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731화 (1,488/2,000)
  • 1731화. 지켜 보다

    *

    “뉘신데 그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처음 보는 얼굴인 듯한데 진짜 모습은 아니시겠지요? 수사의 수행에 감히 정체를 드러내지도 못하고 돌아다는 것을 보면 무슨 음흉한 꿍꿍이가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소진한은 그런 호언 도인에게 시선을 옮기고 말했다.

    그 말에 다른 이들의 표정이 달라져 호언 도인과 그 옆의 운예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호언 도인은 전혀 거리끼는 기색 없이 웃음을 흘리고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소진한이 자신의 처지가 곤궁해지자 아무나 지목해 도발하는 게 분명합니다. 전부 시간을 끌려는 수작이란 말입니다!”

    남려족 노파가 돌연 입을 열어 날카롭게 소리쳤다.

    “맞습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치면 어찌 달아날 수 있겠습니까. 북한선역이 넓다지만 오늘 저자를 놓치면 앞으로 누구도 편히 지내기 어려울 겁니다.”

    봉천도도 눈을 번득이고 나지막하게 설득했다.

    이에 수사들은 가슴이 서늘해져 반드시 소진한을 죽여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봉천도가 수결을 맺어 5, 60리 규모의 검은 영역으로 소진한을 가두려 했다.

    강력한 구금법칙이 퍼져 영역 내의 모든 것을 옭아맸고 호언 도인 등 다른 이들도 엉겁결에 그 안에 말려들어 움직임과 선령력 운용이 어려워졌다.

    수사들은 그가 눈 깜짝할 사이에 영역 신통을 부리자 부담과 함께 강한 경계심을 느겼다.

    동굴 속 한립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검은 영역이 미치지 않았으나 법칙파동만은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영역의 면적만으로는 거령보다도 한 수 위군.’

    영역의 면적은 수사의 실력을 평가하는 중요한 지표 중 하나였다. 이것만 보면 봉천도의 실력이 거령보다 위인 듯 싶기도 했다.

    웅.

    봉천도의 검은 영역 안에서 소진한을 둘러싼 하얀 얼음 구슬이 파르르 떨며 기세가 약해졌다.

    이와 동시에 어두워졌던 검은 사슬들은 바깥의 영역과 공명하면서 밝게 빛났다.

    소진한이 난색을 보이자 나머지 수사들도 분분히 행동을 개시했다.

    회색빛을 방출한 제천소는 금방 잿빛 영역을 형성했는데 봉천도의 것보다 규모는 훨씬 작아도 코를 찌르는 썩은 내가 풍겼다.

    잿빛 영역에 간간이 섞인 갈색빛이 부식 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이번 영역도 빠르게 퍼졌지만 소진한을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일단 영역 주인이 법칙의 힘을 통제해 같은 편에게는 피해를 입히지 않게 조절하기도 했지만, 제천소가 봉천도에 비해 수행이 낮아 이미 대비하고 있던 이들이 자신의 법칙의 힘으로 대항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눈을 반짝인 호언 도인은 전신에서 적홍색 빛을 뿜어 화염 덩어리들을 만들어냈다.

    화르륵.

    화염 덩어리들이 터지면서 사방으로 퍼져 붉은 영역을 이루고 역시 소진한을 에워쌌다.

    남려족 노파도 금색 지팡이에서 적홍색 빛을 일으켜 화염 영역을 이루고 있었다.

    네 사람 외에 금선들도 각자 선기나 영보를 방출해서 소진한을 공격했다.

    소진한은 네 개의 영역에 영향을 받으며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는 여전히 두려운 기색이 없었고 두 눈에는 하얀 기운이 휘몰아치며 두 개의 소용돌이를 이루었다. 전신에서 퍼져나간 짙은 하얀빛이 영역을 형성해 봉천도보다 더 큰 범위를 장악했다.

    영역 안에서는 하얀 눈보라가 치면서 뼈가 시린 한기를 퍼트리고 있었다.

    하얀 영역 안에서 봉천도 등 금선 수사들도 한기에 몸을 떨었고 수행이 낮은 이들은 이를 딱딱 부딪치면서 몸을 떨었다.

    몸만 얼어붙은 게 아니라 선령력과 의식까지 기이한 힘에 얼어붙은 상태였다.

    봉천도 등 금선 수사들은 체내의 법칙의 힘을 운용해 대항했지만 진선 수사들은 피부에 하얀 얼음이 맺혀 한 명씩 얼음 조각상처럼 변해갔다.

    공격하던 영보와 선기도 마찬가지라 금선들의 선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영성을 잃고 떨어졌다.

    소진한이 펼친 영역에 복릉종 진선경 수사들은 분분히 보호막을 펼쳐 목숨을 건졌으나 남려족 진선 몇은 수행이 부족했던지 그대로 얼어 육신의 숨이 끊긴 것은 물론 원영도 그 안에 갇혀 죽어 나갔다.

    혈색 좋은 남려족 노파가 얼른 붉은빛으로 다른 진선 수사들을 감싸 영역 바깥으로 날려 보냈고 봉천도도 소매를 털어 검은빛으로 복릉종 진선들을 보호해 바깥으로 탈출시켜 주었다.

