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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770화 (1,527/2,000)

1770화. 공동의 적

*

수많은 수족인들이 암성협곡에서 날아올라 하늘을 새까맣게 채우고 있었다. 그가 막 둔광을 일으키려는데 낙청린이 동부 입구에 나타났다.

“허허, 려 수사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요?”

“충족이 습격했으나 다 예상했던 바입니다. 대비를 해두었으니 걱정할 것 없으십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오늘 찾아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잠시 후 암성협곡 내의 금제 비술을 발동할 예정이라 골짜기 내에 아무도 남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불편하시겠지만 골짜기 바깥으로 이동해 주시기를 청하러 왔습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짐을 챙겨 나가지요.”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바로 동부 안으로 들어갔고 낙청린은 떠나지 않고 입구에서 기다렸다.

동부 안으로 들어서는 한립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충족과 수족이 대규모 전투를 벌이고 태을경 서금선까지 접근하고 있습니다. 한시바삐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주인님.”

그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비휴가 소리쳤다.

“금동, 네 생각은 어떠하냐?”

“아저씨도 우리 같은 서금선이 마주치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알죠?”

한립의 물음에 금동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아이의 금색 눈동자에 결연한 빛이 어려 있었다.

“누님, 저도 공수구를 따라 다른 선역을 돌면서 서금선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동급이라면 만황진령보다도 강하겠더군요! 태을경 서금선은 우리가 힘을 합쳐도 대항할 수 없을 테니 달아나는 것이 상책입니다.”

백옥 비휴가 그녀를 말리려 했다.

“못 도망쳐……. 서금선끼리는 서로를 민감하게 감응할 수 있어서 달아나도 반드시 나를 쫓을 거다.”

금동이 고개를 저었고 백옥 비휴도 대책이 없기에 입만 뻐끔거리다 말았다.

“금동의 말대로 우리가 이곳을 떠난다고 서금선이 쫓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게다가 마구 돌아다니다 다른 위험에 처할 수도 있지. 이곳에서 버티는 것이 차라리 힘을 아끼는 길일 게다.”

한립까지 이렇게 말하자 비휴도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는 일단 영수대 속에 숨어 잠시 모습을 드러내지 말거라.”

그의 손짓에 푸른빛이 금동과 비휴를 감싸 사라졌고, 그는 금제를 거두고 동부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아닙니다. 려 수사, 저를 따라가시지요.”

낙청린이 웃으며 그를 맞이하고 날아올랐다.

그를 따라 날아가면서 한립은 슬쩍 골짜기 깊은 곳을 돌아보았다. 검은 기운이 골짜기 깊은 곳에서부터 샘솟고 있었다.

아주 짙은 기운이라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으나 수십 개의 돌기둥으로 둘러싸인 진법이 설치되어 있고 그곳에서 공간 파동이 발산되고 있었다.

한립은 조금 놀랐으나 괜히 입을 놀리지 않았다.

영수대 안.

“흰둥이 너, 몸속 공간이 외부세계와 완전히 차단된다고 했었지?”

금동이 돌연 말을 꺼냈다.

“맞습니다, 누님! 기억력도 좋으시네요!”

비휴가 얼른 금동을 추켜세웠다.

“좋아. 그럼 날 삼켜봐.”

금동의 말에 화들짝 놀란 백옥 비휴는 머리가 띵해졌다.

“누님 제 몸속에서 숨어서 기운을 감추려고요? 안 됩니다. 몸속에 살아 있는 생물은 못 넣어요. 뭐든 일단 들어갔다 하면 빠르게 소화가 된다고…….”

“흥, 네가 날 소화 시킬 수 있단 소리야? 헛소리 말고, 빨리! 잠깐은 끄떡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삼켜.”

금동이 성가시게 하지 말라는 듯 재촉하자 목을 움츠린 비휴도 어쩔 수 없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비휴가 입을 벌려 흡입력으로 금동을 감쌌다.

* * *

한립은 낙청린을 따라 빠르게 암성협곡을 벗어났다.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던 수족들은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빠르게 움직여 골짜기 바깥 하늘을 까맣게 뒤덮었다.

한립은 수만 명은 되는 수족 중에 향경족도 3, 40부락 중 하나로 참전해 있는 것을 보았다.

허공에는 새까만 전차들이 천 개 가까이 떠서 수족 수사들을 가득 태우고 있었다. 거기다 각 부락 전사들이 앞쪽으로 백만 마리에 이르는 요수대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무슨 방법으로 통제를 하는지 군대처럼 열을 맞춰선 요수들을 보고 한립도 감탄을 했다.

