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5화. 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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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룡도 금선 도주는 구양규산 없이 홀로 싸우느라 창을 든 괴뢰에게 밀려 얼마 지나지 않아 패할 것처럼 보였다.
“호언 수사와 운예 수사는 동문을 도우러 가시지요. 여기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한립이 골짜기 안을 훑으며 하는 말에 호언 도인과 운예가 깜짝 놀랐다.
“보셨다시피 인원이 많고 적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 누군가 위험을 무릅써야 할 듯싶군요.”
“좋네! 수사가 꾀가 많은 것은 노부도 알고 있으니 믿어봄세! 기회가 된다면 꼭 직접 빚은 몽춘추(夢春秋)를 함께 마시자고.”
“약속하신 겁니다.”
망설이던 호언 도인이 그 말에 밝게 웃음 지었고, 한립도 미소로 화답했다.
“그런데 태을단이 어떤 쓸모가 있기에 낙청해 같은 수사들이 안달을 낸 것입니까? 그저 수행을 높이거나 치료를 위한 것은 아닌 듯싶은데요.”
호언 도인이 몸을 돌리는 것을 보고 한립이 문득 전음을 보냈다.
“금선 수사들이 오매불망하는 단약이 겨우 수행을 높이기 위한 것일 리 없지.”
“이름이 태을인 것을 보면 태을경과 연관이 있겠지요?”
“그렇네! 태을단의 가장 중요한 효능은 금선 최고봉의 수사가 다섯 번째 쇠락인 오쇠(五衰)에 저항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지.”
“그렇군요.”
호언 도인의 설명에 한립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금선들에게 태을단은 진선들이 금혼단을 원하는 만큼 귀할 것이 분명했다.
구양규산의 시신을 수습한 호언 도인이 운예와 함께 동문을 공격 중인 괴뢰를 향해 날아갔다.
한립은 청죽봉운검을 쥔 손에 힘을 실어 교삼과 눈짓하고는 막 협공하려 했다.
쿠르르…….
그때 금색 의자에서 시작된 진동이 폐허가 된 궁전을 울렸다.
부서지다 만 벽들이 우르르 무너지는데 의자 쪽에는 어떤 영향도 가지 않았다.
전신에서 농염한 회색빛을 발산한 시체가 갑자기 몸을 똑바로 세우니 주변의 금색 보호막이 그걸 느낀 것처럼 손바닥 크기의 주술문자로 변해 연결되었다.
그 금빛도 제대로 막지 못해 틈을 따라 회색빛이 삐져나오고 있었다.
“흐하하……. 우하하!”
후련한 웃음소리가 보호막 안에서 들려왔다. 그리 크지 않은 소리가 머릿속을 파고들어 혼백을 찌르는 것 같았다.
놀란 수사들이 공법을 운용해 혼백을 보호하면서 물러났고 한립도 눈을 반짝이고 그들을 따라 뒤로 날아갔다.
공수구도 그들을 쫓지 않고 금색 보호막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설앵이 그 옆에 나타나 공수구의 시선을 따라 금색 보호막을 살피고 있었다.
연기처럼 회색 기운이 아홉 돌기둥을 감쌌다.
콰직!
돌기둥이 부서지고 그것을 근원으로 하던 금색 보호막도 갈라졌다.
금빛이 비처럼 내리는 와중에 누군가 허공답보를 하면서 진짜 신선처럼 날아올랐다.
바로 의자에 시체처럼 앉아 있던 중년 도사였다.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그는 이제 평범한 수사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중년 도사의 두 눈이 회색으로 가득 차 있어 흰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공수구가 중년인의 용모를 보고 퍼뜩 표정이 달라졌다.
“공수 세백, 왜 그러십니까?”
옆에서 설앵이 물어왔다.
“여기에 회선이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구나. 여기까지 와본 보람이 있어!”
공수구는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중년 도사를 노려보면서 표정이 신중해졌다. 그 말에 낙청해와 호언 도인 등의 표정도 달라졌다.
