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7화. 멸살
*
제천소가 의자에 앉은 중년인의 시체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태을단을 저 시체에게?’
이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단약을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시체에게 주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그는 부식 법칙을 익혀 화염 공격에는 약한 편이라 돌파할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고 괴뢰는 점점 의자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40걸음…….
30걸음…….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제천소가 머리를 굴리다 자신의 허리를 탁! 쳐서 하얀 고리를 불러냈다.
속이 쓰릴 만큼 아까웠지만 그것을 냅다 던지고 법결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구슬 속에서 하얀 돌풍이 밀려나와 공간의 힘을 발산했다.
* * *
태을전 바깥에는 각 세력의 수사들이 떨어져 앉아 쉬고 있었다.
석문 입구는 여전히 벌어져서 하얀빛을 번쩍이고 있어 내부 상황을 알 수 없었다. 다들 석문을 힐끔거리면서도 아무도 경거망동하는 이는 없었다.
한립 등 10명의 수사들이 석문 안으로 들어가고 오래지 않아 창류궁 다른 수사들이 백면서생을 선두로 날아들었다.
외부에 남은 수사들은 상의 끝에 누군가 안으로 들어가려 시도하면 합심해 죽이기로 결정했다.
이 중 창류궁 세력이 가장 강해서 금선 넷에 다른 진선경 수사들도 있었고, 그 다음에 금선 셋의 복릉종이었다.
남은 운예와 촉룡도 짙은 눈썹 중년 거한은 뜻밖에도 가까이 붙어 서 있어서 골짜기 안은 총 세 무리가 대치하는 것과 같았다.
이때 복릉종에서 얼굴이 새까만 금선과 하얀 금선이 시선을 교환했다.
“안에서 금방 나올 것 같지도 않은데 우리는 앉아서 기다리기만 해서 좋을 게 없을 듯합니다. 그러지 말고 근처에 다른 보물이 있는지 탐색해 보는 것이 어떨까요? 여기는 몇 명만 남아 지키고요.”
복릉종 새까만 얼굴 금선이 제안을 했다. 다른 이들은 그 말에 의심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목숨을 걸고 이곳을 지켜도 될까말까 할 판에 주변을 탐색하자고?
“관심 없으니 그리 돌아다니고 싶으면 두 분이 다니시지요.”
창류궁의 백면서생이 담담히 말했다. 운예와 촉룡도 금선도 말은 없었지만 떠날 생각은 없어보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끼리 다녀오지요, 뭐.”
어깨를 으쓱한 복릉족 금선들이 정말 날아올라 먼 곳으로 사라졌다.
나머지 수사들이 얼굴을 찡그리면서 그들을 의식 범위까지 쫓다가 그 영역을 벗어나자 그만두었다.
두 복릉종 수사는 한참을 날아가다 멈춰서 으슥한 곳에서 하얀 고리 같은 것을 꺼내들었는데, 그곳에서 하얀 소용돌이가 쳐서 두 사람을 휘감고 사라진 줄은 다들 전혀 모르고 있었다.
* * *
대전 안에서 봉천도가 수결을 맺고 허공을 가리켰다.
하얀 고리가 번득 나타나고 그 안에서 검은 얼굴과 하얀 얼굴 금선 둘을 불러내고 있었다.
멀리서 그걸 본 다른 금선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파삭.
두 사람을 전송시킨 하얀 고리는 곧장 금이 가서 부서져 사라졌다.
“종주님, 대장로님.”
흑백 금선이 대전 내부 상황을 둘러보고 제천소와 봉천도를 향해 예를 올렸다.
“예의 차릴 것 없으니, 일월혼동대법(日月混洞大法)을 펼쳐 어서 불의 벽의 없애주게.”
“예!”
제천소의 부름에 두 사람은 양쪽으로 나눠 서서 소매를 펄럭이며 주문을 외웠다.