“려 수사께서는 외부에서 오셨으니 보고 들은 것도 많으시겠지요. 수족의 병력을 어찌 보십니까?”

낙청린이 자부심을 담아 물었다.

“대단합니다.”

한립의 칭찬에 낙청린이 하하 웃으며 그를 전차 무리 앞에 있는 평평한 검은 제단으로 안내했다.

빛을 반짝이는 공중 제단 위에는 각 부락 족장으로 보이는 34명의 수족들이 서 있었다.

“인족 엽황수사! 낙청린 족장, 그자는 왜 데리고 온 겁니까!”

저음의 목소리가 분개해 외쳤다.

한립이 담담히 살피니 새까만 피부에 체격이 커서 한 마리 흑곰 같은 거한이 있었다.

금선 초기 최고봉에 이른 상대의 수행은 낙청린과 비교하면 조금 더 강한 편이었다.

다른 수족인들도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그중 십여 명만 금선 초기 수행을 지녔고 나머지는 진선 후기였다.

“오로 족장, 그리고 다른 분들도 화를 거두시지요. 여기 려비우 수사는 인족이지만 엽황수사가 아니라 만황구역을 가로질러 지나려는 분입니다. 게다가 수족의 향경족을 구해주신 은혜가 있으니 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낙청린이 급히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소녀가 각 부락에 연락을 취하던 도중 충족의 습격을 받았는데, 그때 려 선배님께서 도움을 주셔서 안전하게 암성협곡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낙의범도 낭랑하게 말했다.

“맞습니다. 려 수사께서는 저희 향경족의 영원한 벗입니다.”

탄십도 비록 외곽에 서 있었지만 우렁차게 목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듣고서도 수족들은 한립에게 불신과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려 수사, 너무 불쾌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만황 각 부락과 엽황수사들 사이에 원한이 깊어 그런 것이지 수사를 겨냥한 것은 아닙니다.”

낙청린이 한립을 향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요. 전투를 앞두고 계시니 낙 족장께서도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실력은 없지만 제 안위는 알아서 돌보겠습니다.”

한립은 미소를 지으며 담담히 답했다.

“려 수사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전투 중에 혹시라도 수족이 불리해지면 수사께 도와달라 청을 드려야 할지도 모르는 것을요.”

낙청린이 웃음을 터트리며 하는 말에 다른 족장들의 안색이 또 달라졌다.

“낙청린, 고귀한 수족이 비열하기 짝이 없는 인족 수사에게 도움을 청하게 될 거란 소립니까!”

흑곰 같은 사내가 버럭 소리쳤다.

“오로 형, 수족의 불구대천의 원수는 충족입니다. 공동의 적을 상대하려면 함께 힘을 모아야지요. 이 일에 대해서는 ‘왕’께도 말씀을 올렸고 그분께서도 제 의견에 찬성해주셨습니다.”

낙청린이 정색을 하며 측면 허공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거한도 ‘왕’이란 소리에는 기세가 누그러졌고 다른 족장들도 침묵했다.

“과분한 말씀입니다. 만황을 지나다 우연히 귀족의 영역에 들른 제가 어찌 두 종족의 쟁투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앞으로 갈 길에 필요한 지도를 구하는 것만이 유일한 바람입니다.”

그들을 훑은 한립이 고개를 저었다.

“지도에 관해서는 정말 죄송합니다. 모이기로 예정된 부락들이 아직 다 도착하지 않아 조금 더 보충해서 드려야 할 듯합니다.”

낙청린은 하얀 뼛조각을 하나 건넸고 그것을 받아 의식을 불어넣어 본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옥간과 비슷한 용도로 쓰이는 짐승의 뼛조각 안에 그가 앞으로 가야 할 일부 지역의 상세한 지도가 담겨 있었다.

“이건 저희 수족에서 준비한 작은 성의입니다. 이걸 받고 도움을 한번 주시지요. 충족이 물러나면 따로 후한 사례를 할 것입니다.”

낙청린은 이에 그치지 않고 백골 반지도 꺼내 넘겨주었다. 한립이 반지를 받아 내용물을 살피니 선원석 5천여 개가 담겨 있었다.

“선물을 준비한 낙 족장의 성의를 생각해서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제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위험이 도래하면 나설 수 없습니다.”

