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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762화 (1,519/2,000)
  • 1762화. 낯선 기운

    *

    보름이 금방 지나 출항할 날이 다가왔다.

    한립은 반지로 변한 금동을 데리고 아침 일찍 연묘원을 나서 서문으로 향했다.

    연중 두 번 있는 선박의 출항 의식은 사람들도 많이 모이고 성대하게 치러져서 성문 바깥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한립이 건물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다양한 복색의 수사들이 검은 부적을 들고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줄을 서서 수사들을 살피니 일부만 진선이고 대다수는 대승기 수사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역사가 증명하듯 대승기 이하의 수사가 만황구역에 들어가 살아 돌아올 확률은 너무 낮았고 대승기 수행의 수사도 목숨을 걸고 가는 것이었다.

    줄은 길었으나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서로 동행하는 수사들도 목소리를 낮추거나 전음으로 대화를 해서 분위기가 삭막했다.

    일각 후, 성벽 위로 해가 떠오르고 둔중한 종소리가 울렸다.

    댕……

    종소리가 울리자 검은 대전 안에서 흑포 노인이 나와 승선을 알리고 표를 검사하고는 안으로 들여보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빨리 한립 차례가 되었고 흑포 노인은 검은 부적을 받아 하얀 옥패를 가져다 댔다.

    화륵!

    부적은 순식간에 검은 연기로 변해 하얀 옥패로 흘러 들어갔고, 옥패 위로 ‘갑등 선실 14호방’이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옥패를 받아 작은 글자를 훑은 한립은 안으로 들어가면서 영패를 살폈다.

    옥패 뒷면에는 금기사항이라는 제목과 함께 선박에 오른 수사들이 해서는 안 되는 행동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 중 첫 번째가 ‘승선자는 어떤 이유로든 싸움을 할 수 없으며, 어길 시 죽임을 당한다.’였다.

    두 번째는 ‘승선자는 어떤 이유로든 선체를 떠날 수 없으며, 어길 시 죽임을 당한다.’였다.

    빼곡하게 적힌 17개의 항목의 마지막은 다 ‘죽임을 당한다.’였다.

    대전 안으로 들어가자 수사들은 성벽 방향 위쪽에 나 있는 돌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들을 따라가자 우뚝 솟은 성벽 위로 올라갈 수 있었고 통로에는 백여 명이 나란히 설 수 있을 정도로 성벽이 두꺼웠다.

    한립은 성벽을 이룬 검은 암석들을 살펴보다 만황구역 쪽으로 정박해 있는 수십 척의 선박들을 발견했다.

    가운데가 볼록하고 양쪽 끝으로 갈수록 얇아지는 선박은 장식이 거의 없고 특수한 금속 재질로 겉을 감싸 투박하고 예스러워 보였다.

    선박들은 대부분 깊거나 얕게 부서진 흔적이 있었고 금속층 말고 아예 선박 바닥을 받치는 용골이 기다랗게 갈라져 있기도 했다.

    이에 이런 선박 위나 주위에 원형의 진법 원반을 든 흑의 수사들이 특수한 술법을 펼쳐 보수하고 있었다.

    한립은 선박의 부서진 곳이 한두 가지 종류의 만황 흉수의 솜씨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보라색 장포를 입은 인영이 다가와 나란히 섰다.

    “사극사(沙棘蛇)와 인면갈(人面蝎)이 남긴 걸작입니다. 하나는 꼬리 부분에 날카로운 칼날이 달려 있고 다른 하나는 두 집게발이 망치처럼 단단한데, 그리 강한 요수는 아니라도 수가 많아 사막에서 쉽게 마주치고는 하지요.”

    “석 수사도 오셨군요.”

    무심결에 미간을 좁혔다 편 한립이 상대를 알아보았다. 어제 금동과 같이 격투장에 있던 요족 사내 석천공이었다.

    “이걸 얻어 타려고 원황성에서 기다린 지 세 달이 넘었습니다. 안 그래도 좀이 쑤셔 죽는 줄 알았어요.”

    “성안에 격투장 같은 곳에 많이 있어 그리 무료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한립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냥 재미로 내기나 했던 것이지 푹 빠져 있지는 않습니다. 어, 그런데 낭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석천공이 민망해하며 화제를 옮기는데 봉화대 중 하나 위로 돌풍이 불고 금색 수가 새겨진 검은 장포를 입은 중년인이 등장했다.

    짧은 턱수염을 기른 중년인의 허리에는 원황성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진 영패가 매달려 있어 성주부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성주가 보낸 호송사입니다. 배 안의 질서를 유지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요. 예전에는 가끔 진선 후기 수사가 맡기도 했는데 8년 전 그 사건 이후로 금선 수사만 맡아오고 있습니다.”

