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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779화 (1,536/2,000)

1779화. 유인

*

강바닥의 바위 아래에 몸을 숨긴 한립은 태을경 서금선이 열을 받아 빠른 속도로 쫓아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금동, 어떻게 상대를 자극한 것이지?”

한립은 의식연계를 통해 금동에게 물었다.

“별것 없는데요? 그냥 눈앞에 두고 잡아먹지 못하는 기분이 어떻냐고 물었어요.”

“그와 직접 대화를 할 수 있단 말이냐?”

“거리가 너무 멀 때는 감응만 할 수 있었는데, 거리가 가까워지면 동족끼리 연식 연계로 대화를 나눌 수 있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원리로 가능한지는 설명하기 어렵고……. 아저씨랑 나처럼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되어서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에요.”

금동의 말이 끝나고 한립이 무어라 말하려는데 콰쾅! 하고 귀청을 때리는 굉음이 들려왔다.

거대한 힘에 강물이 격렬하게 출렁이고 홍라하곡의 물길이 뚫린 돌다리 중앙이 부서졌다. 그 틈으로 노기가 가득한 호사족 족인들이 나섰다.

노약자는 대피했고 전쟁을 치르러 암성협곡으로 상당한 병력이 빠져나가 다 모여봤자 4, 5천 명밖에 되지 않았다.

“충족의 지주라는 자가 수족과 정면 대결을 펼치는 척해놓고 뒤로는 우리 호사족을 기습한단 말입니까!”

수천 장 밖에서 금빛 찬란한 거대 서금충이 날개를 파닥이고 있었다.

그는 호사족 장로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차가운 눈길로 협곡 깊은 곳을 수차례 훑었다.

“내놓거라…….”

“무엇을 찾는 것입니까?”

은통이 의혹 가득한 눈빛으로 벼락과 같은 음파에 겨우 버티면서 소리쳤다. 그러나 태을 서금선은 그 소리를 무시한 채 방대한 몸으로 움직여 날아들었다.

“더러운 벌레의 왕이 감히 우릴 무시해!”

“호사족 병사들이여, 죽을지라도 이런 치욕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은통 등이 안색이 달라져 큰소리로 외쳤다.

태을 서금선은 그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달려들어 부서진 돌다리 위의 호사족 병사들은 분분히 골짜기 안쪽으로 물러났다.

동시에 골짜기 안쪽에서 수백 개의 거대한 사자의 몸에 매의 머리를 한 짐승 수천 마리가 포효하면서 어린아이 울음소리 같은 기괴한 소음을 일으켰다.

그 울부짖는 소리가 뭉쳐 강대하기 짝이 없는 음파를 이루고 골짜기 바깥으로 퍼져나갔다.

한립과 금동은 음파의 공격 범위에 없었음에도 부지불식간에 영향을 받아 머리를 찌르는 듯한 통증에 오랫동안 울렁거리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한립은 급히 동그란 보호막을 펼쳐 강물과 주변의 음파를 차단했다.

쿠쿠쿵!

그때 음파를 정면으로 받은 서금선은 움직임을 멈췄고 냉랭하던 눈빛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해졌다.

“아저씨, 호사족들도 준비해둔 수가 있었는데요? 감응을 해보니까, 저 녀석 혼백에 중상을 입어서 한동안은 정신을 못 차리겠어요. 이 틈에 싹 해치워 버릴까요?”

금동이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강렬한 음파 공격이라도 나 정도 의식의 힘을 지녔다면 정신이 흐트러지는 시간이 3초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고의로 혼백에 중상을 입은 척하는 거라면 어찌하겠느냐?”

“저 녀석이 우리가 나서도록 유인하고 있단 소리예요?”

“그렇든 그렇지 않든 우리와는 무관하다. 누군가 확인해줄 것이니 말이야.”

한립의 예상대로 골짜기 입구 쪽에서 은통이 이를 악물고 명을 내리고 있었다.

“기회다! 충령을 멸해야 한다!”

대제사들이 즉시 손바닥을 베어 줄줄 흐르는 피를 지팡이에 흡수시키면서 진령을 소환하는 주술을 외웠다.

골짜기에 흐릿한 피 안개가 자욱해지고 분위기가 기묘해졌다.

은통 등 호사족 족인들은 눈이 핏빛으로 물들고 만황 사자의 도안이 볼에 떠오르고 있었다.

각인이 빛을 발한 족인들은 몸집이 거인처럼 커지고 인족의 머리 대신 완전한 사자의 모습으로 변했다.

“죽여라!”

호사족 족인들이 튀어 나가 서금선을 둘러싸고 날카로운 발톱을 마구 휘둘렀다.

채채채챙!

날카로운 빛들이 무수히 날아들어 쳤지만 서금선의 몸에는 작은 흠집도 생겨나지 않았다.

