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0화. 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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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지나다니는 수사들도 적어 유용한 소식은 듣기 어려웠다. 이에 그들은 날아올라 중심부로 가려 했다.
고공에서 밤하늘에 떠오른 별빛을 보던 한립이 중얼거렸다.
“원황성 같은 곳에 이렇게 복잡한 진법이 펼쳐져 있을 줄이야……. 장성을 주축으로 18개 대로가 일부가 되어 성이 발전할수록 진법이 굳건해지겠어.”
“아저씨, 뭐가 어떻다는 거예요?”
금동이 튀긴 게를 잡아 뜯으면서 우물우물 물었다.
“……넌 그냥 먹던 거나 먹거라.”
중심부로 들어와 건물을 장식한 짐승 조각상들을 보니 한립도 대부분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길가를 따라 3층이 넘는 누각들과 객잔들이 자리를 잡았고 몇 개의 거리를 지나면 가장 시끌벅적한 원형의 건물도 있었다.
동서남북으로 대문이 나 있는 원형 건물에서 환호성과 박수갈채가 들려왔다.
“저기 재미있어 보이는데, 가봐요!”
“투우장(鬪牛場)을 가서 뭐 하려고. 시장에서 범인들이 가축들을 데려다 서로 물고 뜯게 시키고 누가 이기는지 맞추는 것뿐이다.”
“아…….”
금동도 한립의 설명에 흥미를 잃은 듯했다.
“그간 쉬지 않고 여기까지 왔으니 오늘은 성안에서 푹 쉬고 내일 출발하자꾸나.”
“좋아요! 배부르니까 안 그래도 좀 졸렸거든요.”
금동은 작은 금색 딱정벌레로 변해 한립의 손가락을 물고 몸을 반지처럼 둥글게 말았다.
한립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짓고는 성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으로 들어왔을 때와 달리 점점 건물들이 줄어들었다.
성 중심부는 진법의 핵심이라 함부로 구조를 변경할 수 없어 상업적인 용도로 쓰이지 못하는 듯했다.
한립은 골목으로 들어가 연묘원(烟渺院)이라는 글자가 적힌 주홍색 대문 앞에 섰다.
문 뒤쪽 구역은 주변과 확연히 차이가 나게 천지원기가 충만했고 문 옆에 놓인 검은 목판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저희는 화신기 이상의 수사만 받습니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 아름답게 차려입은 궁장 여인이 다가왔다.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마중을 나가지 못했습니다.”
언사나 태도는 공손했으나 미소가 인위적이라 거리감이 느껴졌다.
“남는 방이 있는가?”
“을등원에 조용한 방이 하나 있습니다.”
“방마다 등급이 다른 것 같은데 갑등원에는 남는 방이 없는 것인가?”
“원황성은 처음이신가요? 성내의 모든 객잔은 갑을병정 네 개의 등급으로 방이 나뉘고 갑등원은 진선 이상의 수사에게만 개방이 됩니다. 그래서……. 대승기 수행을 지닌 손님께는 을등원이 편하실 겁니다.”
궁장 여수사가 미안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군. 알았으니 길을 안내하게.”
“예, 이리로 오시지요.”
여인은 반걸음 앞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후원쪽으로 걸어갔다.
“원황성에서 며칠이나 머무십니까? 성안에 들러 볼만한 곳이 몇 군데 있으니 그냥 지나치시면 아쉬우실 겁니다.”
“어떤 곳이 있는지 설명해 주게.”
“원황성이 처음 지어진 해는 사실 의미가 없습니다. 수사와 만황 흉수들 간의 전투에 허물어졌다가 주변 종문들의 도움으로 다시 지어졌으니까요.”
“만황 흉수들이 원황성을 공격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흥미를 느낀 한립이 물었다.
“예, 듣기로는 만황 진령들이 흉수들을 이끌고 먼저 원황성으로 쳐들어 왔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하는 이들이 거의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원황성은 각 종문들이 공동으로 다스리겠군?”
“그렇지는 않습니다. 원황성이 워낙 특수한 곳에 있어 관리는 성주부에서 하고 다른 종문들의 간섭은 받지 않는 것으로 압니다. 그래도 다른 종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요.”
“선궁은 어떤가?”
“북한선궁이 간섭을 하고 싶어도 일단 다른 종문들이 허락하지 않고 원황성 성주께서도 금선 최고봉의 수사라 그들도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저…….”
궁장여인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저 뭔가?”
