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6화. 내기
*
수족 각 부락의 족장들이 열띤 토론을 하고 있을 때 한립은 침실의 침상 위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곁을 지키던 금동과 백옥 비휴는 언제 거둬들였는지 보이지 않았다.
수족들이 그를 죽여 보약으로 만들려는 계략도 모르고 한립은 어떻게 하면 눈앞에 닥친 강적에 맞설 수 있을까 방법을 찾고 있었다.
천정의 추살을 받을 때보다 더 곤란한 상황이었고 어쩌면 진선계에 온 이래 가장 큰 위기였다.
기연이 따라주어 천정의 감찰선사를 죽이기는 했으나 공수구도 태을경 후기의 서금선 앞에서는 기도 펴지 못할 존재였다.
승산이 희박해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살길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했다.
시간이 흘러, 한립의 눈꺼풀 아래에서 눈동자가 움직이고 전신을 흐르던 푸른 빛이 사라졌다.
무표정하게 눈을 떠서 거실 쪽을 살피던 그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때 암성협곡 중부의 절벽 쪽으로 푸른 빛이 빠르게 날아들어 누군가를 낚아챘다.
“가자꾸나.”
낙청린이 피풍의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리고 은신해 있던 낙의범을 잡아낸 것이었다.
“아버지, 려 선배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가 있는데 어찌…….”
“이건 수족 전체가 결정한 일이다.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니란 말이다.”
“그래도 틀린 것은 틀린 겁니다! 아버지께서는 인족이 교활하고 배은망덕한 족속들이라 하셨지만 이제보니 우리 수족들도 그들과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왕의 뜻이 그러한 것을, 아비라고 어찌할 수 있겠느냐…….”
낙청린이 한숨을 내쉬었고, 그 말을 들은 낙의범은 크게 낙담하며 멀리 절벽 쪽을 바라보았다.
인근 수백 리에 머물던 유진족 족인들이 철수하고 수족 8대 성족들의 정예 전사 수천 명이 수십 명의 대제사의 부름을 받아 주변을 철통같이 포위하고 있었다.
낙청린 외의 나머지 8대 성족 족장들이 절벽 위 상공에서 한립이 머무는 동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동동동…….
호사족 족장 은신이 누런 짐승 가죽은 덧댄 소고를 꺼내 수십 명의 대제사들을 향해 흔들었다.
대제사들이 그 박자에 맞춰 뼈 지팡이를 움직이며 기괴한 주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소리가 멀리 퍼질수록 암성협곡 중앙을 흐르는 강이 미친 듯이 물결치고 양쪽의 절벽을 따라 푸른 덩굴이 자라나 사자 머리 모양의 문양을 만들어 냈다.
덩굴로 인해 낮이었던 골짜기 안에 밤이 드리운 것 같았다.
“려 수사, 상의할 일이 있으니 잠깐 나와 보시지요.”
골짜기 전역에 구금진법을 펼친 은신이 노인네답지 않게 우렁차게 소리쳤다.
“려 수사, 잠시 나와 보시지요…….”
아무 대답이 없었으나 분명 동부 내부에 한립의 기운이 느껴졌고 초조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들 중 유진족 등은 한립이 충령과 대치하는 장면을 직접 보았기에 인족 수사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 전사들만이 아니라 오로나 만림 같은 족장급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은신이 몇 번을 불러도 안에서 응답이 없자 오로가 입을 열었다.
“흥, 겁먹고 나오지 않기는! 제가 들어가 보겠습니다.”
야효족 족장 정귀가 훌쩍 몸을 날려 소리 없이 동부 속으로 날아들었다.
그런데 그가 동부로 진입하기 전에 쾅! 하는 폭음이 들리고 돌문이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다.
정귀가 화들짝 놀라 즉시 뒤로 물러나고 수족의 다른 인물들도 긴장한 얼굴로 동부 안을 들여다보았다.
푸른 장포를 입은 중년인이 태연히 뒷짐을 쥐고 서서 사방의 수족들을 훑고 있었다. 극소수의 몇몇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그의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 극소수의 인물 중에는 호사족 족장 은신, 신상족 노파, 그리로 낙청린이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낙청린의 눈빛은 아주 복잡했다. 미안함과 연민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의 감정이었다.
금선 중기의 수사가 발산하는 무형의 위압감에 수천 명의 수족 정예들이 압도되어 골짜기에 침묵이 흘렀다.
“쳐라!”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은신이었다.
명령이 떨어지자 수십 명이 대제사들이 지팡이를 유려하게 움직여 허공에 무언가를 그리면서 난해한 주문을 외웠고 자신의 피를 흘려보냈다.
산골짜기 위에 형성된 진법에 거대한 진령 허상이 떠올라 점점 실체화되었다.
파아앗.
숨 막히는 기운이 산골까지를 내리누르고 가장 먼저 푸른 갑옷을 입은 꼬리 여섯 달린 여우, 숙육이 강림했다.
