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729화 (1,486/2,000)

1729화. 엿보다

*

협곡 아래 하얀 장방형 석벽.

거산 높이에 매끈한 표면이 무언가로 통하는 대문 같기도 한 석벽의 산하도(山河圖)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고 그 위로 하얀빛의 장벽이 드리워 반짝였다.

그 앞에 모인 무리는 넷으로 갈라졌는데 그중 인원이 가장 많은 곳은 복릉종으로 봉천도와 제천소 외에 세 명의 진선까지 비경에 진입한 수사들은 거의 다 있었다.

부족한 진선 수사 두 명은 선부 어딘가에서 죽은 듯했다.

복릉종 무리와 멀지 않은 곳에 모여 있는 이종족 수사들은 남려족이었다.

총 네 명이었던 금선 중 일흔이 넘어 보이는 노인과 백발 노파를 제외한 나머지 둘은 보이지 않고 일행도 절반이 되지 않아 둘로 나뉘어 다른 곳에 간 것인지 아니면 선부에서 죽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다음으로 구양규산 등 촉룡도 금선 셋이 모여 있었고 인원이 가장 적은 곳은 다른 수사들과 멀찍이 떨어진 흑의 노인과 노란 치마를 입은 예쁘장하게 생긴 여인 일행이었다.

한립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마지막 남녀를 보고 호언 도인과 운예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멀리서 금빛이 반짝이고 각진 얼굴에 금색 수가 놓인 하얀 장포를 입은 사내가 나타났다.

소진한이었다.

그의 출현에 다른 무리들은 놀랐지만 구양규산 등은 희색을 보이며 다가갔다.

“오셨습니까, 궁주.”

“큰 공을 세웠으니 돌아가는 대로 수사들에게 큰 상이 내려질 것입니다.”

소진한 그런 촉룡도 금선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구양규산 무리가 기뻐하며 얌전히 옆으로 물러났다. 소진한은 남려족과 호언도인, 운예 등을 훑고 미간에 주름이 졌다.

“인근에 있다가 천기현상을 보고 급히 찾아든 이들입니다.”

구양규산이 그의 시선을 보고 서둘러 전음으로 해명했고 소진한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 궁주께서 오셨군요. 이렇게 빨리, 그것도 혼자 오시다니 다른 분들은 어디 있습니까?”

“다른 급한 일이 있어 같이 오지 못했습니다.”

소진한은 담담히 답했다.

“항상 우르르 데리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시더니 이런 때 홀로 오시고 적적하시겠습니다?”

“사실 저도 혼자 가볍게 오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책임질 것이 줄어야 무슨 일을 하든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까. 봉 수사께서도 그러신지요?”

“허허, 저는 아닙니다. 아무래도 몇 명은 데리고 다녀야 잡다한 일을 시키기도 쉽고요.”

“복릉종에서는 이렇게 많은 수사를 데리고 오시고 꼭 태을전이 복릉종 영역이라도 된 듯합니다.”

봉천도가 웃으며 하는 말에 소진한은 남려족과 호언 도인, 운예 등을 곁눈질하고 화제를 돌렸다.

“그럴 리가요. 태을전은 주인이 없는 땅인데 누구든 올 수 있지요. 특히 소 궁주께서 함께 들어가시겠다면 저는 환영입니다.”

봉천도가 고개를 저었다.

담담히 미소를 지은 소진한이 그의 뒤쪽에 보이는 하얀 장벽을 살피다 손을 움직였다.

휘릭!

하얀 화살이 그의 손바닥에서 날아가 빛의 장막을 때렸다.

파칙!

화살은 터져나가고 빛의 장막은 반응이 없었다.

“금제가 굳건하긴 합니다.”

“조금 전 복릉종 수사들도 전력으로 금제를 공격했으나 뚫리지 않았습니다. 입구로 들어가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겠습니다.”

구양규산이 보고 있다가 낮게 일러 주었다. 소진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또 고개만 끄덕였다.

“허나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지켜보고 있자니 원래는 금제가 두 배는 두꺼웠는데 왠지 모르게 점점 얇아지더군요. 시간이 더 지나 계속 얇아지다 스스로 사라지거나 파훼하기 쉬워질지도 모릅니다.”

“정말입니까?”

“결코 거짓이 아닙니다. 궁주께서도 주의 깊게 관찰하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구양규산은 서둘러 답했다.

소진한이 그런 상대를 지긋이 바라보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어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다.

