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768화 (1,525/2,000)

1768화. 진언문(眞言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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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십여 일이 지나 자리에서 일어난 한립은 손에 서책과 옥간을 들고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고집스레 파고들어 봐야 마음만 어지러워져 앞으로의 수련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탄식을 하며 서책과 옥간을 집어넣어 버렸다. 그리고 마음을 정리한 뒤 가부좌를 틀고 하얀 자기 병에서 옥처럼 생긴 단약을 꺼내 삼켰다.

이 단약은 소진한에게 빼앗은 설백단으로 금선급 수사의 근본을 다져주어 수련 속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눈을 감고 명상을 하며 호흡을 가라앉힌 한립은 이번에는 금색 무늬가 있는 새하얀 옥간을 꺼내 이마에 붙였다.

<진언화륜경> 5성 공법이 기록된 옥간이었다.

처음 4성까지의 공법을 익힐 때 난해하던 것에 비해 5성 공법은 다가가기 어렵지 않아 금방 구결을 외우고 옥간을 거둘 수 있었다.

수결을 맺은 그의 등 뒤로 금빛이 일고 진언보륜이 떠올랐다.

금제가 파동을 막아 기운이 새어나가지 않았음에도 그와 의식연계가 되어 있는 금동과 흰둥이는 무언가 다름을 감지하고 고개를 돌려 침실 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정신없이 수련에 매진한 지 3달이 흘러갔다.

암성협곡은 나날이 북적여서 거대 부락 몇 개를 제외한 중소형 부락들의 절반 이상이 유진족 지역으로 몰려들어 있었다.

낙의범이 처음 한 달간 두 번 찾아와 그가 폐관 수련을 하고 있다는 소릴 들은 다음부터는 아무도 한립이 머무는 거처를 찾지 않았다.

마치 협곡 안에 인족이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 까맣게 잊은 듯했다.

이날, 금동과 비휴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금제로 둘러싸인 내실을 쳐다보고 있었다.

반 시진 전에 금빛 점이 빼곡하게 박힌 동그란 과실을 삼킨 한립이 진언보륜과 함께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어서였다.

그의 허벅지 바깥쪽에 아주 작은 금색 소용돌이가 주변의 빛들을 강력하게 빨아들여 61번째 선규를 만드는 중이었다.

새로운 선규가 생기고 진언보륜의 시간도문도 두 개나 늘어났다.

얼마 후 기운을 거둔 한립은 기쁨보다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눈을 떴다.

“시간법칙의 힘을 지닌 과실의 도움으로 어렵게 선규를 하나 늘렸지만, 태을경에 이르려면 얼마나 많은 자원이 필요할지 모르겠구나…….”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혼잣말을 하고 있는데, 돌연 앞섶에서 푸른빛이 반짝이고 암녹색 작은 병이 스스로 날아올랐다.

서둘러 진언보륜으로 고개를 돌린 한립은 고리에 11개의 금색 실이 감겨 있는 것을 보고 희색을 드러냈다.

공수구의 짐 속에서 찾은 과실의 내력은 모르겠으나 그걸 복용해 시간정사도 하나 더 늘었으니 기뻐할 일이었다.

‘장천병을 보니 또 시공간 초월을 하려나 보군.’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쿠르릉 거리는 소음과 함께 맷돌 크기로 커진 암녹색 벽이 굵직한 녹색 광선을 날려 침실의 금제를 가르고 허공을 찢었다.

그러나 금동과 흰둥이는 시선이 금제 앞에 생겨난 수정벽에 가로막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어 재미없다는 듯 금방 탁자 옆으로 돌아갔다.

그때 수정 벽에 떠오른 녹색 소용돌이를 쳐다보던 한립의 두 눈꺼풀이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

천천히 의식을 회복한 한립은 이전에 시공간을 초월했던 경험으로 당황함보다는 무슨 일이 생길지 기대감이 가득 찼다.

시간도문을 소모하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는 시공간 초월은 항상 예기치 못한 기쁨을 주었었다.

백옥 궁전에 둘러싸인 하얀 광장들이 시야의 끝까지 연달아 있었고, 공중에는 궁전 양식의 건물들이 들어선 산봉우리들이 떠 있었다.

아무래도 어느 거대 종문 내부인 듯싶었다.

하지만 연기와 불길이 치솟는 광장과 공중의 산봉우리들 일부가 부서져 아주 혼란스러웠으며 수많은 수사들이 허공에서 서로 싸우는 중이었다.

하얀 장포를 걸친 무리와 금색 장포를 걸친 무리로 나뉘는 수사들 중 금색 장포 무리는 한립도 익숙한 천정 수사들의 복색을 하고 있었다.

두 무리의 수사들은 전력이 비슷해서 전투가 교착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속으로는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주위를 살핀 한립은 전방에 흐릿하게 뜬 진언보륜을 발견했다.

