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754화 (1,511/2,000)
  • 1754화. 여독을 풀다

    *

    푸른 빛으로 두 원영을 끌어온 한립은 보라색 부적 두 장을 꺼내 각각의 머리에 붙였다.

    팟!

    보라색 부적에서 주술문자들이 빠져나와 두 원영을 단단히 속박했다.

    원영들을 거둔 그는 두 사람의 저물법기와 주변의 선기들 그리고 괴뢰까지 챙기고 나서야 진언보륜을 거두었다.

    짝짝짝짝!

    한립이 관란성 쪽을 힐끗 돌아보다 다시 출발하려는데 갑자기 손뼉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3대 지존법칙 답구만. 대단하네!”

    “누구십니까?”

    한립이 고개를 돌리니 허공에서 호언 도인과 운예가 나타났다.

    “호언 수사, 운예 수사, 역시 무사하셨군요.”

    그들을 보자 한립이 반갑게 다가갔다.

    “려 수사도 아직 팔팔해 보이니 우리도 안심일세.”

    호언 도인이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언제부터 계셨습니까?”

    “막 도착해서 수사가 위세를 떨치는 것을 다 보았네. 창류궁 오극궁주들은 북한선역에서도 유명한 인물들인데 수사 칼질 몇 번에 나가떨어지더군.”

    “과찬이십니다. 저들이 제 정체를 몰라 방심했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겁니다.”

    호언 도인의 칭찬에 한립이 겸손히 답했다.

    “우리가 먼저 떠나 자네 홀로 공수구와 묵우를 상대하게 한 건 정말 미안했네!”

    호언 도인이 한립을 빤히 보면서 사과했다. 운예도 미안한 눈빛으로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상황이 그리 만든 것이지요. 저도 무사하니 그 일은 다시 꺼낼 필요 없으십니다. 호언 수사, 늘 호쾌하시던 분이 오늘따라 왜 그러십니까?”

    “좋구나! 네 녀석이야말로 예전에 만났을 때 보다 아주 호방해졌어.”

    한립과 호언 도인이 마주 웃자 운예의 얼굴도 밝아졌다.

    “명한선부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으니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난 건 크게 축하해야 할 일이지 않은가? 운예는 술을 즐기지 않아 혼자 자작한다고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르네.”

    호언 도인은 소매를 펄럭여 허공에 탁자와 의자를 마련했다.

    “그래서 나랑 있으면 재미가 없다는 말이에요?”

    운예가 호언 도인을 흘기는데 봉목(鳳目)에 은은하게 사나운 기세가 어렸다.

    “다, 당연히 아니지. 나는 그저 다 같이 모여 술잔을 나누면 얼마나 즐겁겠냐는 뜻이었네, 하하…….”

    목을 움츠린 호언 도인이 마른 웃음으로 민망한 상황을 모면하려 했고 운예는 코웃음을 쳤다.

    “좋습니다. 오늘 다시 뭉친 것은 확실히 축하할 만한 일인 듯싶군요. 술 한잔으로 그간의 걱정과 고생을 떨치고 허심탄회하게 담소나 나누시지요.”

    그런 둘을 보며 한립이 먼저 자리에 앉았다.

    “그러세! 선역이 이후 혼란에 빠지든 창류궁이 북한선역을 독점하든 오늘은 그런 걱정을 지우고 마음껏 취해보세!”

    호언 도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려 수사를 보아 그냥 넘어가 주는 거예요. 앞으로 그런 소릴 하면…….”

    운예가 호언 도인에게 눈을 부릅뜬 다음 그 옆에 앉았다.

    “도와주어 고맙네!”

    그때 한립의 귓가에는 호언 도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한립도 말없이 눈을 깜빡여 알아들었다는 표시를 했다.

    즐거운 웃음을 터트리며 호언 도인이 상 위에 주홍색 술동이를 올려놓았다.

    고색창연한 무늬가 새겨진 술동이는 아주 오래된 물건 같았고 뚜껑을 열자 역시나 그윽하면서도 독특한 향기가 멀리 퍼졌다.

    “향이 좋습니다. 향기가 구름과 같이 주변을 떠도는 것이, 혹시 몽춘추(夢春秋)가 아닌지요?”

    한립도 주도(酒道)에 대해 호언 도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게 된 것들이 많았다.

    “하하, 맞네! 이 몽춘추 한 동이를 빚기 위해 운탄과(雲誕果)를 찾아 숙성시키기까지 몇 만 년이 걸렸지.”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호언 도인이 깨끗한 백옥 잔 3개를 꺼내 술을 따라주었다. 찰랑거리며 차오르는 붉은 술이 하얀 술잔과 대비를 이루며 보기에도 퍽 아름다웠다.

    “좋은 술입니다!”

    잔을 들어 맛을 본 한립의 안색도 밝아졌다.

