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769화 (1,526/2,000)

1769화. 익숙한 기운

*

호흡을 고르면서 목연의 기억을 정리한 한립은 천정에 대한 정보를 찾아내려 했다.

명한선부에서 감찰선사 공수구를 죽인 후로 그와 천정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간 것과 마찬가지라,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고 천정의 실체를 알아두는 것이 앞으로의 싸움에서 유리하다.

잠시 후 한립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과연 태을경 고계 수사답게 기억의 파편 속에서도 천정에 대한 적지 않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정보를 자세히 살피려는데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흐려졌다.

“왜 이러는 거지?”

깜짝 놀란 그가 기억을 파고들지 않자 혼백의 이상 현상이 사라졌다.

“설마 의식이 깃든 신체가 나보다 수행이 높아서인가?”

목연은 이미 죽었지만 남아 있는 기억은 한립의 기억이 아니었기에 그 안에서 원하는 내용을 찾는 일은 추혼술을 사용하는 것과 비슷했다.

의식의 힘이 동급 수사를 뛰어넘는 한립도 태을경 수사에게 추혼술을 펼친다면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한립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손을 저어 몸에 딱 달라붙어 있는 토양을 노란빛으로 녹이고 공간을 마련해 벽에 등을 기대고 쉬었다.

진언보륜의 시간도문이 하나씩 꺼져 총 30개가 어둑해지고 나서야 의식이 회복되었다.

재빨리 다시 목연의 기억을 뒤지기 시작한 그는 다시 천정 관련된 정보를 얻었다.

공식적으로 진선계 제1의 세력인 천정은 각 선역에 선궁을 두고 관리를 했으나 본거지는 중토선역(中土仙域)이라는 곳에 있었다.

천정 세력에는 확실히 시간도조가 한 명 있었고, 천정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도조였다. 여기까지 알아냈을 때 또 어지럼증이 찾아와 한립은 조사를 멈추었다.

“시간도조는 대체 누구일까…….”

다시 의식을 쉬면서 한립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시간법칙을 익혀서인지 시간도조라는 존재에 대해 묘한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흘러 진언보륜 상의 시간도문이 수십 개 꺼지고 그는 다시 목연의 기억을 살폈다.

이번에는 그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드디어 눈앞의 전쟁에 대한 정보를 찾았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미라선존과 같은 대라선존이 버티고 있는 한 진언문의 영화는 계속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진언문의 멸문을 촉발한 사람이 바로 미라선존이었다.

시간도조는 미라선존이 시간법칙을 익히는 것에 대노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진선계 전체를 관통하는 엄청난 비밀에 있었다.

삼천대도에는 무수히 많은 길이 있다지만 결국 진정한 대도는 유일무이한 것이었고 한 하늘에 태양이 두 개 있을 수는 없었다.

각 법칙마다 오직 한 명의 도조만 존재할 수 있었고, 어느 대라선존이 모종 법칙으로 원래의 도조보다 높은 경지까지 익히면 도조 자리가 대체 되었다.

그 중간에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는 아직 태을경 수사인 목연도 모르고 있었고 말이다.

그래서 어느 도조든 자신과 같은 법칙을 익히는 수사들을 주시하고 특히 태을경 이상의 수사는 그의 휘하로 들어가 통제를 받기를 원치 않으면 죽이는 일도 흔했다.

이는 고금 이래 모든 도조들이 이전 도조를 짓밟고 그 자리에 올라섰다는 말이 되었다.

미라선존은 시간법칙으로 대라경에 이르러 시간도조를 위협했고 이 사실을 숨기다 천정에 들켜 시간도조가 친히 나서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 기억을 읽어낸 한립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아직 금선 중기의 수행이었으나 아직 다른 법칙으로 주 수련 법칙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면 언젠가 천정의 ‘시간도조’에게 추살 당할 것이 뻔하지 않은가?

“대도를 수행하는 것은 과연 역천의 행위로구나…….”

모든 법칙을 수련하는 수사에게 각 법칙의 도조는 ‘하늘’과 다를 바 없었다. 그 하늘을 꺾어야 대도에 이를 수 있다니 하늘을 거스르는 일이었다.

침음하던 그는 휴식을 취하고 목연의 나머지 기억도 수색했다. 조각난 기억의 파편들을 대부분 조사했지만 남은 것은 일부였다.

‘엇!’

