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7화. 창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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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석기전을 찾아가 자세한 내막을 알아봐야 할지 고민했으나 그러지 않기로 결정했다.
명한선부를 떠난 지 어느 정도 시일이 흘러 천정에서 벌써 무슨 조치를 취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생각을 마친 한립은 서수에게 손짓해 푸른 실로 그자를 바닥에 묶어두었다.
“반 시진을 주마. 난 성 밖의 산에서 기다리겠다.”
이 말을 남기고 벽옥비차가 다시 번득 화원 바깥으로 사라졌다.
“손호, 대인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손부정이 그 뒷모습을 향해 천천히 꿇어앉아 절을 올렸고, 그 후 어화원에는 참혹한 비명과 피비린내가 뒤따랐다.
* * *
호운성 밖의 산 정상.
한립이 비를 피하기 위해 만들어 둔 정자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옆에는 금동이 두 손으로 새하얀 장검을 쥐고 아드득 아드득 깨물어 삼키면서 주변 풍경을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흠?’
한립은 갑자기 나침반 형태의 법보를 꺼내 들고 눈에 이채를 띠었다. 연신 비술을 사용했을 때 나침반에 미약한 반응이 있었다.
몇 번 더 실험을 해보자 나침반이 연신술을 사용하는 이의 종적을 찾는 용도라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나 멀리까지 감지가 가능한 모르겠으나 태을경 수사인 공수구 수중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 위력이 약할 리는 없었다.
한립이 한숨을 내쉬며 나침반을 넣어두려는데 갑자기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금동이 정자 난간에 기대어 미소를 띤 채 잠이 든 것이다.
한립이 의식 연계로 깨우려 했지만 깨어나지 않아 저물대로 옮겨 주었다.
산바람이 서늘한 기운을 품고 부는 가운데 하늘 끝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곧 몽운귀 등이 산 정상에 올라 정자에 앉은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몽천천에게 들려준 당부를 반복한 한립은 홀로 그곳을 떠났다. 한립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는 몽천천의 눈에는 어쩔 수 없이 아쉬움과 슬픔이 어렸다.
“려 대인께서는 수행이 더 깊어지셨구나. 촉룡도의 금선 도주들보다 더 강해지신 것 같아…….”
“그러니까 우리도 앞으로 더 열심히 노력해서 꼭 대인께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요.”
손부정의 선망 어린 말에 몽천천이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 네 말이 맞다. 오늘처럼 대인께서 우리를 구해주시는 일은 앞으로는 있어서는 안 될 것이야. 호운성의 거처를 정리하는 대로 대인의 말씀에 따라 흑풍해역으로 가자꾸나.”
몽운귀도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 * *
한 달 뒤, 겹겹이 하얀 구름이 껴있는 쪽빛 해역 위로 푸른 빛줄기가 날아들었다.
백옥비차에 선 한립은 금색 찬란한 빛을 번쩍이는 영수대 하나를 손에 들고 있었다.
“이건…….”
영수대를 풀자 금빛이 빠져나와 산만한 금색 딱정벌레의 모습으로 변했다. 금동의 본체였다.
복잡하고 기괴한 무늬가 가득한 영충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강렬한 기운을 내뿜었고 아직도 눈을 꼭 감고 잠들어 있었다.
영계에 있을 때는 잘 먹이고 기르다가 서로 잡아먹게 해 서금충을 키웠는데 금동은 대량의 법보와 보물만 먹고도 수행이 늘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연단로를 삼키고 나서부터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이렇게 될 줄이야…….”
한립은 기운이 왕성해진 서금충을 보고 안심했다.
그가 서금충의 기운을 가려줄 진법 깃발과 원반 등을 꺼내 진법을 펼치려는데 영충이 돌연 눈을 번쩍 떴다.
꺼어억!
힘찬 트림과 함께 굵직한 수정빛이 서금충의 입에서 빠져나와 수백 리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경로를 따라 바다가 갈라져 거대한 고랑이 생기고 해저의 산호와 해초들이 드러났다.
급격히 몸이 줄어 여자아이로 돌아간 금동은 아직도 졸음이 가득한 눈이었다.
“…….”
한립은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금동은 금선 후기의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아니, 먹고 한숨 자고 나서 금선 후기에 이르는 게 말이 되는 소린가?
이런 급격한 성장은 태을전에서 취한 품계가 높은 연단로가 함유한 강대한 원신 때문이 분명했다.
끊임없이 보물을 먹어치워 대는 금동은 금선은 물론 평범한 태을옥선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저씨, 먹을 거 없어요?”
금동이 눈을 깜빡거리며 꼬르륵거리는 배를 부여잡았다.
