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767화 (1,524/2,000)
  • 1767화. 암성협곡

    *

    곧 성안에서 수사들이 날아올라 다가왔다.

    낙의범과 비슷하게 옅은 남색 피부에 뾰족한 귀를 지닌 그들은 유진족이었다.

    유진족 무리 중에는 여인과 사내들이 섞여 있었는데 대체로 사내들의 체구가 크기는 했지만 우락부락하기보다는 곱게 자란 도련님 같은 인상을 주었다.

    무리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중년인은 낙의범과 얼굴이 비슷하고 옅은 남색 머리를 곱게 빗어 늘어트리고 있어 그 모습이 퍽 우아했다.

    “의범아.”

    “아버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낙의범이 희색을 드러내며 날아올랐다. 향경족들과 한립은 약간 떨어진 곳에 멈춰서 그녀를 쫓지 않았다.

    “내가 잘못해서 네가 고생했구나. 무사히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야…….”

    유진족 족장 신분이어도 딸아이를 아끼는 마음만큼은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아버지 탓이 아니에요. 제가 가겠다고 나선 것을요! 다행히 북방 각 부락과 연락되어 암성협곡에서 모이기로 협의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수족 전체의 힘이 집결할 거예요.”

    “잘 해주었다. 십여 일 전부터 주거지역에서 달아난 자들이 수족 부락에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향경족과 공령족이 이미 기습을 당했다고 하더구나. 오는 도중에 위험한 일은 없었느냐?”

    “향경족에 도착하였을 때, 회섬족과 청갈족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향경족 족장 탄객이 무리를 이끌고 공령족으로 향해 병력을 유인한 사이 저는 나머지 향경족인들과 녹명언덕으로 피했어요. 당시 회섬족인들의 추격을 받아 위험에 처했는데 저기 려 선배님께서 회섬족을 멸하고 구해주셨습니다.”

    낙의범은 그간의 여정을 설명하며 눈짓으로 한립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백포 사내는 딸아이가 죽다 살아난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을 졸이다가 낙의범의 시선을 따라 한립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인족…….”

    그뿐이 아니라 유진족의 나머지 사람들도 한립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한립도 그들의 시선에서 마음속 깊이 응어리져 있는 혐오와 경계심을 읽어냈다.

    “아버지, 려 선배님께서 오는 동안 보호를 해주셨기에 저희가 무사히 이곳까지 도착할 수 있었던 겁니다.”

    낙의범이 그 모습을 보고 서둘러 덧붙이자 백포 사내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려 수사, 의범이를 호송해 주신 것에 감사를 표합니다. 원하시는 것이 있으시다면 무엇이든 말씀해 보시지요.”

    백포 사내는 선역의 예법에 따라 공수를 하며 선역 말을 했다.

    한립은 눈썹을 끌어올리며 속으로 냉소를 흘렸다.

    유진족 족장은 아무 보물이나 던져주고 자신을 내쫓아 암성협곡에 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인사는 되었습니다. 원하는 보수에 대해서라면 귀하의 따님에게 이미 말을 하였으니까요.”

    한립은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히 답했다. 그 말에 낙의범은 아비에게 전음으로 지도에 관해 이야기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백포 사내의 이마에는 주름이 더욱 짙어졌다.

    “려 수사, 제 딸이 나이도 어리고 경험이 미천해 허튼소리를 한 듯합니다. 저희 유진족이 규모가 적지 않다고는 하나 만황 수족 전체에 비하면 창해일속(滄海一粟)에 불과합니다. 각 부락의 지도를 모아 드리는 것은 어려울 듯하니 다른 조건을 이야기해 보시지요. 인족의 법도에 대해서라면 저 낙청린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 결코 손해 보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전 엽황수사가 아닙니다. 이곳을 염탐하려는 게 아니라 지도를 이용해 만황구역을 지나 다른 선역으로 가기만 하면 됩니다. 각 부락의 구체적인 위치나 관련 정보를 원하는 것이 아니니 주변 지형과 흉수들의 서식지만 명시해 주어도 충분합니다.”

    한립의 말에도 낙청린은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낙의범이 나서서 몇 마디를 주고받고 나서야 사내가 얼굴을 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저희 유진족에서 며칠 머물다 가시지요. 마침 각 부락의 수사들이 이곳으로 모이고 있으니 수사를 대신해 지도를 구해보겠습니다.”

    “잠시 폐를 끼치겠습니다.”

    한립은 낙청린과 대화를 나누면서 상대를 관찰하니 기운을 숨기기는 했지만 금선 초기 인족 수사에 맞먹는 경지에 이르렀음을 파악했다.

    다만 이종족들이 주로 요수들을 부려 싸운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투력은 평범한 금선 초기보다 높을 테고 낙청린을 따르는 유진족인들도 진선 중기부터 금선 초기까지의 수행을 지니고 있었다.