목연은 놀랍게도 그의 스승과 마찬가지로 시간법칙을 수련하고 있었고 공법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지 않았지만 수련하며 얻은 깨달음과 경험들을 찾아냈다.

시간법칙을 수련하면서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벽을 짚어 나가는 것 같던 한립에게 꼭 필요로 하던 지침서였다.

<진언화륜경>, <환진보전>, <수연사시결> 세 가지 공법을 공부하면서 연결된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았는데 이 기억들을 통해 뭔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속으로 기억 속의 공법 구결들을 빠르게 되뇌던 한립이 고개를 들어 진언보륜을 쳐다보았다.

시간도문이 거의 다 꺼져서 몇십 개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다른 일을 하기에 시간이 없을 것 같아 한립은 목연이 지닌 저물법기를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목연을 죽인 자가 챙겨간 것인가…….”

아쉬운 마음이 드는 순간 기억 파편을 품은 목연의 잔혼에서 강렬한 노기가 느껴졌다.

죽임을 당한 것에 분통을 터트리는 것이었다.

눈썹을 끌어올린 한립은 호흡을 조절해 화를 가라앉혔다.

“설마 기습을 당해 죽었단 말인가?”

그는 복부에 난 상처를 살펴보며 이런 추측을 해보았다. 살해당했을 때의 기억은 남아 있지 않지만 분노와 원망의 감정은 잔혼 깊숙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자신이 깃든 몸을 이리저리 살피던 한립이 소맷자락 한쪽을 잡아 뜯었다. 부욱! 뜯겨 나온 하얀 천에는 깨알같이 작은 글자들이 적혀 있었다.

입고 있는 의복과 같은 재질이고 공들여 숨겨 놓아 피가 스며들어 흔적이 드러나지 않았으면 그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천의 내용을 훑은 한립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깨알 같은 글자들은 ‘법언천지’ 비술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법언천지는 진언문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고계 비술 중 하나로 말 한마디에 법칙이 따르고 허상을 실제로 만들어 하늘과 땅을 요동치게 하는 강력한 술법이었다.

물론 이런 위력을 내려면 백만 년 이상의 고된 수련이 필요하고 최소한 태을경에는 이르러야 해서 금선인 한립은 환술을 펼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립은 급히 천에 적힌 내용을 통으로 외웠고, 곧 진언보륜의 마지막 시간도문이 꺼져갔다….

* * *

의식이 원래 몸으로 돌아온 한립은 소실되어 가는 수정벽을 보면서 오랫동안 요동치는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이번 의식의 시공간 초월을 통해 본 진언문의 변고와 시간도조라는 강자의 존재 등이 잔상처럼 지나갔다.

연신술을 익혀 천정의 금기를 어긴 그는 천정 감찰선사를 죽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시간법칙을 익히는 것마저 도조급 거물의 역린을 건드리는 일이라니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

미라선존 같은 대라경 강자도 시간도조의 일격을 막아내지 못했는데 금선인 자신은 어떻겠는가?

상대가 자신을 죽여야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자신은 죽은 목숨이었다.

밀실 안에서 고민을 거듭하던 한립은 쓴웃음을 지으며 이런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일단은 실력을 키워 만황구역을 탈출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백옥 옥간을 꺼내 목연의 시간법칙 수련 경험과 법언천지 구결을 옮겨 담은 그는 밀실에 앉아 눈을 감았다.

* * *

또다시 3개월이 지나갔다.

그간 낙청린이 몇 번 찾아와 수족 내부에 문제가 생겨 중요 부락 중 몇몇이 아직까지 합류하지 못해 약속한 지도를 내주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미안함을 표하고 갔다.

안 그래도 목연의 깨달음을 얻어 <진언화륜경>, <환진보전>, <수연사시결> 세 공법을 비교 연구하는데 심취해 있던 한립은 조용하게 수련할 공간도 있겠다 재촉하지 않고 계속 이곳에 남아 있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수연사시결 공법 구결을 중얼거리는 한립 주위로 물결처럼 금빛이 흘러나와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이렇게 7일이 지났다.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은 한립은 열 손가락을 쉼 없이 움직여 복잡한 수결을 맺으면서 허공의 금빛 불구슬을 활활 타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불 구슬 속에는 흐릿하게 금색 옥병이 떠 있었다.

위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옥병의 입구 옆에 초승달 모양의 손잡이가 두 개 달려 있었고 아직 흐릿함에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옥병의 출현에 주변의 금빛들이 갈 곳을 찾았다는 듯 안으로 흘러들었다.

