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9화. 첫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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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이 수정구슬을 갖고 놀고 있는데 대전 바깥에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낙청해와 푸른 얼굴 노도사가 들어오는 소리였다.
“시간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상의해 본 결과는 무엇입니까?”
한립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허허, 오래 기다리게 했습니다. 이게 본문의 <수연사시결> 공법입니다.”
낙청해는 시간을 끌지 않고 남색 옥간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과연 말이 통하는 분이십니다.”
그제야 한립은 검은 수염 노인의 원영을 봉인한 하얀 수정구슬을 하나 더 꺼냈다.
그는 두 수정구슬을 낙청해 쪽으로 던져 주고 남색 옥간을 챙겨 들었다. 낙청해는 남색 빛을 주입해 보고 기뻐했다.
구금이 되어 있을 뿐 원영들은 상해를 입지 않았다. 그 사이 옥간에 의식을 불어넣었던 한립이 놀란 얼굴로 의식을 회수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닙니다. 거래도 마쳤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낙청해의 질문에 고개를 저은 한립은 옥간을 넣고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급히 가시지 마시고 창류궁에서 며칠 머물다 가시지요?”
“아닙니다. 저는 공수구 수사나 명한선부 일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니 제게 무언가를 알아내려 하신다면 헛수고일 겁니다.”
한립의 직설적인 말에 낙청해의 얼굴이 일순 굳었으나 다시 평소의 인자한 표정으로 돌아가 노도사에게 명을 내렸다.
“그렇다면 더는 붙들어 두지 않겠습니다. 청부 장로, 대신 류 수사를 배웅해 주게.”
“예! 류 수사, 이리로 가시죠.”
푸른 얼굴 노인이 대답을 하고 한립과 같이 대전 바깥으로 날아올랐다.
* * *
반나절이 지나 점창산맥을 빠져나온 푸른 둔광이 어느 산으로 내려섰다.
한립은 웅장한 점창산맥 쪽을 보면서 웃음 지었고 그의 몸에서 금빛이 새어 나와 금동으로 변했다.
“네 덕에 일이 순조롭게 풀렸구나.”
창류궁 안에서 거원으로 변신한 순간, 그의 선령력은 전부 감추고 금선 후기 금동의 기운을 일부러 드러내 의심 많은 낙청해를 속여 넘길 수 있었다.
“아저씨는, 원영이 두 개나 있으면 절 줘야죠.”
팔짱을 낀 금동이 투덜거리자 한립이 웃음을 지으며 붉은색과 남색의 또 다른 금선 원영을 불러냈다.
“이야!”
금동이 환호하면서 두 원영을 빼앗다시피 가져갔다. 한립이 공수구의 물건에서 찾은 봉인된 금선 원영이 일고여덟 개는 되었다.
그는 <수연사시결>을 꺼내 들고 웃음기가 짙어졌다.
복릉종의 <환진보전>을 얻었지만 북한선역을 떠나려니 3대 시간법칙 공법 중 마지막인 <수연사시결>을 손에 넣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신기한 것은 모아놓고 보니 각 종문의 공법을 기초로 다른 방식으로 설명된 3개의 공법이 어딘가 모르게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가자.”
공법을 집어넣은 한립은 벽옥 마차를 불러내 금선 원영을 소화 중인 금동을 데리고 날아올랐다.
* * *
북한선역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을지 모를 어느 공간.
쪽빛 하늘에 거대한 구름이 가득하고 영조(靈鳥)들이 그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휘황찬란하게 빛나 그림자가 지는 곳이 없었다.
하얀 구름 위 선기가 왕성한 세계에 거대한 산봉우리들이 시야 끝까지 펼쳐져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웅장하고 정교한 세공의 건물들이 들어차 있었다.
웬만한 산봉우리들의 몇백 배에 이르는 거대 산봉우리가 허공에 떠서 각인된 문양들을 반짝였다.
열댓 개의 비교적 작은 산봉우리들이 달을 에워싸듯 검은색 거대 봉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 거대 봉우리 위에 우뚝 솟은 금색 대전에서 금빛이 만발했다.
대문 위에는 능허전(凌虛殿)이라는 세 글자가 은색 편액에 쓰여 있었다.
주변의 작은 봉우리에는 약재밭이나 단약방 같은 다른 건물들이 세워져 있었고, 그중 거대 봉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는 선수들을 기르는 거대 장원이 펼쳐져 있어 울타리마다 청년 시종들이 돌아다니며 일을 했다.
이때 하얀 빛줄기가 멀리서 날아들어 장원을 지나 금색 봉우리로 향했다. 장원 주변 허공이 웅웅 떨리면서 푸른 보호막이 일었다.
이로 인해 내부의 선수들이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고 시종들은 안색이 하얗게 질려 픽픽 쓰러져 나갔다.