    낙청린은 정중한 표정으로 탄십에게 고개를 돌렸다.

    “탄십, 의범이를 보호해 여기까지 와준 은혜는 우리 유진족이 잊지 않을 것이네. 충족을 멸하고 자네들이 대대손손 살아온 땅을 되찾아 이전의 영광을 되찾는 일을 도울 것이야.”

    “감사합니다, 족장님.”

    탄십은 감격한 기색으로 두 손을 가슴 앞에 포개고 예를 올렸다.

    “그전까지 향경족 족인들은 암성협곡을 집이라 생각하고 편하게 생활하도록 하게.”

    낙청린의 말에 탄십과 같이 온 다른 향경족 족인들도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낙청린의 안내를 받아 협곡 안쪽으로 날아오른 한립은 그 위에 날개 달린 짐승들이 웅크리고 앉아 그를 향해 냉랭한 시선을 보내는 것을 보았다.

    짐승들조차 인족인 그에게 악의를 품고 있었다.

    보루 안으로 진입하고 나서야 한립은 암성협곡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너비가 천장에 이르는 푸른 물길이 협곡 중앙에 흘러내리고 양쪽의 절벽에 뚫린 크고 작은 동굴은 산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복잡한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말이 동굴이지 대충 뚫은 굴이 아니라 각각이 지붕과 기둥 난간이 갖추어진 둥그런 혹은 네모난 문이 설치되어 있었고, 각종 꽃과 새 같은 무늬가 정성스레 새겨져 있어 선경같이 고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전에 들린 공령족 부락이 숲속의 작은 마을 같았다면 유진족의 암성협곡은 인족의 성과 비교해도 될 만큼 번화한 곳이었다.

    암성협곡은 강을 따라 구불구불 아주 깊은 곳까지 이어져 있었고 곳곳에 거대한 제단 모양의 건축물들이 있어 진법 파동을 방출했다.

    한립은 자신이 이곳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특수한 신분이라는 것을 알아서 예의상 의식을 이용해 협곡의 건물 분포나 금제에 대해 샅샅이 살피는 행동은 피했다.

    암암리에 그를 감시하던 낙청린이 이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협곡 중부의 비교적 평탄한 절벽 위에 도착한 낙청린이 몸을 돌려 한립을 마주 보았다.

    “한적한 곳이라 며칠 휴식을 하시며 머물기에 나쁘지 않으실 겁니다.”

    한립이 돌아보니, 주위에 유진족의 거처가 있어 약간 거리를 두고 그를 감시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고맙습니다.”

    한립이 웃으며 답하자 낙청린도 바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협곡 깊은 곳으로 날아갔다.

    잠시 머뭇거리던 낙의범이 한립을 지나며 미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려 선배님의 신분이 특수해 어쩔 수 없이 이런 거처를 내드린 것이니, 양해해 주십시오.”

    “나는 오히려 다른 족인들과 달리 자네가 인족에 불만이 없어 보이는 게 이상하군.”

    “그것이…….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인족이셨습니다. 제게도 절반이지만 인족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지요.”

    낙의범의 답변에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수사들이 떠나자 남색빛을 일렁이며 주위를 둘러보고는 절벽에 뚫린 굴속으로 들어갔다.

    양쪽으로 열리는 묵직한 돌문을 밀자 두껍게 쌓인 먼지가 피어올랐다.

    한립이 소매를 저어 바람으로 먼지 가득한 탁한 공기를 날려버리자 동굴 벽에 걸린 등불들이 스스로 피어올라 내부를 밝혔다.

    그리 크지 않은 동굴 내부에는 침실과 거실 뿐이었고 침실에는 돌로 만든 침상이, 거실에는 돌로 만든 탁자와 의자가 전부였다.

    돌문을 닫은 한립은 진법 깃발과 원반을 꺼내 내부에 진법을 설치하고 반 시진 만에 금제 파동이 가득해진 침실로 들어가 침상에 앉았다.

    팟.

    “금동, 나는 잠시 폐관 수련을 해 수행을 높일 수 있을지 볼 것이다. 그동안 너와 흰둥이가 함께 호법을 서거라.”

    그가 반지를 톡톡 두드리자 금빛이 반짝이고 금동이 옆에 섰다.

    “왜 갑자기 수련을 하려고요?”

    “앞으로 본격적으로 만황구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얼마나 강력한 흉수들을 만날지 알 수 없다. 이곳도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바깥보다는 낫겠지. 천정도 나에 대한 추적을 포기하지 않을 테니 기회가 있을 때 수행을 늘리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알겠어요, 아저씨! 내가 아무도 귀찮게 하지 못하도록 할 테니까 수련만 해요.”

