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5화. 모략
*
암성협곡 깊은 곳.
절벽 사이로 만장폭포가 흘러 물안개 속에 무지개가 뜬 선경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물줄기 아래 깊은 호수 중앙에는 검은 바위로 지은 위풍당당한 대전이 있었고 그 양옆으로 거대한 화로가 활활 타올라 빛을 밝혔다.
대전 안에는 각 부락의 수족 족장들이 요수 가죽을 깔아 놓은 기다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유진족 족장 낙청린이 앉아 있었는데 왼편에는 오로 등이 앉아 있었고 오른편은 자리가 비어 있었다.
낙청린 뒤에는 낙의범도 자리했다.
“청체족, 호사족, 야효족 등은 연락이 있습니까? 언제쯤 도착할 수 있답니까?”
낙청린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청체족에서는 이틀 전에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3달 후면 도착할 수 있다더군요. 호사족과 야효족은 더 늦어지겠지만 반년 내로는 모일 수 있다고 합니다.”
유진족 사내 중 나이가 지긋한 이가 나서서 공손히 답했다.
“청옥요(靑玉????)를 날려 오늘 일을 알리고 서두르라 이르세요.”
“예!”
유진족 사내가 명을 받들고 대전을 나서자 대전 안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이번에 충령이 보인 무위가 엄청난 데다 충족 대군과 맞선 수족 전사들이 열세를 보여 사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충령이 직접 이끌고 나타난 충족들의 행태가 이전과 너무 달랐고, 급히 준비해 치른 전쟁이라 소홀한 점이 있으니 모두 너무 걱정하시지 마십시오. 경계를 강화하고 수족 각부를 집결하면 다시 쳐들어온다고 해도 반격을 가할 수 있을 겁니다.”
“예.”
낙청린의 말에 다들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상의를 마친 족장들이 나가고 폭웅족과 독각족 족장만이 남아 낙청린과 마주했다.
“그 인족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오로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이미 우리가 마련해준 거처로 돌아가 폐관을 하고 나서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낙청린은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홀로 충령을 격퇴하다니 상상을 초월하는 실력이었습니다. 왕께서도 못하시는 일을 해내다니, 아직 숨겨 놓은 한 수가 있을지 모르지요. 그냥 더 상세한 지도를 주고 어서 수족을 떠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독각족 족장이 의견을 냈다.
“이제 와서 그를 쫓아 보내는 게 어디 그리 쉽겠습니까…….”
오로가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괜한 걱정이십니다. 딴마음이 있었으면 충령과 대적할 때 바로 무슨 짓을 벌였겠지요. 이미 사람을 시켜 지켜보라 했으니 움직임이 있으면 보고가 올라올 겁니다.”
낙청린이 손을 저었다.
“그러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번 충족의 습격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어찌 생각해 보아도 충족이 공격할 이유가 없는 시기가 아닙니까?”
오로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답해했다.
“맞습니다. 마치 뭔가를 찾는 눈치 아니었나요?”
독각족 족장이 손뼉을 짝! 치면서 말했다.
“저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그게 무엇이든 우리 유진족 영역에 있는 거라면 절대 쉽게 내줄 수는 없지요.”
낙청린은 두 사람을 응시하며 다부지게 말했다.
잠시 후 나머지 족장들이 나가고 넓은 대전 안에는 낙청린과 낙의범 부녀만 남았다.
“아버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안다. 유진족에 은혜를 베푼 상대를 감시하고 경계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겠지?”
딸아이가 입을 열자 낙청린이 탄식하듯 물었다. 낙의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족의 교활함과 포악함은 충족을 넘어선다. 그런데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어머니께서도 인족이 아니셨나요? 그들 중에도 악한 자와 선한 자가 나뉠 거예요.”
“……그래, 네 어미는 특별한 사람이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전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를 아내로 맞이했을 리 없지 않더냐. 하지만 그 선량한 성격이 그녀를 동족의 손에 죽게 했다.”
낙의범도 그녀가 어릴 적 어미가 인족 수사에게 모해를 당해 죽고 아비가 대신 복수한 뒤로 인족에 대한 깊은 증오심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암튼 너무 염려하지 말거라. 우리 수족을 해치지 않는 한 아비도 그를 어찌할 생각은 없다. 상대가 떠날 때가 되면 좋은 지도를 구해주는 것 외에 따로 사례도 할 생각이고.”
낙청린은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타일렀다.
그 시각, 협곡 절벽의 동부 안에서 한립은 진한 푸른 기운 속에 잠겨 침상에 앉아 있었다.
금동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침상 끄트머리에 엎어져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런 그를 지켜봤다. 한립은 길게 한숨을 내쉬어 탁한 공기를 몰아내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아저씨, 몸은 어때요?”
“괜찮다. 앞으로 단약을 복용하면서 조금만 더 휴식을 취하면 완전히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휴, 다행이네요!”
