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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752화 (1,509/2,000)

1752화. 안배

*

대청 중앙에 방석을 깔고 앉아 있던 낙풍은 누군가 나타난 것에 번쩍 눈을 뜨고 일어났다.

“류석 대인!”

“오늘 찾아온 것은 말해둘 것이 있어서이다.”

공손히 예를 올리는 낙풍을 보고 한립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난 한동안 오몽도를 떠나 있어야 하니 섬의 모든 사무는 앞으로도 네가 잘 살펴주어야겠다.”

“얼마나 오래 말입니까?”

“확실히 말해 줄 수 없으나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북한선역을 떠나 언제쯤 돌아올지 알 수 없어 한립은 솔직히 답했다.

“흑풍도와 청우도의 쟁투가 날로 극심해져 언제 오몽도까지 여파가 미칠지 알 수 없는데, 대인께서 안 계시면 저희들의 힘만으로 대항하기는 무리입니다. 게다가 다른 산수들도 시간이 오래 지나면 딴마음을 품게 될 테고요. 신앙의 힘이 부족해서 그러시는 거라면 저희가 더욱 열성을 다해 참배를…….”

빠르게 중얼거리는 낙풍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그런 것이 아니니 걱정 말거라. 흑풍도와 청우도의 쟁투는 이전처럼 격화되지 않을 것이니 흑풍해역은 한동안 평안할 것이다. 내가 떠난다 해도 화신이 남아 충분히 산수들을 다스리고 오몽도를 비호해 줄 것이다.”

“정말입니까?”

이미 넋이 나간 낙풍은 흑풍도와 청우도 간의 쟁투를 묻는 것인지 지기화신에 대해 묻는 것인지 불분명하게 물었다.

“물론, 그러니 안심하거라. 오몽도는 내게도 중요한 곳이니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저희 낙 가가 평생토록 충심을 다해 모실 것이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대인!”

한립의 말에 낙풍은 안심이 되면서 충심이 가득 차올랐다.

“수도 자원이 들어 있으니 가져다 쓰거라.”

낙풍은 한립이 내준 저물법기를 공손히 받아들고 의식으로 내부를 살피다 뻣뻣하게 굳었다.

각종 재료며, 법보, 단약 등이 낙 가 전체가 수백 년을 모아도 모을 수 없을 만큼 쌓여 있어서였다.

상상도 못할 부를 손에 쥔 낙풍은 잠시 얼떨떨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네게 관리하라 주는 것이지 함부로 낭비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것으로 오몽도는 물론 주변 섬의 수사들도 전력으로 양성해야 할 것이야. 결국에는 스스로 실력을 쌓아야 진정으로 흑풍해역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알아듣겠느냐?”

한립은 진지하게 충고했다.

“예, 알아들었습니다! 결코 대인을 실망시키는 일이 없도록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낙풍이 격동해 외쳤다.

이 정도 수도 자원이면 단기간에 고계 수사들을 육성할 수 있었고, 합체기 최고봉에 이른 몇몇 장로들은 대승기를 노려볼 수 있을 것이다.

대승기 장로들이 늘고 지기화신이 버티고 있으면 낙풍은 앞으로도 오몽도의 영광을 유지할 자신이 있었다.

허나 흑풍도도 쉽게 마련할 수 없는 재물을 류석 대인이 어찌 구한 것인지는 낙풍도 의문이었다.

“오몽도는 네게 맡기마.”

“류석 선배님, 맡겨만 주십시오!”

한립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이미 사라졌지만 낙풍은 허공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한립은 이미 지기화신이 폐관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도착해 보니 해상에 거대한 소용돌이가 무서운 파도 소리를 내면서 이전보다 더욱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기쁜 얼굴로 해저로 내려간 한립은 투명한 남색 빛의 실에 누에고치처럼 싸여 있는 지기화신을 발견했다.

머리 위로는 가느다란 남색 실이 강렬한 물의 법칙의 힘을 발산하고 있었다.

“잘하고 있구나.”

“오몽도와 다른 섬들이 안정적으로 발전하고 있어 섬사람들이 열렬히 참배한 덕에 신앙의 힘이 부단히 들어오고 있습니다.”

고치 안에서 지기화신이 웅웅 답했다.

“그래, 이 속도면 머지않아 법칙의 힘을 회복할 수 있겠어.”

지기화신이 중수진륜 제련을 위해 물의 법칙의 힘을 크게 소모한 것을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한립은 남색 깃발과 동색의 비검 세 개 그리고 저물반지를 꺼내 놓았다. 비검은 하나는 크고 두 개는 작은 한 벌로 된 보물이었다.

