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9화. 보석함
*
골도와 벼루 그리고 문진을 집어넣은 한립은 손을 저어 정방형의 보석함을 떠오르게 했다.
사면에 기관이 설치된 자물쇠가 달려있었고 그 위에 각각 은색 부적이 붙은 보석함이었다.
청룡곤목부(靑龍困木符), 백호삭금부(白虎爍金符), 주명거화부(朱明擧火符)와 진무거수부(眞武拒水符), 무엇하나 만만히 볼 부적이 아니었다.
“사상부진(四象符陣)으로 봉인된 보석함이라! 안에 대체 무엇이 들어 있기에 봉천도가 이리 귀히 여겼을까?”
한립은 중얼거리면서 전신에서 금빛을 발산하며 사상부진을 파훼하기 시작했다.
사상부진은 청룡, 백호, 주작, 현무 사방신의 힘이 서로 보완하는 원리를 이용해 각각을 따로따로 풀려 해서는 봉인을 풀 수 없고, 반드시 동시에 네 가지 힘을 발휘해야 보석함이 망가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래서 가장 좋은 파훼법은 수행이 비슷한 수사 네 명이 동시에 힘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한립은 그렇게 하지 않고 간단히 진언보륜을 불러내 네 장의 부적들이 연쇄 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늦추고 하나씩 풀어나가는 편법을 썼다.
순조롭게 네 장의 부적을 떼어내자 자물쇠들이 철컥! 열려 떨어져 나갔다. 한립이 두 손으로 뚜껑을 열었지만 어떤 보물의 기운이나 영력 파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허리를 숙인 한립은 그 안에서 담황색의 고서와 손바닥 크기의 검은 영패 그리고 가지런히 놓인 검은 못들을 찾아냈다.
먼저 고서를 들어보니 표면이 매끄러운 게 모종의 요수 가죽으로 만들어진 듯했다.
표지에는 ‘환진보전(幻辰寶典)’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고, 그걸 본 한립이 어디서 본 듯한 느낌에 기억을 되뇌었다.
‘아, 이건!’
무상맹에서 시간공법을 찾을 때 누군가 언급했던 복릉종에 있다는 시간법칙에 관한 공법이었다.
시간공법을 익히면서 진언화륜경 말고 다른 공법이 있으면 서로 비교하면서 그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이제 그걸 실행할 수 있었다.
이채를 띤 한립은 서둘러 수결을 맺어 진언보륜을 소환했다.
고리의 거대 눈알이 유유히 회전하면서 담황색 고서에 광선을 쏘았지만, 고서는 금빛으로 잠깐 반짝거렸을 뿐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걸 본 한립은 약간 실망한 기색으로 진언보륜을 체내에 돌려놓았다.
“촉룡도의 비석과 달리 시간공법을 담고 있을 뿐 시간법칙의 힘은 함유하고 있지 않은 모양이군…….”
강대한 의식으로 한식경 만에 환진보전을 일독한 그는 감탄을 터트렸다.
시간법칙의 힘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공법은 수련법이나 내용이 진언화륜경과 현저히 차이가 났다.
특히 중간에 언급된 ‘환진사경(幻辰沙境)’이라는 것을 익히면 어느 구역의 시간의 힘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했다.
봉천도와 제천소는 시간공법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익히지 못해 전투에서 사용하지 못한 것이 확실했다.
당장 공법에 코를 박고 연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몇백 년 혹은 몇천 년이 걸릴지 모를 폐관 수련을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에 시작할 수는 없었다.
마지못해 <환진보전>을 챙겨 넣은 그는 심호흡을 하고 검은 영패를 살폈다.
매끄럽고 광택이 흐르는 표면과 달리 그 안은 칠흑처럼 새까매서 먹을 얼려 놓은 것 같았다.
영패 표면에 볼록하게 적힌 ‘건천복릉(乾天伏凌)’이라는 네 글자는 봉천도의 대장로 신분을 의미하고 있었다.
한립은 미리 진법을 펼쳐 놓고 선령력을 주입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지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검은 영패는 반응이 없었다.
이제 보물함에 남은 것은 검은 못뿐이었다.
그 수를 세어보니 딱 81개였고 겨우 손가락 길이의 못은 가까이 들고 보니 각종 문양과 기괴한 짐승의 모습 그리고 기이한 주술문자까지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못들 주위로 먹을 뿌려놓은 듯 검은 안개가 감도는 것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못을 전부 빼낸 한립은 보석함 바닥 검은 철판에 깊이가 다른 여러 선들이 교차하는 것을 발견했다.
철판을 분리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놀랍게도 높은 수준의 진법이었고 왼쪽 아래 귀퉁이에 ‘건천복릉, 진수팔방’이라는 복릉종을 지키는 진법이라는 뜻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설마 종문을 지키는 거대 진법?”