    붉은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열기를 일으켜 몸을 편안하게 해주었고 정신까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술에 함유된 정순한 선령력이 창류궁 궁주들과 싸우느라 소모된 단전을 채워주었다.

    “그야 당연하지! 나 호언이 실력으로는 북한선역에서 최고라 하지 못해도 술 빚는 솜씨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이야.”

    “무슨 술 한 잔을 내주면서 그렇게 자기 자랑을 하고 그래요?”

    호언 도인이 오만하게 말하자 운예가 타박을 하면서도 술잔을 놓지 않았다.

    세 사람은 술잔을 나누며 그간의 있었던 일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알고 보니 호언 도인과 운예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명한선부 바깥으로 전송되어 흑풍해역에 이르렀다고 했다.

    두 사람은 상의한 끝에 낙백량풍을 건너지 않고 안전히 전송진을 이용해 떠나기로 결정해 한립처럼 창류궁 인물들 틈에 껴서 흑풍해역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하, 그랬군요. 전송 전에 익숙한 금선의 기운이 느껴진다 했는데 역시 두 분이었어요.”

    “그렇네. 자네가 창류궁 수사들 면전에서 전송진 한 자리를 빼앗는 것을 우리도 보았지.”

    “흑풍성에 도착하자마자 전송진이 발동하고 있어 어쩔 수 없이 그런 하책을 쓴 것입니다.”

    호언 도인의 놀림에 한립이 웃으며 해명했다.

    “려 수사, 우리가 떠난 후 공수구와의 전투는 어찌 되었나요?”

    운예가 옆에서 입을 열었고 호언 도인도 귀를 기울였다.

    “공수구는 죽었습니다.”

    술잔을 꺾어 남은 술을 털어 넣은 한립이 담담히 답했다. 한립이 멀쩡하게 나타난 것이 그러리라 예상은 했지만 직접 들으니 여전히 놀라웠다.

    “려 수사의 실력이 제 상상을 뛰어넘는군요! 태을경 수사까지 적수가 아니라니 대단하십니다. 제가 한잔 올리지요.”

    운예가 감탄하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촉룡도에서부터 자네가 비범한 녀석이란 것은 알아보았네만 수백 년도 못 되어 이 정도로 성장할 줄은 몰랐군. 자, 비우세!”

    호언 도인도 자신의 술잔을 한립에게 들어 올렸다.

    “공수구는 여럿이 힘을 합쳐 없앤 것이고 저는 약간의 힘을 보탰을 뿐입니다.”

    한립은 겸양을 떨며 자신의 잔을 가득 채워 비워냈다.

    “그 회선은 어찌 되었는가?”

    “공수구가 죽고 바로 떠났습니다. 저도 태을전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연 선부 바깥으로 전송이 되더군요. 아무래도 무언가를 작동해 정해진 시간 전에 모두를 내보낸 듯싶습니다.”

    호언 도인의 질문에 한립은 육우청에 관련된 이야기를 제외하고 답을 주었다.

    “그렇다면 그 회선은 오래전 명한선군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겠어. 선부 안의 금제에 그리 익숙하다니 말일세. 다행히 함부로 살생하는 부류는 아니라 모두가 그의 손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네.”

    “말이 회선이지 이야기로 전해 듣던 바와는 달라 보였습니다.”

    “천정의 감찰선사가 명한선부에서 죽은 일이 금방 알려질 걸세. 감찰사들은 전부 감찰 비술을 익히고 있으니 조심해야 할 것이야.”

    호언 도인이 술잔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충고했다.

    “충고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더욱 신경을 써서 은신하겠습니다.”

    “솔직히 자네의 실력에 지존법칙까지 지니고 있으니 경솔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별일 없을 걸세. 북한선역에서 못 살 것 같으면 뜨면 그만이고.”

    “북한선역을 떠나는 방법에 대해 아시는지요?”

    “나도 그저 백리도주가 한 이야기를 들었을 뿐인데, 북한선궁 안에 다른 선역으로 통하는 건곤문이 있다더군. 허나 한번 발동할 때마다 막대한 자원이 들어가고 궁주라 해도 함부로 사용할 수 없어 우리 같은 사람들은 더더욱 이용할 자격이 되지 않겠지.”

    “제가 듣기로는 다른 방법도 있다고 들었는데 들은 바가 있으십니까?”

    “그건 방법이랄 것도 없네. 선역 사이에 존재하는 만황구역을 가로지르는 것이니까 말이야. 내 충고를 들을지 모르겠네만, 만황을 건너는 것과 북한선궁에 침입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위험한 일인지는 알 수 없네. 태을경 수사라 해도 안전히 지날 수 있다는 보장이 없거든. 들리는 이야기에는 윤회전에서 만황구역을 지나는 비교적 안전한 노선을 개척했다는데, 그게 어디인지는 나도 모르네.”

    호언 도인이 운예와 시선을 마주치고 진지하게 답했다. 그 말을 듣고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삼이 그에게 한 말들은 대부분 사실 같았다.