    석천공이 봉화대 위 사내를 보고 입을 열었다. 한립도 궁장 여 수사에게 들어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자, 승선하러 가시지요!”

    석천공은 한립의 손에 찬 금색 반지를 힐끗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사이 금선 초기의 호송사는 어느 선박 위로 내려섰고, 관사 복장을 한 다른 수사가 갑판 위로 올라와 이쪽으로 오르면 된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관사는 수사들이 선박에 오를 때마다 옥패에 적혀 있는 금기사항을 반복해서 얘기해 주었고, 승선을 마친 대부분 수사는 각자의 선실로 흩어졌다.

    “매번 똑같은 소리가 지겹지도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려 형께서는 처음 타보시는 것이겠지요? 사막 풍경이 썩 괜찮으니 감상해 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저는 많이 봐서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러시지요.”

    석천공이 공수를 하자 한립도 마주 예를 취했다.

    “하하,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인데 그냥 석 형이라 불러주십시오.”

    석천공의 말에 한립은 웃으며 아무 소리 하지 않았고, 석천공도 상관없다는 듯 선실로 들어갔다.

    한립은 그의 뒷모습을 잠시보다 시선을 돌렸다. 상대는 일부러 자신과 가까워지려고 하고 있었다.

    그 이유와 배경은 모르지만 거리를 두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 사이 선박은 유유히 떠올라 절벽 위를 지났다.

    발아래로 끝없이 사막이 펼쳐지고 선박에 새겨진 주술문자들이 떠올라 노란 광채로 보호막을 형성했다.

    동시에 기이한 만황의 기운이 선박에 감돌고 있었다.

    “만황 짐승들을 피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만황에서 자라는 강대한 짐승들의 요핵을 이용해 진법의 주축으로 삼아 만황구역의 생물로 위장을 한다라…….”

    한립이 이제야 알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때 저공비행을 하는 선박의 아랫부분이 거의 사막에 닿을 것 같았는데 표면에 입힌 금속이 특수한 자성을 지니는지 모래와 상호 배척을 하고 있었다.

    선박은 정말 모래 바다 위를 질주하는 것과 같았다. 까마득한 사막에는 어떤 생명체도 보이지 않았고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옥패에 쓰인 금기사항에는 만황 요수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절대 의식을 방출해 사막을 살피지 말라고 적혀 있었고, 굳이 시선을 끌고 싶지 않았던 한립도 금기 사항을 어기지 않았다.

    * * *

    얼마 후 한립은 침실과 거실로 나뉜 꽤 넉넉한 선실로 들어섰다.

    안쪽 침실에는 휴식을 위한 침상이 있고 거실에는 붉은 목재 탁자와 청회색 방석이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인 과실들은 영과라 할 수는 없어도 기운이 맑고 무척 달았다.

    그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손에서 금빛이 반짝이고 금색 딱정벌레가 떨어져 나와 방석 위로 떨어졌다.

    붉은 솜저고리를 입은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변한 금동은 탁자의 과실을 번개처럼 집어서 음미했다.

    “아저씨, 뭐예요! 나보고는 석 가 녀석이랑 놀지 말라고 하더니 아저씨는 왜 같이 떠들고 그래요?”

    “그자의 기운은 요족과 비슷하지만 무언가 다르다. 진실안을 쓰기 전에는 진짜 정체를 알 수 없겠지. 이미 반지로 변한 너를 알아보았음에도 굳이 행방을 묻는 이유도 알 수 없고, 벗인지 적인지 알 수 없는 자이다.”

    “그 녀석이 이상한 꿍꿍이를 품었을 수도 있단 소리예요?”

    “아직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성가신 일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 아니더냐.”

    한립은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진짜 나쁜 마음을 먹었으면 그것도 좋죠. 그냥 팍 잡아다가…….”

    듣고 있던 금동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히죽 웃고 있었고 한립은 할 말을 잃었다. 금동에게 쓸데없이 일을 만들지 말라고 당부를 하려던 한립은 움찔했다.

    “왜 그래요?”

    “방금 강대한 기운이 선박의 위치를 포착하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너는 감지하지 못한 것이야?”

    “그게…….”

    금동이 답을 하려는데 한립의 목소리가 끊겼다.

    “또 다시.”

    그 말에 금동이 숨을 죽이고 의식을 집중했지만 아리송했다.

    “흰둥아, 너는 뭐가 느껴져?”

    그녀의 물음에 한립이 허리에 찬 백옥 장신구는 반응이 없었다.

    “사흘 안 맞았다고 정신 못 차리지? 본 선녀 말이 들리지 않느냐?”

    “아이, 누님! 제가 체면을 살려드리려고 대답을 안 한 겁니다. 저는 처음에 바로 이상을 감지했으니까요.”