눈길을 거둔 소진한이 바위를 찾아 의복을 털고 앉더니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걸 본 봉천도가 복릉종의 다른 이들과 시선을 주고받고 분분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다른 무리의 수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 * *

그때 산골짜기의 숨겨진 동굴 안에서 한립과 금동이 나란히 서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무슨 비술을 사용했는지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누군가 의식으로 훑어도 허공이라 여길 것이다.

한립은 두 바위틈으로 바깥의 수사들을 엿보면서 눈에서 남색 빛을 일렁였다.

천기현상을 보고 급히 왔지만 구양규산 등보다 한발 늦어 일단 금동을 데리고 이곳에 숨었다.

‘사람이 가면 갈수록 늘고 있어. 방금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이곳이 태을전 입구라는데, 태을전이 대체 어떤 곳이지? 소진한, 봉천도 같은 이들이 경쟁할 정도면…….’

한립은 답답했지만 호언 도인과 운예가 있는 것에 마음을 놓았다.

스승 같기도 하고 벗 같기도 한 호언 도인이 어떻게 되었을까 봐 솔직히 걱정하고 있었다.

금동이 무료하게 옆에 서 있다가 갑자기 뭔가를 입에 집어넣고 아그작! 씹었다. 그리 큰 소리가 아님에도 한립이 기겁하기에는 충분했다.

“조용! 저들에게 우리의 존재를 들켜선 안 된다.”

안색이 변한 한립이 전음을 보냈다.

진작 소리와 기운이 노출되지 않게 손을 써두었고 소진한 등이 서로를 견제하고 석벽을 관찰하느라 여기까지 신경을 쓰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너무 심심해요.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해요?”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거라.”

“아저씨, 저들과 원한이 있어요?”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저 중에 누구랑요?”

금동은 주먹을 문지르면서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듯 물었다.

“기다리래도. 저들은 많고 우리는 둘 뿐이라 지금 나서면 손해를 보는 것은 우리다. 어차피 저들도 한패가 아니니 금제가 깨지면 싸우기 시작할지도 모르고.”

한립은 서둘러 금동을 붙들고 전음을 보냈다. 생각해 보면 금동은 그간 거령과 지내면서 성격에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저들이 싸우기 시작하면 흩어질 테니까 그때 쫓아가서 죽이는 거죠? 저 똑똑해요, 안 똑똑해요?”

“정말 똑똑하구나.”

한립은 금동의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알겠어요! 기다리기 지루하긴 한데 인내심을 발휘해 볼게요.”

금동은 털썩 주저앉아 두 손으로 턱을 괴었고 한립은 다시 바깥을 살폈다.

그대로 몇 시진이 지나 금동이 깜빡 잠들었을 때 석벽의 빛의 장막은 종잇장처럼 얇아져 있었다.

그동안 더 도착한 이들은 없었고 소진한과 봉천도를 비롯한 수사들은 전부 자리에서 일어나 하얀 석벽만 주시하고 있었다.

적잖은 이들이 긴장한 기색으로 체내의 선령력을 끌어올렸다 금제의 빛이 가장 약해졌을 때 언제라도 뛰쳐나갈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사형, 금제가 아주 얇아졌습니다. 우리가 힘을 합치면 뚫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 손을 쓸까요?”

봉천도 옆에서 제천소가 입술을 미세하게 움직여 전음을 보냈다.

“더 기다린다. 게다가 우리가 신경 쓸 것은 금제만이 아니야. 더 조심해야 할 것은 소진한이다.”

봉천도가 나지막이 전음으로 답했다.

“예, 사형!”

눈을 반짝인 제천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 동굴 속에서 남색 눈으로 하얀 석벽 쪽을 주시하던 한립의 표정이 달라졌다.

종잇장처럼 얇아진 하얀 빛의 장막이 수많은 가느다란 실을 만들어 점차 굵어지기 시작했다.

그걸 본 수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공격을 개시했다.

소진한이 손을 저어 하얀 송곳 모양의 선기를 방출했다. 하얀 뇌전이 송곳 끝에서 튀어나와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하얀빛의 장막을 찔러 들어갔다.

구양규산 등 세 명도 크게 기합을 넣으면서 각자 금색 비검을 발동했다.

칼자루가 용머리를 닮은 금색 비검은 한쪽에는 산하도가 다른 한쪽에는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새겨져 있었다.

세 비검은 품(品)자 형태로 날아가다 눈부신 빛을 터트리며 합쳐져 하얀빛의 장벽을 갈랐다.

그리고 남려족 노인과 백발 노파는 금색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깜짝 놀랄 만한 금빛이 터져 나와 각각 거목 크기의 금룡으로 변해 날아갔다.