한립의 아무렇지 않은 표정에 금동이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보다, 너는 동족이 호시탐탐 너를 잡아먹으려고 찾아다니고 있는데 두렵지 않더냐?”
웃음기를 머금은 한립이 그녀를 놀렸다.
“무서워요? 본 선녀가요? 그 녀석은 나보다 아주아주 조금 더 센 것뿐이라고요! 지금 당장은 잡아먹지 못해도 싸울 수는 있어요. 음, 못 이기면……. 에이, 아저씨도 있잖아요. 그렇죠?”
금동은 큰소리를 치다가 결국에는 목소리가 모기소리처럼 작아졌다.
“지금 내 실력에 결코 그의 적수가 될 수 없다. 이번에도 수족의 진령왕 유호가 나서지 않았다면 상대를 쫓아 보낼 수 없었을 테고.”
“그래요? 사실, 이번에 마주치기 전에는 그저 서로를 감응하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완전히 제 기운을 포착한 것 같아요. 만황구역을 벗어나기도 전에 붙잡히는 건 시간문제에요.”
그녀의 본능은 또 다른 서금선을 집어삼키라고 부추기는 동시에 더 강대한 동족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저씨…….”
금동이 한립의 옷자락을 잡고 흔들었다.
“그렇다면 문제로구나. 완전한 인근 지도를 얻는다고 해도 만황구역 전체 지도가 아니니 아무렇게나 돌아다닐 수도 없을 텐데 말이야.”
“그럼 어떻게 해요?”
“잠시 원영을 봉인해 두긴 했으나 상대의 수행에 오래가지 않아 돌아올 것이다. 다음에 다시 마주치면 유호와 힘을 합쳐도 이길 수 있을 거라 장담할 수가 없구나. 몸을 회복하면서 수행을 높일 방도를 찾고 진언보륜의 위력을 되찾아야 승산이 있을 것이야.”
“아저씨는 방법이 있을 줄 알았다니까요! 그래서 승산이 얼마나 되는데요?”
“1할.”
“1할이요? 나머지 9할은 지는 거잖아요!”
“이것도 일이 잘 풀렸을 때 이야기다. 약간이라도 승산이 있다는 데 희망을 걸어야겠지.”
금동이 목을 쭉 내미는 것을 보고 한립이 쓴웃음을 지었다.
“맞다! 아저씨 예전에 화로 같은 그런 보물은 더 없어요? 그런 게 다섯 개, 아니 서너 개만 더 있어도 먹고 푹 자고 일어나면 그 녀석을 이길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에요.”
“그런 보물을 당장 어디서 구할 수 있단 말이냐. 게다가 내가 살펴보기도 전에 네가 깨끗하게 먹어치워서 무슨 보물이었는지도 모른다.”
“흰둥아, 어서 냄새 좀 맡아봐. 주변에 무슨 좋은 보물 없어?”
마음이 급해진 금동은 다짜고짜 백옥 비휴를 향해 물었지만 상대는 뭔 소리냐는 듯 눈을 흘기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 * *
몇 개월 뒤.
암성협곡 폭포 아래 대전에 다양한 용모를 지닌 이종족들이 앉아 있었다.
수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이들이 바로 진령왕을 제외한 수족 최고의 권력자 집단이었다.
“청린 족장, 모든 종족이 다 모이기도 전에 왕께 강림하기를 청하다니 설명이 필요할 듯합니다.”
사람의 몸에 야차의 얼굴을 지닌 보라색 피부 사내가 낙청린을 향해 질의했다.
“정귀 족장께서는 어떤 대답을 듣고 싶으십니까? 충족 대군이 돌연 야효족을 습격했다면 족장께서는 어찌할 것입니까?”
낙청린이 냉랭히 상대를 응시했다.
“이 일은 청린 족장을 탓할 일이 아닙니다. 왕을 청한 것은 숙육대인이시니까요.”
오로도 야차 사내를 향해 불만스럽게 말했다.
“이런 불필요한 말다툼은 삼가시죠. 충령이 그냥 물러날 것 같지 않은데 어찌 반격해야 할지 상의를 해봐야 할 것 아닙니까.”
몸이 투명해 연기처럼 보이는 백의 여인이 나섰다. 인족과 비슷한 용모에 얼굴에 흐릿하게 푸른 문신이 새겨져 있고 커다란 두 눈은 혼을 빼놓을 듯 기이했다.
“인매 족장의 말씀이 맞습니다. 중요한 문제들이 쌓여 있어요. 청린 족장, 이번에 충령을 격퇴하는데 어떤 인족 사내의 조력을 받았다던데 사실입니까?”
커다란 몸에 검은 바늘이 가득 자라난 멧돼지 인간이 입을 열었다.
용모는 추레해 보였지만 이곳에 모인 누구보다 수행이 높았다.
“사실입니다. 녹명언덕에서 제 딸 의범이와 향경족 족인들을 구해 암성협곡까지 데려다주었기에 잠시 골짜기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청린 족장, 실수를 반복할 생각입니까? 인족을 들이다니요?”