    “만황이 위험한 것은 그곳에 대해 잘 몰라서예요. 많은 수사들이 지나려 시도했다가 돌아오지 못한 경우도 많았지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 만황구역으로는 들어가지 않는 것이 나을 겁니다.”

    운예도 입을 열었다.

    “두 분의 말씀은 꼭 기억해 두겠습니다. 그런데 두 분은 앞으로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신분이 노출되어 천정의 표적이 될지도 모르는데요.”

    “허허, 우리도 당연히 잘 숨어 다녀야겠지. 좌우간 우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네. 백리도주가 이미 태을단을 복용해 태을경에 이를 날이 머지않았으니 말이야. 그때가 되면 감찰선사 따위를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백리도주께서 하루빨리 태을경에 이르기만을 바라겠습니다.”

    “백리도주는 태을단을 연화시키기 위해 폐관 중이라 지금은 만나기 어려우나, 자네에게 빚을 진 사실은 알고 있네. 이후 연이 닿으면 함께 술이나 마시며 이야기를 나눠보세.”

    “하하, 알겠습니다.”

    세 사람은 북한선역의 정세를 시작으로 수련하며 얻은 깨달음 등을 나누면서 술동이를 비웠다.

    호언 도인이 지닌 새로운 술동이가 탁자에 올랐을 때는 이미 해가 서쪽으로 지고 있었다.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이제 헤어져야 할 때였다.

    “세상에 끝나지 않는 연회는 없으니, 우리도 이만 가봐야겠네. 려 수사, 한마디만 하지. 몸조심하게!”

    호언 도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를 거두었고 운예도 한립을 향해 인사를 했다.

    “두 분도 몸조심하십시오.”

    한립의 인사를 받으면서 호언 도인은 붉은빛으로 운예를 휘감아 석양이 지는 하늘로 날아갔다.

    “술 한 잔으로 근심을 달래고, 지는 해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는 구나…….”

    한립은 뒷짐을 지고 서서 해풍에 장포 자락을 휘날리며 석양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한참 후에야 벽옥비차를 불러낸 그는 다른 방향으로 날아올랐다.

    * * *

    고운대륙, 천운성.

    한해의 끝은 수행하는 수사에게는 언급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으나 속세에서는 1년 중 가장 중요한 때였다.

    천운성에는 거위 털처럼 하얀 눈이 떨어지고 있었고, 수사들이 머무는 일부 저택과 객잔을 제외하고는 길가와 지붕에 눈이 소복하게 쌓였으며 언제부터인지 창가에 복숭아 가지를 꽂고 문틀에는 화려한 색의 글귀를 붙여 두었다.

    해가 떨어지고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는 때라 천운성 동쪽 거리에는 상가들이 붉은 등을 높이 걸기 시작했고 민가의 밥 짓는 연기가 뽀얗게 올라왔다.

    붉은 피풍의를 걸친 고운 얼굴의 소녀가 붉은 열매를 꼬치에 꿰어 설탕물을 묻힌 탕후루를 들고 천천히 길을 거닐고 있었다.

    피풍의에 달린 모자를 깊게 눌러써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소녀의 표정이 어딘가 적막해 보였다.

    “오라버니도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려 장로님은 언제 돌아오시는 걸까…….”

    꼬치에 꿰인 산사 나무 열매를 하나 물어 우물거리면서 소녀가 중얼거렸다. 그때 문득 고개를 들자 키가 큰 청의 사내가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멍하니 서 있던 소녀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서둘러 입안의 열매를 삼키고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행인들 때문에 보이지 않던 어린 여자아이가 사내의 옷자락을 잡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려 장……. 려 대인…….”

    소녀가 사내 앞에서 모자를 벗고 예를 올렸다.

    사내는 황란대륙에서 서둘러 돌아온 한립이었고 피풍의를 입은 소녀는 이제껏 천운성에 남아 있던 몽천천이었다.

    “오랜만이구나. 성 동문으로 들어와 보니 네 기운이 느껴져 와본 참이다.”

    한립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금동이 몽천천을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아저씨, 누구예요? 수행이 저렇게 낮아서야 자질도 별로 안 좋겠어요.”

    “네 사매다.”

    그 말에 한립이 미간을 좁히고 혼내듯 말했다. 몽천천은 부끄러운 얼굴로 작게 인사를 했다.

    “사저, 앞으로 많은 가르침 부탁드릴게요.”

    “자, 사매에게 주는 것이야.”

    금동은 사저란 소리에 얼굴이 활짝 펴지며 어디서 꺼냈는지 단약 한 병을 몽천천에게 주었다.

    “일단 관월원으로 돌아가자. 분부할 것이 있다.”

    한립은 범인들이 그들을 곁눈질하는 모습을 보고 말했다.

    “네!”

    몽천천이 힘차게 답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