각각 얼굴색에 맺게 하얀빛과 검은빛의 법칙파동을 발산하고 있었다. 한립은 두 법칙파동이 익숙한 오행법칙과 다른 것에 눈을 반짝였다.
하얀 빛은 태양처럼 양기가 가득하고 검은 빛은 어두침침해서 사악한 음기가 가득했던 것이다.
‘저게 음양법칙과 관련이…….’
“아저씨, 사슬 못 풀어요?”
한립이 무슨 추측을 해보려하는데 불현듯 금동의 전음소리가 울렸다.
돌아보니 금동이 아직도 네 다리를 버둥거리면서 금빛을 번득번득 날려 사슬을 끊으려 하고 있었다.
“아저씨도 방법이 없냐니까요? 어서 나 좀 풀어줘요. 저 강시 자식, 죽여 버릴 거예요!”
“쉿! 상황이 아직 혼란스러우니 잠시 기다리자꾸나.”
한립은 금동이 돌발행동을 벌이기 전에 주의를 주었다.
격원법련이 선령력은 구속해도 시간법칙의 힘은 쓸 수 있어 사슬을 벗어나는 것은 언제든 가능했다.
그는 지금 가장 적당한 시기를 노리고 있었다.
흑백 금선은 낮게 기합을 넣으면서 몸의 기운으로 흑백 빛기둥으로 만들어 하얀 불벽을 향해 날려 보냈다.
검은 빛기둥과 하얀 빛기둥이 배배 꼬여 합쳐지더니 두 법칙의 힘이 상호 호응해 더욱 강해졌다.
두 가지 다른 법칙의 힘을 결합해서 위력을 늘리는 것은 처음 본 터라 한립은 유심히 봐두었다.
그가 속으로 원리에 대해 연구할 때 콰릉! 하고 하얀 불벽에 흑백의 빛기둥이 관통해 통로로 변했다.
금색 괴뢰가 의자까지 얼마 남겨두지 않았을 때였다. 마음이 급한 제천소는 잿빛 둔광으로 변해 흑백 통로를 지났다.
그의 손에서 회색 옥여의가 날아가 집채만 하게 커지더니 여러 주술문자를 품은 액체처럼 걸쭉한 안개를 금색 괴뢰 머리 위로 줄줄 흘렸다.
흑백 금선도 통로를 통과해 금색 괴뢰를 향해 달려드는 중이었다.
그들은 각각 삼각형 깃발을 꺼내 들었는데 새하얀 깃발은 태양이 수놓아져 있어 눈부신 빛을 뿜었고, 새까만 깃발은 달이 수놓아져 은은하지만 웅장한 기운을 품은 빛을 뿜었다.
두 사람이 재빨리 수결을 맺자 삼각 깃발 두 개가 하얀 빛덩이와 검은 빛덩이로 변해 좌우에서 금색 괴뢰를 향해 쇄도했다.
그 순간, 금색 괴뢰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멍한 눈길로 날아드는 공격들을 바라보았다.
파칙!
금빛이 크게 일어나 뇌전 문양을 이루고 무수히 많은 주술문자들이 떠올랐다.
천천히 한 팔을 들어 올린 금색 괴뢰가 단단히 주먹을 쥐고 이제까지 와는 180도 달라져 쾌속으로 회색 옥여의를 때렸다.
쿠아앙!
옥여의가 부들부들 떨며 빙글빙글 돌아 튕겨나갔다.
표면의 걸쭉할 만큼 짙었던 잿빛이 금색 뇌전에 갈라져 흩어지고 영성이 크게 줄어든 모습이었다.
금색 괴뢰도 충격을 받았는지 쿵쿵 뒤로 물러났다. 괴뢰의 금빛이 약해진 것을 본 흑백 금선들이 이때다 싶어 법결을 날렸다.
흑백 빛덩어리들이 검은 거대 손, 하얀 거대 손이 되어 금색 괴뢰를 낚아채려는데 이변이 발생했다!
금색 괴뢰 옆에 회백색 인영 두 개가 귀신처럼 나타난 것이다.
