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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758화 (1,515/2,000)

1758화. 조건

*

손님을 맞는 장소로도 쓰이는 듯한 대청 안에는 얼음 결정 모양의 수정 돌이 얹어진 남색 옥기둥 열댓 개와 그 중간에 있는 남색 탁자와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자, 앉으시지요.”

낙청해가 먼저 앉고 옆의 자리를 권하자 한립이 거절하지 않고 자리를 잡았다. 나머지 금선들도 그들을 따라 분분히 의자에 앉았다.

“이제야 묻는 것이 민망하지만 성함이 어찌 되십니까? 어느 문파 출신이신지요?”

낙청해가 다른 금선들의 소개를 마치고 느긋하게 물었다.

“저는 류 가입니다. 출신이야 어차피 북한선역 사람이 아니니 말해도 모르실 겁니다.”

“아, 류 수사셨군요. 그래서 오늘 창류궁까지 걸음을 해주신 연유를 여쭈어도 될지요?”

“그건 내가 물어야 할 말인 것 같습니다. 흑풍해역을 빠져나와 종문으로 돌아가려던 나를 관란성 인근에서 창류궁 금선 두 명이 매복해 있다 급습했으니 말입니다. 내가 실력이 있어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그곳에 뼈를 묻을 뻔했다 이 소립니다. 낙 대궁주가 친히 지시한 사항입니까?”

한립은 두 개의 남색 영패를 꺼내 그것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물었다. 영패는 백면서생과 검은 수염 노인의 저물법기에서 찾아낸 신분 영패였다.

영패를 본 창류궁 수사들의 안색이 확연히 달라졌다.

“그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안 그래도 본 문의 철 장로와 추 장로가 관란성에서 돌연 실종되어 적의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닌 가 급히 수색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동공을 수축한 낙청해가 아무 말 하지 않는데 외뿔 거한이 차갑게 웃으면서 도발했다.

한립은 풍해라는 이름의 창류궁 오극궁주 중 남극궁주를 맡은 거한을 마주 보았다.

“그 말은 제가 두 사람을 모함하고 있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렇게 중대한 일을 어찌 수사의 말만 듣고 판단을 내릴 수 있단 말입니까! 그들이 수사를 먼저 습격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내놓아야만 할 겁니다.”

“그렇습니까? 이 일을 어찌 해결하면 좋을지 의견을 구하러 온 것인데, 그런 생각이라면 가보겠습니다. 뭐 제게도 금혼단이 필요한 제자들이 많으니 제련이나 하러 가면 되겠어요.”

한립은 의미심장하게 말하고 벌떡 일어나 나가려 했다.

그 소리에 창류궁 수사들의 안색이 달라졌고 외뿔 거한이 번득 한립 앞을 막아섰다.

“창류궁이 당신이 들어오고 싶으면 오고 나가고 싶으면 나갈 수 있는 곳인 줄 아십니까! 돌아가고 싶다면 추 궁주와 철 궁주의 원영은 내놓고 가세요!”

“당신이 뭐라고 내 앞을 막는 것인지…….”

갑자기 살기등등하진 한립이 우드득 소리를 내며 부풀어 올라 커진 팔을 휘둘러 주먹을 날렸다.

쿠앙!

울룩불룩한 팔뚝에 바늘 같은 금색 털이 자라나 허공을 찢으면서 주먹 허상을 날리고 있었다.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난 외뿔 거한이 교차한 두 팔에 남색빛을 일으켜 용의 발톱을 내뿜었다.

콰르르…….

금색 주먹 허상이 남색 용 발톱 허상 두 개를 바스러트리고 거한에게 날아들었다.

대경실색한 외뿔 거한이 다급히 손을 놀려 삼각형 방패 두 개를 날려 남색 장벽을 만들어냈다.

쿠쾅!

금색 주먹 허상이 장벽과 부딪쳐 무시무시한 기운이 담긴 파랑을 내뿜었다.

그 힘에 남색 장벽이 부서져 내리기 시작하고 강력한 힘에 대전 전체가 흔들렸다.

쿵쿵쿵 몇 장을 물러선 외뿔 거한이 눈을 부릅뜨는데, 갈라진 남색 장벽을 지나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한립이 방패 두 개를 맨손으로 구겨 망가트리고 있었다.

그의 손아귀에서 보물이 가루가 되어 떨어지는 바람에 짙은 영기가 흩어졌다.

창류궁의 다른 수사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놀란 눈빛을 주고받았다.

금선 중기 최고봉의 수행에 인족 수사가 아닌 촉룡 혈맥을 이어받아 육체까지 강인했는데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게 이해가 가지 않는 눈치였다.