“비밀은 아니지만, 촉룡도에서 변고가 있고 북한선역의 정세에 변화가 생겨 앞으로 원황성이 어떤 영향을 받게 될지는 모를 일입니다.”
여인이 천천히 걸으며 걱정스레 말했다. 그 말에 한립은 약간 안심이 되었다. 명한선부에서 있었던 일이 아직 북한선역 전체로 퍼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북한선역이 요즘 평탄하지 않기는 하지.”
한립은 표정 변화 없이 궁장여인의 말에 동조했다.
“무례가 아니라면 원황성에는 무슨 일로 오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만황구역에 가보려고 왔네. 내일 바로 성을 나설 생각이고.”
“내일 바로 성을 나서신다고요? 혹시 일행이 있으십니까?”
“나는 혼자 다니는데 익숙한 사람이라 일행은 없네.”
“제가 너무 말이 많다고 나무라실 수도 있지만……. 귀빈의 수행이 홀로 성을 나서면 짐승의 밥이 될 확률이 큽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성 밖이 그리 위험하단 말인가?”
“원황성은 광활한 영역의 모래사막으로 둘러싸여 있고 곳곳에 유사(流沙) 구덩이가 있어 사람은 물론 보통 사막에서 살아가는 짐승들도 견디기 힘듭니다. 성의 대형 선박을 타고 이동하지 않으시면 맞은 편 만황대륙에 이르지 못하실 겁니다.”
“육로가 안 된다면 수사들은 비행하면 될 테지만 공중에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겠군?”
“진선 수사가 아니라 금선 수사들도 함부로 비행해 건널 곳이 못 됩니다. 원황성에는 지난번 전투 이후 흉수가 출몰하는 일이 드물지만 모래사막에는 자주 강대한 만황 생령이 출몰해 진선 후기 수사도 걸리면 참혹한 꼴을 당하니까요.”
크게 개의치 않던 한립이 그 말에 미간을 좁혔다.
“요행히 흉수를 마주치지 않는다고 해도 신기루와 환상이 곳곳에서 출몰해 길을 잃기 십상입니다. 운이 좋으면 수백 년 정도 같은 자리를 돌다 성으로 돌아올 테지만, 운이 나쁜 이들은…….”
“수사가 말한 선박은 어디서 탈 수 있지?”
“성 서문의 봉화대 입구가 배를 탈 수 있는 곳입니다. 매년 딱 두 번 운행하는 데 다행히 보름 후가 다음번 출항일입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하나 있네. 수사들을 태운 선박에 흉수들이 더 꼬일 수도 있지 않나?”
“사막을 지나는 선박은 성주께서 특수한 기관을 설치해 만든 것으로 기운을 숨기는 데 아주 유용해서 만황 생령들이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한립의 의문에 여 수사가 웃으며 답했다.
“선박을 타고 사막을 건너면 무조건 무사히 반대편에 도착할 수 있단 말이군.”
“무조건이라니 농이시지요? 8년 전에 선박이 우연히 진령에게 당해 사막에 묻히고 수사들이 크게 다치고 죽는 사고도 있었습니다.”
“기운을 숨길 수 있다면서 어찌 그런 사고가 생긴 것인가?”
두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9마리 용 그림자로 이루어진 벽을 빙 돌아 후원에 이르렀다.
“선박에 탔던 진선경 엽황(獵荒) 수사 하나가 만황구역을 돌며 사냥을 하다가 어린 구안연유(九眼蜒蚰) 한 마리를 죽였는데 그 일로 진선경 구안연유가 대노해서 동족의 피 냄새를 따라 선박을 찾아내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들었습니다.”
“엽황 수사란 만황구역에서 짐승을 사냥하는 수사들을 이르는 것인가?”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엽황 수사 중 일부는 만황의 짐승들을 사냥하는 것이 목표지만 전부는 아니거든요. 만황구역에서만 자라는 영초나 광물을 노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오랜 세월 만황구역에 수사들이 드나들었을 테니 완전하지는 않아도 관련 지도가 떠돌겠지?”
“아니요. 상점에 가서 지도를 구하실 생각이면 조심하셔야 합니다. 만황구역 지도를 판다는 상인들은 전부 사기꾼이니까요.”
한립이 걸음을 멈추고 묻자 궁장 여인도 멈춰서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 그렇지?”