“있다마다!”
한립은 주술문자가 가득 새겨진 커다란 도끼를 꺼내 건넸다. 그는 금동이 자신의 키보다 더 커다란 도끼를 껴안고 뜯어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 * *
상아대륙은 북한선역 남쪽에 있었다.
촉룡도가 위치한 고운대륙이나 북방의 명한대륙과 달리 기후가 온난해서 수풀이 우거지고 습지가 많아 독충과 맹수는 몰라도 범인들이 살기에는 그리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비옥한 대륙에 범인들은 적어도 영맥과 진귀한 영초, 영수는 많아서 수사들의 종문이 비교적 많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 상아대륙 제1의 영맥이 흐른다는 점창산맥(点蒼山脈)에 창류궁이 있었다.
창류궁의 대궁주 낙청해는 촉룡도 제1도주 백리염, 복릉종 대장로 봉천도와 함께 선역의 권위자였다.
그 아래로 오극궁주라는 금선들이 버티고 있어 창류궁을 대신해 대륙 곳곳에 퍼진 창류오극궁을 관리했다.
그 밖에도 수행이 높은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문파 전체가 이름을 떨치기보다는 조용히 수련에 매진하는 분위기라 종문 바깥을 나다니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팟.
그날 점창산맥 인근에 얼굴 가득 누런 수염을 기른 거한이 나타났다. 고운대륙에서부터 쉬지 않고 날아온 한립이었다.
그가 점창산맥으로 진입하고 오래지 않아 남색 둔광이 산맥에서 날아올라 그를 맞이했다.
물고기 형태의 남색 배를 탄 창류궁 제자들이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각진 얼굴의 젊은 청년은 복색으로 보아 순찰을 담당하는 듯했다. 무리의 다른 수사들은 화신기인데 그만 연허기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선배님, 저는 외문집사 이앙이라 합니다. 선배님의 존함과 무슨 용무로 창류궁을 방문해 주셨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각진 얼굴 청년은 한립을 경계하면서도 공손히 예를 올리며 물었다.
한립은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방대한 기운을 터트렸다.
휘웅!
남색 배가 태풍을 만난 조각배처럼 뒤집혀 타고 있던 창류궁 제자들이 피를 토하면서 기절했다.
“습격이다!”
그때 기절하지 않고 버티던 각진 얼굴 청년이 고함을 치며 하늘 높이 남색빛을 쏘아 올렸다.
퍼펑!
남색빛이 폭죽처럼 터져 산맥 전체로 퍼져나갔다.
한립은 각진 얼굴 청년의 행동을 막지 않고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고 파공음 소리와 함께 산맥 곳곳에서 둔광들이 몰려들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창류궁 복색을 한 수사들은 이앙보다 수행이 높은 진선 중후기 수사들이었다.
“멈춰라!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침입한 것이냐!”
“낙청해에게 나오라 전하라.”
혈색 좋은 노인의 질책에 한립이 무표정하게 기운을 드러냈고 좌중은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푸른 기파에 맞아 나가떨어졌다.
“어느 수사께서 창류궁을 찾아주셨습니까? 제자들이 몰라보고 예의 없이 군 것에 대해서는 제가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온후한 목소리와 같이 맑은 바람이 불어와 푸른 기파를 대신 막아 주었다.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리며 멈춰 서자 그 앞쪽에 남색 도파 차림의 노도사가 나타났다.
가슴까지 수염을 기른 노인은 신선 같은 풍모가 느껴졌는데 피부에 이상하게도 짙은 푸른빛이 돌았다.
금선의 등장에도 한립은 입을 떼지 않았다.
“저는 처음 뵙는 분 같은데, 성함이 어찌 되십니까? 창류궁에는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푸른 얼굴 노도사가 기분 나빠하지 않고 예를 취했다.
“분명히 말했습니다. 낙청해 보고 직접 나오라고요.”
“이런, 아쉽게도 낙 궁주님께서는 오래전에 창류궁을 나선 이후로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급한 용무가 있다면 제게 말씀해 주시지요. 대궁주께서 돌아오시는 대로 전달을 하겠습니다.”
“명한선부는 진작 폐쇄되었고 낙 궁주가 흑풍성을 통해 흑풍해역을 떠나는 것을 본지도 꽤 되었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단 말을 믿으란 말입니까?”
한립은 조소하며 반문했다.
그 말에 푸른 노인의 얼굴이 굳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낙청해가 나오지 않겠다면 나는 상관없습니다. 그저 앞으로 오극궁주 두 명이나 새로 뽑으라 하세요.”
“그, 그게 무슨…….”
