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6화. 귀빈
*
한립은 한눈에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소매 속에서 노란 콩알 수천 개를 부렸다. 수천 개의 도병들이 벌레 떼 속으로 파도처럼 몰려들었다.
금동은 그사이 영충들을 따돌리고 회섬족 족인들 앞을 막아서고는 앞발을 휘둘러 거의 절반의 두꺼비 인간들을 죽였다.
“대인, 제발 살려주십시오! 다 같은 충족인데 어찌하여 동족을 학살하려 하십니까? 회섬족도 충령대인을 모시는 충사(蟲使)이자 노복입니다. 대인을 남으라 한 것은 인족에게 붙잡혀 고되게 사시는 줄 알고 충족으로 돌아오게 해주려 한 것입니다…….”
달아날 길이 없어진 도리오가 넙죽 엎드려 빌었다. 금동도 그 말에 공격을 멈추고 한립 곁으로 돌아가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변했다.
“충령대인은 또 뭔데?”
금동이 조그만 눈썹을 꿈틀하며 물었다.
“충령대인을 멸시하시면 안 됩…….”
“허튼소리 말고 대답해.”
“그게……. 저희도 잘 모릅니다. 저희 회섬족은 충족 각부의 한 부족으로 제가 족장이기는 하나 충령대인을 직접 뵌 적은 없어서요.”
도리오가 머뭇거리며 하는 말에 금동이 한립을 돌아보았다.
“아저씨, 그냥 추혼술을 쓰며 안돼요?
“안 될 것 없지.”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손가락을 뻗어 수정실을 도리오 미간으로 쏘아 보냈다.
“아, 안 됩니…….”
겁에 질린 도리오가 말을 마치기 전에 머리통이 퍽! 하고 터져나갔다.
“강력한 금제가 걸려있었구나…….”
추혼술을 쓰려던 한립이 인상을 찌푸렸다.
족장이 죽임을 당하자 회섬족 족인들은 분노해 달려들었고, 순식간에 바닥에는 처참한 시체들만 남게 되었다.
도병을 회수한 한립이 마음대로 떠나지 못하고 남아 있던 향경족 족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 감사합니다, 선배님. 저희 향경족 족인들을 어려움 속에서 구해주셨습니다.”
탄십이라는 목이 긴 향경족 사내가 주춤거리다 먼저 나서서 북한선역 말로 인사를 했다.
“우리의 말을 알아들었다면 너희를 구하려 한 일이 아님을 알 것이다.”
“어찌 되었든 선배님께서 회섬족 인물들을 격살하시고 저희의 목숨을 구해준 것은 사실이지요. 보답해야 할 일이나, 부락이 충족들의 공격을 받고 있어 어찌할 도리가 없군요. 그렇지 않았다면 부락으로 모셔 귀빈으로 모셨을 텐데요.”
선을 긋는 한립의 말에 탄십은 미안함을 담아 답했다.
“수족과 충족은 어째서 싸우는 것이지?”
한립은 그들을 그냥 쫓아 보내려다 금동을 힐끗 보고 물었다.
“……충족과 저희 수족은 신앙이 달라 대대로 원한이 깊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쟁투가 끊이지 않고 대대로 수많은 대규모 전쟁이 벌어졌고요.”
망설이던 탄십이 답을 주었다.
“신앙?”
“예, 저희 수족도 각 부락마다 모시는 진령성수가 다르나 총체적으로 보았을 때 수족들은 진령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충족들은 각종 충령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랬군. 알겠으니, 가 봐도 좋다.”
한립은 원하는 대답을 듣자 손을 저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탄십이 물러나고 한립도 금동과 백옥 비휴를 데리고 떠나려 했다. 비휴는 얼른 허리로 날아올라 백옥 장식으로 변하였는데 금동이 웬일인지 머뭇거렸다.
한립은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 재촉하지 않았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탄십이 다시 돌아와 예를 올렸다.
“선배님, 제가 다시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공령 부락으로 모셔서 성의를 보이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진심이라면 너희 중에 진짜 책임자가 나서야 할 것이다.”
한립의 담담한 말에 탄십이 할 말을 잃고 서 있는데, 향경족 사람들이 비켜서며 회색 피풍의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얼굴을 천으로 가린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의범 소주, 안 됩니다.”
탄십이 놀라 말리려 했지만 상대는 한립 앞까지 다가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인사를 했다.
회색 천을 풀자 인족과 비슷한 고운 얼굴이 드러났는데 옅은 남색 피부에 두 귀가 뾰족하고 입가에는 송곳니가 자라나 있었다.
“너도 향경족인 것이냐?”
