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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734화 (1,491/2,000)
  • 1734화. 선사

    *

    골짜기 안 분위기가 묘해지고 있는데 고공에서 쿠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번쩍 고개를 드니 금색 구름이 뭉쳐져 수십리 안의 천지영기를 요동치게 만들고 있었다.

    그 위압감이 골짜기로 떨어져 금색 진흙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단겁(丹劫)이 강림하다니 설마…….”

    한립이 익숙한 천기현상에 고개를 돌려 호언 도인을 쳐다보았다.

    “그래, 이곳에 태을전이 있고 그 안에서 태을단을 제련 중이라는 소리겠지.”

    호언 도인은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봉천도가 고개을 돌려 하얀 석벽의 산하도 문양이 꿈틀거리는 것을 확인했다.

    “허허허, 다들 여기 계셨습니다. 봉 수사께서도 벌써 와계시고 참 부지런하십니다.”

    골짜기 상공에서 기다렸다는 듯 명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남색 물의 연꽃이 피어나 낙청해와 청수한 용모의 젊은 제자 남가몽을 내놓았고 다른 창류궁 수사들은 무슨 일이지 보이지 않았다.

    “일찍 와보았자 때맞춰 온 수사만 하겠습니까. 어떻게 단겁이 도래하자마자 도착하십니다.”

    봉천도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웃고 있는 것인지 인상을 일그러트린 것인지 모호했다.

    “태을전이 여기 있는 줄도 모르고 기관이 겹겹이 쌓인 궁전을 찾아 뚫다가 시간을 얼마나 허비했는지 모릅니다. 대량의 인원이 동원되었는데 결국에는 별 것도 아니었고요. 아, 소 수사가 앞서 가시던 데 어째 안 보이십니다.”

    낙청해는 골짜기 안을 자연스럽게 둘러보고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물었다.

    봉천도는 속으로 약삭빠른 놈이라고 욕을 해댔다. 상대는 일부러 쌍방이 충돌하도록 판을 깔아 놓고 어부지리를 노리고 늦게 온 주제에 또 선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소 궁주는 다른 바쁜 일이 있는지 가셨습니다. 더 큰 기연이라도 발견을 했는지 모르지요.”

    봉천도는 냉랭히 답했다.

    북한선역의 세력들 중 그가 마음에 걸려 하던 것은 촉룡도 하나였다.

    소진한이 실력이 강해도 백리염 보다는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는데 하물며 낙청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게 사실이라면 소 궁주께서 복이 많은 분입니다. 그러고 보니 어딜 바삐 가시는 것을 저도 보았군요.”

    “기왕 오셨으니 골짜기의 금제를 어떻게 깨면 좋을지 살펴보시지요. 진법의 대가가 아니십니까?”

    “허허, 아닙니다. 태을전을 보호하는 금제가 어디 저 혼자가 파훼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곳에 모인 금선 수사들이 같이 힘을 모아야 겨우 일이 될까 말까 할 겁니다.”

    낙청해가 손을 내저었다.

    그의 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색 구름이 확 한곳으로 몰려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고 천둥소리를 뿜어냈다.

    “……단겁이 임박했습니다. 이제 단약이 곧 완성될 텐데 여기서 시간만 축내고 계시겠습니까?”

    낙청해가 웃음기를 거두고 정색을 하며 말하자 봉천도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 금제를 파훼하는 것은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하는 일입니다. 다들 태을전에 들어가 이 좋은 기회를 누리시지요.”

    낙청해는 다른 수사들을 향해서도 협조를 요청했다.

    “저희도 흔쾌히 돕겠습니다.”

    호언 도인이 바로 답했다.

    “함께 금제를 뚫는 것까지는 이의가 없습니다. 허나 안에 들어가면 기연을 얻기는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울까 걱정이군요.”

    남려족 두 금선 중 노파가 차분하게 우려를 표했다.

    “흥, 기연을 찾으러 오셨으면 그만한 위험은 감수하셔야지요. 아니 하늘에서 떡이 뚝 떨어질 때까지 입만 벌리고 있으실 참입니까?”

    인원이 가장 많은 복릉종 제천소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제 종주, 그게 또 그렇게 말하고 넘어갈 사안은 아닌 듯싶습니다. 복릉종 인원이 압도적으로 많아 다른 수사들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인지상정이 아닙니까. 모두 합심을 하려면 복릉종에서도 한 걸음 물러나 주시는 것이 어떨지요?”

    낙청해가 인자하게 웃으면서 중재를 했다. 그 말에 제천소가 미간을 좁히며 반박하려는데 봉천도가 막았다.

    “상관없습니다. 저기 이종족 수사분들이 두 명이고 낙 궁주 일행도 두 명이니 그것을 기준으로 각 종문에서 딱 두 명씩만 태을전에 들어가는 것으로 합의를 보면 되겠습니까?”

