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1화. 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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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황 모처의 대협곡 위.
은색 뇌전이 모여들어 뇌진을 이루었다. 뇌진을 빠져나와 주위를 살핀 한립은 벽옥비차를 불러내 더없이 빠른 속도로 질주했다.
그때 태을 서금선이 태양처럼 환한 빛을 발하며 날아들어 멈추었다. 이전의 화가 가득하던 얼굴은 어느덧 냉정하게 변해있었다.
태을경 서금선의 특수한 육체와 본원의 역량을 태워 쫓다 보면 동족을 따라잡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보름 후, 태을경 서금선은 다시 한립이 방금 뇌진으로 떠난 자리에 도착했다.
* * *
반년 후.
잿빛 안개의 바다를 벽옥비차가 질주했다.
성난 파도처럼 꿈틀거리는 안개 때문에 비차의 속도가 영향을 받았고 뒤로는 열댓 마리 거대 도마뱀 영수들이 금선급 기운을 뽐내며 쫓고 있었다.
그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가장 큰 회색 짐승은 심지어 태을급이었다.
도마뱀들이 입을 쩍 벌려 잿빛 빛기둥을 쏘아 보내고 있었지만 한립은 태연히 비차를 조종했다.
피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피하고 나머지는 금동, 비휴, 해 도인이 비차 뒤쪽에 서서 막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수백만 리 뒤에서 여전히 눈부신 금빛이 그들을 쫓는 중이었다.
* * *
2년 뒤.
노란 사막, 돌개바람이 일고 바람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콰르릉.
바람기둥끼리 부딪치면서 노란빛이 반짝이고 공간 파동이 흩날리며 공간 균열이 나타났다. 얼마나 강력한 위력을 지닌 바람기둥인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녹색 둔광과 금빛이 만 리 거리를 두고 앞뒤로 쫓고 쫓기면서 최대한 바람기둥을 피해 질주하고 있었다.
앞쪽에서 달아나던 녹색 둔광에서 금빛 뇌전이 흘러나와 뇌진을 이루고 콰릉! 하고 사라졌다.
* * *
격한 추격 속에서 십여 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만황 어딘가의 거대한 습지 위로 어둑한 녹색 빛이 날아가고 있었다.
녹색 빛은 옅은 녹색과 진한 녹색, 잿빛 녹색 등이 섞여 색깔이 얼룩덜룩했고 그 안의 비차 자체도 청록색이던 예전과 달리 위에 무언가를 덧바른 듯 이상했다.
한립이 만황의 어느 부족에게 얻은 나무의 수액(水液)을 덧바른 것으로 그간 만황을 다니며 성가신 일들을 피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비차의 영력 파동을 최대한 가려주어 육간진법이 발산하는 강력한 파동을 상쇄하는 역할을 해주었다.
수결을 맺으며 비차를 조종하는 한립 옆에 금동이 창백한 얼굴로 앉아 영보를 뜯어 먹고 있었다. 그 옆에 앉은 비휴도 전신의 하얀빛이 은은한 것이 휴식을 취하는 중인 듯했다.
“십만 리 밖에 차이가 안 나요.”
고개를 든 금동이 말했다.
밑도 끝도 없는 말이지만 한립은 무슨 이야기 인지 알아듣고 뇌진을 펼쳤다.
콰릉!
그들이 사라지고 금빛이 날아들어 비차가 사라진 장소에 도착했다. 거대 태을 서금선은 냉소를 흘리고는 다시 출발했다.
* * *
그 시각, 백만 리 밖 밀림 위에 파동에 일고 금빛 뇌전이 나타났다. 그 속에서 빠져나온 녹색 비차에는 한립 일행이 타고 있었다.
십여 년 동안 태을 서금선은 쫓아오고 곳곳에서 강력한 만황진령들이 튀어나왔다.
강력한 의식을 지니고 시간법칙을 익힌 그도 여러 보물과 금동, 비휴 등이 없었다면 진작 만황에서 뼈를 묻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가장 위협적인 것은 태을 서금선이었다.