죽은 듯 쓰러져 있던 낙청해는 위험한 독충이라도 만난 것처럼 남색 물빛으로 창류궁 수사들을 전부 휘감아 멀리 떨어졌다.
촉룡도 백발 금선도 뒤쪽으로 날아올라 중년 도사와 거리를 두었고 호언 도인과 운예도 마찬가지였다.
한립은 그들을 따라 움직이면서 전음을 보냈다.
“호언 수사, 대체 회선이 무엇입니까?”
“북한선역의 원래 이름은 명한선역이었네. 오래전 멸세대전(滅世大戰)으로 선역이 둘로 나뉘면서 지금의 상태가 되었지만! 그 멸세대전의 원인이 바로 회선들의 침략이었네.
회선들은 선인들의 적이라고 볼 수 있는 존재로 출처는 모르겠네만 그들이 선인을 잡아먹는다고 하더군. 전쟁이 벌어졌을 때 명한선역의 모든 종문 세력들이 힘을 합쳐서 회선들을 겨우 격퇴했는데 그 과정에서 명한선역 거의 절반의 종문이 멸문을 당하거나 대가 끊겼다고 하더군. 그 후로 아무도 회선에 대한 소식을 들은 자가 없네.”
“그런 어마어마한 일을 저는 어찌 처음 듣는 것입니까?”
“워낙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천정에서 그 사실을 숨기려 들어 북한선역에서도 촉룡도, 창류궁 같은 최상위 세력들만이 관련 기록을 보유하고 있네.”
호언 도인의 빠른 설명에 한립은 잔혼이 말했던 이야기를 대입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암홍색 둔광 속 교삼이 중년 도사 옆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묵우진인, 선계에 다시 강림하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그 광경에 낙청해 등이 깜짝 놀랐다. 윤회전 수사가 회선과 교분이 있을 줄 몰랐기 때문이다.
중년 도사를 보는 한립의 눈빛에도 당황스러움이 어렸다.
노도사 잔혼이 윤회전과 회선이 작당했다고 알려주어 교삼과 회선이 연관이 있는 것은 놀랍지 않았지만,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묵우는 회선들의 침략을 이끈 태을회선의 이름이었다.
노도사는 묵우가 명한선군이 제자로 들인 여인이라 했는데 눈앞의 존재는 분명 사내의 몸이었다.
“당신이 묵우라고? 줄곧 이곳에 숨어 있었단 말인가!”
공수구가 이름을 듣고 움찔했다.
“오,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다 있고 신기한 일일세. 그래, 너는 누구더냐.”
중년 도사는 공수구를 상대하지 않고 곁에 선 교삼에게 물었다.
“윤회전의 교삼이라고 합니다.”
붉은빛을 반짝인 그녀는 빨간 치마를 입은 젊은 모습으로 돌아갔다. 붉은 용머리 가면을 쓰고 있어 용모는 드러나지 않았다.
“교삼? 이번에 네게 신세를 졌구나. 말해 보거라, 누굴 죽이고 싶으냐?”
묵우의 말에 교삼은 대답 없이 손으로 공수구를 가리키고 옆으로 물러났다. 공수구를 보고 씩 웃은 묵우가 한립을 발견하고 이채를 띠었다.
“녀석아, 잠깐 안 본 사이에 꼴이 말이 아니구나? 허허, 정말 지존법칙을 모욕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내 일단 신세를 갚고 너와 수다를 떨어야겠다.”
묵우가 의복이 엉망이 된 한립을 보고 웃으며 말하자 수사들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한립을 쳐다보았다.
“이놈아, 저 회선과 무슨 관계인 것이냐?”
호언 도인이 곧장 전음으로 물었다.
“말하자면 깁니다. 어느 궁전에서 우연히 만나 데리고 나왔는데 아직 적인지 벗인지는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한립도 쓴웃음을 흘리며 전음으로 해명했다.