대전 양측에 서있던 회백색 조각상이 방금 살아난 듯 황토색 무늬를 반짝이면서 법칙파동을 내뿜고 있었다.
노란 대검을 든 회백색 조각상들은 병기를 교차해서 휘둘렀다. 두 개의 거대한 황토색 도기가 십(十) 자를 이루고 날아가며 묵직한 법칙파동으로 허공을 왜곡시켰다.
쾅! 쾅!
검은 거대 손과 하얀 거대 손이 그걸 맞고 흩어져 깃발로 돌아갔다. 회백색 조각상들은 어떤 영향도 받지 않은 듯 우두커니 서있었다.
쉬쉬쉬쉭…….
다른 수사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4, 50개는 되는 대전 양측의 회백색 조각상들이 전부 날아올라 중앙의 제천소를 겹겹이 포위했다.
“단약을 훔치려는 도적, 죽인다!”
그 4, 50개의 조각상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면서 철판을 긁는 것 같은 목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대전을 웅웅 울려 음파가 제천소와 흑백 금선들을 덮쳤다. 음파를 직격으로 맞은 세 사람은 고통스러워보였다.
그 찰나, 수십 개의 조각상에서 황토색 무늬가 떠올라 거대 깃발로 뭉치더니 세 사람을 뒤덮었다.
태산과 같은 중압감을 주는 법칙파동이 깃발로부터 퍼져나갔고 금선경 수행을 지닌 제천소와 흑백 금선들도 꼼짝을 할 수가 없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조각상 괴뢰들은 그들을 가둠과 동시에 손에 든 병기로 무참히 공격을 가했다.
쿠콰콰쾅!
여기서 끝이 아니라 바닥의 금색 문양도 쿵! 하고 새로운 하얀 화염을 일으켜 노란 깃발과 세 수사를 불사르기 시작했다.
그 열기에 허공이 일그러지고 있었고 멀리서 지켜보던 다른 수사들도 뜨거운 기운에 안색이 달라졌다.
하지만 한립을 비롯한 다른 금선들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지켜볼 따름이었다.
“으아……. 아저씨, 확실히 여기서 지켜보는 게 낫겠어요.”
아까는 어떻게든 끼어들려고 난리였던 금동도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한립은 대답 없이 두 눈에서 남색 빛을 일으켜 상황을 주시했다.
봉천도의 동공이 맹렬히 수축했다. 도우러 가고 싶어도 사슬로 나머지 금선들을 구속하느라 그럴 수가 없었다.
불바다를 본 그는 후회막심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천소의 말대로 일단 낙청해 등을 처리하고 함께 나설 것을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탐욕이 모든 화를 불러들인다고, 복릉종은 이미 다른 세력들과 척을 진 상태였고 거기다 단약을 지키는 강력한 금제와 괴뢰들까지 홀로 상대를 해야 해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웅.
불바다 아래 바닥에 들릴 듯 말 듯 진동이 들리고 궁전 문 인근에서 제천소가 나타났다.
온몸이 새까맣게 타서 머리카락도 절반밖에 남지 않은 제천소는 입에서 피를 주륵주륵 흘리면서 겨우 몸을 가누고 있었다.
그때, 하얀 불바다가 언제 극성을 부렸냐는 듯 사라지고 바닥에 검은색과 하얀색 깃발만 영성을 거의 잃고 어둑하게 떨어져 있었다.
복릉종의 두 흑백 금선들은 시체는 물론이고 원영까지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제천소의 얼굴을 파랗게 질리게 만들었다.
한립 등 다른 수사들은 고소해 하는 한편 하얀 화염의 위력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십 구의 회백색 조각상들이 황토색 빛을 잃고 노란 깃발 허상도 사라졌다.
조각상들은 몸을 돌려 빠르게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금선 괴뢰는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도 한발 한발 앞으로 가서 은색 단약을 시체의 입가에 가져갔다.
시체의 입이 미세하게 벌어져 단약이 그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고 있었다.