반투명한 시간도문 두세 개가 벌써 어둑해져 있었다. 이전과 비슷한 속도로 시간도문이 꺼지고 있었다.

시선을 내린 그는 자신이 광장 구석에 선 하얀 장포를 입은 사람에게 깃들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키가 크고 마른 하얀 장포인은 볏짚처럼 누런 머리카락을 지니고 피부가 늙은 나무처럼 갈라져 있어 인족이 아닌 목령족 비슷한 이종족이었다.

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몸이 거의 분리된 이종족 수사는 녹색 피를 바닥 가득 흘려 진작 죽었어야 할 상태였다.

‘이 자의 얼굴이 낯설지가 않은데, 여긴 대체…….’

한립은 시간 낭비를 하지 않고 의식이 깃든 상대의 기억을 떠올려 보려 했다.

콰르릉!

이때 하늘의 구름층에서 천둥소리가 들리고 신속하게 거대한 소용돌이가 만들어졌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굉음과 함께 금색 빛줄기들이 소용돌이 중심에서 떨어져 천지가 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한립은 강렬한 시간법칙을 느끼고 움찔했다.

금빛이 품은 법칙의 힘이 너무 강대해서 무한한 느낌이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금빛 태양에 비하면 그가 익힌 시간법칙의 힘은 지붕 사이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만도 못했다.

“누구기에 시간법칙을 이 정도 경지까지 익힌 것인가!”

경악한 한립이 시체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도 잊고 멍하니 금빛을 올려다보았다. 소용돌이 속 금빛들은 홀연히 연꽃 모양의 화염으로 변해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금빛 화염 중 하나가 서둘러 몇 겹의 보호막을 펼치며 물러나는 금선 수행을 지닌 백포 수사에게 떨어졌다.

보호막들은 얇은 종이처럼 뚫리고 백포 수사는 화염에 어깨를 내주어야 했다.

화륵!

백포 수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상처에서 번진 화염에 휩싸여 재가 되어 사라졌다.

지면에 서서 그걸 지켜보던 한립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다른 금빛 화염도 천정 수사들을 피해 한 치의 오차 없이 백포 수사들을 죽이고 있었다.

백포 수사들의 수가 거의 절반으로 줄었을 때, 공중에 뜬 산봉우리 중 가장 큰 곳에서 금색 구름이 튀어나왔다.

허공의 소용돌이만은 못해도 극히 강력한 시간법칙의 힘을 품은 구름이었다.

금색 구름이 점점 넓게 퍼져 소용돌이에서 쏟아져 내리는 금빛 화염들을 가로막았다. 화염들이 더이상 그 아래로 떨어지지 못했으나 금색 구름도 시간이 지날수록 얇아져 갔다.

구름 속에서 누군가 떠올랐는데 놀랍게도 붉은 승려복을 걸친 귀가 큰 승려였다.

비대하게 살이 쪄서 거대한 살덩이로 보이는 승려는 볼에도 살이 너무 많아 두 눈이 가느다란 선처럼 짓눌려 있었다.

“저 승려는…….”

한립이 장천병을 통해 설법하는 모습을 훔쳐보았던 바로 그 귀 큰 승려였다.

그제야 자신이 깃든 육체의 주인이 당시 설법을 듣던 다섯 명 중 한명이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바람아 불어라!”

귀 큰 승려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소리치며 수결을 맺었다.

쿠쿵.

푸른 주술문자가 승려의 입속에서 날아올라 용처럼 거대한 푸른 돌풍을 일으켰다.

돌풍 속의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들이 허공을 찢어 칠흑 같은 공간균열들을 만들어내 공간 파동이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푸른 돌풍이 발산하는 훼멸의 기운이 위쪽의 소용돌이를 향해 솟구쳤다.

“이건 법언천지!”

한립은 바로 귀 큰 승려가 펼친 신통을 알아보았다.

상대의 몇 마디 말을 훔쳐 듣고 그가 깨우쳤던 신통이었다.

그가 펼친 법언천지는 환술에 불과했다면 귀 큰 승려가 펼치는 신통은 실제로 경천동지할 위력을 품고 있었다.

만일 그가 저 돌풍에 휘말렸다면 즉시 갈가리 찢겨 사라졌을 것이다.

아래쪽 백옥 궁전의 전황도 돌풍으로 인해 변화가 생겼다.

열렬히 싸우던 수사들도 수행이 약한 이들은 돌풍의 여파에 휩쓸리기 시작했고 한립이 깃든 시체도 바깥으로 밀려 나갔다.

이에 한립은 서둘러 시체에 남은 선령력을 이용해 노란빛에 휩싸여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얼마 남지는 않았지만 시체의 선령력이 자신의 것보다 정순해 빠르게 멀리 피할 수 있었다.

