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750화 (1,507/2,000)

1750화. 비휴(豼貅)

*

얼굴이 밝아진 한립은 옥함을 손바닥 위에 놓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거의 반나절을 눈을 떼지 못하다가 겨우 옥함을 닫아놓고 부적을 붙여 마무리했다.

이제 공수구의 법보를 확인할 차례였는데, 태을경에 이르러 금선급의 법보들은 처분을 했는지 후천선기 두 개가 그가 지닌 전부였다.

그중 여러 개의 종을 달아 쳐서 연주하는 타악기인 녹슨 편종(編鐘)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한립이 꾹 눌러보아도 더이상 부서지지는 않았고 아무리 편종을 울리려 해도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또 쉼 없이 진동하는 다른 선기는 이상하게 생긴 검은 대도로 표면의 뇌전구름 문양에서 황금빛을 뿜으며 뇌전의 힘을 번득거렸다.

한립이 체내의 뇌붕의 힘과 청죽봉운검의 벽사신뢰를 주입해보자 떨림이 극심해졌다.

분명히 두 기운을 배척하는 반응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 해 도인을 불러냈다.

“한 수사.”

해 도인은 바닥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아직 정리를 마치지 않은 전리품들을 보고도 담담했다.

“이전의 전투로 얻은 물건들이 상당합니다. 이 대도가 그중 하나인데 뇌전을 다루는데 능한 해 수사께서 보시기에 어떻게 사용하면 되는 물건인지 아시겠습니까?”

한립의 질문에 대도를 훑은 해 도인의 표정이 미미하게 달라졌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제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흑토선역(黑土仙域)에서 명성이 자자한 ‘참정(斬霆)’이라는 이름의 병기입니다.”

“흑토선역……. 기억을 꽤 회복하셨나 봅니다.”

“북한선역에 온 후로 종종 기억의 파편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최근에는 더 자주 옛일들이 떠오르더군요.”

“알겠습니다. 기왕 수사께서 대도를 알아보셨으니 인연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참정도는 수사께 드리겠습니다.”

한립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하지 않고 품삯을 받을 수는 없지요. 받을 수 없습니다.”

해 도인이 천천히 참정도에서 눈길을 떼고 차분히 거절했다.

“영계에서부터 이곳 선계까지 해 수사가 제게 주신 도움이 적지 않습니다. 맹약으로 묶여 있다고는 하나 당연히 저도 보답을 해야지요. 게다가 앞으로 제가 도움을 청할 때 참정도를 지니고 더 큰 위력을 발휘해 주신다면 제게도 좋은 일이 아닙니까?”

한립은 해 도인의 성품을 알았기에 의외라 여기지 않고 덧붙였다.

“알겠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해 도인은 대도를 건네받고 두 손으로 칼자루를 쥐었다.

파치칙!

검은 대도의 뇌운 문양이 요란한 금빛을 방출해 겹겹이 뇌전의 파랑을 만들어냈다. 한립이 시도할 때보다 더욱 위력적인 모습이었다.

“오늘 주신 선물에 대해서는 이후 꼭 보답하겠습니다.”

대도를 발동해본 해 도인이 그것을 거두며 말했다.

‘흑토선역……. 설마 해 도인의 이전 주인이 흑토선역 수사였을까?’

한립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 별 말하지 않았지만 내심 생각이 많아졌다.

곧 다른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한 한립은 백옥 비휴에 시선이 닿았다. 속세의 사람들도 백옥으로 만든 작은 동물들을 이용해 집안을 꾸미거나 몸에 지니고 다니기를 좋아해 그리 특별한 물건은 아니었다.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겠느냐, 아니면 내가 강제로 그리 만들어야겠느냐?”

눈동자 깊은 곳에서 남색 빛을 일렁인 한립은 웃으며 물었다. 그의 말에도 백옥 비휴는 여전히 엎드린 채 꼼짝하지 않았다.

“속세에 관을 봐야 눈물을 떨군다는 말이 있다. 네가 딱 그렇구나.”

파앗!

한립의 목소리가 차가워지자 백옥 비휴가 갑자기 보광을 뿜으면서 집채만 하게 커져 하얀 짐승으로 변했다.

“금선 주제에 감히…….”

백옥 비휴는 커다란 입을 벌려 사람 말을 하다 그대로 굳었다. 목 주변 허공에 어느새 청죽봉운검 세 자루가 칼끝을 겨누고 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검의 도신에 금빛 뇌전이 번득이는 것을 본 백옥 비휴는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이고, 선도를 걷는 분이 험악하게 왜 이러실까……. 다짜고짜 칼을 꺼내 들어서 좋을 게 무엇입니까? 우리 앉아서 차분히 대화로 푸시지요.”

기세가 수그러진 백옥 비휴가 급속도로 몸집을 줄여 이웃집 똥강아지처럼 한립 옆에 엎어졌다.