“두 개의 물 속성 선기는 하나는 방어에 적합하고 하나는 공격에 적합해 지니고 다니면 쓸 만할 것이다. 저물반지 안에는 필요로 할 만한 물건들과 중수를 보관할 법기를 담아 두었으니 나를 대신해 이곳을 잘 지키고 있거라.”

한립은 물건들을 앞으로 밀어놓으며 분부했다.

오몽도는 선계에 온 이후 처음으로 만든 보금자리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여차여차해서 이곳의 ‘조신’이 되고 섬의 백성들이 마음 깊이 그를 믿고 숭배해 신앙의 힘까지 바쳤는데 힘닿는 데까지 보호를 해줄 요량이었다.

지기화신이 물건을 거두는 것을 보고 해수면 위로 치솟은 한립은 멀리 오몽도를 보며 탄식했다.

언제 다시 이곳에 돌아올 수 있을지 그도 예측할 수 없었다.

* * *

며칠 뒤, 흑풍성 바깥에 둔광이 가시고 기골이 장대하고 수염이 가득 자란 거한이 나타났다.

바로 용모를 바꾼 한립이었다.

그는 활짝 열린 성문을 올려다보다 다른 사람들과 섞여 안으로 들어갔다.

지난번 낙백량풍을 지나 흑풍해역을 떠나려다 고생을 했기에 수행은 늘었어도 안전하게 전송진을 이용해 떠나려고 온 참이었다.

그는 입성 비용을 내고 빠르게 흑풍성으로 진입해 도왕부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멈칫하고 날아올랐다.

성 중앙의 광장에 내려선 그는 전송탑에서 하얀빛이 강렬한 영력 파동을 내는 것을 지켜보았다. 전송진이 발동되기 전에 공간 파동을 발산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그는 바로 옆을 지나던 원영기 중년 사내를 붙들었다.

“수사, 묻고 싶은 것이 있네. 흑풍도주가 전송진을 천 년 간 봉쇄했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어째서 개방되어 있는 것인가?”

느닷없이 붙들려 화를 내려던 수사는 한립이 수행의 고하를 파악할 수 없는 강자라는 것을 알고 활짝 웃으며 포권을 했다.

“선배님, 흑풍성에 막 도착하셨나 봅니다. 어제 흑풍도 도주가 갑자기 전송진을 다시 개방하겠다 선포하고 오늘 정오에 바로 발동할 예정이라 하더군요.”

“오, 어째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인지도 아는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고맙네.”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고 중년 수사는 빠르게 그를 지나쳤다.

고개를 들어 중천에 뜬 태양을 본 그는 번득 사라져 허상처럼 전송탑 대문 앞에 섰다. 굳게 닫힌 대문 앞에는 흑풍도 수사 둘이 지키고 있었다.

스윽.

한립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형태가 없는 것처럼 대문과 여러 금제들을 통과해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한립은 대청 안에 모인 8, 90명의 사람들을 훑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낙청해 일행과 그를 수행하는 흑풍도 도주 육균이 보여서였다.

낙청해가 자신보다 먼저 명한선부를 떠나 한발 앞서 전송진을 이용하려 한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도 그들을 따라 떠나면 그만이었다.

한립은 소리 없이 수사들 틈에 섞여 손끝으로 어느 백의 청년의 등을 짚었다. 동공이 풀린 청년은 자연스럽게 남색 부적을 한립에게 넘기고 자신은 옆으로 물러났다.

모든 행동이 아무 흔적도 없이 벌어져 낙청해와 극소수의 수사들을 제외하고는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몰랐다.

고개를 돌려 한립을 위아래로 훑던 낙청해가 미묘하게 표정이 달라졌다. 한립은 태연하게 서서 그가 자신을 관찰하는 것을 보았다.

그도 낙청해 등의 눈을 피해 전송진을 이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가 아는 낙청해의 성격이라면 자신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않고서는 함부로 손을 쓰지 않을 거라 여겨서 과감히 행동한 것이었다.

과연 낙청해는 금방 눈길을 거두고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무리에서 낮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 또 다른 시선이 그를 지켜보다 사라졌는데 누군지 알아내지 못했다.

‘설마 호언 도인과 운예 수사도 이 중에 섞여 있는 것일까?’

금선급 수사의 실력이라 여긴 한립은 암암리에 다른 이들을 훑었다.

“모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시간이 되었으니 다들 전송진에 오르시지요.”

검은 장포를 입은 노인이 정오가 되자마자 앞으로 나서며 안내했다.