뒤이어 산만한 코뿔소, 새까만 매 등 8대 성족들이 모시는 진령 여덟 마리가 골짜기 상공에서 청포 중년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도 한립은 말없이 뒷짐만 쥐고 서 있었다.
육미청호 숙육이 눈을 번득이고 느닷없이 한립을 향해 꼬리를 날렸다.
쉭!
꼬리에서 날아간 바람이 덮치자 한립은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지켜보던 수족들과 나머지 일곱 진령들은 어안이 벙벙해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이 멍청한 것들! 이미 달아난 지 오래인 녀석이 남겨 놓은 허상에 속아 우릴 불러들였단 말이냐?”
숙육이 고개를 돌려 각 족 족장들을 책망했다. 한립이 사라진 자리에는 노란 콩알과 푸른 말 머리 가면만 남아 있었다.
은신은 당장 낙청린을 노려보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어찌 알고 저자가 도망친 것이지?”
“설마 저를 의심하시는 것입니까?”
그 말에 낙청린도 버럭 화를 내며 눈을 부릅떴다.
“따님과 인족 수사의 사이가 심상치…….”
“우리가 계책을 세우고 의범이는 줄곧 가둬두었소! 허튼 소리할 생각 마시오!”
정귀가 음산한 눈빛으로 낙의범 이야기를 꺼내자 낙청린의 얼굴이 더욱 살벌해졌다. 게다가 그 말이 끝나자 육미청호도 방대한 몸을 돌려 귀정을 향해 좋지 않은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 의범이가 뭘 어쨌다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정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더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육미청호는 여기 모인 다른 진령들보다 실력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진령왕 유호의 직계로 야효족 진령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오로와 만림은 강 건너 불구경하는 표정으로 서로 눈을 마주쳤다.
숙육대인이 낙의범을 아끼는 것은 다들 아는 사실인데 스스로 분별없이 나서서 화를 자초하다니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유진족이 8대 성족 중에서도 알아주는 이유는 숙육대인이 그 소주인 낙의범을 아주 중시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야효족 진령인 검은 매도 서늘한 눈빛으로 정귀를 노려보아 그는 진땀을 흘렸다.
“다른 일이 없으면 난 가보겠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나 부르라고!”
숙육이 먼저 이렇게 말하고 사라지자 다른 진령들도 몇 마디를 주고받다 분분히 그곳을 떠났다.
텅 빈 골짜기 상공을 바라보는 8대 성족 족장들의 얼굴이 어두웠다.
* * *
암성협곡에서 수만 리 떨어진 어느 산봉우리에 한립이 거목 아래 앉아 금빛 보호막으로 기운을 감추고 운공을 하고 있었다.
돌연 눈을 뜬 그의 입꼬리에 비웃음이 어렸다.
“아저씨 갑자기 왜 그래요?”
옆에서 금동이 힐끗 보고 의아해했다.
“수족이 나를 공격하는 쪽으로 선택을 마쳤구나.”
그 말에 금동이 퍽 실망하는 기색으로 희희낙락하고 있는 백옥 비휴를 흘겨보았다. 아이의 눈빛에 웃음기를 지운 흰둥이가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누님, 내기에서 지셨으니 승복하실 거죠? 이번에는 제가 이겼습니다.”
금동이 코웃음을 치며 영기를 왕성하게 품은 수정돌을 던져주었다.
“이 수족 개만도 못한 놈들!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분수가 있지…….”
팔짱을 낀 금동이 씩씩대며 욕을 하자 막 수정돌을 삼키려던 흰둥이가 목이 막혀 켁켁 거렸다.
“진령의 혈맥을 지닌 내가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비휴까지 데리고 다니니 저들이 나를 왕에게 바칠 보양식품으로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게다가 안 그래도 인족에게 이를 가는데 오래 남아 있어 봐야 좋은 꼴을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역시 주인님께서 마음이 넓으십니다. 사리 분별이 빠르세요!”
비휴가 수정돌을 삼키며 아첨을 했다.
“흰둥이, 너 그렇게 꼬리 흔들며 아첨하다가 아주 꼬리가 뽑히는 수가 있다?”
“헤헤, 누님. 아첨이 아니라, 저도 주인님을 따라다닌 지 꽤 되었잖습니까? 천지 영물도 넉넉하게 먹을 수 있고 누님 같은 용맹한 분의 보살핌도 받게 되었는데 당연히 그 마음을 표해야지요.”
“흥, 안목은 있네.”
금동은 이번 칭찬에 흡족한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번 수는 정말 절묘했습니다! 도병에게 주인님의 의복과 가면을 내주고 체신부(替身符)를 그 안에 숨겨 두었더니 다들 감쪽같지 속았지 뭡니까.”
흰둥이가 찬사를 이어갔다.