쿠릉!

이때 하늘의 소용돌이가 금빛을 크게 일으켜 거대한 손바닥을 만들어냈다.

거대한 금빛 고리를 품은 손바닥이 하강하면서 시간법칙의 힘이 폭발하고 있었다.

푸른 돌풍이 멈춰 아래쪽에서 휘청거리던 두 무리의 수사들도 각기 다른 표정으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금색 구름 위에 선 귀 큰 승려는 무언가 다른 방법을 펼치려 두 손을 들어 올리려다 멈추었고 지하에서 멀리 쏘아져 나가던 한립도 흙 속에 묻혀 꼼짝하지 못했다.

천지간에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금색 손바닥 하나인 것 같았다.

푸른 돌풍이 소리 없이 깨져 푸른 빛알갱이로 흩어지고 금색 손바닥이 가볍게 귀 큰 승려 위로 떨어졌다.

의아한 얼굴의 한립 눈앞에 귀 큰 승려의 몸이 푸른 돌풍처럼 깨져 무수히 많은 살점으로 갈라지는 장면이 펼쳐졌다.

귀 큰 승려를 죽인 거대 손이 더이상 하강하지 않고 돌아가자 모든 것이 이전처럼 돌아갔다.

쌍방의 수사들은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하게 있다가 공중에서 쏟아지는 살점 조각을 발견했다.

백포 수사들은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으나 천정 수사들은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이제 천정 수사들은 수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백포 수사들을 압도했다.

“방금……. 무슨 일이…….”

금색 손바닥이 사라지고 자유를 되찾은 한립은 조금 전 느낌을 되뇌었다. 워낙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의 착각은 아니었는지 의심이 되었다.

“엇, 저런!”

허공에 뜬 진언보륜에서 동시에 두 개의 시간도문이 꺼진 것을 보고 한립은 흠칫 놀랐다.

즉시 의식을 퍼트려 외부 상황을 감지한 그는 공중에서 떨어지는 살점에서 귀 큰 승려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을 감지하고 안색이 변했다.

그가 만난 그 어떤 존재보다 강한 귀 큰 승려가 기척도 없이 살해를 당한 것이다.

하늘의 소용돌이도 서서히 흩어져 금빛 알갱이로 흩어지는 중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한립은 고개를 흔들고 시체를 움직여 바깥쪽이 아닌 지하 깊숙이 잠복해 멈추었다.

심호흡을 하고 시체의 기억을 떠올리려 하자 머릿속으로 조각난 기억의 파편들이 미친 듯이 흘러들어왔다.

“……!”

그는 그것들을 정리하다 안색이 급변했다.

불완전한 기억이지만 그가 본 종문의 이름이 진언문(眞言門)이라는 것이 확실했다.

기억에 따르면 이곳 선역은 북한선역보다 몇 배나 커다란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있는 ‘흑토선역’으로 그 중에도 진언문은 명실상부 흑토선역 최고의 대종문이었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수많은 제자를 양성해 번영을 누려왔다.

그가 깃들어 있는 시체의 이름은 ‘목연’으로 진언문 5대 장로 중 한 명이었고 귀 큰 승려는 진언문 종주이자 목연의 스승인 ‘미라’였다.

수행이 이미 대라의 경지에 이른 미라는 흑토선역 선인들의 우두머리라 하여 미라선존이라 불리었다.

목연 외에 미라선존에게는 네 명의 친전 제자가 있었는데 한립이 진실안을 통해 설법을 훔쳐보았을 때 미라선존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머지 네 명이 진언문의 또 다른 장로들이었다.

이 다섯도 미라의 가르침을 받아 태을경에 이른 고인들이었다.

미라선존과 같이 수행이 엄청난 존재를 금색 손바닥으로 눌러 죽일 정도면 그 주인의 내력 또한 대단할 텐데, 목연의 기억 속에서 상대의 신분은 흐릿하게 가려져 있어 높은 신분의 천정 쪽 인물이라는 것밖에는 알 수 없었다.

‘한순간에 대라경 수사를 죽일 수 있는 수행이라면…… 도조? 설마, 시간도조?’

문득 든 생각에 한립은 몸을 떨었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에 따르면 진언문은 ‘시간도조’에 의해 종주 미라선존이 살해당하면서 멸문의 길을 걷는 듯했다.

진언문과 미라선존이 어쩌다 천정과 척을 져서 시간도조까지 전투에 참여하게 된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시간법칙은 선계의 3대 지존법칙의 하나로 수많은 다른 법칙들을 초월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진언문을 멸망시킨 게 정말 시간법칙의 도조라면 흑토선역 뿐 아니라 진선계 전체에서 손에 꼽히는 거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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