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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772화 (1,529/2,000)

1772화. 속수무책

*

“혈질(血蛭)!”

낙청린이 동공을 수축했고 다른 수족 족장들도 안색이 어두워졌다.

“피에 녹아들어 숙주와 하나가 되는 거머리입니다. 숙주의 정혈을 삼켜 혹을 만들고 자폭하기 때문에 상대하기 까다롭지요. 크기가 작고 속도도 아주 빨라 치명적인 일격을 날릴 수는 있지만 기르기 쉽지 않아 충족도 많은 수를 보유하고 있지는 못할 겁니다.”

낙의범이 신중해진 얼굴의 한립을 보고 설명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어라 답하려다 돌연 그녀를 잡아끌어 푸른 빛줄기로 공중 제단에서 솟구쳤다.

그때 아래쪽 땅속에서 거대한 입이 나타나 검은 제단을 집어삼켰다. 아까 나타났던 대형 사수였다.

낙청린 같은 금선급들은 피했지만 진선경 족장 몇은 제때 벗어나지 못해 제단과 함께 사라졌다.

대형 사수가 으적으적 제단을 씹으면서 그 안에서 참혹한 비명이 짧게 들리다 사라졌다. 그 모습에 각 부락의 일부 전사들이 당황해 우왕좌왕했다.

십여 리 밖에서 푸른빛이 반짝이고 한립과 낙의범이 나타났다.

한립은 미간을 좁히고 있었고 낙의범은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서둘러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관전대가 기습공격으로 훼손되자 낙청린 등은 난색을 표하며 땅바닥에서 솟아오른 사수를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사수는 그들은 상대하지 않고 방대한 나머지 몸을 끄집어내 한립과 낙의범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걸 본 한립은 낙의범을 잡아채 전신에서 금빛 뇌전을 번득였다.

콰릉!

뇌전 소리가 울리고 두 사람이 금빛 뇌전으로 변해 쏘아져 나갔다.

한립은 뇌둔술을 써 대형 사수보다 훨씬 빨리 움직였다. 이에 노호성을 터트린 사수는 전신을 노란빛으로 물들이고 주술문자들을 구름처럼 뿜어냈다.

갑자기 몸집이 절반으로 줄어든 사수는 속도가 3할은 빨라져 그들을 쫓았다.

“의범아!”

아비인 낙청린이 마음이 급해져 쫓으려는데 옆에서 오로가 손을 뻗어 그를 말렸다.

“낙 족장, 저쪽에는 인족 수사가 있으니 따님은 괜찮을 겁니다. 지금은 전투가 급합니다.”

그의 눈짓에 아래쪽을 본 낙청린도 표정이 달라졌다.

회색 피부 거인에 맞먹는 거대 지네 몇 마리가 나타나 전장을 휘젓고 다니는 중이었다.

은백색 지네의 날카로운 다리가 번득이고 입에서는 노란 독무가 흘러나와 수족 대군을 죽였다.

노란 안개에 닿은 수족 전사들은 즉시 살과 뼈가 검붉은 핏물로 녹아내려 죽었다.

이에 얼굴에 흉터가 있는 유진족 거한만 한립 쪽으로 다가가고 나머지는 정신을 차리고 수족 대군을 지휘했다.

안 그래도 검은 제단이 사라져 두려운 마음에 전형이 흐트러졌던 수족 대군은 낙청린 등이 직접 나서자 다시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복면 여인을 위주로 세 명의 수족 금선이 각각 백골(白骨) 북과 피리 그리고 깃발을 발동했다.

그들이 중얼중얼 주문을 외고 세 개의 보물이 음산한 흰빛을 발했다.

다음 순간 세 사람이 선 아래쪽 땅이 갈라지며 그 틈으로 굵은 짐승의 뼈들이 튀어나왔다.

산만한 뼈들 천여 개가 울타리처럼 솟아올라 충족 대군을 막고 있었다.

뼈들에 가득 새겨진 주술문자들이 각종 짐승 도안을 이루어 강력한 영력 파동을 발산 했다.

복면 여인이 기합을 넣으며 수결을 변화시키자 머리 위로 검은 영패가 떠올랐다.

영패는 울퉁불퉁한 동물의 뼈를 깎아 놓은 듯한 투박한 모양으로 눈코가 작은 동물 한 마리가 조각되어 있었다.

복면 여인은 그 안에 정혈을 뱉어 흡수시켰다.

휘이잉.

영패 표면에서 알 수 없는 검은 기운이 흘러나와 거대 뼈들 속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뼈들의 주술문양이 꿈틀거리고 울타리를 이룬 뼈들도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동물 뼈들 위로 맹렬히 동그란 원형의 고리가 생기고 그 안에서 날카로운 뼈 창들이 튀어 나가 충족 대군 위로 떨어졌다.

최전방에서 싸우던 충족 대군의 전사들은 몸이 벌집이 된 듯 구멍이 숭숭 뚫려 피를 흘렸고 거대 지네들도 수많은 뼈 창들을 맞아야 했다.

