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9화. 분쟁
*
멀지 않은 곳에서 전신에 검은 문신이 생겨 불바다 금제로 끌려가고 있던 구양규산이 호언 도인과 운예를 보면서 흠모와 후회 등 복잡한 감정을 내비쳤다.
호언 도인은 운예와 시선을 마주치고는 손을 잡고 구양규산에게로 이동했다.
운예가 먼저 붉은 비단으로 구양규산의 허리를 감았고, 호언 도인이 붉은 화염이 이글대는 비검으로 단전에 파고든 검은 사슬을 내리쳤다.
챙!
검은 사슬에 희미한 붉은 흔적이 생기면서 그것을 중심으로 부서져 나갔다.
“고맙습니다.”
검은 문신이 서서히 가시고 기운을 되찾은 구양규산이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를 지켜보던 봉천도가 악랄한 눈빛으로 뼈만 남은 마른 손을 움직였다.
한립과 서금충을 구속하고 있다 잘린 격원법련 두 개가 그의 수중으로 돌아왔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이거면 되었다…….”
봉천도가 부드럽게 사슬을 쓸며 말했다.
두 사슬의 끝이 뱀 머리처럼 고개를 쳐들고 구불구불 그의 의복을 타고 내려가 다른 사슬들처럼 지면으로 늘어졌다.
“끌끌끌…….”
봉천도가 사슬들을 보고 탁 막힌 소리로 웃음을 흘렸다. 그의 두 손에서 핏물이 스며 나와 천천히 아래로 늘어진 사슬들에 떨어졌다.
핏빛이 퍼진 사슬들의 촤르릉 거리는 소리가 대전을 가득 채우자 암홍색 사슬들이 뱀처럼 지면을 타고 기어가 수사들의 발아래에서 튀어 올랐다.
아직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낙청해 등은 겹겹이 쌓인 사슬에 갇히고 있었다.
호언 도인이 그걸 보고 검 끝을 아래로 해 바닥을 찔렀다.
검 끝에서 붉은 기운이 퍼져나가 작열하는 열기를 내뿜는 빛의 장막으로 변해 사슬들의 침투를 막아냈다.
창류궁 금선 네 명은 비취색 영패에서 휘황찬란한 빛을 뿜어 사각형의 남색 수정 방을 만들어 사슬을 막았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창류궁 금선 노인이 낙청해 쪽을 눈짓하며 물었다.
“궁주께서 일단 단약을 취하라 명하셨으니 우린 명에 따라야 합니다.”
침묵하던 백면서생이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네 사람은 단호한 표정으로 어떻게 하면 불바다 금제를 뚫고 태을단을 가지고 나올 수 있을지 상의했다.
한편 금동과 제천소는 격렬하게 싸우면서 대전 바깥까지 나가 있었고, 한립은 사슬들이 모여 바닥을 타고 그의 발밑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탄식했다.
결국 그가 두 손을 거두자 불바다에 만들어졌던 작은 구멍은 천천히 작아져 갔다.
번득 운예 무리 곁으로 이동한 그는 양손에 선원석을 하나씩 쥐고 선령력을 흡수하면서 시간영역을 회수했다.
영역을 펼치면서 청죽봉운검 세 자루를 부리고 동시에 서령진화로 불바다 금제까지 상대하느라 선령력 소모가 극심했다.
“서금선도 없고 이제 우리 둘이 승부를 가리면 되겠습니다.”
두 눈에 노기가 가득 찬 봉천도가 한립을 향해 말했다. 그는 사슬의 바다를 건너는 조각배처럼 홀로 한립 무리 근처로 이동하고 있었다.
“법칙지존이라는 시간법칙이라……. 끌끌, 그래 내 제자 둘을 죽인 것도 당신이겠지요.”
봉천도는 한립 앞에 멈춰서 그를 쏘아보았다.
“맞습니다.”
담담히 답한 한립은 청죽봉운검을 단단히 고쳐 쥐었다.
“시간법칙을 익혔다고 이리 기고만장하게 군것이라면, 오늘 내가 직접 다시 윤회길에 오르게 해주겠습니다.”
“호오, 장한 녀석! 봉 노귀의 제자를 죽였다는 것만으로도 내 좋은 술을 몇 잔 대접할 만 하구나!”
곁에서 호언 도인이 농담조로 소리쳤다.
“두 병.”
“좋다!”
한립이 농담을 받아주자 호언 도인도 웃으면서 장검을 그러쥐고 호방하게 외쳤다.
이때 뒤쪽을 힐끔 본 구양규산이 언질을 했다.
“나머지 두 단약도 꼭두각시에 의해 시체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호언 도인이 뭐라 답하기 전에 한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안심하고 금제를 풀고 단약을 취하시지요. 저는 여기서 봉 대장로께 시간법칙이 어떤 것인지 좀 알려드리고 있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호언 도인의 화염 영역에서 뛰쳐나가 봉천도에게 날아들었다.