이때 은통이 솔선수범하여 안개가 낀 듯 뿌옇게 변한 서금선의 눈을 노렸다.

다른 호사족 족인들은 진선급 장로들의 명을 받아 서금선의 관절, 날개와 같은 다른 급소들을 노렸다.

“흠, 다들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구나. 네가 보기에 서금선이 일부러 그러는 것 같지는 않더냐?”

한립이 멀리서 천기원기의 흐름으로 전장의 상황을 유추하며 물었다.

은통이 전력을 다해 내지른 암홍색 발톱이 서금선의 뿌연 눈에 닿기 직전이었다. 그 순간 의식을 잃은 듯하던 눈동자의 안개가 걷히고 서늘한 눈빛을 드러냈다.

섬뜩한 기운을 느낀 은통은 퇴각 명령을 내리고 물러서기도 전에 발톱이 서금선의 꽉 감은 눈꺼풀에 닿고 말았다.

눈꺼풀이 찢어지면서 콸콸 반투명한 피가 흘러내려 개울을 이루었다.

카카카캉!

서금선은 부르를 눈꺼풀을 떨며 다시 눈을 뜨고 다리를 움직여 수정 빛들이 원호를 그리면서 악귀의 발톱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가루로 만들었다.

수천 명의 호사족 중 눈치 빠르게 한발 먼저 물러난 수백 명을 제외하고 은통을 포함한 모두가 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서금선도 상처가 나서 정말 화가 났는지 두 날개를 빠르게 펄럭여 거대한 금색 돌풍을 만들어 시체들과 달아나려던 호사족 족인들의 원영마저 가루로 만들었다.

이에 사방으로 대량의 피가 튀었고 그 피는 전부 강으로 흘러 들어가 골짜기를 빨갛게 물들였다.

남은 호사족 족인들은 대제사들이 머물던 제단 위로 물러나고 핏빛으로 변한 골짜기와 하늘을 절망스럽게 쳐다보았다.

“아직 골짜기 안에는 싸울 수 없는 족인들이 남아 있네. 우리가 이대로 물러난다면, 은갑 대인에게 면목이 서겠는가! 이 한 몸 분골쇄신해서라도 구령 대인을 청하겠네!”

대제사가 길게 한숨을 쉬며 목청껏 소리치고 지팡이를 들어 올려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제 피와 몸으로 신령을 청합니다! 구령 대인이시여, 강림해 주소서!”

“제 피와 몸으로 신령을 청합니다! 구령 대인이시여, 강림해 주소서!”

심장에 지팡이를 꽂아놓은 대제사를 둘러싸고 나머지 호사족 족인들도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자신의 심장을 뜯어내 제단을 피로 물들였다.

후우웅.

핏물로 물든 제단에서 산만한 암홍색 빛기둥이 솟구쳤다.

빛기둥 속에는 만황 사자 머리 9개가 달린 거대한 진령이 서 있었다. 갈기와 전신의 털이 어두운 보랏빛인 진령은 보랏빛 화염에 둘러싸여 있었다.

크아아앙!

9개의 머리가 울부짖었다.

포효소리 속에 분노와 원한이 가득했다.

다른 부족들이 모시는 진령과 달리 호사족들은 그들이 모시는 진령의 혈맥을 계승하고 있었다.

자연히 관계도 친밀했고 호사족의 족인 한 명 한 명이 진령의 후인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충령, 네 놈이 정녕 죽고 싶더냐!”

구령이 소리치면서 9개의 머리 중 하나로 공기를 들이마셨다.

강력한 흡입력이 하늘에 흩뿌려진 호사족 족인들의 피를 끌어모았고 곡 내의 다른 제단들도 연달아 빛을 발하면서 불을 밝혔다.

보랏빛 불길들이 전부 모여들어 결국에는 구령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우드득 우드득!

신음을 흘린 구령의 몸이 팽창하고 피부에 암홍색 비늘이 돋고 털들이 배로 길어지더니 기운이 삽시간에 태을경 중기 수준으로 높아졌다.

“호사족과 진령의 관계가 흥미롭구나. 흑풍도의 조신과도 비슷해. 족인들이 피를 바쳐 제단에 함유된 기도의 기운을 격발했으니 저 진령이 서금선과 싸워 볼만도 하겠구나.”

“그렇게 강해졌다고요?”

한립의 중얼거림에 금동이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죽은 호사족 족인들도 알았겠으나 싸워서 상대에게 얼마나 상처를 입힐 수 있느냐가 관건이겠지.”

그 말에 금동이 갑자기 열기를 띠면서 당장이라도 뛰쳐나가려고 해 한립을 어이없게 만들었다.

“들어가 있거라.”

한립은 금동의 이마에 혼갑부를 찰싹 붙이고 비휴에게 금빛 딱정벌레로 변한 금동을 한입에 삼키게 했다.