단약이 뱃속으로 들어가고 시체의 몸에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 아직 호흡은 없었지만 기운이 왕성해진 느낌이었다.
다들 괴이한 일에 놀라고 있을 때 화로의 또 다른 용머리가 입을 벌리고 오색 광채가 흩어졌다.
대전 하늘 위에 거대한 금색 소용돌이가 생겨 아까보다 더한 중압감을 내뿜었다.
무거운 바위에 깔린 듯 호흡이 어려워진 수사들은 이게 단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소름이 끼쳤다.
영역을 펼치고 있던 봉천도의 피해가 가장 막심해서 시체 같은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낙청해가 귀신 같이 그 틈을 노려 전신의 남색빛을 모아 검은 영역을 강하게 밀어냈다.
촤륵!
검은 영역의 틈새가 벌어지고 낙청해는 남색 빛으로 변해 빠져나왔다.
훽! 하고 고개를 돌린 봉천도가 두 팔을 펼쳐 머리통만한 금색 빛덩이 두 개를 영역으로 흡수시켰고 강한 빛을 발산한 영역이 다시 안정되면서 틈새를 복구했다.
검은빛이 자신까지 덮치려는 것을 본 낙청해는 냉소를 흘리고 양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몸에서 흘러나온 남색빛이 물결 허상이 보이는 보호막으로 변해 그를 보호했다.
“무슨 짓입니까!”
봉천도가 차갑게 물었지만 낙청해는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연달아 법결을 날려 남색 보호막을 더 밝게 만들었다.
보호막은 격원법련은 끊어내지 못해도 영역의 검은빛만은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잘 막고 있었다.
똑. 똑.
눈빛이 사나워진 봉천도가 무언가 하려는데 하늘의 금색 구름이 소용돌이를 이루고 은색 물방울 두 방울을 떨구었다.
치지지직!
황금 궁전 지붕으로 은색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눈부신 빛을 방출했고 첫 번째 단약 때처럼 건물 전체의 금제가 작동해 단겁에 대항했다.
* * *
이때 골짜기 쪽 입구가 번득하면서 남색빛이 튀어나와 펑! 터졌다.
웅.
다른 수사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벌떡 일어나는데 남색 빛이 응결하면서 복릉종 흑백 금선들이 대전 안에 나타나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런 몹쓸 놈들!”
“어쩐지 바깥을 탐색해 보겠다고 할 때 헛소린 줄 알았습니다!”
“이 복릉종 빌어먹을 것들이!”
골짜기 안의 수사들이 불같이 화를 내며 복릉종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던 뚱뚱한 복릉종 노인을 돌아보았다.
노인은 진작 대비를 하고 있었던지 팽이처럼 몸을 굴려 쉭! 하고 달아나 버렸고 나머지 수사들은 그를 쫓을 생각은 버리고 입구를 쳐다보았다.
“복릉종에서 먼저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협의는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촉룡도의 짙은 눈썹의 금선이 날아올라 창류궁 금선 넷이 막기 전에 문틈으로 사라졌다. 운예도 창류궁 수사들을 힐끔 보고 은빛으로 변해 안으로 들어갔다.
창류궁 수사들은 그들을 막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모두 사라지고 자기들만 남자 네 사람은 시선을 교환하고 수결을 맺었다.
남색 화면 안에 숨겨져 있던 낙청해의 비밀 전음이 전해졌다. 그의 말이 끝나자 남색빛은 흔들거리다 사라졌고 백면서생은 진선들에게 분부를 내렸다.
“너희는 입구를 지키고 있거라.”
“예!”
네 명이 들어가고 남색 빛의 문이 점차 흩어져갔다.
팟.
그 순간, 창류군 진선들 위로 하얀빛이 번득이고 벌써 안으로 들어간 줄 알았던 운예가 나타났다.
그녀는 놀란 진선 수사들을 거들떠보지 않고 아직 완전히 흩어지지 않은 빛의 문 속으로 뛰어들어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