불똥이 사방으로 튀고 거대 지네들의 단단한 껍질에 하얀 흔적이 남았다. 뼈 창이 거대 지네들에게 상처를 입히지는 못했지만 영충들은 고통스러운지 날카롭게 울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충족 대군에서 강대한 기운을 지닌 금선 네 명이 날아올랐다. 그 모습에 복면 부인이 머리 위 백골 북에 법결을 던져넣었다.

둥!

작은 북이 쩌렁쩌렁 울리고 끈적한 하얀빛이 아래쪽 짐승 뼈로 흘러 들어갔다.

괴이하게도 뼈들이 동시에 갈라져 액체처럼 변하더니 거대한 하얀 장벽으로 뭉쳐 수족 대군의 전방을 가로막았다.

하얀 보호막에는 희미하게 짐승 도안이 떠올랐고 굉장히 튼튼해 보였다. 불시에 보호막에 부딪힌 네 명의 금선들은 둔광을 흐트러트리고 본 모습을 드러냈다.

노란 장포를 입은 노인과 대머리 거한 그리고 자매로 보이는 닮은 금포 여인 둘이었다.

충족의 금선들은 이렇게 빨리 강력한 보호막이 형성된 것에 놀란 기색이었으나 곧 황포 노인이 손을 뻗어 세 개의 금빛을 날렸다.

펑!

금빛이 하얀 보호막을 갈랐으나 물결이 일다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금빛의 정체는 칼을 닮은 괴충들이었다.

황포 노인이 세 가지 백골 보물을 훑고 냉소했다.

“유진족에 천절마령고(天絶魔靈鼓), 삼재원골적(三才元骨笛), 차천백골기(遮天白骨旗)라는 태을경 진령의 유골로 만든 보물이 있다는 소리는 익히 들어왔습니다. 어디 오늘 그 ‘백골삼보(白骨三寶)’의 위력이 어떤지 직접 확인해보지요!”

이 말을 시작으로 충족 금선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

복면 여인 등 세 명의 수족 금선들은 하얀 보호막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백골삼보 속으로 정혈을 뿜고 법결을 날렸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보물의 기운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 * *

전장에서 꽤 떨어진 허공에 금빛과 노란빛이 번득이고 환영처럼 한립과 사수가 지나갔다.

어느새 방대하던 몸집이 아주 작게 줄어든 사수는 처음보다 훨씬 빨라져서 풍뢰시를 펼치고 전력으로 뇌전술을 펼쳐도 따돌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 원인 중 하나에는 낙의범을 데리고 이동해야 한다는 것도 있었다. 양자 간의 거리가 수십 리 안으로 좁혀 졌을 때 이변이 발생했다.

노란 빛덩이가 강렬한 법칙의 힘을 품고 한립을 가두려 한 것이다.

한립은 사수의 영역에서 벗어나기 위해 순식간에 풍뢰시의 금빛으로 온몸을 감싸고 수백 리 바깥에서 나타났다. 그는 즉시 뇌전빛을 크게 일으켜 다시 이동해 어느 숲 위에서 나타났다.

“낙 수사, 이 틈에 먼저 가보게. 사수가 노리는 것은 나니까 자네를 쫓지는 않을 걸세.”

“려 선배님도 조심하십시오!”

한립은 낙의범에게 말을 남기고 홀로 튀어 나갔다. 창백한 얼굴의 낙의범은 차분히 예를 올리고 협곡 방향으로 따로 날아갔다.

하늘 끝에서 그들을 쫓아 나타난 사수는 힐끗 한립이 뇌전으로 변해 달아나는 모습을 보더니 뜻밖에도 낙의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이런!”

수백 리 밖에서 이를 알아챈 한립은 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달았다.

이미 거리가 꽤 멀어졌지만 그는 풍뢰시를 활짝 펼치고 몸을 돌려 뇌둔술을 극성으로 발휘해 낙의범 쪽으로 쏘아져 나갔다.

낙의범은 무시무시한 거대 짐승이 자신 뒤에 따라붙은 것을 알자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하얀 옥 부적을 꺼내 깨트렸다.

펑!

옥부가 하얀 빛 알갱이로 변해 그녀의 몸에 스며들고 낙의범도 등 뒤로 하얀 학 날개 한 쌍이 생겨 속도가 두 배로 빨라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수의 속도보다는 느렸다.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져 사수가 입에서 밧줄 모양의 노란빛을 뿜어 그녀를 노렸을 때 굵직한 은색 벼락이 짐승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콰쾅!

사수의 머리를 내리친 벼락이 은빛으로 흩어지고 주변이 웅웅 떨렸다. 낙의범 옆에 은빛이 번쩍이고 나타난 것은 흉터 거한이었다.

“극돈 장로!”

그녀가 상대를 알아보고 기뻐했다.

“소주,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흉터 거한은 번개처럼 그녀를 안고 다른 손으로 뇌전 문양이 새겨진 망치를 움켜쥐었다.