“걱정할 것 없으니 우린 단약이나 가지러 갑시다!”
싱긋 웃는 호언 도인의 말에 운예와 구양규산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어떻게 하면 화염 금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상의했다.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나 대전 입구에서 가까운 사슬탑 하나가 돌연 허물어지고 암홍색 사슬들이 떨어져 내렸다.
마치 처음부터 그 안에 아무도 갇혀 있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대전 오른쪽의 기복이 일정하지 않은 사슬 바다 위를 남려족 노파가 빠르게 지나갔다. 그는 금색 지팡이 대신 손바닥 크기의 담황색 영패를 들고 있었다.
삐뚤삐뚤한 겉모습과 달린 영패에는 이상한 주술문자들이 잔뜩 새겨져 있었고 법칙 파동까지 느껴졌다.
불가사의한 속도로 움직인 노파는 은은한 암홍색 보호막을 두르고 대전의 다른 수사들이 반응을 보이기 전에 불바다 금제 앞에 도착했다.
노파의 손에서 영패가 날아올라 불바다에 떨어졌다. 화염 속에서 영패가 양초처럼 녹아 암홍색 주술문자들을 방출했다.
“어느새!”
금제를 파훼해 보려던 호언 도인이 그걸 보고 입을 달싹였다.
대전 다른 쪽에서는 허공에 촤릉 거리는 소리가 울리고 암홍색 사슬들이 피맛을 보고 싶어 하는 것처럼 한립을 향해 달려들었다.
빼곡한 붉은 그림자가 한립의 신형을 뒤덮었다.
청죽봉운검을 든 한립은 전신에 회색빛을 흘리면서 마치 허상처럼 그 사이를 쉭쉭 피해 다녔다.
안색이 어두워진 봉천도는 사슬 위를 미끄러지듯 이동하면서 수결을 맺어 검은빛의 장막으로 대전을 감시했다. 그리고 사슬로 한립을 공격해 달아날 수 있는 공간을 좁혀 나갔다.
슉!
봉천도의 손짓에 암홍색 사슬 하나가 독사처럼 한립의 발아래에서 솟아올랐다. 그러나 미리 알아챈 한립은 장검을 아래쪽으로 향하게 했다.
검끝이 사슬에 닿기 전에 금색 뇌전이 밀집한 황금빛을 이루고 사슬로 떨어졌다.
파치치칙!
검은 사슬을 타고 금색 뇌전이 폭발적으로 퍼져나가 대량의 사슬들을 집어삼키고 금색 뇌전 연못을 이루었다.
봉천도가 뇌전 연못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금빛에 매몰되어 기름에 튀겨지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요란스러운 장면에 수사들은 곁눈질로 그곳을 보았고 혈색 좋은 노파마저 잠시나마 불바다 금제에서 눈길을 떼었다.
그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한립을 잠깐 보고는 다시 금제에 집중했다. 그때 영패가 녹아든 불바다 속에 손톱만 한 불씨가 뭉쳐지고 있었다.
눈을 반짝인 노파는 몸을 날려 불씨들이 뭉쳐 만들어낸 협소한 틈을 지나갔다.
바로 이어 창류궁 금선 네 명이 조용히 그녀의 뒤를 쫓아 틈을 지나려는데 화염이 펑! 하고 솟아올라 틈이 사라졌다.
“그 영패는 대체 무슨 물건이었을까요?”
표정이 변한 운예가 의문을 드러냈다.
“불 속성 법칙을 지닌 보물이었을 지도요.”
“아니, 어찌 되었든 불 속성 법칙만은 아닙니다……. 그보다 어떻게든 진법을 파훼합시다.”
구양규산의 말에 호언 도인이 침음했다. 불바다 금제를 통과한 노파에게 하얀 인영 둘이 따라붙었다.
온몸에서 황토색 문양을 반짝이는 회백색 괴뢰들은 왼쪽과 오른쪽에서 노파를 공격해 들어갔다.
이에 노파는 암홍색 빛을 터트려 좁은 범위의 영역을 이루고 그녀를 향해 달려들던 두 회백색 괴뢰들을 가두었다.
그녀는 손을 튕겨 암홍색 가느다란 실로 괴뢰들의 사지 관절과 머리 등을 찔렀다. 그러자 강력하던 회백색 괴뢰들이 두부처럼 뚫려 실이 연결된 꼭두각시처럼 변했다.
그럼에도 괴뢰들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듯 노파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노파가 이번에는 손가락을 교차해 회백색 괴뢰들의 목을 뚫고 나간 가느다란 실을 꺾어 뒷목 어딘가를 찔렀다.
“찾았다…….”
그 순간, 갑자기 뻣뻣하게 몸이 굳어버린 두 괴뢰는 뒷목으로 황토색 빛이 모이더니 암홍색 실을 따라 기운이 사라졌다.