    고계 수사들이 영역 법칙으로 싸우기 시작하면 어차피 금선이 아닌 수사들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전광석화처럼 벌어지는 동안 표면에 하얀 얼음이 낀 금선 수사들의 선기들은 속도와 위력이 줄어든 채 소진한에게 날아들었다.

    쿠르릉!

    여러 선기들이 앞다투어 떨어졌는데도 소진한을 둘러싸고 있는 하얀 얼음 구슬은 미약하게 흔들거리며 버텨냈다.

    소진한은 바깥의 상황을 신경 쓰지 않고 중얼중얼 주문을 외면서 여덟 가닥의 하얀 수정실을 불러내 봉천도 등 수사가 아닌 자신을 둘러싼 검은 사슬들을 휘감게 하고 있었다.

    검은 사슬 위로 한 겹의 하얀빛이 떠올라 법칙의 힘을 발동했다.

    소진한이 즉시 두 손으로 검은 사슬들을 감아 힘껏 당기자 촤르릉! 소리와 함께 사슬들이 뽑혀 나왔다.

    검은 사슬들을 몸에서 뽑아낸 그의 안색은 훨씬 나아 보였다.

    “네 개나 되는 영역의 영향을 받으면서 격원법련에서 벗어나다니 북한선궁 궁주답습니다. 허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살아서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겁니다!”

    봉천도가 차갑게 외치며 손짓을 해 검은 사슬들을 불러들였다.

    소매 속으로 사슬들을 넣어둔 그는 다른 팔을 뻗어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펼쳤고 찰나의 순간 손끝에서 다섯 줄기의 검은 빛이 쏘아져 나갔다.

    영역 안의 검은 빛이 출렁출렁 뭉쳐서 검은빛 속으로 스며들었다.

    다섯 줄기 검은빛들은 몇 배로 불어나 쿵! 하며 하나로 합쳐지더니 칠흑 같은 소용돌이를 형성해 놀랄만한 법칙의 힘을 발산했다.

    봉천도가 기합을 넣으며 새까만 소용돌이를 가리켰다. 소용돌이는 즉시 번개처럼 튀어나가 소진한 앞에서 맹렬히 폭발했다.

    소용돌이 속에서 무수히 많은 검은 빛이 튀어나와 하얀 얼음 구슬을 때렸다.

    이때, 소진한 뒤에서는 집채만 한 잿빛 손바닥이 갈색 부식 기운을 품고 날아들고 있었다.

    거대 손바닥의 주인은 제천소였다.

    어느새 소진한 뒤로 이동한 그의 표정은 냉랭했다.

    소진한의 왼쪽과 오른쪽에도 호언 도인과 혈색 좋은 노파가 나타나 각각 적홍색 거검과 화염 용 허상을 날렸다.

    쿠쾅쾅!

    네 사람의 공격이 시간차를 두지 않고, 하얀 얼음 구슬을 때려 드디어 균열을 만들어냈다.

    쉭!

    검은색, 회색, 붉은색 빛에 매몰되어 있던 얼음 구슬 속에서 소진한이 피범벅이 된 몰골로 빠져나왔다.

    바로 그 순간, 새까만 소용돌이가 그 앞으로 이동해 시커먼 짐승의 입처럼 소진한을 삼켰다.

    이곳을 벗어나려던 그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소용돌이로 끌려 들어가야 했다.

    “당신은 오늘 이곳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봉천도가 전방에서 번득 나타나 팔을 휘둘렀다.

    웅!

    거대한 검은 검 허상이 그의 손을 벗어나 소진한의 머리로 날아들었다.

    서걱.

    멀리서도 소진한의 몸이 세로로 반으로 잘려 나가는 것이 보였다.

    “에휴, 이렇게 죽다니 은색 수염 진짜 불쌍해요. 원영은 아직 남아 있을 텐데 낭비하지 말고 내가 챙겨야겠어요.”

    동굴 속에서 금동이 당장이라도 바깥으로 튀쳐 나갈 기세로 말했다.

    “가지 말거라.”

    영목 신통을 발휘하고 있던 한립이 재빨리 금동을 붙잡았다.

    “금선 원영을 주기로 약속했잖아요!”

    금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투덜거리면서 한립의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조급히 굴지 말거라. 재밌는 구경거리는 이제부터 시작일 게다.”

    한립은 차분하게 말했다.

    * * *

    골짜기 안, 둘로 갈라진 소진한의 시체를 보며 미소 짓던 봉천도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잘린 시체에서 원영이 날아오르지 않고 빛이 번득이고는 얼음 조각 두 덩이로 변해 버려서였다.

    파삭!

    얼음 조각은 스스로 부서져서 하얀 영역 안으로 흡수되었다.

    얼음 조각이 부서진 후 봉천도 등 네 명과 멀찍이 떨어진 산 벽 앞 허공에 하얀빛이 반짝였다.

    하얀 눈꽃들이 응결해 사람만 한 얼음조각으로 변해 터지자 창백한 얼굴의 소진한으로 바뀌었다.

