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747화 (1,504/2,000)

1747화. 당신

*

고개를 저은 한립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묵우를 응시했다.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제가 무생도인이라 불러드려야 할까요? 아니면 회선 묵우라 불러야 할까요?”

“노부는 무생도인이 아니라 회선 묵우다.”

미소를 머금은 묵우가 당당히 답했다.

“제게 말씀해 주신 무생도인 및 명한선군에 대한 이야기 중 진실은 얼마나 되는 것입니까?”

“월화궁 안에서는 네가 노부를 데리고 나가주기를 바랐기에 신분을 속였을 뿐 다른 이야기에는 거짓이 없다! 무생도인이 바로 명한선군이고, 게다가 그녀는 지금 이곳에 있지.”

묵우는 한립의 물음에 대답하다 갑자기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쳐다보았다. 한립과 교삼은 그 말에 움찔해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무생, 여기까지 왔는데 얼굴을 보이지 않을 참이오?”

묵우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허공이 흔들리고 나타난 것은 놀랍게도 육우청이었다. 그녀는 이전과 기질이 완전히 달라져 서릿발 같은 기세를 드러낸 한 자루의 검 같았다.

“우리가 드디어 다시 만나게 되었소!”

묵우는 그윽하게 육우청을 보며 한달음에 달려가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뭐 하는 거예요, 보는 눈도 있는데…….”

그녀는 여전히 냉랭한 얼굴이었지만 뺨에 붉은 기가 돌며 부끄러운 듯 중얼거렸다.

“내 잘못으로 우리가 그 오랜 세월을 떨어져 있었는데 그게 다 무슨 상관이오. 내 절대 이 손을 다시 놓지 않으리다!”

묵우의 말에 굳건한 의지가 느껴졌다. 이에 육우청이 손을 빼려던 것을 그만두고 묵우의 손을 마주 잡았다.

한립과 교삼은 어색하게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한립은 남궁완을 떠올렸고 회한의 감정이 어렸다.

“아이고!”

누군가의 탄성에 한립이 회상에서 빠져나왔다.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리니 육우청을 어루만지고 있던 묵우가 누군가에게 귀를 붙잡혀 앓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섬섬옥수의 주인은 육우청이었다.

그걸 지켜보는 교삼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내가 그만 건들라면 그만 건들라고요! 이 귀는 괜히 달려있나 보죠?”

“정말 아팠다오! 내가 잘못했소……. 앞으로는 당신 말을 잘 들으면 될 것 아니오.”

“항상 잘못했다, 앞으로는 안 그러겠다 말은 잘하죠! 당신이 정말 잘했으면 내가 왜 이러고 있겠어요?”

육우청이 묵우의 귀를 더 세게 잡아당기자 묵우의 머리가 따라 올라갔다.

“내 그래서 잘못했다 하지 않소……. 지켜보는 이들도 있는데…….”

묵우가 고개를 비틀면서 바보같이 웃어 보였고, 육우청이 힐끗 한립과 교삼을 보고 손을 풀었다.

묵우는 빨갛게 변한 귀를 부여잡으며 여전히 육우청을 보고 실실 웃고 있었다.

“창류궁 궁주나 다른 수사들은 왜 보내준 거예요? 오늘 일을 천정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 알 텐데요.”

“그런 중요하지 않은 인물들이야 가든 말든 상관없어 보내주었소. 그들을 죽인다고 해도 우리가 부활한 사실을 숨길 수는 없을 테고 말이오.”

육우청이 미간을 좁히며 묻자 묵우가 몸을 틀어 한립과 교삼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 나와 무생이 부활할 수 있었던 데에는 자네들의 공이 크네. 우리가 은혜를 모르는 부류는 아니니 무엇이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 보게.”

육우청이 그 말을 듣고 묵우를 흘긴 다음 한립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한 수사, 자네가 이곳까지 나를 호위해 주었기에 무사히 기억의 봉인을 풀 수 있었네. 그 은혜를 갚지 않는다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으니 편하게 원하는 바를 이야기해보게.”

“한 수사? 아까 다른 녀석들은 려비우라고 부르던데……. 으휴, 네 녀석은 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육우청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묵우가 뭔 소리냐는 듯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든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그냥 려비우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눈을 반짝인 한립이 침착하게 답했다.

“음흉한 녀석!”

묵우가 불만스럽게 말했고 교삼도 눈빛이 흔들렸으나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육 수사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영역을 익히기는 했지만 아직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으니 괜찮으시다면 두 분 선배님께서 조언을 해주시기를 청하겠습니다.”