흙 속성 법칙의 힘으로 비호받지 않는 괴뢰들은 자연히 노파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노파는 괴뢰들에게 더는 시간을 빼앗기지 않고 연단로 뒤쪽으로 돌진했다. 단약을 가져가던 두 금색 괴뢰들이 훽! 고개를 돌리며 주먹을 내질렀다.
그 주먹에는 뇌전 주술문자가 일렁였고 그 한 가운데에 소용돌이가 형성되어 기이한 흡인력을 방출하고 있었다.
동시에 양쪽에 서 있던 회백색 석상 둘도 황토빛 기운을 일으키며 달려들었다.
“죽겠구만…….”
창류궁 금선 노인이 조소했다.
그런데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흐릿해진 노파의 신형이 두 금색 괴뢰를 스쳐 거대 의자 아래에서 나타났다.
두 금색 괴뢰가 만들어낸 소용돌이는 진작 사라져 보이지 않고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실만이 엉켜 있었다.
잠시 후 대전에 가득하던 회백색 괴뢰들을 불러내는 술법 자체가 발동되기 전에 멈추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창류궁 노인의 탄성이 호언 도인 무리의 시선을 끌었다.
그때 다른 쪽에서는 뇌전 연못에서 빠져나온 봉천도가 드디어 눈앞의 인물이 만만치 않은 실력을 지녔다는 것을 깨닫고 서로 대치 중이었다.
그렇게 모두의 시선이 노파에게 집중되었을 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노파는 금선 괴뢰들이 들고 있던 태을단은 건드리지도 않고 법칙의 힘을 발산하는 검은 단약을 꺼내 단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저건……. 허원단!’
동공을 수축한 한립이 자신이 직접 제련한 허원단을 알아보고 노파를 보는 시선이 흔들렸다.
“대체 무얼 하려는 것입니까!”
봉천도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버럭 소리를 쳤다.
혈색 좋은 노파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기괴한 미소를 지으면서 살아있는 시체의 말쑥한 뺨을 쥐고 허원단을 입에 넣어 주었다.
꿀꺽.
시체의 머리가 들썩이며 단약이 목구멍 너머로 사라졌다. 숙연한 얼굴로 옆으로 물러선 노파는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오직 시체만을 응시했다.
그 모습에 나머지 수사들은 어안이 벙벙해 일순 대전이 고요해졌다.
시간이 지나도 대전은 고요하기만 했고, 검은 단약을 복용한 시체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냐, 이럴 수는 없어……. 왜…….”
노파가 믿기지 않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중얼거렸다.
다른 수사들은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자 안심했고 봉천도도 다시 한립에게 집중했다.
쌍방이 맞붙기 직전 괴이한 장면이 나타났다.
팟.
돌연 잿빛이 시체의 몸에서 나타나 영역처럼 널리 퍼져나갔고 그 안에서 뇌전 소리와 바람 소리가 콰릉콰릉 울렸다.
가까이 있던 노파가 돌풍에 휩쓸려 멍하니 선 회백색 괴뢰에게 부딪쳤고 비취색 연단로는 강렬한 충돌에 부르르 떨다 다시 안정을 찾았다.
금색 괴뢰 둘과 여러 회백색 괴뢰들도 괴력에 의해 이리저리 부딪치고 있었다. 가장 바깥의 불바다 금제마저 바깥쪽으로 확 밀려나며 폭발했다.
백면서생 등이 서둘러 뒤쪽으로 피한 사이 호언 도인이 눈을 번득이면서 오히려 앞으로 튀어 나갔다.
금색 불꽃이 일렁이는 낡은 호롱불을 불러낸 그는 터져나가는 화염 금제 속으로 사라졌다.
“호언…….”
운예도 그럴 줄 몰랐는지 놀라 외쳤다.
한립은 두 눈에 남색빛을 크게 키워 고개를 돌렸으나 자욱한 회색 안개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회색 안개가 서서히 흩어지면서 누군가 번득 나타나 운예 옆에 섰다. 바로 호언 도인이었다.
의복이 검게 타고 수염도 녹아 사라진 그는 피부가 검게 그을려 꼴이 말이 아니었다.
“내가 구해왔어! 금색 괴뢰들의 실력이 대단해서 하나밖에 빼앗지 못했지만.”
호언 도인은 씩 웃으며 운예에게 전음을 보냈다.
“다음에 또 그러면 진짜 혼날 줄 알아요!”
운예가 안심하며 그를 흘겨보았다. 먼지가 가라앉고 금색 의자에 앉은 시체가 다시 노출되었다.
움직임은 전혀 없었으나 기운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두 금색 괴뢰가 의자 곁에 나타나 한 마리는 태을단을 시체의 입에 넣어 주었고, 나머지 한 마리는 몸 절반이 새까맣게 탄 채 팔 한쪽도 날아간 상태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