    원기를 크게 상한 듯 보이기는 했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그의 주변으로 하얀빛이 거의 도자기처럼 실체화되어 다른 영역들의 침범을 막고 있었다.

    봉천도가 그걸 보고 코웃음을 치더니 검결을 맺어 손을 뻗었다.

    검은 거검이 방향을 틀어 수많은 검 그림자를 소진한이 있는 곳으로 날려 보냈다.

    제천소, 호언 도인 등도 다시 쫓아와 술법을 펼치고 있었다.

    웅웅웅!

    허공이 진동했다!

    회색 거대 손, 붉은 거검 그리고 붉은 화룡이 소진한을 향해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다른 금선들은 소진한의 얼음 영역 안에 있었고 자신들은 영역이 없었기에 이 네 명의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했다.

    “…….”

    창백한 얼굴의 소진한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하얀빛으로 변해 지면으로 내려가 고개를 들어 봉천도와 다른 수사들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머리 위로는 검 그림자 거대 손 등이 태산을 무너트릴 기세로 날아들고 있어 파공음이 난무했다.

    쿠쿵.

    바로 이때 지면이 크게 흔들리고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소진한 뒤로 거목 크기의 하얀 돌기둥이 불쑥 올라왔다. 한 번이 아니라 쿵! 쿵! 쿵! 쿵! 연이어 네 번이 더 울렸다.

    5개의 백석 기둥은 원형을 이루고 소진한을 둘러싸고 있었다.

    만년 빙하를 가져다 조각한 것 같은 새하얀 돌기둥들은 꼭대기부터 아래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괴한 문양이 가득 새겨져 있었고 하얀 보석이 눈알처럼 박혀서 반짝거렸다.

    우웅!

    돌기둥들이 뿜어낸 하얀 빛이 연결되어 보호막을 이루고 소진한을 지키려 들었다.

    쿠콰콰쾅!

    봉천도 등 네 사람의 공격이 하얀 보호막에 떨어질 때마다 색색깔의 날카로운 빛이 터져 나왔다.

    보호막은 주름이 잡혀 부들부들 떨리면서도 표면의 주술문자들이 날아올라 결국에는 공격들을 막아냈다.

    봉천도와 다른 수사들이 그걸 보고 움찔했다.

    그러나 한립은 소진한이 기적같이 금선 넷이 동시에 펼친 영역을 벗어난 것에도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여우같은 소진한이 홀로 여기까지 나타날 때는 그만한 대비를 해두었을 것이 뻔했다.

    그러나 돌연 돌기둥들이 나타나 그를 보호할 때는 놀란 눈빛이 스쳤다.

    돌기둥들은 더욱 눈부신 빛을 머금고 있었고 그 안에 품은 주술문자들이 눈꽃처럼 날아올라 소진한의 빙설 영역 안으로 녹아들었다.

    빙설 영역은 빠르게 규모가 커져 거의 두 배로 늘어났다.

    한립은 안색이 급변했다. 금동과 그가 숨은 산 동굴도 이제 빙설영역 내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뿐 아니라 미리 내보낸 복릉종, 남려족 진선들 그리고 아직 허공에서 대기 중이던 구양규산 등 촉룡도 금선 셋도 빙설 영역에 휘말렸다.

    빙설 영역은 규모만 커진 것이 아니라 그 안의 눈보라도 몇 배는 심해지고 함유하고 있던 법칙의 힘도 증폭되었다.

    영역의 범위 안의 산골짜기에는 두꺼운 얼음이 끼고 바닥에서 눈이 소복하게 쌓여갔다.

    그곳을 중심으로 반경 백 리가 새하얀 빙설 세상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에 멀리 있던 진선들은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다시 얼음 조각이 되어 갔고, 봉천도 등 금선들의 몸도 즉시 얼음으로 뒤덮였다.

    하지만 금선들은 곧바로 몸에서 각자 다양한 빛을 일렁였다.

    퍼퍼펑!

    몸의 얼음을 털어버린 그들은 안색이 어두워져 있었고 구양규산 등 세 명도 더는 다른 수사들과 거리를 두지 않고 얼음을 털어내자마 금선 수사들의 인근으로 모여들었다.

    자금선들은 어떻게든 이겨냈다지만 진선들은 아니었다. 얼음 조각 속의 진선들은 빠르게 생기가 사라지면서 숨이 끊어졌다.

    봉천도 등도 그것을 알고 대노했으나 진선들을 챙길 여력이 없었다.

    “대관절 저 기둥들은 어찌 된 것입니까? 영역의 힘을 증폭시키다니요? 대체 언제 저런 걸 설치해 두었단 말입니까!”

    제천소가 경악한 상황에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수사들도 서로 눈치를 살필 뿐 돌기둥의 내력에 대해 아는 것 같지 않았다.

    “본 궁주가 아무것도 모르고 당할 줄 아셨습니까? 속아주는 척하면서 어디 누가 연루되어 있나 색출하려던 것뿐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죽어 나가는 것은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 될 겁니다.”

    서늘한 소진한의 목소리가 하얀 보호막 속에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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