그간 모든 방법은 다 써보았다.
심지어 구뢰목을 이용해 초장거리 전송진법을 펼치거나 함정을 파서 태을 서금선을 잡아두려고도 해보았는데 상대는 불굴의 의지로 쫓아왔다.
몸 안의 뇌붕혈맥과 청죽봉운검 내의 벽사신뢰 그리고 해 도인의 도움으로 선원석을 이용해 조금씩 힘을 보충하면서 여기까지 버텨 왔으나 뇌진을 사용해 달아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뇌전의 힘도 바닥나고 있었다.
거기다 최근 들어 태을 서금선도 그의 상황을 눈치챘는지 더욱 추격에 박차를 가해서 뇌전의 힘이 떨어질 때까지 얼마 시간이 남지 않았다.
한립은 진언보륜을 불러내 거의 회복된 시간도문들을 보고 마음을 안정시켰다.
“아저씨, 나 이제 괜찮아졌어요.”
금동의 말에 한립이 해 도인에게 비차의 조종을 넘기고 다가갔다. 그가 아이의 이마에 손바닥을 대고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파앗!
보광이 떠오른 금동의 이마에 의식 파동이 일고 혼갑부에 그려진 것과 비슷한 구름무늬가 떠올랐다.
혼갑부는 워낙 귀한 재료들이 쓰이는 부적이라 재산이 넉넉한 한립도 십여 년 동안 사들이기에는 가격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부적의 원리를 연구한 끝에 의식의 힘을 비술로 응결해 실체화시킨 다음 보호막의 형태로 부적에 봉인해 두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걸 모방해 사용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십여 년 동안 틈이 생길 때마다 전력으로 연신술 4성을 익혀 의식의 힘이 두 배로 강해지니 혼갑부 비술을 모방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의식의 보호를 받기 시작한 금동이 비휴의 몸속으로 들어가고 한립은 해 도인에게 비차 조종을 넘겨받아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 * *
그 후로 몇 개월의 시간이 지나갔다.
비차는 만황의 어느 사막 위를 녹색 번개처럼 지나쳐 하늘 끝으로 사라졌다.
비차 위에서 한립은 진중한 얼굴로 수결을 맺고 있었고 해 도인과 비휴가 옆에서 각각 노란빛과 하얀빛을 불어 넣어주고 있었다.
이때도 한립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실은 아주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최근 한 달간 태을 서금선은 미친 사람처럼 그들을 쫓아 숨 돌릴 틈도 주지 않았다.
안 그래도 위태위태하던 뇌전의 힘이 오늘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바닥났다.
금동이 아직 비휴 체내에 있어 위치를 들키지는 않았지만 태을 서금선이 겨우 수십만 리 밖에서 쫓고 있어 금동이 나오면 잡히고 말게 확실했다.
거기다 금동이 비휴의 체내로 들어간 지 한 시진 반이 넘어서고 있었다. 그 말은 일각 내로 태을경의 서금선과 마주치게 생겼다는 소리였다.
궁지에 몰려서도 한립은 냉정히 주변을 살피면서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했다.
“음?”
그가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희색을 드러냈다.
사막을 지난 비차가 푸른 산맥으로 들어서자 천지영기가 자욱하게 그를 감쌌다.
그간의 경험으로 이렇게 영기가 짙은 곳에는 강대한 생령이 서식하거나 강력한 만황 부족들이 머물기 마련이었다.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이런 생각이 든 그는 연신술을 발동해 의식을 최대한 넓게 퍼트렸다. 바로 그때 비휴가 표정이 변해 입을 벌리고 금동이 튀어나왔다.
금동은 최선을 다해 버틴 듯 금빛이 어두웠고 작은 얼굴에는 핏기 하나 없었다.
“아저씨, 더 이상은 안 되겠어요…….”
“괜찮으니 휴식을 취하거라.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마.”