팔을 거둔 한립이 힐끗 외뿔 거한을 보고 다가가려 했다.

쉬쉬쉭!

창류궁 금선들이 우르르 몰려와 적의를 드러내고 각자의 영기의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창류궁은 손님을 이렇게 대접하는군요? 하하, 어디 끝까지 해봅시다.”

한립이 웃음을 터트리며 금털 거원으로 완전히 변신하고 금선 후기의 기운을 드러냈다.

농염한 살기가 포악스럽게 대청을 가득 채워다.

“그만!”

이때 낙청해가 한립과 창류궁 금선들 사이에 나타났다.

“낙 궁주께서도 함께 하시렵니까?”

“하하, 그런 오해는 마시지요. ……모두들 거처로 돌아가 반성하고 있게! 내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는 거처 바깥으로 나올 생각들 말고! 창류궁의 귀빈인 류 수사를 상대로 이 무슨 경우에 없는 짓들인가.”

낙청해는 한립을 향해 사람 좋게 웃어보이고는 다른 금선들을 호되게 나무랐다.

“예!”

다른 금선들은 두말하지 않고 기운을 거두고 물러나는데 외뿔 거한만은 한립을 노려본 다음에야 몸을 돌렸다.

금색 눈동자를 반짝인 한립도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 대청 안에는 그와 낙청해 뿐이었다.

“류 수사, 솔직히 말씀을 드리면 명한선부 안에서 창류궁이 입은 피해가 막심한 데다 두 궁주까지 실종되어 다들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런 충동적인 일을 벌인 것이니 나무라지 말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실종이라니요? 보아하니 낙 궁주께서도 제가 그 둘을 모함하고 있다 여기시는 모양인데, 그럼 더는 할 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제 설명을 좀 들어주시지요. 우리 같은 수행에는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기보다는 이익을 쫓아 움직이는 경우가 더 많지 않습니까? 수사께서 직접 창류궁을 찾아오신 데는 분명 목적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낙청해가 담담히 웃음 지었고 한립은 꿈쩍 않고 어디 무슨 이야기를 하나 들어보자는 얼굴이었다.

“철 궁주와 추 궁주의 원신정이 아직 꺼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류 수사께서 너그러운 성품이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무엇이든 제가 대신해서 사과할 테니 배려를 해주시지요.”

낙청해는 진지하게 한립을 향해 공수를 해 보였다.

“낙 궁주께서야 말로 오해십니다. 그런 자들을 단번에 죽여주기 아까워 그런 것이지요.”

“허허, 일단 화를 가라앉히십시오. 철 궁주와 추 궁주가 무슨 이유로 수사와 충돌했던 간에 그들의 원영만 돌려주신다면 창류궁에서 수사가 만족할 만한 보상을 하겠습니다.”

“제가 그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확신하십니까?”

“세상에 가격이 없는 물건은 없고 조건만 맞는다면 벗이 되지 못할 이도 없다고 믿는 편입니다.”

“……낙 궁주께서 먼저 성의를 보이시니 두 사람의 원영은 돌려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대신 무엇을 원하십니까? 본문이 청빈해서 복릉종이나 촉룡도 보다는 가진 게 많지 않아도 수사의 요구는 꼭 들어드리겠습니다.”

낙청해가 한립의 말에 희색을 드러냈다.

“북한선역 같이 척박한 땅의 물건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명한선부에서 공수구가 말하는 것을 들으니 창류궁에 시간법칙에 연관된 <수연사시결(水衍四時訣)>이 있다던데, 맞습니까?”

한립은 다시 낙청해 옆에 앉으며 물었다.

“그게, 저희 창류궁에 확실히 그런 공법이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류 수사께서 말한 공수구가 명한선부에 나타났던 감찰선사 공수구 대인이 맞습니까?”

“맞습니다.”

“명한선부에서 류 수사를 마주친 적은 없는 듯한데 혹시 공수구 선사와 함께 들어가셨던 것인지요?”

“거래가 급하지 않으신가 봅니다.”

“하하,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계속 이야기하시지요.”

한립이 인상을 찌푸리자 낙청해가 웃어넘겼다.

“긴말 않겠습니다. <수연사시결>을 내주시면 저도 두 사람의 원영을 돌려드리겠습니다.”

“<수연사시결>은 창류궁의 비서로 창류궁 수사도 장로회의 동의를 얻어야 열람이 가능합니다. 그 요구는 들어드리기 어려울 듯한데 다른 조건은 없으십니까?”

“제가 원하는 것은 이미 말씀을 드렸고 결정은 그쪽에서 내리시면 됩니다. 저는 딱 한 시진만 기다리고 그때도 <수연사시결>을 볼 수 없으면 두 원영을 데려다 금혼단이나 제련하겠습니다.”