    금동의 두 손이 움직이려 하자 백옥 비휴가 반짝거리면서 말했다.

    “네가 나보다 대단하단 소리야?”

    “아뇨, 아뇨. 저야 원래 만황구역에 살았으니 자연히 만황 생물의 기운에 민감할 수밖에요.”

    “어떤 기운인지도 알겠더냐?”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립이 물었다.

    “제가 만황구역 출신이기는 해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엽황수사에게 잡혀 각 선역을 떠돌았습니다. 그러다 공수구 손에 들어갔고요. 만황진령이라는 것도 공수구에게 들었는데 기운만으로 상대가 어떤 요수인지 판별은 못 합니다.”

    백옥 비휴의 설명에 한립이 대답하려 할 때 아까 그 기운이 선박을 감쌌다.

    “너는 여기서 기다리거라.”

    그는 금동에게 당부하고는 방을 나서 갑판으로 올라갔다.

    갑판 위에서 삼삼오오 모여 있는 수사들은 어떤 이상도 감지하지 못하고 편안한 얼굴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반대편의 석천공만이 홀로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는 한립을 발견하고 마음이 통했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의상 고개를 끄덕여 인사한 한립은 바로 선실로 돌아갔다.

    강대한 기운은 세 번 나타났다 종적을 감추었지만 한립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 * *

    다섯 달이 훌쩍 지난 어느 날.

    선박은 아무런 이변 없이 사막을 건너 만황대륙에 도달하기 직전이었다.

    만황대륙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새벽바람을 맞으며 한립은 뱃머리에 서서 눈에서 남색빛을 일렁이고 있었다.

    보호막 너머 멀리 시야의 끝에 오아시스처럼 초록빛이 보였다. 갑판 위에는 거의 백여 명의 수사들이 만황대륙에 도착할 때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아저씨, 아직도 그 일 때문에 걱정이에요?”

    금동이 옆에 서서 뒷짐을 진 한립을 따라 하며 물었다.

    “아니다, 만황대륙에 도착하면 어찌 이동할지 생각 중이었다. 이전에 사 모은 지도와 비교해 교삼이 내준 지도는 오차가 적지 않더구나. 진정으로 윤회전에 가담하겠다고 답하지 않아 완전하지 않은 노선을 내준 것일 테지.”

    한립은 그녀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맨날 생각하고 있으면 머리 안 아파요? 그냥 우리가 길을 하나 만들면 되죠!”

    금동이 히히 웃으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저기, 저게 뭡니까!”

    이때 수사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립이 고개를 돌리니 검은 선이 가까워지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창백한 사람의 얼굴에 검은 전갈의 몸을 한 기괴한 요수들이었다.

    “인면갈…….”

    누군가 요수를 알아보고 놀라 중얼거렸다.

    사막 요수 중에 실력이 강한 편은 아니지만, 그 수가 많아 인면갈 떼에 휩쓸리면 진선 수사라도 화를 입을 수 있었다.

    “당황할 것 없습니다.”

    힘이 실린 목소리가 선실 꼭대기에서 들려왔다.

    성주부에서 나온 호송사가 난간에 서서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보고 있었다.

    “저 정도 수의 인면갈이 선박을 뒤집을 수는 없으니 각자 제 몸만 잘 가누면 될 것입니다. 선박 바깥으로 떨어져 나간 이들은 성주부에서도 책임지지 않을 겁니다.”

    호송사의 냉랭한 목소리에 갑판에 있던 수사들은 겁에 질려 선실로 돌아갔다.

    그러나 한립은 아무 소리도 못들은 사람처럼 가만히 서서 검은 인면갈 떼를 응시했다.

    “인면갈 외에 다른 게 섞여 있구나.”

    금동도 난간에 기대서서 눈을 가늘게 뜨고 검은 선을 바라보았다.

    “왔구나.”

    그런 금동을 난간에서 떼어낸 한립이 낮게 한마디 했다.

    사람의 얼굴을 한 검은 전갈들이 하늘과 땅을 뒤덮고 선박의 앞길을 막았는데 황소만 한 영충들이 서로 기어올라 빠르게 검은 산을 이루었다.

    “이런, 이건 뭔가 이상한데…….”

    호송사가 그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며 혼잣말을 했다.

    이전에도 인면갈 떼를 많이 보았지만 이렇게 질서를 가지고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선박은 ‘검은 산’과 충돌했다.

    펑!

    선박이 심하게 흔들리고 속도가 줄자 노란 보호막이 번쩍거렸다.

    이어서 선박 표면의 다양한 주술문자들이 빛을 발하고 느닷없이 속도를 높여 검은 산을 뚫고 나가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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