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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735화 (1,492/2,000)
  • 1735화. 믿음

    *

    ‘윽!’

    하얀빛으로 들어선 순간 두 눈에 극통을 느낀 한립은 무의식중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눈앞에는 기이한 세상이 펼쳐졌다.

    하얀 안개가 짙게 깔린 허공은 방향을 분간할 수 없었고 미리 들어온 다른 이들은 거리를 두고 모여서 주위를 살피는 중이었다.

    다들 무턱대고 안개 속으로 뛰어들고 싶어 하지 않는 듯했다.

    구양규산과 또 다른 촉룡도 금선 한 명도 번득 나타나 호언 도인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섰고, 마지막으로 낙청해가 제자 남가몽을 데리고 들어왔다.

    “다들 여기서 저를 기다리신 겁니까? 이런, 송구스러울 데가.”

    낙청해는 너스레를 떨면서 눈으로는 주위를 빠르게 훑었다.

    그들은 쓸데없는 말에는 답하지 않고 각자 다양한 신통을 이용해 갈 길을 찾았다.

    한립은 안개에 영목 신통이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을 보고 머뭇거렸다.

    진실안은 어쩌면 통할지 모르나 그러면 자신이 시간법칙을 익혔다는 것이 들통나 앞으로 전투에 불리해질 것이 뻔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낙청해 옆의 청수한 사내의 눈빛이 어딘가 달라 보였다.

    눈동자 깊은 곳에 하얀 안개가 차올라 허공 어딘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고, 낙청해도 그 옆에서 따로 길을 찾는 척하며 실은 자신의 제자만을 주시하고 있는 눈치였다.

    ‘설마 특수한 눈이라도 지닌 것인가?’

    의심이 든 한립은 주의력 일부를 그를 지켜보는 데 사용했다.

    “이렇게 보기만 해서야 아무 것도 못하겠지요. 다들 방향을 정해서 일단 흩어져 찾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잠시 후 낙청해가 낭랑하게 말했다.

    “의식을 차단하는 하얀 안개 속에 무엇이 있을 줄 알고요? 그냥 들어가 헤매다 죽기라도 하라는 소립니까?”

    혈색 좋은 남려족 노파가 금 지팡이로 몸을 지탱하고 서서 혀를 찼다.

    “허허, 다들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으시다면 저 먼저 갑니다.”

    낙청해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제자의 팔목을 잡아 어딘가로 날아올랐다.

    “호언 수사, 우리도 따라가야 합니다.”

    마음이 동한 한립은 호언 도인에게 전음을 보냈다.

    “왜 그러는가?”

    멈칫한 호언 도인이 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를 뒤쫓으면 도발로 여겨질 게 분명했다.

    낙청해 같은 자와 척을 져서 좋을 것은 없었다.

    “낙청해의 제자가 특수한 안력을 지닌 것 같습니다. 방향도 모르고 출발한 것이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그 약삭빠른 성격에 다른 이들이 모험하게 두고 뒤에서 지켜보는 것이 정상이기는 한데……. 알겠네, 수사를 믿어보지. 따라가세!”

    한립의 몇 마디에 생각이 통한 호언 도인이 결단을 내렸다.

    그들이 안개 속으로 몸을 날려 멀리서 낙청해를 쫓기 시작하고 촉룡도 금발 사내와 구양규산이 시선을 교환하고 왼쪽의 다른 방향으로 출발했다.

    남려족 노인과 노파도 즉시 방향을 정해 날아올랐다.

    이제 남은 것은 봉천도와 제천소 뿐이었다.

    “이제 되었군. 따라가지.”

    봉천도가 갑자기 이렇게 말하고 검은 막으로 자신과 제천소를 감아 한립의 뒤를 쫓았다.

    안개 속 깊은 곳, 낙청해와 남가몽은 균일한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문득 남가몽이 안개 속에서 멈춰 섰다.

    “궁주님, 누군가 쫓아옵니다.”

    “허허, 그럴 수도 있지. 말해보거라, 쫓는 자들이 누구더냐?”

    “전부 다입니다.”

    웃음 짓는 낙청해를 향해 남가몽이 미간을 좁히며 답했다. 그 말에 낙청해도 기가 차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가장 가까이에 진염종 노인과 젊은이가 있고 촉룡도와 남려족 무리는 길을 빙 돌아 쫓고 있습니다. 복릉종 수사들이 비교적 가장 멀리 있는데, 마치 저희가 아니라 진염종 수사들을 쫓는 것처럼 보입니다.”