한립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후배는 유진족(幽辰族) 족장의 딸 낙의범이라 합니다. 수족 각부를 연합해 공동으로 충족의 침략에 대응하려 했는데 막 향경족에 도착하자마자 회섬족 등의 공격을 받아 여기까지 도망을 오게 되었습니다. 선배님께서 구해주신 것에 감사를 올립니다.”
남색 피부 여인은 자신을 소개했다.
“우리를 청한 것도 수사겠지?”
“맞습니다. 선배님께서도 엽황수사시겠지요? 충족이 나날이 기고만장해져 우리 수족을 공격하는 것은 물론 사수를 조종해 사막을 지나는 선박을 공격하게 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곳 지리에 익숙하지 않아 그들의 영역을 돌아다니다 안 좋은 일에 휘말릴 가능성도 크겠지요.”
“우리를 위해 부족으로 함께 가자고 청했단 뜻이냐?”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가 한 가지 이유라면 당연히 사심도 있습니다. 저는 유진족으로 돌아가는 길에 선배님의 비호를 받기를 원합니다.”
낙의범은 솔직하게 답했다.
“귀 종족에 만황구역 지도가 있는가?”
한립도 고개를 끄덕이며 정중하게 물었다.
“……만황구역이 워낙 넓고 각 구역마다 강력한 생령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진족도 모든 수족 부락의 지도를 지니고 있지는 못하지요. 하지만 선배님께서 저희를 부족까지 호송해 주시면 최선을 다해 각 부족이 지닌 지도들을 구해드리겠습니다.”
“좋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앞으로 어찌 불러드리면 좋을지요?”
“려비우.”
한립의 응답을 들은 낙의범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탄십과 그녀가 한립과 금동을 데리고 돌아오자 향경족 족인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마음 깊이 그들을 두려워하며 꺼리는 눈치였다.
탄십이 만황말로 무어라 하자 다들 시선을 거두고 족인들과 요수의 시체를 거두는 일에 집중했다.
그들은 신속하게 회섬족 족인들과 그들이 부리던 요충들의 시체도 챙겼다. 적잖은 부분이 좋은 재료로 쓰이는 것이 틀림없었다.
얼마 후, 족인 한 명이 낙의범의 분부에 그 중 뼈로 만든 저물반지를 한립에게 가져왔다.
한립은 전혀 필요 없는 물건이었지만 일부러 받아두었다.
아무 대가도 받지 않으면 오히려 향경족 인물들이 불안해하고 경계심에 딴마음을 품을 수도 있었다.
그는 남들 몰래 반지 안의 물건들을 간식이나 하라고 비휴와 금동에게 나눠줘 버리고 향경족 무리와 함께 언덕 남쪽으로 출발했다.
탄십이 맨 앞에서 길을 안내하고 한립과 낙의범이 향경족 족인들에게 둘러싸여 나란히 걸어갔다.
금동과 비휴는 각각 반지와 장신구가 되어 그의 손과 허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선배님, 언덕 지대를 지나면 백안오공(百眼蜈蚣)이 활동하는 구역입니다. 실력이 강하고 성격은 포악해서 무언가 머리 위로 지나가면 백 개의 눈에서 뼈를 녹이는 삭골신광을 쏘아 떨어트리지요. 향경족 수사 대부분이 당해낼 수 없는 공격이라 그 구역을 지나야 요수를 타고 날아서 이동할 수 있을 듯합니다.”
“알겠네. 피할 수 있는 위험은 피하는 것이 좋겠지.”
낙의범의 설명에 한립이 담담히 답했다.
“흰둥아, 앞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내게 만황 언어를 알려 주거라.”
한립은 의식 연계로 백옥 비휴에게 말을 걸었다.
“선역 수사들은 짐승들의 언어라고 깔보는 말인데 굳이 배우시려고요?”
백옥 비휴가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언어는 소통의 수단일 뿐인데 어찌 무엇이 더 귀하다 할 수 있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성심성의껏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 * *
한 달의 시간이 흘러갔다.
울창한 원시림 위로 기이하게 생긴 거대 새들이 푸른 피부에 긴 목을 지닌 이종족들을 태우고 날아가고 있었다.
순박하게 생긴 인족 중년인이 그 틈에 끼어 있었는데, 바로 향경족과 함께 유진족으로 향하는 한립이었다.
탄십은 등에 날개가 달린 고라니 같이 생긴 짐승을, 낙의범은 새하얀 매를 타고 밀림 속의 탁 트인 공간으로 내려갔다.