망치에서 뇌전 법칙의 힘이 흘러나와 그들을 휘감고 이동하려는 순간, 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컥!”

사발 크기의 노란 빛 구슬에 가슴을 관통당한 거한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은빛 뇌전이 완전히 흩어지고 피부가 약간 그을린 대형 사수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노란 빛 구슬은 사수의 미간에서 쏘아져 나간 것이었다.

빛 구슬이 터지면서 흉터 거한의 몸도 산산조각이 나서 떨어졌지만 그 찰나의 순간 거한의 은색 뇌전 망치가 흐릿하게 사라져 사수 앞을 가로막았다.

자세히 보니 작은 원영이 보물 속에 숨어 이동한 것이었다.

“터져라!”

굉음과 함께 은색 망치가 폭발하면서 무시무시한 파동이 주변을 휩쓸었다. 대형 사수는 보물이 자폭한 위력에 휘말려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이로 인해 발생한 돌풍에 바깥으로 튀겨나간 낙의범은 눈에 언뜻 눈물이 맺혔으나 결연한 얼굴로 하얀 둔광을 일으켜 달아났다.

몇 호흡이 지나 은빛이 가시고 상처가 가득한 사수가 나타났다.

고개를 훽 돌린 사수는 하늘을 향해 울부짖더니 노란빛으로 전신을 감싸고 물속을 노니는 물고기처럼 땅속으로 뛰어들었다가 솟구쳤다.

신기하게도 사수는 몸에 난 상처가 씻은 듯이 사라지고 기운이 조금 허약해 졌을 뿐이었다. 사수는 즉시 방향을 틀어 낙의범을 쫓아갔다.

팟.

금빛이 번득이고 도착한 한립은 곧장 수결을 맺어 그들을 뒤따랐다.

* * *

암성협곡 입구.

낙청린이 빠르게 성곽에 내려서자 회색 장포를 입은 대제사 두 명이 다가왔다.

“족장님,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숙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낙청린은 두 손을 펼쳐 금실로 천체도가 화려하게 수놓아진 보라색 장포를 불러냈다.

세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성곽 중앙의 널따란 제단 위로 올라 각각 세 방향에 자리한 다음 푸른색 나무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둥둥. 둥둥둥. 둥둥…….

낙청린이 진령 언어로 주문을 외며 지팡이로 제단에 새겨진 진법을 두들기자 나머지 대제사들도 장단을 맞춰 지팡이를 움직였다.

잠시 후, 낙청린이 지팡이를 지면에 깊숙이 찔러 넣는 순간 대제사들의 지팡이도 제단을 파고들었다.

이어서 낙청린은 손바닥을 들어 깊게 베고는 대량의 핏물을 제단으로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핏물이 똑똑! 떨어져 사방으로 튀지 않고 보라색 뱀처럼 진법을 타고 꿈틀꿈틀 퍼져나갔다.

“움직여라!”

얼굴이 창백해진 낙청린이 이를 악물고 외쳤다.

우우웅.

제단 위로 보랏빛이 폭발적으로 치솟아 복잡한 빛의 진법을 형성하고 반딧불이 같은 빛알갱이가 날아올라 거대 허상을 만들어 냈다.

거대 허상은 어깨를 털고 몸을 움직여 보다 점점 실체화되었다.

“유진족 녀석아, 이 몸의 본체를 다 불러내고, 벌써 못 버티게 된 것이냐?”

진법의 보랏빛이 천천히 가시자 푸른 털이 자라난 거대 여우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여우는 미간에 별 무늬가 있었고 오른쪽 눈에는 다른 흉수에게 당한 듯 세 줄기 상처가 남아 있었다.

거대한 여섯 개의 꼬리를 늘어트린 여우는 화려한 금빛 문양이 가득 새겨진 푸른 갑옷을 입고 매우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숙육대인. 의범이가 위험에 처해 대인의 도움을 구합니다!”

낙청린은 서둘러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뭐라! 어떤 놈이 의범이를 괴롭힌단 말이냐?”

거대 청호(靑狐)가 돌연 허리를 펴자 입고 있는 갑옷들이 쩔그럭거리며 여섯 개의 꼬리가 마구 움직였다.

“대인께 아룁니다. 금사족(噙沙族) 족장이 기르는 사수가 지금 의범이를 쫓고 있습니다. 전족이 전장에 나선 터라 대량의 병력을 보내 딸아이를 구할 수 없으니 대인께서 도와주십시오.”

낙청린은 조급해하면서도 황송하다는 기색으로 말했다. 숙육이 고개를 돌려 전장에서 낙의범의 신영을 찾으며 입을 열었다.

“낙청린, 아비 노릇을 이렇게 해서야 되겠더냐? 너희 유진족 중에 의범이 그 아이가 가장 마음에 찼는데, 오늘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네게 죄를 묻겠다.”

그때 하늘 끝에서 사수에게 쫓겨 위기에 처한 낙의범의 모습이 청호의 눈에 들어왔다.

“찾았다…….”

눈을 가늘게 뜬 숙육이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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