냉소하는 한립을 보면서 노도사의 눈이 커졌다.
“너희가 관여할 일이 아니니 모두 물러가거라.”
푸른 얼굴 노도사는 제자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지켜보자 헛기침을 해 모두를 쫓아냈다.
다들 궁금했지만 노도사의 명을 어길 수 없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수사, 저를 따라오시지요.”
노도사가 한립을 이끌고 점창산 쪽으로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의 둔광이 산맥 깊은 곳으로 향했다.
짙은 안개가 사라지고 시야가 맑아지면서 산맥 곳곳에 새워진 건물들과 금제가 보였다.
“이제까지 지나온 곳이 점창산맥의 외곽이라면 여기서부터가 중심지라 할 수 있습니다. 창류궁 종문이 다 이곳에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창류궁에 19개의 거대한 봉우리가 있고 점창산맥의 영맥이 모이는 십구성봉(十九星峯)이라 부른다던데 이곳인가 봅니다. 창류궁의 초대 대궁주가 강력한 신통을 발휘해 이 십구성봉을 근간으로 봉우리마다 비경을 만들어 두셨다던데 이것은 어느 봉우리의 비경입니까?”
“허허, 수사께서도 들어보셨군요. 이곳은 십구성봉 중 회광봉(懷光峰)입니다.”
푸른 얼굴 노도사는 한립이 내부사정을 잘 알자 놀라면서 답했다. 회광봉 옆으로 거대한 강이 굽이치면서 강렬한 물의 기운을 발산했다.
마치 진수의 일종 같기도 했다.
촉룡도에서 관련 경전도 읽었고 검은 수염 노인에게 추혼술을 사용해 창류궁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다.
창류궁 십구성봉을 휘감고 도는 19줄기의 강은 십구진하(十九眞河)로 점창산맥 특유의 물의 영맥이 이곳을 근간으로 하는 데다 각각의 강들이 특색이 있었다.
창류궁은 초대 궁주를 시작으로 이 강들을 기초로 하여 물 속성 공법과 신통을 갈고 닦아 지금의 세력을 이루었다.
반 시진을 더 날아가자 푸른 얼굴 노인이 멈추었다. 전방을 바라본 한립은 장관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아래로 급격히 꺼지는 지형에 주변에서 강줄기들이 몰려들어 거대한 폭포를 이루고 떨어지고 있었다.
반경 만 리에 이르는 거대한 구덩이는 그 바닥을 알 수 없게 어두웠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노도사는 곁에서 한립이 경치를 감상할 수 있게 잠시 시간을 주고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로 내려가 보니 천지가 쪽빛 물이었다. 19개의 거대한 폭포가 쏟아붓는데 이곳의 물은 물결도 치지 않아 남색 유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수면 위 허공에 남색 수정으로 만들어진 매끈한 성이 떠서 반짝이고 있었다.
거대한 수정을 통으로 조각한 듯한 성의 대문에는 ‘창류전’이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푸른 얼굴 노도사와 한립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그 앞에는 방대한 기운의 금선 7명이 모여 있었다. 그중에 낙청해도 있었다.
창류궁 금선들은 한립을 보는 눈빛이 곱지 못했다. 특히 머리에 남색 뿔이 하나 자라난 거한은 대놓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알고 보니 수사셨군요. 관란성에서 뵙고 여기서 다시 뵙습니다. 오시는 것을 몰라 미처 마중하지 못했으니 제가 실례를 했습니다.”
낙청해는 웃으면서 그를 맞이했으나 한립은 이곳에 모인 이들을 훑었다. 창류궁 금선은 죄다 모였다고 봐도 될 듯싶었다.
금선의 수만으로도 전성기 때의 촉룡도에 못지않았고 이 중에 금선 중기 수사만 해도 그를 안내한 푸른 얼굴의 노도사, 얼굴을 가린 남색 장포를 입은 여인, 마지막으로 뿔이 난 거한까지 셋이었다.
그중 거한의 수행은 금선 중기 최고봉에 이르러 금선 후기를 한 걸음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공수구와도 정면으로 대적했던 한립이 겨우 창류궁 금선 몇 명이 모였다고 움츠러들 리 없었다.
“낙 대궁주, 얼굴 한 번 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허허, 제가 폐관을 하느라 손님을 받지 않겠다고 해두어서 그런 불편을 겪으신 듯합니다. 다들 수사를 몰라보고 그런 것이니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지 마시지요.”
낙청해도 한립이 다수의 금선들을 앞두고도 개의치 않는 것을 보고 눈빛이 달라졌다.
“대전 안으로 들어가 말씀을 나누실까요?”
낙청해의 안내에 한립은 다른 금선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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