“그만 되었다. 이제 수족을 떠났으니 더이상 그들을 이용해 서금선을 상대할 수 없게 되었다. 앞으로는 상황이 더 좋지 않을 것이야.”
“아저씨, 벌써 그 녀석의 힘이 조금씩 회복되는 게 느껴져요.”
“격원법련은 내가 직접 제련한 물건이 아니라 봉천도가 쓸 때보다는 위력이 떨어진다. 게다가 그 서금선의 실력이 워낙 강해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이야.”
“그럼 이제 어쩌죠?”
“수족 영역의 지도를 일부 손에 넣었으니 이동하면서 그때그때 대책을 생각해 봐야겠지. 시간도문만 제때 회복되면 진언보륜을 이용해 치명적인 일격을 날리고 만황구역을 빠져나갈 시간도 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어디로 가는데요?”
“지도에 따르면 수족과 충족들의 영토는 아직 만황구역의 변두리고 남쪽으로 내려가야 심처로 진입할 수 있을 듯하다. 일단 수족과 충족의 구역을 떠나자꾸나.”
지도를 펼쳐 방향을 확인한 그는 벽옥비차를 불러내 금동과 흰둥이를 태우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 * *
반나절 후.
선령력을 주입해 쾌속으로 날고 있는 벽옥비차 위에서 한립이 미간을 좁혔다.
금선 중기의 수행을 지닌 그는 태을옥선이 원주인이던 비차의 속도를 기껏해야 2, 3할밖에 낼 수 없었다.
머리를 굴리던 그는 손을 저어 해 도인을 불러냈다.
“마차를 맡아 주시지요.”
분부를 내린 한립은 뒤로 물러나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나 해 도인의 선령력이 한립보다 부족해 그가 조종을 맡자 비차의 속도는 한층 느려졌다.
한립은 개의치 않고 ‘용오’ 가면을 꺼내 얼굴에 쓰고 붉은 화면을 불러냈다.
윤회전 가면이 만들어 내는 붉은 화면은 새로운 구역이 하나 더 생긴 것을 제외하면 무상맹 화면과 다를 바 없었다.
현상 구역에 금선 수사가 태을급 선기를 쉽게 다루는 방법을 찾는다는 임무를 걸어 놓고 꽤 많은 선원석을 보수로 약속했다.
다음에는 거래 구역으로 가서 황토색 진법 깃발과 원반, 하얀 우산 형태의 선기 그리고 비취색 옥쇄를 구해 옆에 놓았다.
보물들을 본 금동은 곧장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침을 삼켰다.
“아저씨, 선원석 좀 썼나 보네요?”
금동이 백옥 비휴를 타고 한립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물었다.
“다 쓸 데가 있는 물건이라 줄 수 없다.”
“힝…….”
한립이 얼른 소매를 펄럭여 물건들을 치워버리자 금동이 입을 비죽였다.
“태을경 서금선의 상태는 어떠하냐?”
“처음보다 더 빨리 힘을 회복하고 있어요……. 그래도 아직 쫓아오고 있지는 않은 것 같고요.”
“금동, 비휴의 뱃속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지?”
“흰둥이 뱃속 공간은 특수한 힘이 가득해서 날 소화하지는 못해도 혼백에는 영향을 끼쳐요. 적어도 반 시진에 한 번씩은 나와 줘야 해요.”
진지한 한립의 질문에 금동이 비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반 시진이라…….”
한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비휴 뱃속에 금동을 숨길 수 있으면 태을경 서금선을 피해 달아나는 데 아주 유용할 것이다. 다만 상대의 추적을 피하기에 반 시진은 너무 부족했다.
“흰둥아, 금동이 네 뱃속에서 더 오래 버티게 할 방법은 없겠느냐?”
“음……. 체내공간은 비휴 일족의 천부적인 신통이지만 제가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아 마음대로 조종할 수가 없습니다. 누님이 반 시진이나 머물 수 있게 하는 것도 엄청 힘든 일이라서요. 더 오래 있으려면 누님 쪽에서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겁니다.”
비휴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렇다면 혼백의 방비를 강화해 비휴 체내에서 더 오래 견디게 하는 수밖에 없겠어. 그런 거라면…….”
침음하던 한립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다시 윤회전 가면을 쓰고 붉은 화면을 불러냈다.
거래 구역으로 가서 이것저것을 고르던 그가 무언가를 선택했다.
“혼갑부(魂甲符)요? 이게 뭔데요?”
금동이 한립의 시선을 따라가 물건을 확인했다.
“써보면 알게 될 게다.”
한립은 담담히 미소를 짓고는 선원석을 500개나 주고 부적을 사들였다.
예전에 연신술 발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방법을 찾을 때 혼백을 강화하는 혼갑부를 봐두었었다.
하얀빛이 번득이고 타원형의 하얀 부적이 진법 중앙에서 떠올랐다. 구름 모양이 그려진 부적에서 강렬한 의식 파동이 새어 나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