“그간 만황구역에 들어간 수사들의 수는 수도 없이 많지만 다들 아주 협소한 범위 내에서만 움직였습니다. 진정한 만황구역 심처까지 들어갔다 살아 돌아온 이는 극소수이고, 그마저도 전부 금선경 기상의 고계 선인들뿐입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만황구역을 통과해서 인접한 흑산선역에 이른 이는 태을경 이상의 실력자뿐이라던데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어 지도가 유출되겠습니까?”
“일리가 있는 말이군.”
“만황구역에 호기심이 생겨 원황성에 오신 것 같은데 수사들이 자주 가는 인근 지역만 돌아보셔도 예상치 못한 수확을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궁장 여인은 웃으며 말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을등원의 어느 집 앞이었다.
3개의 방이 가운데 작은 화원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화원에는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선초와 아름다운 꽃들이 자라고 있었다.
여인이 청우헌(聽雨軒)이라 적힌 푸른 옥패를 들어 허공에 비추자 금제가 갈라지고 시녀 복장을 한 여인 둘이 나타나 예를 올렸다.
“이곳의 시녀들은 결단기 여 수사들로 순결한 몸을 지니고 있습니다. 귀빈의 눈에 든다면 이 아이들의 복이겠고, 마음에 차지 않으시면 차를 따르고 청소를 하는 등 잡다한 일을 시키시면 됩니다.”
궁장 여인이 옥패를 건네면서 설명했다.
“되었네. 난 혼자 지내는 것이 편하니 시중들 사람은 필요 없네.”
한립의 말에 시녀들은 물론 궁장 여인도 약간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이 아이들이 복이 없네요. 그럼 편히 쉬십시오. 곧 주안상을 봐서 올리겠습니다.”
“고맙네.”
한립은 인사를 하고 비단 주머니 하나를 던져 주었다. 궁장여인은 공손히 그것을 받아 안을 살피다 화들짝 놀라며 황송해했다.
“제가 이런 분인지도 모르고 여기로 모신 것이 부끄러워 얼굴이 다 달아오를 지경입니다. 지금이라도 갑등원으로 모실까요?”
“되었네. 여기도 좋군. 다들 물러가 보게.”
한립은 손을 내저으며 홀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가자 궁장 여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비단 주머니 안에는 영기가 농염한 극품 영석이 들어있었다. 그녀는 두 시녀를 보며 혀를 찼다.
“너희가 정말 큰 복을 놓쳤구나.”
* * *
다음 날 아침, 일찍 자리에서 일어난 한립은 연묘원을 나섰다.
금동도 하룻밤 쉬더니 기운이 넘쳐서 한립을 따라다니며 거리의 맛좋은 음식을 싹쓸이하고 있었다.
“아저씨, 이제 출발이에요?”
고기만두를 가득 문 금동이 아쉬운 얼굴로 물었다.
“아니다.”
한립은 간략하게 답하고는 성 서문으로 향했다.
“여기는 왜요?”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거라.”
한립은 홀로 검은 건물로 들어갔다가 얼마 뒤에 선박 도안이 그려진 검은색 부적 두 장을 들고 나왔다.
“그게 뭐예요?”
“배표다.”
한립은 어제 들은 이야기를 간단하게 전해주었다.
“우리 실력에 배를 타지 않고 그냥 슝! 지나가도 되잖아요.”
“우리도 만황구역은 처음이니 신중하게 움직이는 것이 나을 게다. 선박을 타고 편히 사막을 건너면 불필요한 싸움을 할 필요도 없겠지.”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다시 음식 냄새에 이끌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금동을 데리고 거리를 걸었다.
공수구 등의 저물법기에서 찾은 단약이 많았지만 다 그에게 맞는 것이 아니라 위험한 지역으로 가기 전에 준비해둘 필요가 있었다.
또한 만황구역 인근이라 관련 재료도 구할 수 있어 구경할 만했다.
한립은 규모가 있는 잡화점에 들어가 원황성을 소개하는 서책도 한 권 사서 들춰보고는 내성의 백옥 광장으로 향했다.
백옥 광장을 중심으로 백여 개의 길이 성 곳곳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광장 위에는 하얀 궁전이 떠 있었다.
한립은 통천가(通川街) 길목에서 멈춰서 하얀 궁전과 길가를 살폈다.
경전에서 본 기록에 따르면 원황성 성주가 머무는 궁전에서 통천가를 감시한다고 했다.
그래서 원황성의 다른 곳보다 거리가 조용하고 다들 여기서 싸움을 벌이거나 분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허공의 궁전은 권위의 상징으로 원황성에 머무는 수사들에게 위압감을 주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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