진법과 영패 그리고 81개의 검은 못을 차례로 훑은 한립이 중얼거렸다. 진법이 새겨진 철판을 뒤집어 움푹 들어간 곳을 확인하니 과연 검은 영패와 윤곽이 비슷했다.
차칵.
영패를 끼워 넣자 빈틈없이 딱 맞았다.
어떻게 해도 반응이 없던 영패에서 드디어 검은 먹 같은 기운이 흘러나와 진법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용처럼 꿈틀거리는 먹빛이 지난 자리에 진법이 은은한 금빛을 발했다.
한립은 서둘러 진법판과 영패를 함께 연화한 뒤 숲 바닥에 내려놓고 검은 못 하나를 진법의 금빛 속에 던져 넣었다.
진법 기운에 닿자 못은 강력한 힘에 끌려가 진법 어딘가에 박혀 들어갔다. 동시에 작은 섬 동쪽 어딘가에서 쿠쿵! 하는 진동이 들려왔다.
고개를 든 한립은 검은 빛기둥이 땅을 뚫고 나와 하늘로 솟구치는 것을 보았다.
“역시!”
희색을 드러낸 그가 연달아 다른 못들을 진법 위에 두었고 작은 섬에는 부단히 검은 빛기둥이 치솟았다.
우웅!
마지막 빛기둥이 고공으로 향하고 검은 안개가 퍼지면서 서로 융합되어 칠흑 같은 보호막이 작은 섬을 둘러쌌다.
이어서 섬 곳곳에 나타난 검은 빛기둥이 점점 투명해지면서 보호막도 보이지 않게 되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한립은 강력한 진법이 작은 섬을 보호하고 있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그는 번득 섬 밖으로 날아올라 보호막을 지날 때 영력 파동을 스치는 느낌을 받았지만 스스로 연화한 진법이라 어떤 방해도 받지 않았다.
바깥에서 보면 어떤 진법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명청영목으로 보면 보호막이 분명히 드러났다.
단숨에 섬과 거리를 벌린 그는 손바닥을 펼쳐 일장을 날렸다.
쿵!
커다란 손바닥 허상이 나타나 천지원기를 압도하며 삼색 섬에 드리웠다.
그때 눈에 보이지 않던 진법 장벽이 나타나 손바닥 허상에 대항했고 81개의 검은 빛기둥에서 묵룡이 회오리치며 올라와 진법에 힘을 실었다.
콰콰쾅…….
엄청난 굉음이 울리고 보호막이 움푹 파였지만 허물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걸 본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력을 다하지 않고 평범한 금선 중기 수사의 수행을 흉내 낸 일장이긴 했으나 작은 문파의 보호 진법을 무너트리기에는 충분했다.
‘건천복릉’ 진법의 방어능력은 북한선궁이 백리염을 상대하려고 촉룡도 내에 펼친 진법에 약간 못 미치는 정도인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진법판은 누구나 눈이 휘둥그레질 보물이었다.
보통 종문을 지키는 거대 진법은 영기가 충만한 영산 곳곳에 특수 제련한 깃발과 원반 같은 법보를 심어 위력을 발휘했는데 건천복릉진법은 어디든 갖고 다니며 쉽게 펼칠 수 있어 훨씬 실용적이었다.
‘아마 복릉종의 진정한 보호 진법의 축소판쯤 되겠지.’
앞으로 동부를 개척하고 이 보물을 사용하면 쉽게 보호막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 * *
섬으로 돌아간 한립은 진법판을 회수해 다시 보석함 안에 넣어두고 봉천도의 다른 물건들을 정리했다.
소진한에 비해 봉천도는 단약이나 약방은 가진 게 거의 없었지만 제련 재료에 관해서만은 풍성하게 지니고 있었다.
후천선기를 제련하는데 중요한 재료로 쓰이는 천하성사(天河星沙) 반 근, 손바닥만 한 나채하정(羅彩霞晶)십여 개, 음심유수(陰沈幽水) 8병은 어느 선역의 경매회에 올라와도 엄청난 경쟁을 불러일으킬 물건들이었다.
그 외에 봉천도는 아기 팔뚝 굵기의 은락선등(銀絡仙藤)도 두 줄기나 감춰두고 있었다.
은락선등은 북한선역에서 이름 높은 최상급 괴뢰의 재료로 선원석을 주고 구하고 싶어도 구하기 어려운 보물이었다.
경전에 적힌 바로는 이걸로 괴뢰를 제련하면 육체가 진선에 비할 정도로 강해지고 체내에 선인처럼 경맥이 자리 잡아 선령력을 운용해 선가술법을 쓸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시선이 이번에는 비취색 대나무 지팡이로 향했다.
