 유골들을 퍽퍽 때려 부수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분노가 사라진 그는 자신의 성치 않은 몸을 내려다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환영 속에 있다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니…….”

분명 몸이 절반 이상 뜯겼는데 전혀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금빛을 발해 원래 상태로 돌아가고 환영에서 벗어날 방법을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요수 유골들은 괴성을 지르면서 달려들었다. 한립은 눈을 감고 주변의 요수 유골들을 무시한 채 연신술을 운용하는 데 집중했다.

그의 미간에서 수정빛이 새어 나와 점점 밝아지더니 똑바로 바라보기 힘든 태양처럼 변했다.

그 빛에 유골들은 처량하게 비명을 지르면서 핏빛 바닷속으로 몸을 던져 숨었고, 별안간 주위가 고요해졌다.

눈을 번쩍 뜬 한립은 두 눈동자에서 형형한 금빛을 발하면서 기합을 넣었다. 미간에서 수정빛이 뭉쳐 산만한 수정 칼날을 이루고 허공을 갈랐다.

촤악!

수정 칼날이 닿은 핏빛 공간이 물결치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직 환영 공간이 깨지지 않았음에도 한립은 정신을 더욱 집중해 미간의 수정빛을 강화하려 했다.

찌직!

바로 그 순간 핏빛 바다가 거의 뒤집히면서 커다란 녹색 시체가 등장했다.

거대하기 짝이 없는 녹색 쥐는 눈알이 있는 자리에 녹색 불길이 치솟고 있어 기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녹색 거대 쥐가 내뿜는 기운에 허공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거대 쥐는 태을 서금선 이상이었다.

아니, 어쩌면 시공간 초월을 통해 본 귀 큰 승려와 맞먹는 존재일지도 몰랐다. 한립은 눈을 가늘게 떴으나 두려움에 떨지는 않았다.

녹색 거대 쥐가 아무리 강대해도 환영 속의 존재였다.

그리고 거대 쥐의 커다란 꼬리를 보니 아까 자신의 주먹을 깨부수고 허리를 내려친 바로 그 꼬리뼈였다.

파앗!

거대 쥐가 눈을 번득이고 녹색 그림자로 변해 기세등등하게 덤벼들었다. 한립은 양손으로 수결을 맺고 미간에서 빛기둥이 뻗어 나가 거대 쥐의 머리를 공격했다.

하지만 거대 쥐는 입을 벌려 빛기둥을 꿀꺽 삼키고 다가오는 속도를 유지했다.

운석처럼 떨어지는 거대 쥐의 방대한 몸을 보고 한립은 다급히 미간의 수정빛을 날려 방패를 만들어 앞을 막았다.

파사삭!

거대 수정 방패가 갈라지자 이번에는 거대 쥐가 몸통 박치기를 해왔다. 엄청난 힘에 튕겨 나간 한립은 수십 리를 날아가고서야 간신히 몸을 가눌 수 있었다.

쉭!

그가 반격하려 했으나 녹색 뇌전이 몸에 구멍을 뚫었다. 거대 쥐의 기다란 혀가 녹색 불길을 품고 그를 공격한 것이다.

머릿속에 불타는 극통을 느낀 한립은 혼백에 구멍이 뚫린 듯 괴로워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커다란 두 손으로 녹색 혀를 붙들어 끊으려 했다.

그러나 녹색 혀가 반대로 그의 두 손을 휘감아 막고 빙글빙글 돌아가며 그를 꽁꽁 묶었다.

거대 쥐의 힘에 녹색 혀가 한립을 품고 입속으로 빨아 들였다. 눈앞이 캄캄해진 한립은 썩은 내가 진동하는 어두컴컴한 공간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두운 보랏빛의 살점 덩어리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나는 액체가 흘러나왔다. 게다가 아직도 녹색 혀는 그를 풀어 주지 않았다.

한립은 최선을 다해 발버둥 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 그는 눈썹을 휙 끌어올리고는 반항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공간에 녹색 빛이 일고 화염으로 변해 그를 불사르기 시작했다.

엄청난 고통에 한립은 이를 악물고 서둘러 수결을 맺었다.

팟.

그의 머리에서 금빛 찬란한 원영이 두개골을 빠져나와 긴장된 낯으로 두 눈에서 금빛을 쏘아 머릿속으로 불어넣었다.

곧 뜨겁게 달구어진 의식세계에 시원한 기운이 돌고 타들어갈 것 같던 혼백의 괴로움도 줄었다.

하지만 녹색 불길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면서 어떻게 든 연신술의 방해를 뚫고 혼백을 불사르려 하고 있었다.

눈은 감은 채로 미친 듯이 연신술을 펼치던 한립의 몸에 반투명한 진극막이 어리고 전신의 골격이 부서질 것처럼 아드득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립은 얼굴을 흉악하게 일그러트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의식세계의 열기가 축적되어 말라비틀어질 것만 같았다.

바로 그때, 혼백이 진동하고 의식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웅!

희미한 수정빛이 의식세계 어딘가에서 나타나 가득 차오른 열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순식간에 열기가 가신 한립은 얼굴을 풀었고, 의식이 쿵! 하고 진동하면서 힘이 강대해졌다.

일각 동안 천천히 호흡을 고른 한립은 기쁜 표정으로 천천히 눈을 떴다.

이번 고난으로 의식의 힘이 2, 3배는 늘었고 수많은 수정빛 샘물이 의식의 바다로 흘러들어 힘이 더욱 정순해진 느낌이었다.

혼백이 위기에 처했을 때 연신술 4성의 고비를 넘어 대성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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