금동의 허약한 모습에 가슴이 쓰린 한립은 영보들을 한 무더기 쏟아내 그 옆에 쌓아두었다.
금동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영보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 * *
후방 수십만 리 밖.
눈부신 금빛 속에서 태을 서금선이 살의 가득한 눈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그의 몸에서 금빛이 점점 진해지다 못해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는 중이었다.
쿠쿠쿵.
그때 푸른 산맥 깊은 곳의 낭떠러지에서 푸른빛이 반짝였다. 놀랍게도 산 벽이 거대한 얼굴로 변해 태을 서금선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태을 서금선은 그를 본 듯 만 듯 무시했다. 상대가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그도 최대한 성가신 일을 만들지 싶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태을 서금선의 시야 끝에 녹색 빛이 잡혔다.
그걸 보고 가슴이 벅차 쿵쾅거리기 시작한 태을 서금선은 더욱 속도를 높여 녹색빛을 따라갔다.
녹색빛 안에는 비차에 탄 한립, 해 도인, 금동 및 비휴가 있었다.
태을 서금선의 등장에 한립을 비롯한 나머지 인물들의 얼굴에 당혹스러움과 겁먹은 표정이 떠올랐다.
그 모습에 태을 서금선은 오랜 숙원을 푼 듯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서금선의 입에서 금빛 빛기둥이 뻗어 나가 청록색 비차를 공격했다.
한립이 밝은 빛을 터트리며 급격히 비차를 횡으로 이동시켜 피했으나, 금빛 빛기둥이 천 가닥 만 가닥으로 갈라지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검빛처럼 비차를 쫓았다.
콰콰쾅!
푸른 비차가 폭발하자 금빛이 반짝이며 그 안에서 푸른 빛줄기가 탈출해 달아났다. 이에 태을 서금선이 흉흉한 미소를 머금고 빛줄기를 향해 앞발을 휘둘렀다.
푸쉭!
산봉우리만 한 금색 칼날이 푸른 빛줄기를 갈랐다. 낫처럼 호선을 그리는 칼날에는 수많은 금색 무늬들이 새겨져 있었다.
칼날에서 폭발적으로 퍼져 나온 힘에 푸른 빛줄기도 영향을 받아 속도가 확연히 줄었다.
크항!
그 순간, 푸른 빛줄기 속에서 눈부신 금빛과 함께 털이 북슬북슬한 주먹이 빠져나와 금색 칼날을 내리쳤고 날카로운 수정빛이 검 그림자로 변해 금색 칼날을 베었다.
검 그림자는 속도가 너무 빨라 잔영을 남기면서 주먹보다 먼저 거대 칼날과 부딪쳤다.
챙강!
두 종류의 금빛이 튀면서 검 그림자가 두 동강이 났지만 금색 칼날도 부들부들 떨리면서 기세가 줄었다.
그 위로 금색 주먹이 유성처럼 떨어졌다.
쾅!
태양처럼 강렬한 빛과 충돌의 여파가 무형의 금제처럼 퍼져 나갔다. 거대 주먹이 거의 절반으로 잘려 피를 마구 쏟았고, 금색 칼날도 부러졌다.
금털 거원이 낭패를 당한 모습으로 나타나 피범벅인 손으로 숨을 헐떡였다.
거원의 한쪽 어깨에는 금색 딱정벌레, 금동이 앉아 있었고 다른 쪽 어깨에는 비휴와 해 도인이 서서 불안정한 기운을 발산했다.
그들도 비차가 폭발할 때 부상을 입은 듯했다.
해 도인은 왼쪽 팔이 보이지 않았고, 비휴는 등 뒤가 기다랗게 갈라져 있어 아주 끔찍했다.
금동은 태을 서금선을 표독스럽게 노려보았으나 그 시선에는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태을 서금선은 다른 이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금색 딱정벌레만 보며 탐욕을 드러냈다.