야차 사내가 비웃듯 물었다.
“족인들을 시켜 엄중히 감시하고 있고 그가 원하는 것은 인근의 만황 지도뿐입니다. 원하는 것을 내준 후에 보낼 예정이고요.”
낙청린도 냉랭하게 답했다.
“금선 중기 수사가 왕과 힘을 합쳐 충령을 격퇴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멧돼지 사내가 뒷짐을 지고 의문을 제기했다.
“그자가 암성협곡에 발을 들이고 충령이 나타난 것을 전부 우연이라 여길 수 있겠습니까? 충령 쪽에서 심어 놓은 자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 자리에 다 모였으니 일망타진하기 얼마나 쉽겠어요.”
정귀가 눈썹을 끌어올리고 근심했다.
아무 근거 없는 소리였지만 목숨이 달린 일이라 다들 어두운 표정으로 낙청린을 바라보았다.
“상대는 평범한 금선 중기 인족 수사가 아닙니다. 만황진령의 기운을 지닌 영수를 데리고 있고 그 자체도 여러 진령 혈맥의 흔적이 느껴지더군요. 충령의 성격에 수족 진령 혈맥을 지닌 자와 협력할 듯싶으십니까?”
낙청린이 덤덤하게 반문했다.
“그자가……. 진령 혈맥을 지니고 있다고요?”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암성협곡에 들였을까요?”
정귀의 반문에 낙청린이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즉시 말했다.
“택무식 족장은 어찌 보십니까?”
연기로 이루어진 인매가 멧돼지같이 생긴 거한의 의견을 구했다.
“진령혈맥을 지니고 있다면 충족의 첩자일 리는 없겠군요. 하지만 어쨌든 인족이니 믿을 수 없다는 데는 동의합니다. 이후 이용가치가 있다면 이용하되 될 수 있는 한 빨리 내보내는 것이 좋을 거라 봅니다.”
“금선 중기의 수행을 지녔고 실력이 상당하니 최대한 악연을 맺는 것은 피하는 것이 낫겠지요.”
태무식의 의견에 인매도 동조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그럼 이렇게…….”
“잠깐.”
정귀도 어깨를 으쓱하고 동의하자 낙청린이 마무리를 지으려는데 누군가 끼어들었다.
백발이 성성하고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이종족 노인이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이목구비는 인족과 흡사했지만 사자 머리를 한 노인이었다.
“은신 선배님, 가르침을 주실 일이 있으신지요?”
낙청린이 미간을 좁히며 노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호사족의 일대 장로인 상대는 배분이 그들보다 높았는데 외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수련에 매진하다 아들이 엽황수사에게 죽었다는 소식에 출관했다.
격노한 그는 수백만 리를 쫓아가 관련된 인족 수사들을 잡아 죽이고 원황성 북단의 성벽까지 가서 마지막 인족 수사까지 격살한 뒤, 그들의 머리를 가져와 아들의 묘비 앞에 쌓아 두고 다시 족장 자리를 맡은 인물이었다.
“충령이 포악하기도 하지만 회복능력이 그 무엇보다 뛰어나다는 점에서는 무서운 존재일세. 우리도 제대로 전쟁 준비를 하지 못했다지만 돌연 습격한 그들도 마찬가지일 테지. 충령이 몸을 회복하고 충족 대군과 몰려온다면, 아직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왕과 우리만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은신이 무표정하게 묻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은신 족장. 빙빙 돌려 말하지 마시고,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세요.”
백발에 귀가 크고 코는 하늘로 치솟은 마른 노파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은신과 비슷한 배분의 신상족의 족장이었다.
“은신 선배님, 좋은 생각이 있으시면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택무식도 입을 열었다.
“그 인족이 지녔다는 진령혈맥을 이용하면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거란 소릴세. 무슨 말인지는 다들 알아들었을 테지?”
“진령의 피를 추출해서 왕의 회복을 도울 수 있게 바치자는 소리시겠지요.”
정귀가 바로 은신의 말뜻을 알아듣고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그건 안 될 말입니다. 아무리 인족이라 하나 우리 수족의 은인인데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낙청린이 인상을 찡그리며 반대했다.
“청린 족장은 부인이 어찌 목숨을 잃었는지 잊었단 말입니까? 인족에게 은인이라니 정신이 나갔군요.”
정귀가 얼굴을 굳히고 쏘아붙였다.
“전족의 흥망과 인족 한 명의 목숨을 저울질하는 겁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택무식도 서늘하게 물었다.
“그자는 왕과 함께 싸워 충령을 물리친 공이 있습니다. 왕께서도 동의하지 않으실 겁니다.”
“방금 왕께 여쭈었는데 그분께서도 허락하신 바일세.”
낙청린이 한숨을 내쉬며 반박하자 은신이 허허 웃으면서 답했다.
“그렇다면 저도 더는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좋네. 그럼 이제 어찌 그자를 죽일지 의견을 모으면 되겠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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