“방금 어느 대인이 지나가신 겁니까?”
기세가 가시자 비틀거리면서 일어난 키 크고 마른 청년 시종이 흥분해 소리쳤다.
“손 형은 이제 막 능허궁에 와서 모를 수도 있겠네요. 서운평 대인, 서 대인은 능허선존 대인의 5번째 제자십니다.”
나이가 조금 더 들어 보이는 각진 얼굴 시종이 귀띔해주었다.
“서 대인의 수행이 정말 어마어마하십니다.”
짙은 눈썹의 또 다른 시종이 중얼거렸다.
“듣기로 태을경 중기 고비를 뚫으려고 오래 폐관 수련을 하셨다는데, 출관하신 것을 보니 성공하셨나 보네요. 허나 영기의 압력이 바깥으로 새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직 경지를 굳건히 하지는 못하셨나 봅니다.”
각진 얼굴 시종이 또 답해주었다.
“능허선존 대인의 문하에 들어간 지 수십만 년 만에 벌써 태을경 중기에 이르신 기재신데 계속 태을경 초기에 묶여 있으실 리 없겠지요.”
짙은 눈썹 시종이 감탄하며 말했다.
“하계에서 비승한 수사신데 그 잠재력이야 능허선존 대인의 어느 제자들보다 손에 꼽히지요. 우리 같은 이들과 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각진 얼굴 시종이 자조적으로 말했다.
하얀 빛줄기가 거대한 산봉우리 정상의 대저 앞에 도착해 금관을 쓰고 금포를 입은 청년으로 변했다.
영준한 얼굴에 별처럼 빛나는 눈과 곧은 눈썹이 예리한 인상이었다.
대전 양측에는 피부가 금속처럼 광택이 나는 금갑 병사가 한 명씩 서 있었다.
“선존께서는 안에 계시는가?”
“계십니다.”
금갑 병사의 대답에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러 통로를 지나 편전에 이른 그는 은색 단 위에 놓인 금색 의자를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보라색 장포를 입은 중년 사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는데 까무잡잡한 피부에 각진 턱, 큰 코를 갖고 위엄 있는 분위기를 풍겼다.
중년인의 전신에서 보랏빛이 자욱한 안개를 만들어 호흡할 때마다 편전 전체가 웅웅 진동했다.
편전 안의 모든 것이 중년인의 통제 하에 있는 듯했다. 금포 청년은 금포 중년인의 모습에 머뭇거리다 결국에는 소리를 냈다.
“제자 서운평이 사존 대인을 뵙습니다.”
눈꺼풀을 가볍게 떤 자포 중년인이 눈을 뜨고 벼락같은 시선으로 금포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에 안색이 하얗게 질린 청년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운평이 왔구나. 무슨 일이냐?”
“북한선궁의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궁주 소진한이 제자들을 데리고 명한선부에 들어갔다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그 자신도 다른 금선 장로 몇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합니다.”
“그런 일이? 소진한은 금선 최고봉의 수행에 이르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쩌다 죽은 것인지 조사는 마쳤느냐?”
“여러 경로로 정황을 알아내려 했으나 명한선부에서 살아남은 선궁 수사가 몇 되지 않고 다들 어찌 된 일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소진한이 북한선역을 통일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북한선역의 다른 거대 세력들과 마찰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소진한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다. 그자가 경솔하게 군 것도 있지만 감히 천정이 파견한 선궁 궁주를 해하다니. 북한선역으로 사람을 보내 철저히 조사하고 이 일에 연관된 이들은 전부 죽이라 명하거라. 천정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들은 살려둘 수 없다!”
“예! 이미 북한선역에 사람을 보내두었으니 곧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금포 청년이 공수하고 명을 받들었다.
“그래, 철저히 진상을 밝혀야 할 것이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보고를 드려야 할 소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
“또 무엇이지?”
“……명한선부가 개방되고 선옥(仙獄)의 공수 선사가 윤회전 일당을 쫓아 안에 들어갔다 그 안에서 목숨을 잃은 듯합니다.”
“공수? 설마 공수 세가의 그 공수구 말이냐?”
이번에는 자포 중년인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그러합니다.”
“공수구가 순찰사자 중 실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라도 태을옥선인데 북한선역에 그를 죽일 수 있는 자가 있단 말이냐. 윤회전 인물들의 소행이더냐?”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윤회전에서 태을경 수사를 북한선역에 투입했다면 저희가 모를 수가 없습니다. 제자를 보내 조사를 해볼까요?”
자리에서 일어난 자포 중년인을 향해 금포 청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선옥은 독단적으로 행동하길 좋아했지. 그쪽 인물이 죽었으니 알아서 조사에 나설 게다.”
“예.”
