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2화. 진퇴양난
*
거대한 숲의 가장자리.
회갈색의 낮은 기암괴석 언덕에 벽옥비차가 떨어졌다.
쿵!
바위가 사방으로 튀고 회갈색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비차 위의 한립은 기혈이 들끓는지 넘어오는 핏물과 신음을 삼켰다.
“아저씨…….”
옆에서 금동이 걱정스레 그를 보고 있었다. 이에 한립은 괜찮다는 듯 손을 저어 신중하게 물었다.
“금동, 서금선이 지금 어찌하고 있는지 감응이 되느냐?”
“어? 이상해요. 그 녀석,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계속 떠 있어요.”
금동은 눈을 감고 감응해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쫓지 않는다고?”
한립은 단약을 꺼내 삼켰다.
“아뇨, 그저…….”
“그저 어쨌다는 것이냐?”
“의식과 법력 파동이 이상하게 요동치고 있어요. 전혀 움직임이 없는데도 의식의 힘과 법력을 소모하는 것처럼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네가 설명한 대로라면 강력한 환술에 빠진 것 같구나.”
“환술이요? 어쩌다 갑자기 환술에 빠져요?”
“그건 나도 모르겠다만, 어찌 되었든 우리에게는 좋은 일이다. 이곳에서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어서 출발하자꾸나.”
벽옥비차가 빛을 반짝이면서 다시 날아오르려는데 돌연 한립의 머리가 묵직해지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족 녀석아, 서금선은 내가 너를 위해 잠시 묶어 두마. 하지만 딱 20년밖에는 시간을 줄 수 없다. 지금 네 실력으로 서금선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니까,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흠칫 놀란 한립이 연신술을 운용해 의식을 단단히 붙들고 물었다.
“누구신지 여쭈어도 될지요? 어째서 저를 도와주시는 겁니까?”
그 순간 머리의 묵직한 느낌이 사라지고 더이상 어떤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한립은 의식을 최대한 널리 퍼트려 주변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왜 그래요, 아저씨?”
한립의 표정이 이상해지자 금동이 놀라 물었다. 그러나 한립은 멍하니 서서 무언가를 고심하는 듯했다.
그는 작게 탄식하고는 고개를 젓고 벽옥비차를 움직였다.
* * *
분홍색 꽃이 만발한 복숭아나무 숲.
거대한 복숭아나무 밑에 커다란 수레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눈처럼 새하얀 털을 가진 여우가 엎드려서 눈을 가늘게 뜨고 졸린 듯 늘어져 있었다.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털과 신비로운 분위기는 절로 숭배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거대 백호(白狐) 앞에 새하얀 치마를 걸친 소녀가 근심스러운 표정을 하고 서성거렸다.
“노조, 서금선이라는 요충을 가둬두실 수 있다면 그냥 후환을 제거해주시면 안 되는 것입니까?”
“낙아야, 노부는 저 인족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저자가 영환계에서 너를 돌봐주지 않았었다면, 우리 영호족 영지를 침범했을 때 한 번에 때려죽였을 것이야.”
거대 백호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선잠이 든 것처럼 천천히 말했다.
‘낙아’라고 불린 아리따운 소녀는 바로 영환계에서 한립과 서로 의지해 살았던 류낙아였다.
“노조…….”
“노부가 이번에 나선 것은 너를 대신에 은혜를 갚아주려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 너와 저자의 인과(因果)를 끊기 위해서였다. 내 너를 아낀다고 하나 앞으로 수행에 방해가 된다면 저자를 죽이는 것으로 해결하겠다.”
“그러지 마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류낙아가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말했다.
“저 서금선은 배경이 상당하다. 노부라 해도 함부로 건들 수 없고, 죽이는 것은 더욱 안 될 일이지. 저 인족 녀석이 어쩌다 서금선과 척을 졌는지 모르겠으나 나름 총명한 자이니 20년이면 자신이 왔던 하찮은 선역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석두 오라버니…….”
류낙아는 백호 노조의 말을 듣고 더욱 근심 어린 표정이 되었다.
* * *
반년 후.
한립과 금동은 멈추지 않고 이동해 만황 구역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강력한 만황 짐승들이 나타나고 수시로 서금선과 맞먹는 존재들이 튀어나와 어쩔 수 없이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몇 차례나 흉포한 짐승들에게 쫓겨 도망을 다니고는 했었는데, 다행히 그들은 서금선과 달리 길어야 몇 날 며칠을 쫓다 포기했다.