    수사들은 그렇게 불리한 조건을 먼저 제안할 줄 몰랐기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허허, 다들 무엇을 걱정하시는지는 알겠지만 그러실 것 없습니다. 시간이 부족하지만 않았어도 여기서 실력의 고하를 확정 짓고 천천히 금제를 깨도 좋겠으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저는 이의 없습니다.”

    봉천도가 담담히 웃으며 하는 말에 낙청해도 화답했다.

    “남려족도 동의합니다.”

    “촉룡도도 이의 없습니다.”

    노파와 구양규산이 답하고 골짜기에서 호언 도인 셋만 의견을 표명하지 않았다.

    한립은 호언 도인과 운예를 보고 내심 한숨을 쉬면서 괜히 자신을 선택하라 강요하지 않고 스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럼 려 수사가 나와 함께 태을전으로 들어가세.”

    그가 막 둘이 다녀오라고 말하려는데 호언 도인이 한립과 운예에게 전음을 보냈다.

    운예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한립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눈으로 눈썹을 끌어올렸다.

    “네 녀석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쉽게 배신하는 성정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고 있다. 너를 데리고 들어가는 것은 무엇보다 네 실력과 머리를 믿기 때문이고.”

    가볍게 웃음을 흘린 호언 도인이 촉룡도에 있을 때처럼 편히 말했다.

    “또 한 가지 빼놓은 것이 있지 않으십니까? 태을전 안이 위험할 것 같아 운예 수사를 데리고 들어가기 싫다는 것 말입니다.”

    싱긋 웃은 한립이 농을 던졌다.

    “하하! 농담은 되었네, 려 수사. 그보다 약속한 대로 진언보륜의 후속 공법을 내주지.”

    “감사합니다.”

    호언도 인이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찔러주자 한립이 티 안 나게 챙기며 인사를 했다. 호언 도인의 호방한 모습에 눈빛이 따뜻해진 운예는 걱정을 숨길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자, 여러분! 진염종도 동의하겠습니다!”

    미소를 머금은 호언 도인이 당차게 선포했다.

    “좋습니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 당장 시작하시지요. 제가 볼 때 석벽의 산하도는 명한선부에 들어올 때 사용했던 명한산하도와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노부의 의견으로는 이곳에 모인 금선 13명이 구궁파진도(九宮破陣圖)에 따라서 구령섭진술(九靈攝眞術)을 펼치면 파훼가 가능할 것입니다.”

    낙청해가 모두를 석벽 앞으로 이끌며 설명했다. 다들 말없이 생각에 잠긴 가운데 한립도 침음했다.

    구궁파진도는 오랫동안 선계에서 전해 내려오는 금제를 깨는 진법도안으로 꽤 복잡했고, 구령섭진술은 대오행섭령진광에 뒤지지 않는 신통이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펼쳤을 때 어떤 효과가 있을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낙 수사께서 구궁파진도를 주관해주시고 저희는 보조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봉천도의 결정에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그때부터는 낙청해가 거침없이 금선들을 부리면서 구궁 술에 따라 구령섭진술을 펼치게 했다.

    이에 복릉종 4명, 창류궁 1명, 남려족 2명 촉룡도 3명 그리고 한립 일행 셋까지 총 13명의 금선 수사들이 같은 수결을 맺고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진법 도안의 어느 교차지점에 선 한립은 법결을 발동하면서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모든 이들의 선령력이 강력한 흡입력에 강을 이루며 빠져나와 호수를 채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진법 가장 끝에 선 낙청해가 그 호수의 유일한 출구였다.

    방대한 선령력이 몰려들자 발아래 남색 연꽃 하상을 불러낸 낙청해가 떠올라 하얀 석벽을 가리켰다.

    거의 실체화된 남색 빛기둥이 그의 손끝을 따라 빠져나가 석벽 표면의 하얀 빛의 장막을 쳐대자 물결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 모습에 한립은 동공을 수축했다.

    두 번째 금제야말로 하얀 석벽의 진정한 보호막인 것 같았다.

    * * *

    쿠르릉!

    골짜기에서 상당히 떨어진 어느 누런 사막 구석에 청옥색 호수에서 진동과 소음이 들려왔다.

    호수 속에서는 괴뢰를 닮은 남색 물 괴물들과 낙청해의 요청에 불려갔던 설앵 등 북한선궁 수사들이 싸우고 있었다.

    그들은 낙청해를 따라갔다가 누런 모래사막의 금제에 걸려들어 죽을 고생을 하는 중이었다.

    함정에 빠진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어서 진선 수사 몇이 죽고, 그녀도 쉽게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알고 낙담하고 있는데 갑자기 청옥 비차가 나타났다.

