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1화.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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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의 군대가 성난 파도처럼 맞부딪쳐 하늘과 땅이 울리는 것을 보고 한립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전장에서 들려오는 전투 소리에 그의 기분도 고조되고 있었다.
쿠르릉!
그때 뒤쪽에서 거대한 불 구슬들이 날아올라 멀리 충족 대군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귀청을 때리는 폭음이 들리고 거대한 불 구름이 충족 군대를 덮쳐 영충들을 재로 만들었다.
한립이 고개를 돌려보니 불 구슬들은 새까만 전차에서 날아오른 것이었다.
전차에 새겨진 문양들이 빛날 때마다 원통형 입구에서 불 구슬이 쏘아져 나가 운석처럼 충족 대군에 떨어졌다.
“저희 수족의 화신전차(火神戰車)입니다. 위력은 대단한데 재료를 구하기 어려워서 아쉬운 일이지요. 저런 전차를 만 대만 만들 수 있었어도 충족을 멸할 수 있었을 텐데요.”
낙의범이 한립이 표정을 읽고 말했다.
이때 검은 그림자가 충족 대군에서 날아올라 비처럼 수족 대군 위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가느다랗게 흩어진 비수 모양의 괴충들이 수많은 수족들을 뚫고 지나가 비명과 괴성이 난무했다.
그러나 괴충들도 무언가를 관통하면 스스로 터져 목숨을 잃었다.
“망골충(芒骨蟲)입니다! 충족이 망골충 둥지를 가지고 왔을 줄이야…….”
낙의범의 고운 얼굴이 냉랭해졌다.
그 말에 한립은 충족 대군 뒤쪽 떠오른 백여 개의 작은 검은 그림자에서 꿈틀꿈틀 수많은 영충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망골충의 속도는 수족 화신전차의 불 구슬만 못했으나 각 둥지가 품고 있을 요충들의 수를 생각하면 위력은 엄청났다.
쌍방은 치열하게 대립하면서도 서로 물러나지 않았고 거리가 가까워지자 유진족 전사들은 등에 맨 남색 대궁을 풀러 화살을 쏘아댔다.
쉬쉬쉬쉭…….
남색 화살이 비처럼 충족 대군 속으로 떨어져 대량의 충족 전사들의 몸이 뚫렸다. 화살이 품은 힘은 심지어 망골충보다 강한 듯했다.
그뿐 아니라 충족 전사를 관통한 화살은 터지면서 청록색 화염을 일으켜 사방으로 튀었고, 그 불길이 붙은 충족 전사들은 살이 타들어가 뼈만 남았다.
바로 그때, 귀를 찌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금색 충족인들이 충족 대군에서 날아올랐다.
온몸이 황금색인 이 충족들은 등 뒤로 날개가 달려 있었고 두 팔이 낫처럼 생겨서 사마귀 인간 같아 보였다.
유진족들은 사마귀 충족들의 습격에 더는 충족 대군을 공격하지 못하고 대궁을 그들 방향으로 돌렸다.
쉬쉬쉬쉭.
사마귀 충족들은 파도처럼 밀려드는 화살을 뚫고 달려들어 유진족 전사들도 대궁을 거두고 남색 장도를 꺼내 들어 육박전에 돌입했다.
“금당족(金螳族)까지!”
미간을 좁힌 낙의범이 중얼거렸다.
“금당족이 나타난 것이 문제인 건가?”
한립은 상대의 어투에서 무언가 이상을 감지하고 물었다.
“금당족은 충족의 큰 종족입니다. 수족의 8대 성족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지요. 신상족(神象族), 준익족(準翼族)처럼 이곳에서 아주 먼 곳에 거주하는데 어떻게 저들까지…….”
“자네의 말은 충족의 이번 공격이 이전과는 양상이 다르다는 것인가?”
“네, 수족과 충족은 원한이 깊어 전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런 대규모 공격은 처음 봅니다.”
“자네 종족에서도 미리 대비하였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큰 위험에 처할 뻔했군.”
낙의범과 대화를 나눈 한립이 침음했다.
아래쪽에서는 쌍방의 대군이 격돌해 서로 죽고 죽이는 중이었다.
전방의 폭웅족 전사들은 우람한 몸에 핏빛 인장 자국이 떠올라 체구가 더 커졌고 커다란 도끼로 충족 전사들을 콱콱 찍어 죽여 나갔다.
독각족 전사들은 머리에 난 녹색 뿔에서 음산한 광선을 뿜어 적들을 공격했다.
광선이 어찌나 강력한지 일고여덟 명의 충족을 뚫고서야 사라졌고 광선에 관통당한 충족 전사들은 몸이 얼어붙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그런 후 독각족 전사들은 손에 든 무기를 이용해 얼어붙은 적들을 제거했다.
윙윙윙…….
폭웅족과 독각족을 선두로 수족 전사들이 충족 대군 내부로 파고들려 할 때 갑자기 전방에서 새까만 거대 개미 떼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맷돌 크기의 거대 개미들은 몸 껍질이 아주 단단하고 성정이 흉포해서 폭웅족의 도끼를 맞고도 더 광분해 달려들었다.