최근 보름 동안은 태을급의 또 다른 만황 짐승에게 쫓겨서 어느 산골짜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면적이 꽤 되는 산골짜기 안에는 고목들이 자라고 있어 한적해 보였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곳곳에 짐승들의 사체가 가득했고, 그 냄새가 코를 찌를 정도로 지독했다.
깜짝 놀란 한립이 다시 나가려고 했을 때는 수많은 덩굴이 날아들어 거대한 감옥을 만들고 그를 가두었다.
울창한 숲으로 보이던 산골짜기가 사실은 강대하기 짝이 없는 나무 요수였던 것이었다.
결국, 그는 청죽봉운검 속의 벽사신뢰를 아낌없이 사용해 뇌진을 펼친 끝에야 탈출할 수 있었다.
나무들이 드문드문 있는 황량한 산 위에 옅은 안개가 끼어있었다.
멀리서 녹색빛이 날아들어 천천히 내려왔다.
한립은 벽옥비차에서 뛰어내려 주위를 살피고는 나무줄기가 두 아름은 되는 거목에 기대앉아 단약을 삼키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금동도 백옥 비휴를 타고 내려와 그의 옆으로 왔다. 한립과 금동 모두 아주 피로한 기색이었고, 비휴 역시 힘없이 바닥에 엎어졌다.
한참 후 한립은 길게 숨을 내쉬면서 피로감이 가신 얼굴로 눈을 뜨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저씨, 반년이 넘었는데 그 녀석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어요.”
“내게 말을 건 자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구나. 정말 태을 후기 영충을 이렇게 오래 가둬두다니 말이야. 서금선의 약점이 의식이라지만 대단한 일이야.”
“정말 우리를 도운 거라고요?”
“아직 확신할 수는 없구나. 낯선 만황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니까.”
“맞아요, 북한선역에서도 서로 속고 속이고 난리인데 어떻게 처음 와보는 만황에서 믿을 만한 사람을 찾겠어요.”
“꼭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요, 누님. 선역의 진선들은 겉보기에는 점잖아 보여도 뒤로 온갖 음모를 꾸미지만, 만황은 쟁투가 끊이지 않고 복잡해 보여도 훨씬 시비와 은원이 분명하다고요.”
듣고 있던 비휴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런 말이 나와? 수족들이 어떻게 은혜를 원수로 갚았는지 벌써 잊은 거야?”
금동이 손을 뻗어 비휴의 머리를 꾹 누르며 화를 냈다.
“아니, 누님! 수족은 만황 변두리의 작은 종족이라고요. 그들이 그랬다고 다들 그러라는 법이 어디 있어요? 진정한 만황 대종족들은 인과와 업보를 얼마나 중히 여긴다고요!”
“만황 대종족…….”
흰둥이의 말에 한립이 눈을 반짝였다.
“아저씨, 무슨 생각이라도 든 거예요?”
금동이 그걸 보고 더는 흰둥이에게 따지지 않고 물었다.
“서금선을 20년 동안 잡아둘 수 있다고 말했고, 내 의식에 전음을 전달하면서 종적을 들키지 않은 것을 보면 태을 후기……. 아니, 대라경의 존재일 수도 있다. 아마 흰둥이가 말한 만황 대종족이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죠. 우릴 도와주기만 하면 만황 대종족이든 소종족이든 신경 쓸 것 없잖아요? …… 태을 서금선 그 자식은 2백 년, 아니 2천 년은 가둬놔야 하는데!”
“어째서 영원히 가두는 것이 아니고 2천 년이냐?”
한립은 기운차게 떠들어 대는 금동을 보며 오랜만에 놀리듯 물었다.
“2천 년 후면 그 자식보다 강해질지도 모르잖아요. 그때가 되면 내가 찾아가서 삼켜주려고요! 가둬놓으면 찾아다닐 필요도 없고요.”
금동은 먹는 이야기가 나오자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네가 잡아먹히는 게 아니고, 잡아먹겠다고?”
“당연하죠!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음속에서 계속 그런 충동이 일어요. 동족은 발견하는 족족 잡아먹어야 한다는 느낌이요. 그 녀석에게 쫓길 때도 그랬어요.”
“아마……. 그게 너희 서금충의 사명인지도 모르지.”
“그럼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요? 그 사람 말대로 북한선역으로 돌아가요?”