잠시 후 골짜기 안의 강물 속에서 벽옥비차가 튀어나와 하늘 끝으로 사라졌다.

골짜기 안에서 금동의 기운이 사라지자 서금선이 곧장 눈살을 찌푸리며 쫓으려 했으나, 구령의 입에서 화염이 쏟아져 나와 하늘을 다 불사르고 있었다.

* * *

암성협곡 폭포의 대전.

8대 성족 족장들은 요수 가죽을 덮은 의자에 앉고 나머지 중소 부락의 족장들은 그 아래에 앉아 중앙에서 타들어 가는 화롯불을 보고 있었다.

“왕께서는 이미 회복을 하셨으니 모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상석에 앉은 낙청린이 모두를 향해 말했다.

“그것은 무척 기쁜 일이지만 충령이 그 틈에 공격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그 인족이 충령에게 그렇게 큰 타격을 입혔단 말입니까?”

택무식이 의혹을 드러냈다.

“그럴 가능성은 낮습니다. 그런 능력이 있었으면 가짜 화신을 만들어 두고 몰래 암성협곡에서 달아났을 리 없지요.”

하얀 연기로 이루어진 인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습니다. 실력이 그리 고강했다면 왕께서 부상을 입어 상처를 치유하는 동안 우리를 제압했을 겁니다.”

낙청린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청린 족장, 아직도 인족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한 겁니까?”

호사족 족장 은갑이 입을 열었다.

“충령이 쳐들어오지는 않아도 양군이 대치 중이라 언제 다시 전쟁이 재개될지 모릅니다. 사람을 보내 추적하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한동안 그를 잡는 것은 어려울 듯합니다.”

낙청린의 대답에 무어라 하려던 은갑이 돌연 입을 벌려 손바닥 크기의 백골을 꺼내 들어 손끝에서 피를 한 방울 흘려보냈다.

웅!

피를 머금은 백골에서 신비로운 문자들이 떠오르고 은갑은 그것을 두 손 사이에 들고 기도를 하는 자세를 취했다.

잠시 후 안색이 급변한 그가 벌떡 일어나 쾅! 하고 앉아 있던 의자를 내리쳤다.

“은갑 족장, 왜 그러시는…….”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의자를 보고 낙청린이 큰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하고 물었다.

“충령이 홍라하곡을 습격했습니다…….”

“뭐라고요? 대군을 이끌고 언제 거기까지 갔단 말입니까?”

택무식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충령 홀로 홍라하곡으로 들이닥쳐, 그곳을 지키던 호사족 족인들은 노약자를 제외하고 전부 전사했답니다! 거기다 구령 대인께서도…….”

눈시울이 붉어진 은갑이 한 글자 한 글자 이를 갈며 답했다

“어쩐지 충족 대군이 공격하지 않더라니!”

인매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 입을 벌렸다.

“허나 그 말은, 지금 암성협곡 바깥의 충족 대군에는 충령이 머물고 있지 않다는 소리가 아닙니까?”

야효족 정귀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의 의도는 지금이 충족을 쓸어버릴 기회라는 뜻이었다.

정귀의 이기적인 말에 은갑의 눈에 분노가 차올랐다.

“무엇을 하든 이제 호사족은 함께 하지 못하겠습니다.”

“충령이 직접 홍라하곡을 쳐들어갔습니다. 그곳 상황이 어떨지는 안 봐도 뻔하지요. 지금 은갑 족장이 족인들을 이끌고 돌아간다고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곳에 남아 죽은 족인들을 위해 복수하시는 것이 옳은 결정이라 생각합니다. 안 그런지요?”

정귀는 찔리는 기색도 없이 태평하게 말했고, 대전 안의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몇천 명의 족인을 잃은 호사족 족장 앞에서는 그 누구도 함부로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아무도 이런 참혹한 일이 벌어질 거라 예상하지 못하였습니다. 은갑 족장께서 당장 홍라하곡으로 돌아가 남은 족인들을 추스르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하시지요. 연합군 일로 더이상 부담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저희 유진족에서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낙청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가슴 앞에 겹치고 정중히 예를 취했다. 진심 어린 위로의 목소리였다.

“구령 대인께서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셔서 호사족 병사들에게 어떤 비호도 내려주시지 못합니다. 저희가 남아 있어 봐야 큰 도움도 되지 못할 거예요. 저는 일단 홍라하곡으로 돌아가겠으니, 왕께는…….”

안색이 누그러진 은갑이 함께 예를 취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제가 숙육 대인과 왕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고하면 그분들도 이해해주실 겁니다.”

“수고해주십시오. 고맙습니다.”

이미 마음이 전장에서 떠난 은갑은 정신이 나간 얼굴로 급히 인사를 하고 대전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그가 떠나고 다른 족장들은 분분히 비술을 이용해 족인들에게 충령이 기습했는지 확인을 하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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