한립 역시 귀를 날개처럼 펄럭이는 잿빛 코끼리를 타고 그들을 따라 내려갔다. 그는 건물들이 땅에 절반 정도 파묻혀 거목들과 어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건물들은 대부분 반쯤 무너져버렸고 그 잔해 속에는 참혹하게 죽은 이종족 시체들이 뒹굴고 있었다.
죽은 이종족들은 비대한 몸집에 키는 작고 머리는 컸는데 얼굴 생김새가 인족과 비슷했다. 다만 눈코입이 한곳에 몰려 있어 모습이 추해 보였다.
그 밖에 푸른 피부를 지닌 향경족 족인들의 시체와 수많은 요수 시체들도 주위에 쌓여 있었다. 전부 벌레가 파먹은 자국이 있어 눈을 뜨고 보기 힘든 끔찍한 광경이었다.
건물 주변을 수색한 향경족 무리는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서 분노에 치를 떨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탄십이 엄숙한 얼굴로 어느 작은 건물 뒤쪽에서 연로한 향경족 노인의 시체를 찾아냈다. 탄십과 무척 닮은 노인은 그의 아비이자 향경족 우두머리가 분명했다.
그걸 본 낙의범이 앞으로 나서서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으고 탄십을 향해 애도를 뜻하는 예를 올렸다.
오는 내내 비휴에게 만황의 말을 배운 한립은 여인이 상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만황의 말로 ‘너무 상심하지 말라’는 등의 말을 하는 것을 알아들었다.
탄식이 부친의 품에서 옥처럼 매끈한 검은 뼈를 들어 올리고 곡소리를 시작하자 다른 향경족 족인들이 그를 중앙에 두고 같이 흐느꼈다.
낙의범은 그들을 떠나 한립에게 다가섰다.
“탄십의 부친이 전사해서 앞으로는 그가 부락을 이끌게 될 겁니다.”
차분한 목소리에 지친 마음이 묻어났다.
“수족의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군.”
“수백만 년 전 전쟁에서 충족을 이기고 수족은 너무 안온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줄곧 충족의 동향을 주시하기는 했어도 오랜 세월 이를 갈아온 적들의 기습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했지요. 하지만 저희가 모시는 진령의 왕께서 충령보다 강하니 각 부족이 연합해 왕께서 강림해 주시기를 청하면 충족을 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립의 말에 낙의범은 의심 없이 답했다.
“나도 부디 그러길 바라네. 유진족 부락은 얼마나 남았지?”
만황 수족과 충족의 흥망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한립은 화제를 돌렸다.
“저희의 이동속도면 늦어도 3달 내로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향경족 족인들은 간략하게 애도 의식을 마치고 족인들의 시체를 회수해 다시 출발했다.
공령족 부락을 떠난 후에는 이동속도도 빨라지고 가끔 강대한 흉수가 서식하는 곳을 지나치기는 했지만 별다른 곡절 없이 이동할 수 있었다.
한립은 그들을 따라가면서 비휴에게 만황의 언어를 배우고 지형을 지나치면서 지도를 보충해나갔다.
두 달 반이 흐르고 한립과 향경족 무리는 드디어 삼림을 벗어났다.
향경족이 삼림 지형에 익숙하기는 해도 이따금 강한 진령과 충족들이 출몰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직접 나서지 않고 금동과 비휴 흰둥이가 나서서 처리하게 했다.
향경족 인물들도 그에 대한 적의나 경계심이 차차 줄어들어 틈틈이 낙의범과 탄십을 통해 만황 관련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이제 그들은 유진족 거주 지역인 암성협곡 앞에 도달해 있었다.
유진족이 수족에서 가장 강대한 부족 중 하나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한립은 눈앞의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하얀 협곡의 입구에는 거대하기 짝이 없는 백석 관문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위로 방어를 겸한 망루와 나부끼는 깃발들이 가득해 위압감을 주었다.
게다가 성루의 높이가 만 장에 달해 양쪽으로 우뚝 솟은 산과 엇비슷했고 유일한 출입구인 반원형 문은 금속성의 검은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반원형 문 안쪽으로는 거대한 강이 세차게 흘러내려 천둥소리 같은 물소리가 콸콸 들려왔다.
성 밖에 도착한 낙의범은 회색 장포를 벗어 가벼운 옷차림으로 고운 몸매를 드러냈는데 향경족 사내들은 눈빛이 뜨거워지면서도 감히 함부로 쳐다보지 못했다.
한립도 그런 그녀를 훑고 눈에 이채를 띠었다.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장포를 벗기 전까지는 수행을 알아내지 못했는데 그녀는 이미 진선 후기에 이른 수사였다.
만황에도 다른 대륙과 다른 특유의 기술이 전수되고 있고 대부족만이 그런 실력을 지닌 연기사를 보유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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