    남가몽이 고개를 돌려 찬찬히 살피고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진염종은 무슨, 노인네는 촉룡도 호언 도인이다. 그를 따르는 새까만 사내의 정체가 불분명한데…….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마냥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 같단 말이지.”

    “이제 어쩌면 좋을까요?”

    “태을단 완성이 코앞이니 저들과 논쟁할 시간이 없다. 가자!”

    낙청해는 남색 물빛으로 그와 남가몽을 감싸 퐁! 하고 거품처럼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립과 호언 도인이 날아들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따라붙어도 신경 쓰지 않는 게 이상하다 했더니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모양입니다.”

    “그 여우 같은 늙은이가! 으휴, 이제 우린 갈 길을 잃었구만…….”

    “괜찮습니다. 아직 방법이 남았는데 수사께서 영역을 방출해 잠시 제 기척을 가려주셨으면 합니다.”

    한립은 망설이다 부탁을 했다.

    “좋네! 뭐든 해보게.”

    호언 도인은 뜻밖이라는 얼굴로 붉은 화염 영역을 퍼트려 주변 수백 장을 가렸다.

    “더 넓게는 무리야. 딱 이 정도에서만 수사가 술법을 펼치는 파동을 가려줄 수 있네.”

    “네, 충분합니다.”

    노인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수결을 맺어 등 뒤로 금빛 진언보륜을 불러냈다.

    금빛 고리에 밀집한 도문들에게 강렬한 시간법칙 파동이 흘러나와 산전수전 겪어 보지 못한 일이 없는 호언 도인을 놀라게 했다.

    “이, 이게…….”

    한립은 입을 뻐끔거리는 노인을 쳐다보지도 않고 진실안을 발동해 주위를 살폈다. 우측 전방 안개 깊은 곳에서 공간파문이 출렁이는 것을 찾아내었다.

    “찾았습니다.”

    한립은 진언보륜을 체내로 회수하고는 말했다.

    “진언화륜경을 익히는 줄은 알았네만, 벌써 시간법칙을 장악했는지는 몰랐군. 게다가 이런 경지까지 익히다니!”

    호언 도인이 평소 표정으로 돌아와 감탄을 늘어놓았다.

    “인연이 닿아 그렇게 되었습니다.”

    “으휴, 그러지 말고 솔직히 좀 말해보게. 계속 수행을 숨기고 있었거나 아니면 윤회 법칙을 동시에 수련하기라도 한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짧은 시간에 어찌 금선 중기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아까부터 솔직하게 말한 겁니다. 얼마 전 기이한 비경에 들어갔는데, 그곳에 갇혀 수 만 년을 수련하다 겨우 금선 중기에 이르러 탈출했더니 바깥세상은 찰나의 시간밖에 지나있지 않더군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쉰 한립은 비경에 머문 시간만 부풀려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그 말을 듣고 한참 말이 없던 호언 도인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남들 다 약 올라 죽으라고 하는 말이냐? 어째 모든 기연은 다 네 녀석만 몰아 만나는 것이냐?”

    농담 반 진담 반인 노인의 타박에 눈을 흘긴 한립은 아무 대꾸하지 않았다. 어느 기연을 마주칠 때마다 고비가 없었던 적이 있었던가?

    구사일생의 사건을 수도 없이 겪으며 지금의 수행에 오른 그였다.

    파팟.

    호언 도인이 갑자기 금색 문양이 새겨진 새하얀 옥간 두 개를 꺼내 건넸다. 그걸 알아본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리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진언화륜경 5성과 6성 공법일세. 지금 이걸 내주는 대신 부탁할 것이 있어.”

    호언 도인이 진지한 얼굴로 말문을 뗐다.

    “말해보시지요.”

    “태을전에 들어가면 최선을 다해 내가 태을단 한 알을 얻을 수 있게 도와주게. 딱 한 알이면 족하네.”

    “목숨이 위험한 상황만 아니라면 전력을 다해 돕겠습니다.”

    한립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그 말에 호언 도인이 빙긋 웃음지었다.

    “그 말이면 차고 넘치네! 공법은, 가져가게.”

    “어째서 선부를 떠날 때 주시거나 아니면 5성 공법만 미리 주고 6성 공법은 남겨 두지 않은 것입니까? 그렇게 하면 더 확실히 약조를 지키게 할 수 있을 텐데요.”

    “자네의 앞날이 훤한 것 같아, 잘 보이고 싶어 일부러 그런 것이라면 믿겠는가?”

    “믿습니다.”

    한쪽 눈썹을 끌어올린 노인의 대꾸에 한립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그런 반응에 말문이 막힌 호언 도인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얼굴로 투덜거렸다.