낙청해가 난감한 얼굴을 했으나 한립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팟.

한립은 남색 원영을 봉인한 하얀 수정구슬을 불러냈다. 원영의 용모가 백면서생과 같았다.

남색 원영은 낙청해의 얼굴을 보더니 깜짝 놀라며 기뻐했으나 움직이기는커녕 전음을 보낼 수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다른 수사들과 잠시만 상의를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수정구슬을 보던 낙청해가 지긋이 한립을 쳐다보고 바깥으로 나갔다.

* * *

대전을 나온 낙청해는 고민이 많은 얼굴로 좌측의 편전으로 향했다. 그가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금선들이 모여들었다.

“대궁주님, 어찌 되었습니까?”

푸른 얼굴 노도사의 물음에 낙청해가 숨김없이 한립과 나눈 대화를 들려주었다.

“뭐라고요! <수연사시결>을 내달라니 그게 무슨 헛소립니까!”

외뿔 거한이 가장 먼저 소리쳤다.

“맞습니다. 창류궁의 보물인 비서를 어찌 외부인에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복면 부인도 기분이 상해 반대했다.

“대궁주께 들으니 다른 것은 필요가 없다고 했다던데 그럼 철 궁주와 추 궁주는 어쩐단 말입니까.”

푸른 얼굴 노도사가 미간을 좁혔고 그것을 본 복면 부인이 침묵했다.

“제 아무리 실력이 출중해도 창류궁 금제와 우리의 실력이면 금선 한 명을 못 붙잡아 둘까요? 그자를 구금해도 철 궁주와 추 궁주는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외뿔 거한이 살의를 드러냈다. 다른 금선들도 솔깃하는지 눈빛이 심상치 않은 표정이었다.

“저렇게 농염한 흉살기를 지닌 수사가 절대 평범한 금선은 아닐 테고, 홀로 창류궁에 찾아왔을 때는 그만한 준비를 하지 않았겠는가? 은은하게 숨겨진 강력한 힘이 느껴지는 데다 공수구와도 아는 사이인 듯하니 범상치 않은 신분을 지녔을 가능성도 있네. 우리가 멋도 모르고 손을 썼다가는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종문에 커다란 분란을 일으키고 말게야.”

고민을 거듭하던 낙청해가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결정하시려 하십니까?”

외뿔 사내도 누그러든 기세로 물었다.

“당시 선부가 개방될 때 일곱 장의 명한선하도를 이용해 안으로 들어간 수사들은 입구에서 전부 만나 보았네. 기운이나 용모로 판단할 때 저런 금선 수사는 없었지. 그렇다면 공수구와 같이 8번째 명한산하도로 들어왔다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낙청해의 분석에 다른 수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렇게 <수연사시결> 그냥 내줘야 한다는 말입니까?”

외뿔 거한이 싫은 내색을 하자 다른 금선들도 말이 없었다.

“대궁주님의 판단을 믿습니다. 결정해 주시지요.”

이때 푸른 얼굴 노도사가 입을 열었다.

“지금의 북한선역은 수십 만년 이래 가장 격동하고 있네. 북한선궁, 복릉종, 촉룡도가 모두 화를 입어 우리 창류궁만이 아직 건재한 상황이지. 난세에 기회가 있다고 창류궁의 세력을 확장할 절호의 기회네. 이대로 가면 단번에 복릉종과 촉룡도를 압도하고 창류궁이 북한선역 제1의 세력이 될 수도 있단 말일세.”

낙청해의 차분한 설명을 들은 수사들의 눈빛이 뜨거워졌다.

창류궁은 오랜 세월 북한선궁을 제외한 3대 세력으로 꼽히기는 했으나 복릉종과 촉룡도보다 과소평가 되어왔다.

이제 복릉종과 촉룡도를 제치고 북한선궁의 일인자가 되면 명성은 물론이고 막대한 수도 자원이 창류궁으로 흘러든다는 뜻이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철 궁주와 추 궁주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네. 내 생각에는 <수연사시결>로 두 사람의 원영을 돌려받는 편이 현명할 듯싶군.”

“대궁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창류궁의 대계가 공법서 한 권보다 훨씬 중하지요.”

“맞습니다! 공법이 아무리 좋다 해도 그 안에 담긴 시간법칙을 익히기가 너무 어려워 창류궁 제자 중에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던 이도 없고요.”

“옳은 말씀입니다. 두 금선 장로를 돌려받기 위해서라면 가치 있는 결단입니다.”

푸른 얼굴 노도사를 시작으로 여러 명이 찬성 의사를 밝혔다

외뿔 거한은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라 더는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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