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2화. 도착
*
노파는 금색 보호막이 깨지지 않자 희색이 짙어졌다. 노인은 금색 보호막 너머의 시체를 훑으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눈을 번득인 낙청해도 몸을 날려 금색 보호막 앞에 섰다.
“낙 궁주,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노인이 곧장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엇을 하다니요? 그럼 저 시체 안에 든 태을단을 당신들이 독식하게 놔두란 말입니까?”
낙청해가 냉소하며 남색빛을 일으키고 주문을 외웠다. 노인이 핏빛을 일으켜 방해하려는데 노파가 손을 뻗어 그를 말렸다.
“상관없습니다.”
“허나…….”
머뭇거리던 노인이 결국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낙청해는 다시 태을경의 기운을 발산해 한 손을 휘둘렀다.
쿠콰쾅!
남색 지팡이 허상이 나타나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으면서 금색 보호막을 내리쳤다.
궁전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에도 보호막은 잠시 진동할 뿐 곧 안정을 되찾았다. 그 모습에 낙청해가 난색을 표했고 나머지 수사들은 다들 어찌 된 상황인지 알 수 없어 말을 아꼈다.
고요한 대전에서 비취색 연단로의 화염이 지글지글 끓는 소리만 울렸다.
“려 수사, 양혼로와 잔혼은 어찌 된 일인가?”
호언 도인이 한립에게 다가와 사정을 물었다.
남려족 노파와 노인도 그 소리에 움찔해 고개를 돌렸고 낙청해 등 다른 수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유적의 금제 안에서 우연히 발견해서 가지고 나온 것인데 그 안에 잔혼이 숨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가 길게 설명하려 하지 않자 호언 도인도 ‘그렇구만.’이라 답하고 더는 묻지 않았다.
그러나 노파는 한립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눈빛이었고, 낙청해는 금색 보호막을 쳐다보다 훌쩍 몸을 돌려 다가온 창류궁 수사들과 전음을 주고받았다.
한립도 금색 보호막과 시체를 보면서 머리가 복잡했다.
‘잔혼과 시체는 대체 무슨 관계란 말인가? 잔혼이 비경에서 데리고 나가주기를 원한 것은 육신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게다가 교삼이 그에게 허원단을 만들게 시킨 것은 진작 이곳에 잔혼과 육신이 있는 줄 알고 일부러 그런 것이란 말인가?
쓴웃음을 흘린 한립은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그와는 크게 관계없는 일이었고 창류궁이든 교삼이든 성가시게 하지 않으면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태을단이 전부 완성되었고, 원하던 것도 얻었으니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드는 이곳에 더 머물 이유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는 곧바로 자리를 뜨려다 멈칫 멈춰서 시체를 돌아보았다. 방금 시체의 오른손 손가락이 움직인 것 같아서였다.
“려 수사, 왜 그러는가?”
호언 도인이 그의 표정이 이상해진 것을 알고 전음을 보냈다.
“아닙니다.”
한립은 다른 이들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아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다른 보물이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그만 다른 곳을 살펴보면 어떻겠나?”
호언 도인은 딱히 의심하지 않고 떠날 것을 제안했다. 그 말에 한립은 궁전을 둘러보았다.
단겁을 막는 궁전 그 자체가 엄청난 보물로 욕심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영역을 펼치면서 자세히 살피니 지붕의 금제는 궁전과 일체여서 이런 격전이 벌어졌음에도 흔적도 남지 않은 단단한 궁전을 옮겨갈 방법은 없었다.
“그러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쉬움에 탄식한 한립도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기록해 두셨습니까?”
한립은 의식으로 체내의 해 도인에게 물었다.
“잘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의 몸속 어딘가에서 해 도인이 하얀 옥간을 들고 대전 곳곳에 새겨진 금제를 상세하게 따라 그려두었다.
“그럼 다행입니다!”
한립은 명한선부를 떠나면 이 현묘한 금제를 잘 연구해서 원합오극산에 써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연단로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금동!’
고개를 돌린 한립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금동이 어느새 딱정벌레의 모습으로 연단로 위에 앉아 입을 벌리고 있어서였다.
화로 아래 화염은 훨씬 줄어 있었고 대전 양측의 회백색 조각상들도 움직임이 없었다.
“무얼 하려는 것이냐?”
한립이 얼른 화로 옆으로 이동해 물었다. 이미 한쪽 구석이 뜯겨나간 화로를 보는 그의 눈에 아까운 마음이 그득했다.
“한참 뛰어놀았더니 너무 배가 고파서 배 좀 채우려고요! 단약이 다 나올 때까지 기다려 주느라 얼마나 참았다고요…….”