    그렇게 우스갯소리를 주고받다 그들은 우측으로 출발했다.

    얼마지 않아 한립이 사라지고 화들짝 놀란 호언 도인도 서둘러 그가 없어진 허공으로 돌진했다.

    팟!

    팟!

    한립과 노인은 차례로 또 다른 공간에서 나타났다.

    “이건…….”

    두 사람 아래 수백 장 밖 허공에 넓은 소형 육지가 떠 있고 녹음이 우거진 숲에 각양각색의 누각들이 번쩍거렸다.

    그런 육지 위를 푸른 물길이 가로지르면서 가장자리에는 은색 폭포를 이루고 떨어져 선경이 따로 없었다.

    육지 가장자리에 광활한 토지에는 녹색 풀이 깔린 영수 우리가 수백 개로 구분되어 있었고 반대편에는 영약밭이 펼쳐져 다양한 선초들이 자라고 있었다.

    “연지마(胭脂馬)와 청죽사(靑竹獅)는 수만 년 전에 북한선역에서 멸종된 영수인데 여기에는 아직도! 게다가 혈통이 정순하기가 아주…….”

    호언 도인은 영수 우리 속을 가리키며 붉은 말 몇 마리와 푸른 사자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영약밭 안에도 최소 수십만 년 된 고계 선초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영초의 영기가 모여 보라색 연기가 피어오르지는 않을 테니까요.”

    한립도 영약밭을 보며 중얼거렸다.

    영수 우리와 영약밭에는 검은 장포 차림의 시종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다양한 기구를 들고 밥을 주고 영액을 뿌리랴 아주 바빠 보였다.

    두 구역 사이, 하얀 돌로 깔린 산길에도 시종들이 많았고 다들 영수 재료와 영약 선초들을 등에 지고 정상으로 오르고 있었다.

    “저 시종들은, 전부 괴뢰로군요.”

    “그러게 말일세, 전부 괴뢰로구만.”

    한립이 놀라 하는 말에 호언 도인이 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머리 위로 금빛이 밀려들어 구름을 형성하고 외부에서 보였던 단겁의 현상을 반복하고 있었다.

    한립이 금색 구름 아래를 보니 우뚝 솟은 산에 휘황찬란한 황금 궁전에 세워져 있었고 궁전 앞 광장에 남색빛을 반짝이는 인영 둘이 서 있었다.

    “낙청해가 벌써 궁전 금제를 거의 다 뚫었나 봅니다. 어서 가시죠.”

    “그러세!”

    한립과 호언 도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백장 밖 허공이 일그러지고 봉천도와 제천소가 나타났다.

    봉천도는 힐끗 한립을 보고는 궁전으로 다시 고개를 돌려 제천소와 광장으로 내려갔다.

    “어떻게 여길……. 저 중에도 허령안(虛靈眼)을 지닌 자가 있단 소린가?”

    낙청해가 봉천도와 제천소를 보고 의혹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궁주님, 어떻게 할까요?”

    남가몽이 수결을 맺으며 물었다.

    “일단 들어가 생각하자꾸나.”

    나지막이 답한 낙청해가 두 손으로 궁전 대문을 쾅! 쳤다.

    그의 손바닥에서 남색 잎사귀가 퍼져나가 은색 무늬를 타고 대문에 붙었고, 잎사귀가 눈 녹듯이 사라지고는 무늬를 따라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낙청해와 남가몽이 문틈으로 뛰쳐 들어가기 직전, 뒤에서 봉천도의 음성이 들려왔다.

    “낙 수사, 모두 떼어놓고 혼자 여기까지 오신 것을 보면 혼자 기연을 독차지할 심산이셨나 봅니다.”

    “허허, 그런 말씀은 마시지요. 우연히 도착해 보니 시간이 없어 급히 금제를 뚫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제때 문을 개방해 모두의 심려를 덜어드렸지 않았습니까?”

    멈칫 걸음을 멈춘 낙청해가 특유의 웃음을 흘렸고, 한립과 호언 도인도 궁전 문 앞으로 내려섰다.

    그리고 연이어 파공음과 함께 네 줄기의 빛이 차례로 내려왔다. 남려족 금선 둘과 구양규산과 금발 수사였다.

    바닥에 내려선 노파가 지팡이로 보란 듯이 바닥을 쿵! 찍으면서 코웃음 쳤고, 구양규산은 미미하게 호언 도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여기까지 온 것은 호언 도인이 비술로 연락해 위치를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보니 입구에서 흩어졌던 무리가 다 궁전 문 앞에 모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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