청죽봉운검은 여전히 그림자처럼 비휴를 따라가 그 주변을 맴돌았다.

“공수구가 기르던 영수겠지? 기운이 약하지 않은데 나와 공수구와 싸울 때 왜 그를 돕지 않은 것이냐?”

한립은 무표정하게 물었다.

“하! 만황 진령인 이 몸을 누가 기르고 말고 한단 말입니까? 공수구가 나보다 조금 더 오래 살고, 아주 조금 더 강하다고 강제로 데리고 다녔을 뿐입니다!”

백옥 비휴가 벌컥 화를 냈다.

“내 질문에 똑바로 답하거라. 어째서 나서지 않았지?”

“이유가 뭐겠습니까……. 딱 봐도 못 이길 것 같으니까 그랬지요. 한 명은 시간법칙에 다른 한 명은 윤회법칙을 다루고 내력을 알 수 없는 노괴들까지 뒤에 버티고 있는 마당에 공수구 편을 들다가 같이 죽기라도 해야 합니까?”

한립의 표정이 싸늘해지자 백옥 비휴가 골이나 대답했다.

“자신을 돕지 않는 너를 공수구가 그냥 두었다고?”

“헤헤, 공수구야 그냥 두고 싶지 않았겠죠. 허나 이 몸이 맹약을 맺지 않겠다고 버텨와서 전투 중에 틈을 내 나를 죽이지 않는 한 어찌할 방도가 없었을 겁니다.”

한립의 의심에 백옥 비휴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하하, 맹약을 맺지 않았다? 비술 금제로 그런 몸에 갇혀 있으면서?”

“그건…….”

“내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어서 말해 보거라.”

“크흠, 알겠습니다. 이 몸은 천부적으로 재물을 모으는 재주를 타고나서 그간 공수구의 재산을 적잖이 불려주었습니다. 그러니 쉽게 죽이고 싶겠습니까?”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너를 죽여 진령의 피만 얻어도 나는 쓸 곳이 많은 사람이다.”

한립은 호의적이지 않은 눈빛으로 비휴를 응시했다.

“어휴, 인족들은 하나같이 왜 이리 의심이 많은지! 이 몸은 정말 재물운이 좋아서 숨겨진 천지간의 보물들을 잘 찾아낸단 말입니다. 게다가 수행이 늘수록 그런 재능도 더 개발되고요.”

백옥 비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세히 설명했다.

“그 말이 사실인지는 앞으로 확인해 보면 알 터. 지금 네가 결정하거라. 나와 진령 맹약을 맺겠느냐 아니면 내게 진령의 피를 바치겠느냐?”

“무슨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공수구보다는 그나마 당신이 나은 것 같기는 한데…….”

한립의 말에 백옥 비휴가 자신 주위를 맴도는 비검들과 이미 사방을 감싸고 있는 시간영역을 보고 씁쓸한 얼굴을 했다.

그걸 본 한립의 입꼬리가 휘었다.

백옥 비휴는 맹약을 맺고, 뜬금없는 말을 했다.

“주인님, 이제 우리가 한배를 탄 셈이라 드리는 말씀인데 저건 없애는 것이 좋겠습니다.”

비휴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그곳엔 금빛 찬란한 원반이 있었다.

“저게 무엇인지 아느냐?”

“공수구가 천정의 다른 감찰사, 순찰사들과 연락하는 수단입니다. 천정이 공수구에게 일이 생긴 것을 알면 가장 먼저 찾을 물건이고요.”

그 말에 한립은 원반을 끌어와 자세히 살폈다.

“강제로 없애면 천정이 바로 알 수 있게 돼 있는데 내게 없애라고 한 의도가 무엇이냐?”

“그냥 마구 때려 부수면 당연히 그리되겠지요. 하지만 제게 맡겨주시면 후환이 없을 겁니다! 맹약을 맺어 당신이 죽으면 이 몸도 좋은 꼴을 보지 못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백옥 비휴의 설득에 한립은 반신반의하며 원반을 넘겨주었다. 그러자 백옥 비휴는 입을 벌려 투각된 원반을 그대로 삼켜버렸다.

“제가 태어날 때부터 항문이 없습니다! 이 뱃속에 들어간 물건은 한번 들어가면 나올 길이 없다는 말이지요. 뱃속에서 외부 세계와 철저히 차단될 테니 아무도 이걸 추적하지는 못할 겁니다.”

“네 뱃속이야말로 살인멸구하고 그 흔적을 숨길 최적의 장소로구나. 그게 네가 지닌 최고의 실력이냐?”

한립도 약간 신기해서 농담조로 말했다.

“그렇다고 아무거나 다 삼키게 할 생각은 마십시오! 이 몸은 법보나 영물이아니면 안 먹습니다!”

백옥 비휴가 실언을 했다는 생각에 서둘러 소리쳤다. 그걸 본 한립이 미소를 지으며 공수구의 다른 물건을 살폈다.