“아직까지는 대처를 잘했으나 내가 관할하는 북한선역에서 큰일이 생겨서는 안 될 것이야. 어서 새로운 북한선궁 궁주를 선발하도록 하거라.”
“알겠습니다!”
금포 청년이 빠른 걸음으로 편전을 나섰다.
“북한선역. 북한선역이라…….”
편전을 이리저리 오가던 자포 중년인이 번득 사라졌다.
* * *
상아대륙 서남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광할한 육지, 임황대륙(臨荒大陸)이 나왔다.
대륙 동쪽은 산과 구릉지대가 많고 그 틈의 밀림에는 자욱하게 독무가 퍼져 있어 성이 거의 없었다.
동쪽 해안에서 내륙으로 십여만 리 안으로 들어가면 갑자기 깎아지른 듯 우뚝 솟은 절벽이 나타나 수백만 리를 이어지는 통에 분명 하나의 대륙이 이 절벽을 기준으로 확연히 구분되었다.
절벽 위로는 푸른 들판이 펼쳐지고 절벽 아래로는 모래바람이 부는 사막이 끝없이 이어졌다.
두 세계를 가르는 절벽 위에 검은 용이 엎드려 있는 것처럼 만리장성이 펼쳐져 있고 만 리마다 하나씩 봉화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봉화대는 무수히 많았으나 그곳에 있는 성은 딱 한곳 원황성(元荒城)뿐이었다.
차츰 해가 기울고 주황색 노을이 성에 드리우면서 서늘한 흑강암(黑鋼巖)을 따스하게 비추었다.
성벽을 사이에 두고 절벽 아래 사막은 고요하기만 한데 반대편 성안은 떠들썩하게 거리마다 등을 밝혀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이때, 성 외곽 쪽에서 들어가는 길을 두 사람이 걸어가고 있었다.
붉은 천에 금색 테두리가 들어간 솜저고리를 입은 여자아이는 여덟아홉 정도 먹은 것 같았는데 손에 탕후루를 3개나 들고 옆의 키 큰 청년을 따라가고 있었다.
푸른 장포를 입은 평범한 청년은 한립이었고, 땋은 머리를 흔들면서 그와 걸어가는 여자아이는 당연히 금동이었다.
교삼이 준 지도의 출발지와 호언 도인이 말해준 위치가 똑같이 원황성이었다.
한립은 오는 동안 여러 정보를 수집해 만황구역을 건너기로 마음을 먹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아저씨만 수행을 감추면 되지 왜 나까지 그래야 해요?”
금동은 탕후루를 맛보면서 이해가 안 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금선 후기의 수행은 기운이 너무 왕성해 눈에 띄기 쉽다.”
“좋잖아요! 겁 없는 금선들이 달려들면 싹 해치워서 배도 불리고 재산도 불리고 하는 거죠.”
“급히 북한선역을 떠나야 해서 괜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 멋대로 굴려면 반지로 변해 얌전히 내 손에 들려 있거라.”
걸음을 멈춘 한립이 진지하게 당부했다.
“싫어요! 알겠어요, 알겠어. 아저씨 말대로 할게요…….”
금동은 고개를 붕붕 저었고 두 사람은 어느새 성 외곽에 이르렀다.
원황성 외곽은 진창길이었고 푸른 벽돌에 검은 기와를 얹어 만든 낮은 집들이 많았다.
길가에 늘어놓은 좌판에서 파는 물건들도 전부 속세의 물건이라 딱히 볼 게 없었다.
성안으로 들어갈수록 길이 넓어지고 건물들도 크고 호화로워지면서 다른 북한선역의 대륙과 비교해 독특한 양식을 드러냈다.
성 외곽은 간단하고 소박한 건물들이 주를 이루었고 길가에 파는 물건들도 다른 대륙과 차이가 났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어 길가에 사람이 많지 않은데도 한립은 북한선역의 다른 대륙에서 잘 찾아보기 어려운 이족인들이 상당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와, 좋은 냄새!”
금동은 손에 든 탕후루를 다 먹자마자 코를 킁킁거렸다.
그녀를 따라가 보니 불 위에 걸어 놓은 커다란 솥에서 기름이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무언가를 튀기는 냄새가 정말 좋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서 솥 안을 보자 미간이 저절로 좁아졌다.
그곳은 커다란 곤충의 몸통이나 게 그리고 이름 모를 짐승의 눈알 같은 것을 바삭하게 튀겨 파는 곳이었다.
“이게 먹고 싶다고?”
“네, 전부요! 아저씨, 계산이요!”
식욕이 동한 금동이 작은 손을 휘둘러 솥 옆에 쌓아놓은 기괴한 튀김들을 전부 저물탁 속에 넣었다.
한립은 어쩔 수 없이 사내에게 값을 치르고 금동을 데리고 성안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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