손가락 굵기의 기다란 대나무 지팡이는 9마디로 나뉘어 있었고 하얀 광택이 번들거렸다. 이미 뿌리를 잃은 대나무 줄기가 생기가 왕성한 것이 나무 속성 법칙을 지닌 물건이었다.
그가 시간법칙을 지기화신은 물의 법칙을 수련했다지만 그것 외에 다른 법칙을 접촉하기 쉽지 않았고 자연히 법칙의 힘을 함유한 물건들은 매우 진귀했다.
특히 나무 속성 법칙의 힘을 수련하는 수사에게는 가격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이었다.
시간법칙의 실을 더 응결하려면 앞으로 시간법칙을 지닌 물건이 대량으로 필요했는데 이걸로 다른 수사와 거래할 수 있을지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바닥에 남은 물건들은 그가 따로 살필 만한 것이 없었다.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에게는 별 소용이 없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소진한이 지닌 것보다 더 많은 수량의 선원석이 쌓여 있는 것만 보았어도 진선 수사들은 기함했을 것이다.
봉천도의 물건까지 분류를 마친 한립은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공수구의 하얀 저물탁에서 물건을 쏟아냈다.
파아앗.
봉천도와 소진한이 지닌 선원석을 모두 합쳐도 이르지 못할 선원석의 작은 산이 숲속에 나타났다.
가장 높이 있던 선원석이 촤르륵! 미끄러져 내리는 소리가 듣기 좋게 들려왔다. 다른 보물들은 다른 쪽에 따로 쌓여 있었다.
그는 자신의 키보다 높게 쌓인 선원석 산을 두고 입을 벌렸다.
“태을경 수사가 지니고 다니는 선원석 양이 이렇게 많다니…….”
그는 선원석을 모두 챙겨 넣었다.
거령을 시작으로 소진한, 봉천도, 공수구의 저물탁을 얻어 거의 2백만 개에 가까운 선원석을 확보한 그는 웬만한 거대 세력의 재력과 비교해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된 느낌이라 자연히 마음이 들뜨고 움직임이 경쾌해졌다. 하지만 한립은 금방 냉정을 되찾았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고 선원석을 쓸 곳은 허다했다.
태비의 눈알 같은 시간법칙 재료를 찾는 데만 해도 얼마가 들지 알 수 없었고, 진귀한 단약 재료를 모으는 것도 가산을 탕진하기 딱 좋았다.
아마 태을경에 이르기 위해 수련하고 준비하는 데도 선원석 2백만 개는 모자랄 가능성이 컸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른 한립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공수구의 다른 물건들을 향해 걸어갔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무상맹의 다양한 가면들이 천여 개나 진열 되어 있는 나무 진열장이었다.
“이건…….”
각각의 동물을 상징하는 교(蛟), 맥(貉), 용(龍), 효(梟), 호(狐) 등 다양한 글자가 적힌 가면들이었다.
남색에서부터 붉은색까지 수많은 가면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가면을 남기고 죽어 나간 수사들이 연상되어 입맛이 썼다.
“앞으로 가면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겠구나.”
한립은 가볍게 탄식을 하며 어두운 기운을 떨치고 소매를 털어 진열장을 거두었다.
공수구의 소장품들은 너무 많아서 단약부터 모아 분류를 했다. 수량도 적지 않고 품질도 좋은데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한립도 천단사였기에 단약의 기운이나 특성을 살펴 대략 용도를 짐작하고 수행 증진에 도움이 되는 류와 부상 치유용을 나누었다.
그중 두 개의 약병에는 금박을 입한 얇은 종이가 붙어 있었고, 그 위에 옥청단(玉淸丹)과 을원단(乙苑丹)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아쉽게도 각 병에는 딱 하나씩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화앗!
병에 붙은 금박종이의 재질이 특이하다고 느껴 자세히 살피려 손을 뻗자, 종이에서 금색 주술문자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옥양수(玉陽髓), 풍령자(風靈子), 구엽수유(九葉茱蔂)…….”
떠오른 글자를 하나씩 읽어가면서 한립은 기록된 내용이 어느 단약의 약방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공수구가 지닌 약재를 살핀 결과 대부분이 있었고 부족한 것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약방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한립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마지막으로 검은 옥함을 들어 금색 부적을 뜯고 열어보았다.
옥함 안에서 진한 약향이 흘러나왔고 금색 줄무늬 3개가 들어간 백옥 같은 단약이 뿌연 안개에 휩싸여 있는 것을 보았다.
“도문!”
금색 무늬의 정체를 알아본 한립은 깜짝 놀랐다. 하얀 단약은 공기 법칙을 함유한 3품 도단이었다.
도단은 무척 귀해서 연단을 완성하기 전에 반드시 단겁을 이겨내야 했다. 연단 성공률이 극히 낮은 만큼 3품 도단은 대단한 보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