“정말 전설 속의 월화전(月華殿)이라도 다녀왔단 말인가?”
“이제 돌아보니 그런 것도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 묵우의 시선이 공수구에게로 돌아가 있었다.
“나 묵우는 은혜를 입으면 필히 갚는 성격이라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죽여 드리면 좋겠습니까?”
묵우는 정말 어쩔 수 없다는 어투였다.
“흥! 방금 혼백이 돌아와 경지도 안정되지 않아 시간을 끌려는 수작은 아니고요?”
코웃음을 친 공수구가 수결을 맺어 10개의 백무 인영들을 만들어냈다. 이전보다 몇 배는 더 큰 인영들이 묵우를 향해 튀어 나갔다.
“아이고, 들켰네! 감찰선사들은 다 당신처럼 똑똑한 겁니까?”
묵우는 당황한 듯 말했지만 손바닥에서는 벌써 회색빛을 뿜고 있었다.
펑!
회색빛이 터져 무수히 많은 빛의 실로 변해 쉬쉬쉬쉭 날아갔다.
빼곡하게 생겨난 회색 실들이 넓은 공간을 차지해 순식간에 하얀 인영들을 관통했고, 수많은 구멍이 뚫린 인영들은 안개로 흩어졌다.
손을 쓰자마자 그들을 공격했던 백무 인영보다 훨씬 강한 기영(氣影)들을 해치운 묵우의 실력에 한립 등이 놀란 눈빛을 보였다.
회색 실들은 멈추지 않고 공수구를 향해 뻗어 나갔다.
공수구는 당황하지도 않고 입에서 하얀 고대 거울을 뿜어 수많은 주술문자들을 만들어냈다.
주술문자들이 하얀 반딧불이로 변해 그를 세밀히 둘러쌌다.
이때 묵우가 수결을 바꾸었고, 회색 실들이 한데 뭉쳐져 사발 굵기의 화살로 변해 반딧불이 보호막을 찔러 들어갔다.
찌직!
막 형성된 반딧불이 보호막이 찢어지면서 그 안의 공수구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미 화살이 관통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눈, 코, 입, 귀에서 피를 흘리며 수직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태을옥선이 회선 묵우를 상대로 일격을 막지 못하고 패한 꼴이었다. 그러나 안심하던 수사들의 눈앞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추락하던 공수구의 시체가 분해되면서 하얀 안개로 변해 흩어지고 묵우 뒤에서 진짜 공수구가 나타난 것이다!
파칙!
그가 다짜고짜 입을 쩍 벌려 오색 수정돌을 뿜었다.
눈을 찌를 듯 강렬한 오색 뇌전을 품은 수정돌에서 천벌과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천벌뇌석(天罰雷石)!”
안색이 급변한 묵우가 몸을 틀어 피하면서 회색 화염을 전신에 일으켰다. 묵우도 빨랐지만 오색 수정돌은 더 빨라서 흐릿하게 그를 따라잡았다.
쿠쾅!
수정돌이 폭발해 눈부신 오색 뇌전이 묵우를 둘러싸고 단겁의 10배 이상 되는 포악한 뇌전 폭풍을 일으켰다.
허공이 출렁이고 공간이 갈라질 듯 검은 주름이 잡혀있었다.
한립 등 나머지 수사들이 무서운 공격의 여파를 피하기 위해 궁전 폐허 바깥으로 물러났는데, 오색 뇌전 속에 잠식된 묵우는 보이지 않았다.
공수구가 희미한 미소를 짓고 나머지 수사들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찌 되었든 묵우가 쉽게 나가떨어지면 그들에게 좋을 것이 없었다.
뇌전이 차차 가시고 묵우가 나타나자 공수구의 웃음기가 사라졌다.
안색이 조금 좋지 않은 것을 빼면 어디 상한 데도 없었고 심지어 의복도 온전했다.
“회선이 어떻게 천벌신뢰에서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인가!”