동시에 독각족 전방의 지면이 뒤집히고 커다란 황토색 전갈들이 솟아올라 앞을 막아섰다.
사람의 얼굴이 달려 섬뜩하기 짝이 없는 전갈들은 독각족의 녹색 광선에 내성이 있는지, 광선들이 딱 한 마리만 관통하고 사라졌다.
인면(人面) 전갈들은 녹색 광선에 당하고도 순간 뻣뻣하게 굳었다가 다시 달려들었다.
졌다고는 할 수 없으나 폭웅족, 독각족, 유진족 세력이 더는 돌진하지 못하고 앞길이 막힌 것만은 확실했다.
검은 공중 제단 위에 선 수족 족장들의 얼굴이 굳어갔다.
“살한 족장에게 움직이라 명을 전하라.”
낙청린의 분부에 곁에 선 유진족인이 대답을 하고 흐릿하게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족의 전선에 붉은 피풍의로 전신을 가린 인영이 나타나 두 팔을 펼쳤다.
희색 빛구슬 세 덩이가 충족 대군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쾅! 쾅! 쾅!
커다란 폭음이 세 번 울려 전장을 뒤흔들고 산봉우리 같은 우람한 무언가가 떨어져 거대 개미 떼와 인면 전갈 등을 가루로 만들었다.
한립이 돌아보니 키가 천장에 달하는 회색 피부 거인 셋이 상반신은 헐벗고 하반신은 동물 가죽으로 가린 채 거대한 낭아봉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나같이 추하게 생긴 거인들은 이마에 거대한 눈이 하나 박혀 있고 얼굴에 뚫린 구멍 두 개가 콧구멍을 대신하고 있었다.
코 아래 얼굴은 텅 비어 있어 무언가를 먹고 말을 하기 위한 입은 보이지 않았다.
낭아봉이 떨어질 때마다 충족 대군은 물론 그 아래 나무와 언덕도 조각이 났다.
거대 개미들은 몸이 터지면서 녹색 피를 흘려 하얀 연기가 자욱하게 올라왔다.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던 충족이 전열을 재정비하자 새까만 거대 개미들이 빠르게 외눈박이 거인 세 마리를 포위했다.
대량의 개미들이 겹겹이 거인들을 타고 올라가 뜯어먹으면서 날카로운 이빨에 묻은 부식 능력을 지닌 침으로 거인의 몸을 녹였다.
외눈박이 거인들이 괴로운 듯 몸부림치고 손바닥으로 몸에 붙은 개미들을 쳐냈으나 영충들은 끈질기게 버텼다.
이때 커다란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상반신은 인족과 비슷하고 하반신은 얼룩말인 반인반마의 전사들이 수족 대군 후방에서 날아올라 푸른 덩굴로 엮은 대궁을 들고 푸른 화살을 쏘아 올렸다.
쉬쉬쉬쉭…….
거의 동시에 날아오른 수많은 화살이 한 곳으로 집결해 푸른 소용돌이를 이루고 아래로 떨어졌다…….
수족과 충족이 싸우는 것을 지켜보던 한립이 입을 열었다.
“옛말에 첫 번째 북소리는 사기를 북돋으나 두 번째 북소리는 기세를 꺾고, 세 번째 북소리는 끝을 알린다고 했네. 겉보기에 수족이 우세한 것 같아도 충족 대군의 병력이 수족을 압도해서 이대로 가다간 패배할 걸세.”
“그런 말씀을 하시기에 아직 이르지 않을까요? 수족의 북소리는 아직 한 번밖에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둥둥……. 둥둥…….
낙의범의 말이 떨어지고 기다렸다는 듯 북소리가 들려왔다.
그 박자에 맞춰 전장 곳곳에서 노랫소리 같은 기괴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데 만황의 언어도 아니고 선역 통용어도 아니었다.
‘어떤 진령의 언어 같은데…….’
한립은 상황을 이해하고 전장 곳곳에서 다른 전사들에 둘러싸여 있는 회색 장포의 특수한 존재들을 발견했다.
검은 나무 지팡이를 쥔 그들은 진령 언어를 써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었다.
분명 그냥 목소리에 불과했는데 기이한 힘이 전장을 뒤덮고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상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수족 전사들은 이 회색 장포 수족인들의 노랫소리를 들은 다음부터 굉장히 흥분해서 전력을 다해 싸웠다.
한립 역시 그 소리를 듣자 혈액의 흐름이 왕성해지는 것을 느꼈다.
“죽여라! 죽여…….”
폭웅족 전사들의 기운이 증폭되어 충족들을 향해 뛰어들었고 독각족 전사들은 몸에서 기이한 허상이 떠오른 뒤 눈이 붉게 물들며 온몸의 관절에서 칼처럼 날카로운 뼈가 자라났다.
두 종족 외에 다른 수족 전사들도 다양한 변이를 하고 있었다.
“수족이 기혈술(嗜血術)이라도 펼친 것인가?”