솔직히 백골 반지에 든 선원석이 그에게는 별 것 아니었으나 만황 종족에게는 큰 액수가 틀림없었고 그가 품고 있는 다른 마음을 숨기기에 좋은 구실이었다.

“저리 담이 작은 자에게 도움을 구해 무엇에 쓰려 하십니까, 낙 족장!”

“맞습니다! 그렇게 겁이 많으면 처음부터 만황에 발을 들이지 말았어야지요!”

다른 족장들이 한립의 말에 다시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여러분 우리는 전쟁을 앞두고 있습니다. 대국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려 수사, 모든 것은 수사의 뜻대로 하시면 됩니다.”

낙청린의 말에 한립은 일단 옆으로 물러났고, 그는 다른 족장들과 전술을 상의하러 갔다.

전체 수족 무리 중 세 부락의 인원이 가장 많았다.

그중 체구가 곰처럼 크고 전신에 검은 털이 자란 이들은 오로와 비슷하게 생겼고, 날개 달린 도마뱀을 타고 등에 남색 대궁을 맨 유진족 족인들도 상당수를 차지했다.

마지막으로 인족과 체형이 가장 비슷한 청록색 피부 족인들은 머리에 녹색 뿔이 하나 자라 있었고 녹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번득였다.

이 세 부락의 전사들이 수족 대군의 7할을 차지했다.

“저기 두 부락은 폭웅족(暴熊族)과 독각족(獨角族)입니다. 저희 수족의 8대 성족 중 일부로 방금 오로 족장이 폭웅족의 족장이지요.”

곁으로 다가온 낙의범이 한립이 수족 전사들을 살피는 것을 보고 설명해주었다.

“8대 성족?”

“수족의 수많은 부락 중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8개의 부락을 8대 성족이라 칭합니다. 저희 유진족도 그중 하나고요. 안타깝게도 아직 성족 중 3개의 부락밖에 암성협곡에 모이지 못했지만요.”

한립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쿠르르…….

하늘 끝에서 검은 선이 한줄기 나타나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엄청난 영충 대군이 빼곡하게 날아들어 하늘을 뒤덮는 중이었다.

수족의 요수 대군을 훨씬 뛰어넘는 규모의 영충 대군 뒤로 거대한 회색 구름이 무수히 많은 충족인들을 태우고 나타났다.

수만 명의 충족인들 역시 수족인들보다 수가 많았다. 무표정하게 그런 충족을 살핀 한립은 내심 흠칫 놀랐다.

충족 대군의 금선급 존재도 수족보다 많은 30명 정도였다. 어느 방면으로 보나 수족이 열세였으니 숨겨둔 방법이 없다면 이번 전쟁은 패배였다.

낙청린 등도 그걸 보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오로 족장, 만림 족장, 살한 족장, 계획대로 움직입시다.”

낙청린의 말에 세 사람은 한립을 차례로 훑었다.

오로는 이미 누군지 알고 있었고, 그 옆의 갑옷을 걸친 푸른 눈동자를 지니고 머리에 녹색 뿔이 돋은 거한은 뺨과 겉으로 드러난 피부에 흉터가 가득했다.

옆에서 낙의범이 나지막하게 그가 만림이자 독각족의 족장이라고 알려주었다.

마지막 살한 족장은 마르고 작은 몸을 품이 넉넉한 피풍의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리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세 사람은 낙청린에게 공수한 후 공중 제단에서 내려가 수족 대군에 합류했다.

오로 족장은 손을 저어 코뿔소를 닮은 거대 짐승을 불러냈다. 움직이는 요새같이 생긴 거대한 영수의 등장만으로 위압감이 대단했다.

코뿔소 영수에 탄 오로는 거대 도끼를 불러내 어깨에 걸쳤다.

“수족 용사들이여, 전방에는 비열한 적들이 후방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족인들이 있다! 수족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싸우자!”

오로 족장은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지르면서 들고 있던 도끼를 앞쪽으로 휘둘렀다.

“싸우자! 싸우자! 싸우자!”

수족 전사들이 소리를 높여 함성을 지르고 각자 무기를 들고 튀어 나갔다.

폭웅족, 유진족, 독각족 전사들이 최전방에서 진격하고 요수 대군도 포효를 내지르며 돌진했다.

충족 쪽에서도 흉흉한 기세로 달려들고 있었다. 그저 두 종족의 금선들은 서로 허공에 멈춰서 대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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