“그곳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선궁이 진작 수배령을 내렸을 테니 돌아가면 꼼짝없이 잡힐 테지.”
“그럼 계속 가던 길로 가요?”
“네 동족에게 쫓겨 마구 돌아다니다 보니 경로에서 크게 벗어났다. 우리의 수행에 만황을 헤매고 다니다가는 언제고 큰일이 나겠지. 가볍게 태을 후기 서금선도 붙들어 둘 수 있는 존재도 있는데 조심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설마 이곳에 눌러앉아 폐관 수련이라도 할 거예요?”
“그래.”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금동과 비휴는 깜짝 놀랐다.
“장난치는 거죠? 수행이 하루 이틀 사이에 느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위험한 곳에서 수련한다고요?”
“나도 어쩔 수 없이 생각해낸 방법이다. 만황구역 깊은 곳까지 들어왔으니 우리 수행으로 진퇴양난이란 말이다. 20년 내로 수행을 높이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이야.”
“알겠어요. 아저씨가 그렇게 말하니까 믿어볼게요. 내가 호법을 서줄 테니까 앞으로 안심하고 수련에만 집중해요!”
금동은 깊이 숨을 내쉬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녀의 호기로운 장담에 비휴는 묵묵히 두 앞발 사이에 고개를 묻고 모르는 척했다.
“급할 것 없다. 반년 동안 열심히 달려온 것은 적합한 수련 장소를 찾기 위해서였는데, 아직 도착하지 못했거든.”
“여기가 아니라고요? 이 황산 인근에 짐승도 없는 것 같은데 여기서 수련하는 것도 좋지 않아요?”
“일전에 지났던 심연을 기억하느냐?”
한립은 씩 웃음 지었다.
“기억해요. 그 나무 요수가 사는 골짜기 근처잖아요. 어두침침하고 멀리서도 흉살기에 이상한 냄새가 진동하던데……. 아저씨, 설마 그곳에서 수련하려고요?”
“맞다. 만황에서 강력한 짐승들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고 침범하지 않지. 그래서 우리를 쫓던 짐승도 나무 요수의 영역까지는 쫓지 않고 돌아간 게다.”
“그렇다고 해도 나무 요수가 우리가 거기서 수련을 하게 놔두겠어요?”
“나무 요수의 가지가 산골짜기와 골짜기 바깥에 널리 퍼져 있지만 유독 심연 근처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느냐?”
“수목은 햇살이 잘 들고 충분한 수분과 영양분이 공급되는 환경을 좋아하지. 수련을 통해 요수가 되었다고 해도 똑같다. 심연 안은 해가 전혀 들지 않고 환경이 적합하지 않아 나무 요수도 그곳으로 뿌리와 줄기를 뻗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아, 그렇구나!”
“거기다 나는 심연 안의 짙은 흉살기가 마침 필요하던 참이고……. 자, 대충 체력을 회복했으면 길을 서두르자꾸나.”
한립은 간단히 설명을 마치고 금동과 비휴를 데리고 비차에 올라 출발했다.
십여 일 후 벽옥비차는 수십 리 길이에 폭은 수백 장밖에 되지 않는 깊은 계곡 위에 섰다.
비차 앞에 선 한립은 깊은 심연을 내려다보면서 머뭇거렸다.
금동에게 이야기한 것은 전부 그의 추측이었고 직접 아래로 내려가 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만일 심연으로 나무 요수가 발을 들이지 않는 이유가 더 강력한 존재가 도사리고 있어서라면?
다른 선택지가 없는 한립은 무의미한 상상으로 심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아 곧장 아래로 내려갔다.
심연으로 들어서자 즉시 빛이 차단되면서 역겨운 냄새가 느껴졌다.
한립은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푸른 보호막을 일으켜 단번에 천장 아래까지 의식을 퍼트렸다.
심연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어서 바닥이 어딘지 알 수 없었고 생명체는 진작 사라지고 없었다.
한쪽 절벽을 따라 빠르게 내려가던 한립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양쪽 절벽은 고르지 않아 바위가 많았는데 그중에는 벽에서 불쑥 튀어나와 수십 장에 이르는 공간도 있었고 그런 암석들 사이사이에 음산한 빛을 반짝이는 백골들이 쌓여 있었다.
다양한 형태를 지닌 백골들은 체형이 아주 큰 것도 있었다.
설마 흉살기가 짙은 이유가 나무 요수가 죽인 수많은 만황 짐승의 사체를 이곳에 던져두어서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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