금동은 입을 벌려 화로를 갉아 먹으면서 웅웅 대답했다.
“알겠다. 하지만 천천히 식사할 시간은 못 준다.”
한립은 푸른 빛으로 금동과 연단로를 감쌌다. 다른 수사들도 그것을 보고 있다 눈길을 돌렸다.
태을단은 전부 나왔고 불세출의 보물이었던 연단로는 이미 망가졌으니 그걸 위해 시간법칙을 익힌 금선 중기 수사와 척을 질 이유가 없었다.
쿠쿵!
한립은 연단로와 금동을 통째로 뽑아 영수대 공간 중 하나에 넣어 두었다.
팟.
그 순간 화로 속에서 하얀 그림자가 더없이 빠른 속도로 한립의 체내에 스며들었다.
한립 몸속 어딘가에 가부좌를 틀고 있던 해 도인은 하얀빛이 번득이고 화염 소인(小人)이 나타난 것을 보았다.
바로 정염지화였다.
그 작열하는 열기에 눈살을 찌푸린 해 도인이 정염소인과 약간 거리를 두었을 때 소인이 입을 벌려 은빛에 감싸인 태을단을 뱉어냈다.
다른 태을단과 달리 은색 무늬가 들어가 희미하게 금조(金鳥)의 형상을 이룬 단약은 향기가 더욱 그윽했다.
한립은 속으로는 기뻐하면서도 겉으로는 티 나지 않게 호언 도인 무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쉬익!
그때 대전 안에 홀연히 빛줄기가 나타나며 새로운 인물들이 나타났다.
청아한 외모의 사내는 천정 감찰선사 공수구였고, 단아한 여인은 북한선궁 부궁주 설앵이었다.
“허허, 아주 이 안이 북적거리는구나.”
공수구가 인자한 웃음을 띠며 입을 열었고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가 대전 안의 잡음을 압도했다.
수사들은 공수구를 보며 의아해했지만 설앵을 발견하고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낙청해가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공수구는 대전 안 수사들을 하나씩 훑고는 웃음기가 짙어졌다.
“경사가 따로 없구만! 이렇게 많은 윤회전 역도들을 발견하고 말이야.”
백옥 비휴를 만지작거리면서 하는 말에 투명한 빛의 장막이 퍼져 대전을 감쌌다.
공수구가 펼친 영역에 둘러싸인 수사들은 긴장해서 주변 환경과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청죽봉운검을 단단히 쥔 한립은 반투명한 영역에서 어떤 압박감이나 파동도 느껴지지 않는 것에 더 불안해졌다.
“천정 감찰선사 공수 대인이십니다. 모두 예를 올리세요.”
설앵이 앞으로 나서 대전의 수사들을 내려다보며 외쳤다. ‘감찰선사’라는 네 글자가 유독 크게 들렸다.
천정의 특수 직위를 얻었다는 것은 상대가 최소한 태을경 초기의 옥선(玉仙)이라는 뜻이었다.
호언 도인과 운예도 심란한 눈길을 주고받았고 금색 보호막 옆의 노파와 노인은 생사 대적을 앞둔 것 같은 비장한 얼굴이었다.
한립은 영계 명충모를 상대할 때 만났던 하강이란 진선이 자신을 순찰사자라고 칭하면서 감찰선사의 명을 받았다고 말하던 것을 떠올렸다.
당시 연신술이 선계에서 금술이며 감찰선사나 순찰사자에게 쫓길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듣기도 했다.
낙청해가 한참 머뭇거리다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 예를 올렸다.
“창류궁 낙청해가 감찰선사를 뵙습니다.”
“창류궁 궁주는 그간 북한선궁을 번거롭게 한 일이 있는가?”
눈썹을 끌어올린 공수구가 웃으며 물었다.
“저희 창류궁은 늘 천정의 법도를 지키며 윤회전 같은 간사한 무리와는 거리를 두어왔습니다. 선사께서 이곳에 윤회전 관련해 일을 보시러 오셨다면 저희는 걸리적거리지 않게 물러나겠습니다.”
낙청해가 공손히 답하며 남가몽 등에게 눈짓을 해 속히 떠나려는데 반투명한 영역에서 금빛이 나타나 강렬한 법칙 파동을 발산했다.
한립은 천지원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흐르지 않는 것을 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의도로 이러시는 것입니까?”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기 전까지 누구도 이곳을 떠날 수 없다.”
낙청해는 표정이 달라져 입을 열었지만 공수구는 느긋하게 답했다.