한립은 자신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지 않고 바로 원하는 바를 밝혔다. 그 말에 묵우와 육우청이 시선을 마주쳤다.

“수사마다 수련하는 법칙이 다르니 그 활용법도 당연히 다르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수련 심득을 참고할 수 있다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이건 그간 내가 영역을 수련하며 깨달은 바이니 가져가 살펴보게.”

묵우는 회색 옥간을 그에게 날려 보냈다.

“감사합니다.”

한립은 옥간을 받아 의식으로 살피고 미소를 머금었다.

“교삼 수사도 이야기를 해보게.”

이번에는 묵우가 바로 교삼에게 말했다. 침음하던 교삼도 오래지 않아 입을 열었다.

“저는 명을 받아 행했을 뿐이니 보답을 바라는 것은 당치않은 일입니다. 다만 묵우진인께서 견문이 넓고 모르는 것이 없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이에 한가지 가르침을 청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지? 말해 보거라.”

“조금 전 제 영역이 려 수사의 시간영역과 공명해 위력이 급증한 것을 보셨을 겁니다. 묵우진인께서는 그 이유를 아시는지요?”

“선계에서 금선의 경지에 이른 이들은 기본적으로 법칙 한 가지쯤은 장악하고 있기 마련이지. 법칙을 장악하지 못한 산수들은 삼쇠의 겁을 이겨내기 어려우니 말이야! 원칙적으로 법칙에 깨달음이 깊어질수록 영역의 위력도 커지지만, 일계(一界)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법칙의 힘은 심오해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네. 그러니 부합하는 법칙을 결합해 운용하면 자연히 위력도 증가하게 되지.”

교삼의 질문에 묵우가 미소를 지으며 답해주었다.

“법칙이 결합한단 말씀입니까?”

한립이 듣기에도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그래, 흔치 않은 일이고 모든 법칙들이 서로 결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야. 예를 들어 음양이 조화를 이룬다든지 아니면 바람과 불이 서로를 북돋는 것과 같다.”

묵우 도인의 대답은 청산유수와 같이 막힘이 없었다.

“그랬군요. 제 법칙의 힘이 교삼 수사의 법칙의 힘과 결합해서 그런 위력을 낸 것이군요.”

“법칙의 도는 심오해서 나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런 법칙결합이 이전에도 벌어진 적이 있었으니 교삼 수사는 크게 개의치 말게. 허허, 아마 자네가 장악한 법칙이 3대 지존법칙 중 하나인 윤회법칙이겠지. 두 사람이 똑같이 지존법칙을 수련했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고.”

묵우의 설명에 교삼은 개운해 보이지 않았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한립은 교삼을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그녀가 익힌 법칙이 윤회법칙이라 당시 그렇게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청은 모두 들어주었네. 우린 막 깨어나 처리할 일들이 산재해 있으니 더는 시간을 내주기 어렵겠군. 잠시 후, 술법을 이용해 명한선부 바깥으로 내보내 줄 것이니 기다리게.”

육우청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한립과 교삼이 대답하기 전에 푸른빛이 그녀와 묵우를 품고 먼 곳으로 사라졌다.

한립은 그들이 멀어지자 내심 안도했다.

‘늙은 도사 잔혼의 말을 처음부터 믿은 것은 아니지만 그는 난생 처음 보는 회선이었고, 흑풍도 도주의 딸인 줄로만 알았던 육우청이 사실 무생도인의 환생이자 진정한 명한선군이었다니.’

가장 놀라운 일은 명한선군과 묵우라는 태을회선이 아주 오래전부터 연인 사이였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한립은 생각을 정리하고 교삼을 살폈다. 그녀 역시 가면을 써서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생각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더는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무너진 궁전 쪽으로 의식을 퍼트렸다.

얼굴이 밝아진 한립은 푸른 빛줄기들을 보내 금색 지붕 조각과 금색 괴뢰 두 구의 잔해를 불러왔다.

특수한 기운을 머금은 금색 지붕 재료는 원합오극산과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단겁을 막을 수 있는 지붕의 재료였으니 부서지기는 했어도 그 재료로서의 가치는 아직 남아 있을 것이다. 금색 괴뢰도 평소 괴뢰술에 흥미가 많았기에 일부러 챙겨두었다.

교삼은 그가 무엇을 하든 쳐다보지도 다른 전리품을 챙기지도 않았다.

한립이 그것들을 챙기고 다른 곳을 찾아보려는데 금빛의 굵직한 빛기둥이 아무 징조도 없이 하늘에서 떨어져 그와 교삼을 감쌌다.

빛기둥 안에서 주술문자들이 흐르며 두 개의 진법을 형성했다.