어느덧 금빛 불 구슬마저 사라지고 옥병을 보는 한립의 눈빛이 반짝였다.

수연사실결 공법은 애써 수련할 생각이 없었는데 그냥 시도만 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것이 1권 내용을 순식간에 익혀 광음정병까지 완성하고 말았다.

공법에 적혀 있기로는 광음정병 수련은 아주 어렵고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 난 자가 시간법칙을 어느 정도 깨우친 후에야 일말의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적혀 있었다.

‘진언화륜경을 익혀 시간법칙 기초를 깨우쳤기 때문인가?’

한립은 더는 생각하지 않고 계속해서 공법을 펼쳐 보았다.

예스러운 주술을 읊으며 수결을 맺고 두 손에서 금빛 주술문자를 품은 빛줄기를 옥병 허상 속으로 불어넣었다.

한 달 뒤, 한립 앞에 떠 있는 금색 옥병 광음정병은 이전보다 크기가 조금 줄어든 대신 해와 달 그리고 별 문양이 가득 새겨져 있어 광활한 천체를 보는 것 같았다.

공법 3권 수련을 마친 것이었다.

다시 눈을 감은 한립은 양손으로 수결을 맺고 전신에서 금빛을 방출했다.

시간법칙 파동을 발산하는 금빛들이 그의 술법에 천천히 옥병 속으로 녹아들어 쌀알처럼 작은 빛 알갱이로 변했다.

이렇게 하루하루가 흘러 거의 반년이 흘러갔다.

금색 옥병 속에는 금빛 알갱이가 가득 쌓였고 한립은 출렁이는 금색 강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금빛 물결이 옥병으로 흘러들어 새로운 무늬를 만들었는데, 바로 여섯 번째 시간도문이었다.

웅!

금색 옥병이 웅웅 진동을 했다.

수결을 푼 한립의 몸속으로 금빛 물결이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공법 4권의 내용은 앞선 3권보다 복잡해서 광음정병에 시간도문 여섯 개를 만들어내야 했는데 한 해 만에 일사천리로 해결이 될 줄은 몰랐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금제를 거두고는 침실에서 동부 바깥으로 뚫린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침 시간이 늦어 밝은 달과 수많은 별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 법결을 날렸다.

촤륵!

금색 옥병 안의 금빛 한 줄기가 창밖으로 빠져나가고 여섯 개의 시간도문이 반짝였다.

동시에 비스듬히 동부를 비추던 달빛 속에서 하얀 알갱이가 분리되어 옥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모습에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옥병이 달빛의 힘을 흡수하는 속도가 느려서 광음수적을 형성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이때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비휴를 탄 금동이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린아이의 얼굴에 웬일인지 근심이 가득했다.

비휴도 어린 주인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아는지 얌전히 한립 옆으로 다가왔다.

“금동,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아저씨…….”

“걱정하지 말고 무슨 일이든 이야기해 보거라.”

심각한 아이의 표정에 한립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주 익숙한 기운이 느껴져요. 나랑 같은 기운을 지닌 무언가가 인근에 있는 것 같아요.”

“기운이 같다고? 설마…….”

그 말에 한립도 표정이 진지해졌다.

“누님이 한 명 더 있는 거 아닐까요?”

금동이 답을 하기 전에 비휴가 입을 열었다.

“뭐라는 것이야? 흰둥이 너 정신 못 차릴래?”

곧장 금동의 눈꼬리가 홱 올라갔다.

“아,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또 다른 서금선이 나타났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죠.”

백옥 비휴도 자신이 실수한 것을 알았는지 실실 웃으며 정정했다.

“또 다른 서금선이 이곳에 나타나 뭘 하려는 것이지?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도 느껴지느냐?”

“나보다는 강한 거 같아요. ……아주 조금요.”

한립의 질문에 금동이 침묵하다 답했다. 놀라운 이야기였다.

금동의 수행은 그보다도 강해 금선 후기였다.

그녀보다 강하면 태을경 서금선이 인근에 나타났다는 소리가 아닌가?

“주인님! 그럼 어서 달아나야 하는 것 아닙…….”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비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이 끝나기 전에 바깥에서 거대한 북소리가 연달아 들려와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고요하던 산골짜기가 소란스러워지고 빛줄기들이 연달아 하늘로 날아올랐다.

“여기들 있거라. 내가 나가서 무슨 일인지 확인하고 오마.”

한립은 홀로 동부를 나섰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