다들 남색 부적을 들고 전송진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백의 청년만 멍하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육균도 슬쩍 한립 쪽을 쳐다보았지만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흑포 노인이 하얀 진법 원반을 꺼내 빠르게 수결을 맺었다.

웅!

진법 원반에서 화려한 빛이 뿜어져 나간 뒤 전송진 전체가 공명하듯 더 밝은 빛을 발해 모두를 휘감았다.

눈앞에서 수많은 고계 수사들이 사라진 것을 보고 육균이 긴장을 풀었다. 바로 그 순간 곁의 백의 청년이 눈이 맑아져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 이게 무슨……. 내가 왜 여기에…….”

“데리고 나가서 전송에 대가로 지불한 선원석을 돌려주게.”

육균이 명을 내리자 흑풍도 수사 두 명이 백의 청년의 양팔을 끼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

“도주님, 드디어 저 역병 같은 화근 덩어리들이 떠났습니다!”

흑포 노인이 육균에게 다가가 탄식했다. 그러나 육균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아직 모든 일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선부에 들어간 세력이 어디 창류궁 하나였는가? 그런데 낙청해와 그 일행들만 돌아온 것이 무슨 의미겠나? 소진한, 복릉종, 촉룡도 무리는 증발이라도 한 듯 사라졌네.”

“그들은 다른 경로로 흑풍해역을 떠난 것 아니겠습니까? 다들 능력자들인데 흑풍해역을 떠날 방법이 전송진만 있는 것도 아닐 테고요.”

“나도 그들이 전부 낙백량풍을 통과해 떠난 것이었으면 좋겠구만.”

노인이 굳은 얼굴로 하는 말에 육균은 쓴웃음을 흘렸다.

“그보다 도주님, 우청 아가씨에 대해서는 물어보셨습니까?”

“물어보았지만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네. 정말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입을 다무는 것인지는 모르겠네만.”

딸아이의 이야기에 육균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아직 아가씨의 원신정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어디 갇혀 계시거나 돌아오는 길이 지체되신 걸 테니 너무 심려하지 마시지요.”

흑포 노인이 그를 위로했다. 하지만 자식을 걱정하는 육균의 마음이 그리 쉽게 가벼워질 리 없었다.

“흠?”

육균은 무심코 전송진 옆을 돌아보다 하얀 옥간을 발견했다. 옥간을 끌어와 의식을 불어넣자 짧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귀하의 여식 우청은 명한선부에서 기연을 얻어 무탈하게 지내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네.”

그걸 본 육균의 표정이 밝아지며 옥간을 소중히 품에 넣어 두었다. 그는 노인의 의아한 눈빛을 받으며 전송진 쪽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 * *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귀가 멍해진 한립은 불편한 느낌이 사라지고 또 다른 하얀 대청에 도착해 있었다.

관란성의 전송 대전 안이었다.

그는 곧장 바깥으로 나가 거리의 사람들 틈에 섞여 종적을 감추었다.

머지않은 누각 위에서 낙청해를 비롯한 창류궁 수사들이 한립이 사라진 방향을 보고 있었다.

“궁주님, 저자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백면서생이 시선을 거두고 물었다.

“아직 모를 일이네. 허나 금선인 것이 분명하고 무상맹 가면으로 용모를 변화한 듯하구만. 가몽아, 네가 보기에는 어떠하냐?”

낙청해는 몇 마디 답하다 곁의 남가몽을 쳐다보았다. 남가몽도 난처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을 따름이었다.

“무상맹 가면을 썼다면 윤회전 인물일까요?”

검은 수염을 기른 노인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물었다.

“그럴 수도 있네. 허나 촉룡도, 복릉종 혹은 다른 세력의 인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 명한선역에 들어간 수사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창류궁이 마련한 전송기회를 저런 미꾸라지 한 마리가 끼어들어 이용하다니 제가 정체를 조사해 볼까요?”

“우리가 명한선부에 들어갔던 목적은 이루었네.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자를 함부로 건드려 괜한 일을 만들기보다는 어서 창류궁으로 돌아가 북한선역에 불어 닥칠 폭풍에 대비하는 것이 옳을 것이야.”

검은 수염 노인의 말에 낙청해가 고개를 저었다. 그 말에 검은 수염 노인은 실망한 눈빛이 스쳤으나 그저 알겠다고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행과 같이 누각을 빠져나가려던 남가몽이 돌연 얼굴에 기이한 남색빛이 오르고 얼음 알갱이가 피부를 덮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녀린 몸을 바르르 떨더니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 모습에 낙청해가 안색이 변해 남색빛으로 그녀를 받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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