    * * *

    “후배 설앵이 공수 선사를 뵙습니다.”

    어느새 호수에서 빠져나온 설앵이 인사를 올렸다. 청옥 비차에 타 그를 구해준 중년인은 천정의 감찰선사 공수구였다.

    “우리 공수 가문과 설 가는 오래도록 사이가 좋았지. 나와 네 부친은 그중에서도 사이가 가까웠는데 그리 딱딱하게 부를 것이냐?”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공수 세백(世伯).”

    “북한선역에 다녀갔으면 좋겠다던 네 부탁은 전해 들었다. 다른 일에 발이 묶여 있다 조금 늦었는데 이러고 있을 줄은 몰랐구나.”

    옅은 미소를 짓는 설앵을 보고 공수구가 탄식했다.

    “소 궁주는…….”

    설앵이 무어라 하려다 뒤쪽의 다른 선궁 수사들을 힐긋 보았다.

    “할 말이 있으면 편히 하거라. 저들은 듣지 못할 것이다.”

    공수구가 대충 손을 저으며 말했다.

    * * *

    어느새 무형의 장막이 생긴 것을 감지한 설앵이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소 궁주는 요 몇 년 사이 수행이 적지 않게 늘었고 북한선역의 평화를 위해 열심히 일해 왔습니다. 그런데 백리염을 처리하고 복릉종과 창류궁이 겉으로는 얌전히 굴면서 기회를 노리더군요. 이렇게 가다가는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아 제가 독단적으로 월권하여…….”

    “나와 너 사이에 도움을 좀 청한 것을 월권이라 여길 것 없다. 천정도 진작 이곳을 눈여겨보고 있었고. 사실 윤회전이 빈번하게 활동하며 들쑤시는 선역이 북한선역 뿐이 아니기에 다른 곳에서 일을 보고 오느라 늦었구나. 그러다 때마침 명한선부가 나타나 들어와 본 것이다.”

    “공수 세백을 여기서 마주치고 제가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안 그랬으면 이곳에서 한참 시간을 낭비했을 것입니다.”

    설앵은 포권을 하며 예를 취했다.

    “네가 갇혀 있던 현무수기진(玄武水機陣)은 외부에서 물을 이용해 몇몇 핵심 부분을 부수면 파훼가 가능하지. 일단 안에 갇히면 금선 후기의 수행을 지녀도 스스로 구하기 어려운 진법이니 자책할 것 없다.”

    공수구가 웃으며 말했다.

    “저희도 낙청해 그 교활한 자의 수에 당한 것입니다.”

    “소진한은 지금 어디 있지?”

    설앵이 얼굴을 굳히며 한숨을 내쉬는데 공수구가 물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 말에 다급해진 설앵이 얼른 말했다.

    “가자.”

    * * *

    설앵 무리가 갇혀 있던 고대 유적 아래에 검은 통로가 길게 뻗어 있었다.

    하얀 형광석들이 알알이 박혀 미약한 빛을 내는 지하통로를 누군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중이었다.

    빛이 어른거릴 때마다 드러나는 얼굴은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아름다웠다.

    대략 스무살 내외로 보이는 여인은 바로 육우청이었다.

    * * *

    골짜기 안, 금선 수사들의 막대한 선령력을 빨아들인 남색 연꽃들이 하얀 석벽 곳곳으로 날아들었다.

    파파파팟.

    신비롭게도 석벽의 연꽃들이 활짝 피어나면서 금제를 공략했다.

    한립은 그걸 보며 내심 감탄했다.

    낙청해가 구궁파진도와 구령섭진술을 펼치게 한 것은 다른 금선들의 선령력을 빌리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고 진짜 금제를 파훼하는 절기는 남색 수정 연꽃이 틀림없었다.

    다른 이들이 무슨 이변이라도 벌어질까 걱정하는데, 낙청해가 가볍게 석벽의 문을 밀었다.

    그의 두 손바닥이 양쪽으로 문을 열어 가운데 공간을 만들어냈다. 소리도 없이 서서히 열리는 문을 다들 긴장한 낯으로 주시했다.

    한립은 선령력 회복을 도와주는 단약을 꺼내 복용하고 영목신통으로 문 안쪽을 살피려 했다.

    하지만 하얀 빛이 깔린 내부는 어떻게 해도 들여다볼 수 없었다.

    “금제는 풀렸습니다만 미리 약조한 대로 차근차근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겁니다. 제가 술법을 거두어 다시 금제를 발동하게 하지 마시고요.”

    낙청해가 온화한 얼굴로 아무도 반박할 수 없게 경고했다.

    복릉종 다른 수사들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으나 봉천도가 제천소에게 고갯짓을 하고 먼저 하얀 빛 속으로 들어갔다.

    이어서 남려족 두 수사가 들어가고 호언 도인이 한립과 같이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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