문득 태을 서금선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금털 거원이 허공을 박차며 옆으로 피했다. 그러나 흐릿한 금빛이 빠르게 그를 따라붙으며 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순식간에 금털 거원은 가슴의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게 베였고, 어깨에 앉아 있던 금동은 앞발이 하나 잘려 고통스러워하는 중이었다.
태을 서금선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멈춰 서서 금동의 앞발을 하나 물고 으적으적 씹어 삼켰다.
산해진미를 맛보는 것처럼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금털 거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손바닥에 녹색 빛을 일으켜 가슴의 상처를 쓸었다. 그러자 피가 멈추고 커다란 상처가 슬금슬금 봉합되었다.
그는 부상을 돌볼 겨를도 없이 몸을 날려 푸른 거대 새로 변했다. 기다란 푸른 깃털을 지닌 거대 새는 청란변신을 한 것이었다.
쾌속으로 하늘을 가르면서 청란 위로 금색 고리가 떠올랐다.
청란이 열댓 개의 푸른색과 금색 허상으로 갈라져 사방팔방으로 날아가는데 그 속도가 태을경 서금선과도 비할 만했다.
태을 서금선은 금색 고리가 발산하는 시간 법칙의 힘을 느끼고 놀란 기색을 보이다가 앞발을 휘둘렀다.
수백 리 허공이 눈을 찌를 듯한 금빛으로 뒤덮여 청란 허상들을 금색 영역에 가두었다.
강력한 법칙 파동에 모든 청란 허상들의 속도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촤륵!
태을 서금선의 입에서 굵은 금빛이 분출되었다. 엄청나게 밝은 금빛 안에는 수정실들이 훼멸의 힘을 드러냈다.
다음 순간, 금빛이 스스로 열댓 가닥으로 갈라져 각각 청란 허상들을 쪼았다. 금빛의 속도가 무척 빠르고 청란 허상들의 속도는 줄었으니 따라 잡히는 것이 당연했다.
펑펑펑…….
연달아 폭음이 들리고 금빛이 터져 태양처럼 강한 빛과 강력한 기운을 발산해 주변 허공을 찢어 놓았다.
청란 허상들은 금빛 태양에 집어 삼켜져 순식간에 사라지고 오직 청란 본체만이 남았다. 게다가 깃털은 엉망이 되고 가슴은 갈라져 피가 흘러내렸다.
청란 등에 탄 금동도 온몸에 상처가 가득해서 매끈하던 금빛 껍질에 가느다란 흔적이 가득했다.
비휴와 해 도인은 진작 보이지 않고 주변에 하얀 빛알갱이들과 금빛 파편만 남아 있었다.
청란은 입에서 선혈을 뱉으며 금빛을 방출해 진언보륜으로 무언가를 하려 했다. 그러나 아래쪽 허공에 수십 가닥의 금빛 수정들이 나타나 청란을 관통했다.
수정실들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청란의 육신은 수백 조각으로 갈라져 떨어졌다.
금동은 수정실에 찔리기 전에 화들짝 놀라 금빛으로 변해 달아나려 했지만 수정실들이 번개처럼 날아들어 그물을 이루고 금동을 잡았다.
태을경 서금선이 입에서 금빛 광채를 뿌려 그물에 잡힌 금동을 감쌌다. 겁에 질린 금동은 최선을 다해 벗어나려 했으나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았다.
태을 서금선은 멸시하는 눈빛으로 비웃음을 흘리고는 광채 속에서 작아진 금동을 한입에 삼켰고 어느새 비명도 사라졌다.
태을 서금선은 허공에서 눈을 감고 주변의 금색 영역을 빨아들여 거두었다.
잠시 후, 서금선의 몸에서 진한 금색 파랑이 퍼지기 시작했고 기운이 한층 강화되었다.
“드디어 한 마리를 잡았다. 언젠가 또 기회가 오겠지…….”
서금선은 혼잣말을 하면서 하늘을 향해 길게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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