“기혈술이요? 비슷하기는 하지만 저희는 그렇게 부르지 않습니다. 수족 특유의 헌제술(獻祭術)은 각 족인들이 자신의 정혈을 진령에게 바치고 진령의 부분 역량을 빌려오는 술법입니다.”
웃으며 고개를 젓는 낙의범의 말에 한립도 이해가 되었다.
회색 장포를 입은 수족들은 각 부락의 대제사로 각각이 신봉하는 진령 허상이 맴돌고 있었다.
“모시는 진령과 소통할 수 있다면 진신으로 강림할 것을 청하면 충족을 금방 물러나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저희 수족의 8대 성족이 각자 자신들만의 진령을 모신다고 하지만 실은 계약관계와 같습니다. 그 관계가 돈독하냐 아니냐에 따라 진령께서 제공하는 비호의 정도도 달라지는데, 직접 강림 해주시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처럼 수족의 존망이 걸린 위기에도 말인가?”
“헌제술을 이용해 진령께서 진신으로 강림하는 데는 많은 제약이 따릅니다. 특히 자신의 기반이 아닌 곳에서는 더 어렵고요. 대부분 부락이 자신의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으로 집결했기에 진령이 자신의 기반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까지 진신으로 강림해 주실 가능성은 낮습니다.”
낙의범의 설명에 한립은 만황 수족이 진령과 맺은 의존관계가 흑풍해역의 지선과 그 신봉자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충족들을 마구 죽이던 천장 크기의 외눈박이 거인 세 마리 중 하나가 비틀거리면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저건…….”
그걸 본 한립이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외눈박이 거인이 서 있던 땅이 무너져 내리면서 엇비슷한 크기의 사수가 교룡처럼 머리를 쳐들고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바로 원황성 선박을 공격했던 태을경 대형 사수였다.
워낙 순식간에 발생한 일이라 외눈박이 거인이 머리부터 사수의 입으로 떨어지며 콰직! 하고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대형 사수가 외눈박이 거인의 머리를 통째로 물어뜯은 것이다.
머리 잃은 거인의 몸통은 옆으로 쓰러지면서도 손에 움켜쥔 낭아봉으로 사수를 호되게 내리쳤다.
쿠앙!
사수의 몸통이 엄청난 힘에 땅속 깊이 내려앉고 완전히 통제를 상실한 외눈박이 거인의 몸통이 쓰러지며 수천 마리의 충족 개미들을 으깨버렸다.
사사삿.
수많은 소형 사수들이 빼곡하게 땅속에서 튀어나와 거인의 시체를 덮고 뜯어먹었다.
피비린내가 진하게 풍기는 가운데 나머지 두 외눈박이 거인이 낭아봉으로 인면 전갈들을 부수면서 몸을 돌려 수족 방향으로 물러나려 했다.
그 순간 충족 대군 후방에서 암녹색 난쟁이들이 나타났다.
인족과 비슷한 생김새에 얼굴이 네모반듯한 이종족은 흰자위가 없는 새까만 눈이 이마에 붙어 있고 가느다란 더듬이가 자란 메뚜기 인간들이었다.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곤충 충족들이 암녹색 구름처럼 하늘을 가렸다.
“녹황족이 저렇게나 많이!”
그 모습에 낙의범이 놀라 소리쳤다.
“저 메뚜기 충족들은 상대하기 쉽지 않나 보군?”
“녹황족은 갉아먹지 못하는 것이 없어 떼로 나타나면 인근의 생명체가 모두 몰살당하기도 합니다. 충족 내부에서도 다른 부족의 배척을 받는 일파입니다. 습지에서 주로 생활하며 수량이 그리 많지 않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이 번식을 하였을 줄은 몰랐습니다.”
한립의 질문에 낙의범이 대답했다.
암녹색 메뚜기 떼가 나머지 외눈박이 거인 두 마리를 쫓고 있었다.
거인들도 그들의 무서움을 아는지 상대하지 않고 바로 큰 걸음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움직임이 가면 갈수록 느려져서 얼마 가지 못해 따라잡힐 것 같았다.
위기의 순간 고공에서 커다란 날개달 린 도마뱀들이 나타나 입에서 화염을 뿜어 녹황족인들을 공격했다.
화르륵!
암녹색 구름에 불바다가 되어 녹황족인들이 별똥별처럼 아래로 추락했다.
그 틈에 간신히 녹황족의 포위를 뚫고 달아난 두 거인은 전신에 뜯어 먹힌 작은 상처들이 가득해서 보기만 해도 섬뜩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암성협곡에 도달해 완전히 전장을 벗어날 수 있을 듯싶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쌀알 크기의 붉은 딱정벌레 백여 마리가 꼬리에 반딧불이처럼 빛을 밝히고 하늘과 땅에서 날아들어 두 거인의 상처에 파고들었다.
이에 거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멈춰 서서 상처를 살폈다. 그런데 작은 상처가 순식간에 혹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경악한 거인들이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새빨갛게 부어오른 혹들이 분분히 터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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