이후에는 백옥 비휴가 공수구의 물건에 대해 아는 바가 많아 빠르게 정리할 수 있었다.

가장 놀라운 점은 시간법칙 재료도 두 가지나 찾았다는 것이었다.

금색 점이 가득 박힌 동그란 과실과 회(回)자 형태의 문양이 새겨진 부서진 비수가 그것이었다.

* * *

전리품 정리만 하는데 벌써 황혼이 드리우고 밤이 되어가고 있었다. 기지개를 켜는 한립의 얼굴에는 흡족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잠시 후 그가 손을 젓자 금빛이 데구루루 굴러 나와 여덟아홉 살 가량의 여자아이로 변해 바닥에 주저앉았다.

한립이 서둘러 다가가 살피니 아직 잠에서 덜 깬 듯했다.

“아저씨, 자는데 왜 깨우고 그래요…….”

“그만 자고 일어나 뭐 좀 먹거라.”

“먹으라고요?”

금동 앞에 열댓 개의 강렬한 영력 파동이 일고 그녀가 먹다 만 하얀 돌기둥을 포함한 법보들이 나타났다.

“와, 이렇게나 많이요!”

눈을 번득인 금동은 잠이 싹 달아난 얼굴이었다. 잔영을 남기며 법보들 앞에 달려간 아이는 행복한 얼굴을 하다가 멈칫했다.

“왜 그러느냐?”

“저 몰래 혼자 보물 정리 끝낸 거죠! 이건 아저씨가 고르고 남은 거 맞죠?”

“너무 깊게 자서 깨우기가 그랬다.”

금동의 불만에 한립이 코끝을 긁적였다.

금동은 뺨을 부풀리고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고, 옆에 엎드려 그걸 보고 있던 백옥비휴가 이건 또 뭔가 하며 눈을 굴렸다.

“이 팔찌 안에 든 것은 전부 네 것이다.”

한립이 저물탁 하나를 더 꺼내 금동에게 주었다. 금동이 싸웠던 제천소의 저물법기였다.

그 말에도 뾰로통한 기색을 지우지 않고 저물탁을 받아든 금동은 내용물을 확인하고 희색이 만연해졌다.

“역시 아저씨가 최고예요!”

금동은 재빨리 팔찌를 손목에 차고 다른 법보들을 챙겼다. 그 모습에 한립은 말없이 웃음 지었다.

기분이 좋아진 금동이 그제야 멋쩍게 엎드려 있는 백옥 비휴를 발견하고 통통 뛰어가 머리를 탁! 쳤다.

“이건 어느 집 개에요? 먹어도 돼요?”

그녀의 말에 깜짝 놀란 백옥 비휴가 분노해 소리쳤다.

“이 계집애가 뭐라는 거야! 이 몸은 만황 진령이시다!”

“본 선녀 앞에서 계집애라고?”

눈빛이 순간 냉랭해진 금동이 음산하게 송곳니를 드러냈다. 백옥비휴는 이유도 모른 채 한기가 들어 몸을 떨었다.

“이 몸이 그 버릇을 고쳐주마!”

“아하하, 웃기는 녀석이네…….”

금동의 기세에 밀린 백옥 비휴가 캉! 짖으면서 다시 몸집을 집채만 하게 부풀렸고 금동이 키득거리면서 전신에서 금빛을 발산했다.

“…….”

입꼬리를 씰룩이던 한립은 그저 조용히 몸을 돌려 자리를 피했다.

* * *

반각이 채 지나지 않아 삼색 섬이 고요해졌다.

“가자, 오몽도로 간다.”

그는 섬에 남은 흔적을 깔끔하게 지우고 공수구의 벽옥비차를 불러냈다.

“좋죠, 출발해요!”

금동이 사뿐하게 비차에 올라타는데 그 아래 죽상을 한 백옥 비휴가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흰둥아, 안 가니?”

금동이 종아리로 옆구리를 옥죄자 낑! 소리를 내며 비휴가 종종 걸음으로 걸어갔다.

* * *

며칠 뒤 어느 섬 위에 녹색 잔영을 남기고 벽옥비차와 한립이 도착했다.

태을경 수사인 공수구가 타고 다니던 비행 선기답게 청연주보다 몇 배는 속도가 빨랐다. 다만 아직 비차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해 멈추는 데 조금 서툴렀다.

마차 위에 드러누운 금동은 아랫배를 드러내고 쿨쿨 자고 있었고 비휴는 힘없이 구석에 엎드려 있었다.

금동을 본 한립이 눈을 빛냈다.

며칠 동안 대량의 보물은 먹은 금동은 막대한 힘을 소화하느라 잠이 많아졌다. 그것은 곧 일정 경지를 뛰어넘을 징조였다.

현재 금동의 실력은 한립과 일대일로 붙어도 시간법칙을 사용하지 않는 한 쉽게 제압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 있었다. 다시 수행이 높아지면 그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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