“낙청해! 우리를 속여 호수 금제에 가둔 것이 곧 윤회전 무리와 작당을 했다는 뜻이 아닙니까? 북한선궁 궁주 소진한을 해치다니 당신이 윤회전 무리 중 하나가 아니라고 어찌 증명하겠습니까?”
설앵이 버럭 화를 내며 끼어들었다.
“그건 억울한 말씀입니다. 호수에서 부궁주가 위험에 처한 것을 보고 제 힘으로는 구할 수 없겠다 싶어 급히 소 궁주를 찾으러 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쪽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 아직까지 떠나지 못하고 붙들려 있었던 것이고요.
소 궁주에 대한 것은 심마를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저희 창류궁 수사들은 소 궁주를 공격한 적도 위해를 끼친 적도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소 궁주께서 정말 큰일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찌 되었든 저는 골짜기에 들어선 후 소 궁주를 본 적이 없으니까요.”
낙청해는 차분하게 자신의 억울함을 고하고 의미심장하게 대전 안의 나머지 수사들을 훑었다.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설앵의 뽀얀 얼굴이 열이 받아 달아오르는데 공수구가 손을 펼쳐 말을 막았다.
“그간 북한선역을 하나로 통일시키려 한 소진한의 행위는 천정에서도 좋게 보고 있지 않았다. 스스로 경거망동해서 화를 입었으니 목숨을 잃었다고 해도 어쩔 수 없겠지.”
“예에? 소 궁주가 정말 목숨을 잃었단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공수 선사께서는…….”
“……그러나 오늘 보니 그 경거망동으로 큰 공을 세웠더군. 이렇게 좋은 판을 깔아 놓고 가고 말이야, 하하하!”
낙청해가 생전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놀라는데 공수구가 말을 끊었다.
호쾌한 웃음소리에 대전 안 수사들은 갑자기 무형의 괴력을 느끼면서 몸이 불편해졌다.
그와 동시에 붉은색과 남색 등 대부분의 금선들이 각각 영역을 펼쳤다.
한립과 구양규산 등도 한곳에 모여 여러 영역을 중첩해 상대의 법칙의 힘에 대항하려 했으나 효과가 미미했다.
“이런 기괴한 법칙이…….”
구양규산이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의문을 드러냈다. 한립은 말없이 이곳을 어떻게 떠날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대전 안 금선들도 견디기 어려운 압력에 진선 수행을 지닌 남가몽이 견뎌낼 리 만무했다.
낙청해의 영역 안으로 피한 그녀는 여전히 숨이 막혀오고 온몸에 극통을 느끼고 있었다. 두 귀에서 잉잉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다른 이들이 무어라 떠드는지 거의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하시는군요.”
아끼는 제자가 고통에 몸을 덜덜 떨고 있는 것을 본 낙청해가 창백한 얼굴로 노기를 드러냈다.
쏴아아!
그의 두 손에서 남색빛이 빠져나가 거대한 물결 소용돌이를 이루었다.
소용돌이 속에 흐릿하게 수룡(水龍)들이 돌아다니면서 주변의 압력을 부수고 있었다.
물결 소용돌이는 보이지 않는 기파의 벽에 막힌 듯 공수구 곁으로는 접근하지 못했지만 낙청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더욱 힘을 실으며 백면서생 등과 눈짓을 교환했다.
강제로 태을경의 힘을 이용해 잠시 공수구를 막는 것만으로도 낙청해는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의 뜻을 알아들은 백면서생 등 네 명이 남가몽의 사방에 나타나 각각 비취색 영패를 하나씩 꺼내 수결을 맺었다.
영패에 각인된 바다 요수 도인이 밝은 빛을 발하면서 네모난 거대 진법을 이루었다.
진법을 펼친 네 사람의 얼굴이 삽시간에 하얗게 질리고 각양각색의 복잡한 문양이 진법에서 떠올라 강렬한 공간 파동을 일으켰다.
“사해오유대진(四海遨游大陣)……. 해양 4곳에 진법을 펼쳐 극강의 공간 전송진을 만들어낸다는 진법을 법보 4개로 구현해 내다니. 낙 궁주, 실력이 대단하군.”
온화한 목소리가 물결 소용돌이 속에서 들려왔다. 낙청해는 답하지 않고 더 빨리 수결을 맺으면서 술법을 지탱했다.
공수구의 말대로 백면서생 등 네 명이 펼친 것은 사해오유대진(四海遨游大陣)이었다.
다만 간소화된 진법이라 원래의 오묘한 위력은 내지 못하고 그들이 탈출할 정도의 공간 신통만 일으킬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