호언 도인과 운예도 적홍색 비검과 남색 수레바퀴 선기를 불러내 금제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들 중 누구도 복릉종의 위력적인 공세를 따라가지는 못하고 있었다.

둥그렇게 모여선 복릉종 수사들은 어떤 곳은 조밀하고 어떤 곳은 흩어져 있어 진법을 이룬 듯 보였다.

모든 수사들의 몸에서 검은빛이 흘러나와 새까만 빛다발을 이루고 각각이 검은 구렁이처럼 일어나 결국에는 봉천도에게로 집결되었다.

몸집이 몇 배로 불어난 봉천도의 가냘프던 몸에 울룩불룩 근육이 솟아오르면서 압도적으로 기운이 증폭되어 소진한도 살짝 안색이 달라졌다.

길게 숨을 내쉰 그가 빠르게 주문을 외자 피부는 검푸르고 머리카락은 누렇게 변해 거의 강시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촤르릉.

수십 개의 사슬이 봉천도의 체내에서 빠져나오면서 특유의 소리를 냈다.

그리고 사슬 위에는 검은 주술문자들이 떠다니면서 가슴이 철렁할 만한 법칙파동을 내뿜었다.

멀리 동굴 안에서 한립이 동공을 수축했다.

봉천도가 불러낸 검은 사슬의 기운이 격원법력과 같다는 것이 또렷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설마 저자가…….”

눈을 반짝인 한립은 빠르게 상황이 파악되었다.

* * *

하얀 석벽 앞.

눈을 감은 봉천도의 손짓에 허공의 사슬들이 동시에 몸을 떨면서 검은 실로 변해 빛의 장막으로 떨어졌다.

피피피핏!

가을 낙엽에 굵은 빗발이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연달아 들리고 하얀빛의 장막에 검은 파문이 생겨났다.

나머지 수사들도 각자의 술법이나 보물로 다채로운 공격을 퍼붓는 중이었다.

수많은 진선, 금선들이 힘을 합치자 하얀빛의 장막도 표면이 찌그러지면서 수많은 주술문자가 요동쳤다.

콰르릉!

땅이 꺼지는 소리가 들리고 협소한 골짜기가 진동했다.

굵은 산 벽에 생긴 균열이 거미줄처럼 퍼져나가고 하얀빛의 장벽도 더는 견디기 어려운지 불안정하게 번득였다.

이에 수사들은 더 거세게 공격을 이어갔다.

파직!

하얀빛의 장벽에 새겨진 주술문자들부터 분분히 터져나가더니 빛의 장벽이 대량의 수정빛으로 흩어지며 그대로 석벽이 드러났다.

봉천도의 야윈 얼굴에 희색이 스쳤다.

수결을 바꾼 그가 작게 무어라 읊조리자 검은빛이 번득하고 검은 사슬들이 체내로 돌아 들어갔다.

그가 성큼 앞으로 나서며 무어라 하려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봉천도와 가까이 붙어있던 제천소 그리고 다른 세 명의 금선들이 양손을 들어 손목을 턴 것이다.

촤르릉!

제천소 등 네 명의 소매 속에서 굵은 금색 사슬이 빠져나와 봉천도의 사지를 구속하려 날아갔다.

강력한 구금의 법칙의 힘을 함유한 사슬들이었다.

파앗.

표정이 급변한 봉천도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몸에서 칠흑 같은 검은 빛이 반짝이고 보호막이 형성되었다.

거의 동시에 사슬들이 도착해서 검은 보호막을 감쌌다.

금색 사슬은 검은 보호막과 닿자마자 맹렬한 빛을 발했고, 뜨겁게 달군 검으로 보호막을 뚫고 들어가 봉천도의 사지를 속박했다.

금색 사슬에서 뇌전들이 떠올라 봉천도의 몸에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신음을 삼킨 봉천도는 몸에서 검은빛이 사라지고 보호막도 쪼개져 버렸다.

제천소 4인방은 좋아하며 주술을 외워 금색 사슬이 연결되어 금색 철창 우리를 만들도록 조종했다.

강대한 구속의 힘이 공기의 흐름과 천지영기까지 얼려버리는 것 같았다. 워낙 모든 일이 전광석화처럼 벌어져서 다른 수사들도 당황한 채 지켜보기만 했다.

하얀 석벽에 대해서도 당장은 까맣게 잊은 것 같았다. 멀리 동굴에서 숨어 엿보던 한립도 무척 놀란 표정이었다.

“저 금색 사슬은 그때 그…….”

그의 머릿속에 촉룡도 설법대회의 광경이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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