웅! 웅!

금빛 진법이 날카롭게 진동하면서 광채를 만발했다.

* * *

명한선부의 잡초가 무성한 정원 안에 3층 누각 하나가 온전하게 유지되어 있었다.

그곳 3층 난간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검처럼 쭉 뻗은 눈썹에 별처럼 빛나는 눈빛을 지닌 미중년의 품에 그림같이 고운 여인이 안겨 있었다.

“무생, 예전보다 체구가 퍽 줄었소. 이렇게 쏙 안기다니 말이오.”

중년 도사가 기분 좋게 웃음 지었다. 그들은 회선 묵우와 명한선군 육운이었다.

“……이 껍데기가 예전의 나보다 더 좋은가 보죠?”

눈썹을 끌어올린 육운의 물음에 묵우는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에이, 겉모습이 뭐가 중요하오. 내면에 당신이 있다는 것이 가장 중하지. 나는 당신뿐이오!”

눈을 번득인 묵우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됐네요……. 얄미워서 한 대 때리고 싶다가도 헛수고다 싶어서 참고 있거든요.”

육운이 입을 비죽였다.

“맞소! 내 이 두꺼운 가죽을 때려봐야 당신 손만 아프고, 그럼 또 내 가슴이 얼마나 쓰리겠소.”

묵우는 위기를 넘긴 것에 싱글벙글했다.

“내가 밉지는 않고요?”

그의 품에서 한 발짝 벗어난 육운이 검은 머리카락을 넘기며 물었다.

“당신한테 갇혀 처음 몇 백 년 동안은 이해가 가지 않았지. 천 년간은 조금 원망스럽기도 했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움만 커지고 미움은 옅어지더군.”

“윤회전이 명한선부를 직접 공격할 줄은 몰랐어요. 후에 상황이 통제할 수 없게 되고 천정만 어부지리를 얻었죠.”

“다 지나간 일을 지금 와서 말해 무엇 하겠소……. 우리가 다시 북한선역으로 돌아왔으니 천정에게 받은 만큼 갚아주면 될 일이오.”

묵우가 육운의 어깨를 끌어와 안아주려는데 그녀가 짝! 소리나게 그의 등을 내리쳤다.

“앞으로 남들이 있을 때 이러는 건 금지에요!”

* * *

쪽빛 바다 위.

허공에 빛들이 몰려들어 네모난 빛의 문을 만들고 강렬한 공간 파동을 뿜어냈다.

휙!

그 안에서 휘황찬란한 빛기둥이 빠져나와 두 사람을 옮겨놓고 사라졌다.

이종족 복장을 한 백발 노파와 우람한 체구에 사내는 용모를 바꾼 교삼과 한립이었다.

“교삼 수사, 이곳이 어딘 줄 아시겠습니까?”

몸을 바로 세운 한립이 망망대해를 훑었다.

“흑풍해역 내이기는 하지만 홍월도와는 멀리 떨어진 곳 같네요.”

교삼이 푸른 지도를 펼쳐 살피며 대답했다.

“저도 잠시 지도를 봐도 될까요?”

“값나가는 물건도 아니니 그냥 드릴게요. 이번에 흑풍해역을 떠나면 오랫동안 다시 돌아오지 못할 테니까요.”

한립의 말에 교삼이 푸른 지도를 던져주었다.

“고맙습니다.”

“한 수사께서는 이제 어찌하실 계획이신가요?”

“흑풍해역에서 개인적으로 처리할 일이 있어 그걸 마치면 저도 떠날 생각입니다.”

“제 충고를 들으실지 모르겠지만, 흑풍해역을 떠나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겁니다. 북한선역 자체를 떠나는 것이 좋을 거예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북한선궁 궁주인 소진한과 감찰선사 공수구가 죽었으니 천정이 이 소식을 알게 된다면 북한선역이 뒤집히겠지요. 명한선부에 들어갔던 이들은 모두 천정의 조사를 받게 될 텐데, 저는 진작 수배령이 떨어진 상태이니 종적을 들켜 좋을 게 없을 테니까요.”

한립은 잠시 생각하고 답했다.

격전 끝에 진언보륜의 힘으로 공수구를 죽였다지만 너무 많은 행운이 따라 주어 가능했던 일이었다.

전력을 다하면 확실히 태을경 초기의 옥선의 위력을 낼 수 있었지만 선령력이 부족해 짧은 시간 밖에는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회선 묵우가 상대의 힘을 빼놓고 시간영역이 느닷없이 교삼의 영역과 공명하지 않았다면 절대 그렇게 쉽게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