    한립이 찬찬히 사정을 설명하자 금동이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저물대 하나를 소매 속에서 꺼내 건넸다.

    “아껴가며 먹고 있거라.”

    “네!”

    저물대를 받은 금동은 방실방실 웃으면서 거실로 뛰어나가 돌 탁자 위에 앉아 내용물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누님, 제 몫은요!”

    백옥 비휴가 한립의 몸에서 뛰어내려 강아지처럼 금동을 쫓아 탁자 위에 올라갔다가 금동의 손에 밀려 떨어졌다.

    그들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한립이 시선을 거두고 진법을 발동해 침실과 외부를 차단했다.

    잠시 후, 그의 손에는 두 권의 옥간과 누런 서책이 들려 있었다. 북한선역 3대 종문의 시간공법인 <수연사시결>, <진언화륜경>, <환진보전>이었다.

    <수연사시결> 공법이 담긴 옥간을 이마에 댄 한립은 미간을 좁혔다 폈다를 반복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간격이 길어지고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도 했다.

    이렇게 사흘 밤낮이 흐르고 눈을 뜬 그는 심력을 크게 소모한 듯 눈이 충혈되고 등 뒤로 식은땀이 가득 배어 있었다.

    “어찌 이런 공법이…….”

    <수연사시결>은 총 7권으로 나뉘어 있었다.

    수련 초기에는 진언보륜에 상응하는 법보 광음정병(光陰淨甁)을 만들어 천지의 해와 달의 정화를 흡수해 광음수적(光陰水滴)을 모으게 되어 있었다.

    공법을 4성까지 익히면 충분히 모은 광음수적으로 시간법칙의 힘이 담긴 광음의 실을 만들 수 있었는데, 영계 수라주(修羅蛛)가 있던 곳에서 보았던, 시간법칙을 함유한 광음의 강에서 탄생한다는 광음사가 바로 그것이었다.

    범인이나 저계 수사들은 광음사 한 가닥만으로도 수명을 늘릴 수 있었고 고계 수사들은 천겁의 강림을 미룰 수 있는 구중천에서 가장 진귀하다는 보물이었다.

    공법에 서술된 바에 따르면 수연사시결로 만들어낸 광음사는 더욱 정순한 시간법칙을 함유하고 있어 효과가 더욱 강력해 진선의 삼쇠를 미룰 수 있었다.

    광음정병을 제련하는 것도 진언보륜 때와 마찬가지로 시간법칙을 함유한 물건과 적잖은 기이한 보물들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창류궁의 수사들도 이 시간 공법을 수련하는데 고난이 많았을 것이다.

    이 공법은 진언화륜경과 달리 수련을 하면 선규가 늘거나 수행이 늘지 않고 오로지 광음수적을 쌓는 속도만 빨라졌다.

    광음수적을 어느 정도 쌓으면 무척 강력한 신통을 발휘할 수 있다지만 초기에 축적되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한 방울을 모으는데 놀랍게도 백 년이 걸린다.

    이런 속도로 광음수적의 강을 이루려면 금선이라 해도 기다리기 벅찬 세월이 흘러야 했다.

    한립이 느끼기에 수연사시결은 진언화륜경보다 공격력은 약하지만 독특한 특성이 있었다.

    진언화륜경을 기초로 3일간 여러 번 회독했는데도 완전히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깊게 숨을 내쉰 그는 잠시 마음속의 의혹을 미뤄두고 환진보전을 펼쳐 천천히 읽어나갔다.

    고요한 침실에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들려왔다.

    하루 뒤, 천천히 누런 서책을 덮은 그는 피로한 듯 미간을 누르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옅은 웃음이 걸려 있었다.

    환진보전은 앞서 살핀 두 시간 공법보다 훨씬 특이했고 시간 공법이라 불리기는 하지만 제련술을 담은 경전에 가까웠다.

    이 공법을 어느 수준으로 익히면 시간법칙의 힘을 품은 물건을 이용해 환진사(幻辰沙)라는 모래를 만들 수 있었다.

    환진사를 재료로 특수한 방식으로 제련해 만드는 봉쇄된 소형 공간을 환진사경이라 불렀고, 그 모양이 상자냐 병이냐에 따라 환진사합, 환진사병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런 물건의 내부공간에서 시간의 흐름에 변화가 생겼다.

    “환진사의 수량만 충분하다면…….”

    이런 가정을 하던 그는 자조적으로 웃음 지었다.

    “실제로 가능할지 안 될지를 떠나 그렇게 대량의 환진사를 어떻게 만든단 말인가? 시간법칙을 지닌 물건이 흔한 것도 아니고…….”

    세 개의 공법을 반복해 읽을수록 희미하지만 무언가 통하는 바가 있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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