“천벌뇌석이 있는 것은 의외긴 했는데, 그렇게 급이 떨어져서야 나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묵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을 본 공수구가 훽! 몸을 돌려 입구 쪽으로 날아갔다.
“더 싸우지 않고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시려고요. 노부는 한입에 두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묵우가 그를 부르면서 오른손을 저었다. 왼팔이 터져 짙은 회색 사슬로 변하더니 허공에 녹아들었다.
다음 순간 공수구는 허공에서 번득 나타난 회색 사슬에 꽁꽁 묶이고 말았다.
묵우의 몸에서 회색빛이 널리 퍼져 영역을 형성하고 그 안에 무수히 많은 회색 그림자들이 요동쳤다.
중얼중얼 들려오는 주문 소리와 함께 영역 안의 그림자들이 뭉쳐져 거대한 회색 용머리를 형성했는데 그 위에 섬뜩한 한기를 발산하는 검은 주술문자가 가득했다.
허공에 있던 수사들은 용머리가 나타나자마자 온몸이 아프고 뼈가 시린 한기를 느껴 보호막을 강화하면서 서둘러 더 멀리 벗어나려 했다.
난색을 표한 공수구도 하얀빛을 일으켜 화염덩어리로 사슬을 불사르면서 몸부림쳤다.
촤릉!
회색 사슬이 점점 얇아져 그가 탈출하기 전에 묵우의 술법이 완성되었다.
거대해진 회색 용머리가 눈에서 훅훅! 회색 화염을 일으키며 공수구를 노려보았다.
크하아앙!
포효소리와 함께 회색 빛기둥이 용의 입에서 빠져나와 공수구를 때렸다.
회색 태양처럼 보이는 폭발이 일고 머리가 산발이 된 공수구가 날아가 궁전 벽 잔해에 박혀 중상을 입은 듯 보였다.
“아직도 살아있네. 쯧쯧, 더 놀아드리겠습니다!”
묵우는 투덜거리며 수결을 맺었고 회색 용머리의 입속에 빛이 밀려들었다.
경악한 공수구가 벽에서 튀어나와 부상을 치유할 틈도 없이 하얀 깃발과 노란 영패를 불러내 두 겹의 보호막을 쳤다.
그 순간, 인상을 팍 쓴 묵우가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몸을 떨었다. 회색빛이 깜빡거려 영역 전체가 불안정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쿠쿠쿵…….
무슨 일인지 회색 용머리가 붕괴하고 영역이 사라져 버렸다. 그 순간 공수구는 반색하며 하얀 빛줄기로 변해 벗어나려 했다.
쉭!
그때 쏜살같이 날아들어 그 앞을 가로막은 것은 한립이었다. 씨익 웃은 한립은 진언보륜을 불러내 급속도로 회전시켰다.
금빛 파문이 퍼져 나와 너른 구역을 장악하고 공수구도 그 안에 갇히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꼼짝하지 못하는 상대를 보고 한립은 푸른 비검을 날렸다. 거목 크기로 커진 거검이 굵직한 뇌전을 일으키고 있었다.
서늘한 눈빛으로 수결을 맺은 한립의 조종에 거검에서 모호하게 검빛이 빠져나가 공수구를 베었다.
윤회전에 묵우의 일까지 알고 있는 공수구가 달아나게 두었다가는 그는 영원히 천정에 쫓겨 다녀야 할 것이다.
삼대지존법칙 중 하나인 시간법칙은 태을옥선에게도 통할 거라 예상하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공수구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무엄한 놈, 멈춰라!”
설앵이 그걸 보고 번개처럼 날아들며 소리쳤다. 겨우 금선 중기 수사가 이런 짓을 벌이게 둘 수는 없었다.
은색 밧줄 선기를 불러낸 설앵은 푸른 거검 공격을 공수구 대신 막아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선기도 금색 파문 영역에 들어서자 천배로 움직임이 느려졌고 한립의 진언보륜 신통을 처음 보는 설앵은 순간 머뭇거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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